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전원거(歸田園居) .... 시골에 돌아와 살며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전체는 되는대로

인문학에 길을

오리진을 붕괴시켜라.

백수.白水 2012. 7. 3. 11:59

콤플렉스를 복권하고 마이너리티의 힘을 활용해 새로운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건 ‘하이브리드(Hybrid)적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브리드는 혼종(混種), 혼성(混成), 혼혈(混血)의 의미다. 서로 달라 보이던 것들을 ‘이종교배’함으로써 이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는 가장 전형적인 창의성 코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게 가능하기 위해선 ‘순수성’이라는 걸 거부해야 한다. 이는 ‘오리진(origin)’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다. 기원으로 보이는 것, 정통의 길을 걸어온 것, 그래서 모두에게 순수한 원형으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는 하이브리드적 방법론을 사용하기 힘들다. 인간의 정신세계가 가진 가장 순수한 오리진은 선과 악, 미와 추, 사랑과 증오 등이다. 이는 ‘선은 아름답고(곧 사랑해야 하고), 악은 추하다(그러니 증오해야 한다)’는 논리와 결합되면서 하나의 단단한 오리진을 형성하고 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해도 칭찬받을 만큼 선하지 말 것이며, 선하지 않더라도 욕을 먹지 않을 만큼만 선하지 않아야 한다.”


이 말 자체로는 과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선하지 않은 것인지, 그것이 악에 얼마나 다가가 있는지를 알기 어렵다. 선과 악이라는 가장 상징적인 오리진이 붕괴된 것이다.

‘서시빈목(西施빈目)’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월(越)나라의 미인 서시(西施)가 가슴앓이를 해서 눈을 찌푸리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러자 추녀가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해 자신도 얼굴을 찌푸리고 다녀 주변 사람을 경악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원래 이 고사성어는 무조건 남의 흉내를 내다가 웃음거리가 됨을 비유적으로 이른 말로, 외형에 사로잡혀 본질을 망각하는 작태를 비난하는 뜻이었다. 하지만 ‘오리진과 그것의 붕괴’라는 차원에서 다시 해석해보면, 미와 추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준다. ‘추한 얼굴을 한 미녀’는 과연 추녀일까, 미녀일까.

오리진에만 경도되어 있다면 하이브리드적 방법론으로 생각하기 힘들다. 당신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오리진은 무엇인가. 그 오리진을 붕괴시키고 생각의 이종교배를 시작하라. 거기서부터 새로운 삶을 위한 당신만의 새로운 하이브리드적 방법론이 탄생할 것이다. 

 

 

‘나와 너’의 복원

 

‘오리진(origin)’의 붕괴는 인간관계에서도 필요하다. 관계의 오리진은 ‘나’와 ‘너’의 엄정한 분리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시작된 개인의 발견은 이런 생각을 공고화했다. 이제 ‘나’는 하나의 소우주이며, 누구도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사적인 존재다. 또 독립적인 인격과 자유, 권리를 가지는 존재로 인식된다. 외부에는 ‘너’라고 하는 타인이 존재한다. ‘나’와 ‘너’가 분리돼 있고 서로가 침해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산업사회는 ‘너’가 ‘그것(it)’이 되는 비참한 현실을 가져왔다. 타인은 하나의 수단이 돼 나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사물화돼 인격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비정상적 관계의 오리진이 됐다. 이를 붕괴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 타인을 사물화하고 그들을 이용하며 도구화하는 비인간적인 관계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종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1878∼1965)가 1923년 발표한 ‘나와 너 (Ich und Du)’라는 책은 이런 관계의 오리진을 붕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는 본질적으로 ‘나와 너’라는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나’만 단독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너’ 없이는 진정한 ‘나’도 있을 수 없고, ‘너’ 역시 ‘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 연계성을 인식하면 ‘너’를 ‘그것’으로 바라보는 도구적 관계론을 넘어설 수 있다.

 

어린이 놀이기구인 시소의 어원은 ‘seesaw’다. ‘보인다’라는 뜻의 동사 see와 과거형인 saw가 결합된 것이다. 내가 앉은 자리가 높아지면 ‘보이고(see)’, 상대가 높아지면 방금 전에 본 것은 ‘보였던(saw)’ 것이 된다.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see와 saw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인격적 관계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나’와 ‘그것’이라는 관계를 붕괴하고 ‘나’와 ‘너’의 관계를 복원해보자. 그러면 당신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 역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남훈 경제 경영 전문작가>

'인문학에 길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용어)에 대한 이해.  (0) 2012.07.13
제행무상(諸行無常)  (0) 2012.07.07
변증법적 중용  (0) 2012.06.29
화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0) 2012.06.23
정약용과 서유구  (0) 2012.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