조선의 성리학은 많은 점에서 뒤틀린 모습을 보인다. 안향이 전한 성리학은 당시 원나라 성리학을 주도한 노재(魯齋) 허형(許衡)의 학풍으로 우주론적인 이기(理氣)보다는 심성수양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성리학은 남명학파 외에는 거의 이기에 치중했다.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 해도 조선 후기의 양상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우암 송시열이 떠받들어 마지않았던 명나라는 이미 성리학이 아닌 양명학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암은 명나라를 떠받들면서 양명학을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그렇다면 명은 사문난적으로 가득 찬 나라 아닌가? 도대체 우암이 떠받들었던 명(明)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모르겠다.
소수서원의 전신인 백운동 서원은 주세붕이 안향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연 서원이다. 그 후 1550년 풍기군수였던 퇴계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으며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소수(紹修)’란 무너진 유학을 다시 닦게 한다는 의미다. 말 그대로 이때는 250년간 중국의 학풍을 휩쓸던 주자의 성리학이 무너지고 양명학이 세를 떨치던 시기였다. ‘소수’라는 사액에는 중국에서 무너진 주자의 성리학을 다시 이으려는 조선 성리학자들의 자존과 당대의 동아시아 지식사회의 변화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경북 영주시 소수서원은 죽계천을 따라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곳에 자리한다. 그런데 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게 바로 당간지주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이지, 최초의 서원은 아니다. 그러나 서원의 배치가 확립되기 전의 서원임은 분명하다. 초입부터 당간지주가 나오는 것은 소수서원이 있던 자리가 원래 ‘숙수사’라는 절터였기 때문. “흐르는 물도 머물고 간다”는, 절 이름치고는 좀 속되다. 계류를 따라 걸으면 취한대와 경렴정이 나오고 소, 돼지, 염소 같은 육고기를 검사하던 생단(牲壇)이 눈에 띈다. 생단을 지나면, 누마루도 없이 일주문 같은 사주문이 나온다. 그리고 만나는 강학당의 옆면, 이것도 어리둥절하다. 강학당 앞에 좌우로 놓여있어야 할 동재와 서재도 한 몸인 채 강학당 뒤쪽에 있다. 아직 서원건축의 전형이 확립되기 전이고 조선 성리학이 딱딱해지기 전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도 그 관용의 품속에 있는 것이다.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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