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무상(諸行無常)
안녕하십니까? 그 동안 약 두 달 반 동안 거의 독서에만 몰두했습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에 그러니까 약 두달 반, 사당동 어떤 횟집에서 아는 분 다섯 명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나가고 술이 몇 잔 돌아가자 어떤 사람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더니 말을 이어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본질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했습니다. 그러므로 일체개고(一切皆苦 )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괴로움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술 한 잔 먹고 헛소리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었을 일이, 아마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말은 계속 마음 속에서 맴돌았습니다.
다음 날 취기가 좀 사라지자 그 말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에 있는 책장을 죽 살펴보니 모두다 영어 책이고 한글 책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홍순철 저 "불교 성서"라는 책입니다. 5년 전 경기도 안양에서 서울로 이사 올 때 문학 전집, 사상 전집 등 수 많은 책을 다 버리고 영어 책만을 이삿짐에 넣어 왔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내가 한국문학이나 세계문학 전집을 읽어 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 혹시 마음이 울적하거나 외로울 때면 읽어보려고, 바로 이 불경성서와 성경 두 가지 책만은 버리지 않고 가져왔는데, 마침내 그날 그 책을 꺼내 보았던 것입니다. 사실 이 불교성서는 전에 같이 근무했던 어떤 선생님의 형님이 쓰신 책인데 기념으로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도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습니다.
700페이지나 되는 이 불교 성서는 부처님의 생애,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용어 해설로 된 책입니다. 나는 우선 불교의 원리를 알아보기 위해 처음부터 읽지 않고 제 2부 불교의 근본 원리부터 읽었습니다. 불교에 관한 지식이라고 해봐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 보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 "수리수리 마하수리 ----"등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을 따라서 외웠던 이상한 말 이외에는 들은 바가 없었기에 처음 읽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원칙을 세워서 읽었습니다.
1)처음 읽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면, 다시 읽는다. 2)그래도 모르면 인터넷에서 찾아 본다. 그래도 모르면 글을 쓴 사람이나 번역한 사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내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처음에 나오는 법(法)이라든지, 사성제, 오온, 연기, 아트만, 브라만, 중도, 공, 무명, 진여 등의 불교 용어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여기저기 찾아보면서 읽어보니 이해 못할 정도로 어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불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철학이요, 과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불합리하지만 진리이니 믿어라,"도 아니요 "처음에는 이상할지 모르지만, 나중에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맞아!, 맞아!" 하면서 읽어 내려갔습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과 "모든 것이 괴롭다"는 것도 연관성이 없는 것 같지만 그것 또한 사실로 이해되었습니다. 당장 하루만 굶어도 괴롭고, 겨울에 한 시간만 추위에 노출되어도 괴롭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야져야 하고, 싫은 사람과 만나야 합니다. 또 우리는 모두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본질을 알지 못하면서 과거를 붙잡고 늘어지려고 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대단한 논리학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소크라테스와 이야기를 한다면 정말 흥미진진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자와 이야기할 때 한 단계 한 단계 물으면서 확인해가는 모습이 초등학교 선생님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여튼 나는 여기서 불교 강좌를 할 생각이 없고, 그 동안 내가 어떤 과정을 밟아 공부를 했는가를 밝히는 것이 그 목적이므로 다음으로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면 고다마 싯다르타 부처님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많은 생각을 우파니샤드라는 브라만교 경전에서 배웠다는 것을 나는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석지현씨가 해설한 우파니샤드라는 책을 샀습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트만(본질)과 브라만(이것도 역시 본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쇼펜하우어, 니체, 흄 등이 읽고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책입니다. "우파니 샤드는 무더운 여름밤, 바람부는 바다와 같다. 모든 종교적 정서와 모든 위대한 윤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지극히 고상하며 끊임없이 우리 영혼에 시적인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라고 에머슨은 말했다고 합니다. 정말 다시 공부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인도 철학을 공부해 보고 싶습니다. 인도 철학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포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파니샤드에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중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을 소개합니다. "모든 감촉의 합일점은 피부다. 모든 냄새의 합일점은 코다. 모든 맛의 합일점은 혀다. 모든 색과 형상의 합일점은 눈이다. 모든 소리의 합일점은 귀다. 모든 생각의 합일점은 의식이다. 모든 지(知)의 합일점은 마음이다. 모든 행위의 합일점은 손이다. 모든 쾌락의 합일점은 성기(性器)다. 모든 보행의 합일점은 발이다. 그리고 이 모든 베다(경전. 우파니샤드는 그 중의 일부)의 합일점은 언어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파니샤드는 난해하고 심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다른 정신적 지도자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오쇼가 지은 위대한 만남이라는 책을 구입했습니다. 이 책은 그의 강연 내용을 모아 놓은 것인데 오쇼 본인 말에 의하면 그는 10만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계산해보니 하루에 10권씩 10년 동안 읽은 셈이 되었습니다. 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 책은 20명의 정신적 지도자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예수, 붓다, 치요노, 크리슈나, 장자, 칼릴 지브란, 노자, 소크라테스"등도 20명 중에 들어있습니다.
그 책의 구르지예프에 관한 것 중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보통 그대는 "먼저 믿지 않으면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며 살았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다. 믿음은 진리로 가는 다리가 아니다. 믿음은 장애물일 뿐이다. 믿는 자는 결코 찾지 못한다. 그들은 찾지 않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있습니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이문열 삼국지에도 나오는 표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집착하지 말라. 집착은 지옥을 불러온다. 집착하는 마음이 곧 지옥이요. 집착하지 않고 깨어있는 의식이 곧 천국이다. 우리는 항상 기분과 함께 산다. 기분이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라. 그 변화를 받아 들이라. 불평도 할 필요가 없고 불만도 할 필요가 없다. 삶은 변화하는 것이다. 만물은 변화하는 것이다. 그대가 흐름을 거스르고자 해도 그 흐름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 다음 나는 세계의 종교에 대해 관심이 생겼습니다. 좀 넓게 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 유다 유타카가 쓴 세계의 종교라는 책을 구입했습니다. 이 책은 유대교, 기독교, 베다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에 관한 개괄서입니다. 그는 "신이 존재한다면 더구나 전지전능하다면, 신이 창조한 이 세계에서 인간이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좋단 말인가?"로 시작하며 자기 나름의 종교관을 펼쳐나갑니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해도 그 행위에는 어떠한 동기도 목적도 없었으며 창조란 기껏해야 신의 장난에 불과하다."라는 샹카라의 말도 인용합니다.
다음으로 나는 실제 불교 경전을 읽어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구입한 것이 금강경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읽는 금강경"이란 책인데 이현주 목사가 해설한 책입니다. 끊임없이 나오는 구절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너무 궁금하여 영어로 된 금강경도 구입해 보았는데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는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최고로 완벽한 깨달음"이라고 해야할까요? 제자 수보리와 부처님과의 대화로 되어 있는 이 금강경은 내가 보고 믿는 것이 사실은 본질이 아님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제법무아를 이야기하는 것일 것입니다. 작가 이현주 목사의 말대로 "금강경 전체가 끊임없는 우상 부수기"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읽은 책이 반야심경 강의입니다. 200페이지가 되는 이 책은 한 페이지가 원문이고 나머지 199페이지는 원문에 대한 해석으로 되어 있는 참으로 허망한 책이었습니다. 노무현대통령 장례식 때 스님이 나와서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모제 사바하"로 염불한 내용입니다. 영화제목에도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어구가 들어있는 경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공이라는 말은 심오한 말입니다. 제가 나중에 읽게 된 용수라는 인도 사람의 공(空)사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8만 대장경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있기에 그 많은 것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나는 내가 읽으면 좋을 경을 찾고자 "불교 경전의 이해"라는 책을 구입했습니다. 개괄적으로 경전의 종류에 대해 알아보고 그 중에서 몇 가지만 더 구해서 읽어 볼 생각이었습니다. 그 책은 불교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중요한 경전 60권을 해설한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나는 초기 경전인 아함경, 숫타니파타, 법구경을 읽기로 했고, 화엄사상을 좀 알기 위해 화엄경을 읽기로 했습니다.
제가 가장 감명을 받은 것은 숫타니파타경입니다. 내가 무엇이라 말하는 대신 몇 구절을 인용할까 합니다.
<사귐이 깊어지면 애정이 싹트고 사랑이 있으면 거기 고통의 그림자가 따르나니, 사랑으로부터 불행이 시작되는 것을 깊이 관찰하고 저 광야를 가고 있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 가거라.>
<어느 곳이든 가고 싶은 대로 가거라. 해치려는 마음은 갖지 말고 무엇을 얻든 그것으로 만족해하라. 이 모든 고난을 묵묵히 참고 견디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저 광야를 가고 있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가거라.>
<인간의 목숨은 예측할 수 없고 언제까지 살지 알 수도 없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괴로움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뒤따른다. >
<살아있는 존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늙으면 이윽고 죽음이 오나니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것들의 운명이다.>
<우리는 온 곳도 모르고 가는 곳도 모른다. 탄생과 죽음의 이 양 끝을 모르면서 왜 그리 구슬피 울고만 있는가?>
그 다음 아함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한 구절 인용합니다. 마침 술에 대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술에 빠지면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과오가 생긴다. 재산의 손실을 입고, 다툼이 잦아지며, 쉽게 병에 걸리고, 악평을 듣게 되며, 벌거숭이가 되어 치부를 드러내게 되며, 지혜의 힘이 약해진다.> 아마 이 당시에 술에 취해 옷을 벗고 길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듯 합니다.
지옥을 묘사한 것도 흥미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1. 머리를 갈아 벌겋게 달구어진 철환을 집어넣어 골수를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한다. 2. 윗입술 목둘레의 살을 찢고 머리를 한 갈래로 묶어 살과 머리를 동시에 벗겨 머리 뚜껑을 모래로 문질러 씻어 조개처럼 하얗게 보일 때까지 문지른다. 3. 막대기로 입을 벌려 입 안 깊숙히 등불을 켜거나, 또는 귀 밑에서 입까지 정으로 찔러 입안 가득히 붉은 피가 흘러나오게 한다. 4. 온 몸을 기름묻은 헝겁으로 감싸 불을 붙인다. 5. 칼로 몸의 여기저기에 상처를 내어 잿물을 부어넣어 살갗, 살, 근육이 흘러나와 뼈만 남게 한다. 6. 분뇨지옥에서는 죄지은 사람을 똥 구덩이에 집어넣으면 예리한 촉이 있는 벌레가 피부를 뚫고 들어가 살을 파괴하고 근육을 파괴하고 골수를 파 먹는다. <이것은 본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해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기타 형벌은 무궁무진합니다. 지옥이 136개가 된다고 하는데, 가장 무서운 죄는 어머니를 죽인죄로 그런 죄를 저지르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 벌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뜨거운 불로 말려서 껍질을 벗기고 말못할 고생을 시킨 뒤에 다시 살려서 처음부터 이런 고통을 다시 가 한다고 하는데, 하루에도 여러번 이런다고 하니, 정말 인간의 상상력이란 끝도 절도 없나 봅니다.
*오늘은 여기서 끝냅니다. 써 놓고 보니 제가 느꼈던 감격적인 장면을 잘 묘사하지 못했군요.
앞으로 2-3회 더 쓰겠습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 등을 믿는 신자 중 본 글에 불만족하거나 기분 나쁜 분이 계시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실 저는 그냥 호기심에서 책을 읽었을 뿐이고, 불교 신자도 아니고 기독교 신자도 아닙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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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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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행무상(諸行無常)-2
이슬람교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세계 종교"의 저자인 일본인 유다 유다카의 말에 따르면, "알라"라는 말의 뜻은 "그 신(the God)"이라고 합니다.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꾸란)은 "읽는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6세 때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대단히 불행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무함마드가 메카 근처의 동굴 근처에서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실 그는 이상한 말을 하고 다녔는데 자신도 그 말이 신의 계시인지를 모르고 중얼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나는 도대체 코란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여 약 600 페이지나 되는 한글 코란을 구입했습니다. 김용선씨가 번역한 것인데요, 본인은 해설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원문인 아랍어로 읽어야 가슴 뭉클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114장으로 구성된 코란은 각 장의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암소의 장, 여인의 장, 식탁의 장, 전리품의 장, 꿀벌의 장, 개미의 장, 요셉의 장, 마리아의 장"등의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제 1장인 개경(開經)의 장에는 기독교의 주기도문과 비슷하게 시작됩니다. "참으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운신 알라의 이름으로 온 세상의 주인이신 알라를 찬송할 지어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운신 분. 심판일의 주재자 당신을 믿고 당신한테 구원을 청하나니 우리를 옳은 길로 인도하소서. 당신께서 은총을 내려주신 사람들의 길로. 노여움을 산 사람들이나 길 잃은 사람들이 간 그런 길이 아닌 곳으로."
이슬람도 유일신을 믿기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유일신이라는 점은 유대교나 기독교와 같습니다.
알라신을 믿지 않는 자,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불로 옷을 만들어 입히며 머리 위에서 펄펄 끓는 물을 쏟아 붓는다. 그러면 그들의 내장이나 피부도 전부 흐물흐물 녹아 버린다. 게다가 철로 만든 갈고리를 먹어야 한다. 너무 고통스러워 기어가기 시작하면 그 때마다 다시 찌른다."
하지만 알라신을 믿는 자들에게는, "알라가 낙원에 보내 주신다. 내려다 보면 냇물은 졸졸 흐르고, 황금 팔찌와 진주로 몸을 장식하고, 옷은 비단으로 만들어 입는다."
처음부터 코란을 읽어나가다가 "왜 이리 재미가 없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전을 무슨 재미로 읽겠습니까만, 저는 읽다가 졸다가 딴 생각하다가, 건너 뛰며 읽다가 결국은 읽기를 그만두었습니다. 나중에 좀 한가하면 그 때 읽어 보려고 합니다. 매일 노는 놈이 한가한 때를 찾는다니 내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 같지만, 사실 저는 항상 대단히 바쁩니다. 그냥 바쁩니다.
코란에 있는 몇 구절을 보면
"진실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유태교도 기독교 사바인 등 누구든지 알라와 최후의 심판날을 믿고 좋은 일을 행하는 자들은 그들의 주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며, 두려움도 없고 슬픔도 없을 것이다."<암소의 장>
"너희들이 아내와 이혼할 경우에는 일정한 기한이 지난 뒤에 하는 것이 좋다. 그 기한을 계산하는 알라를 두려워하라. 너희들은 아내가 눈에 벗어나는 음란한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도 함부로 그녀들을 집에서 내쫓거나 또는 나가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알라의 규정이다. 알라의 규정을 범하는 자는 이미 자신에게 불의를 저지른 자다. 그대는 모르더라도 알라는 나중에 새로운 일을 일으키실지도 모른다. <이혼의 장> *그 당시에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함부로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에 대한 경고.
다시 불교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최초의 불교(근본불교, 원시 불교)는 상좌부 불교와 대중부 불교로 갈라졌다가 다시 18개의 파로 갈라집니다. 이때를 부파불교라고 합니다.
(1)한 갈래는 스리랑카로 가서 미얀마 쪽으로 갑니다. 소승불교 또는 남방불교라고 합니다. 소승이라는 말은 "작은 바퀴"라는 뜻인데, 그들이 스스로를 소승이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일부가 자신들을 대승이라고 하면서, 수행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소승이라고 한 것이지요. 아마 소승 불교 사람들은 이 말 들어서 기분 좋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2)또 한 분파는 티벳으로 가서 티벳불교가 됩니다. 우리가 아는 달라이 라마가 티벳불교를 이끕니다. 달라이는 "바다"란 뜻이고, 라마는 "스승"이라는 뜻입니다. 현재 달라이라마는 14대 달라이 라마입니다. 학교 다닐 때 라마교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바로 이 티벳 불교를 말합니다. 티벳 불교는 반야사상과 밀교가 융합되었다고 합니다.
석지현씨가 번역한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라는 책을 구입하였습니다. 파드마삼바바라는 사람이 써서 사방에 있는 동굴에 깊숙하게 감춰놓은 것을 릭진이라는 사람이 찾아낸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죽어가는 사람에게 해주는 말인 듯한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약 500페이지나 되는 데, 해설이 2/3 정도이고 본문이 1/3 정도입니다 서문 정도만 읽고 대충 훑어 보았는데, 이 책에 관한 것은 다음으로 미룹니다. 하루 이틀에 읽어볼 책이 아니라, 독서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책입니다.
어떻든 에반스 웬츠는 "사자의 서"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삶은 죽음에서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앞에 놓고 죽음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기 앞서 그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우리가 이제부터 책장을 넘겨 나갈 이 책 역시 우리에게 다름아닌 그 진리를 일깨우고 있다. 여기 이 책은 결코 어떤 종교적 전통이나 믿음으로부터 탄생한 책이 아니다.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다음, 의식을 가진 채 다시금 인간의 육체 속으로 환생한 위대한 영적 스승들의 증언을 근거로 한 것이다."
(3)세 번째로 우리가 알고 있는 대승불교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대승은 "큰 바퀴"라는 뜻이고 깨닫는데 역점을 둔다고 합니다.
내가 불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은 동국대학교 김종옥교수의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 철학"이라는 비디오입니다. 45분짜리 27강으로 되어 있는 이 비디오는 서양철학을 개괄적으로 보여주며, 불교 사상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의 핵심인 이데아(idea), 중세의 "신" 중심 세계, 그리고 근대의 "사유, 이성"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철학 역사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니체의 "신은 죽었다"와 하이데거의 "실존"으로 끝납니다. 이를 설명하면서 불교의 어떤 사상과 연관되는지를 설명합니다.
불교가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는 것은 한문을 모르면 불경이 그림의 떡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저는 한글로 된 경전을 읽어 보았지만, 아무리 한글로 된 경전이라고 해도 한문을 모르면 힘들다는 것을 알았고, 또 한문을 잘 몰라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한문 공부 좀 하려고 한문 책도 구입했고, 한문 강좌 비디오도 보았지만 알고 있는 한자는 너무 적고, 알아야 할 한자는 너무 많기에 괴로웠습니다.
과거에 한문으로 된 경전만 있었을 때는 몇몇 지식인들 이외에는 정말 공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주로 미국에서 공부한 목사님들에 의해 들어왔다고 하는데, 천만다행입니다. 만약에 중국을 통해 기독교가 들어왔다면, 아마 목사님들 고생 엄청나게 했을 것입니다. 새카맣게 쓰여진 한문 성경은 정말 상상만해도 눈앞이 캄캄할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들어왔어도 마찬가지였겠지요. 더구나 성경은 딱 한 손에 들어갈 정도의 양이지만 불교는 8만 대장경을 공부해야하니 우리나라 스님들은 골치깨나 아플 것입니다. 반면 목사님들 운 좋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한자로 된 사도신경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성경 전체가 아래와 같았다면 지금처럼 많은 신도가 있는 종교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흥미있는 것은 "마리아"는 "馬利亞"가 되고, "아멘"은 "阿門"이 되는군요.
我信上帝,全能的父,創造天地的主.
我信耶蘇基督,上帝的獨生子,我們的主;因著聖靈成孕,從童女馬利亞所生;在本丟彼拉多手下遇難,被釘在十字架上,死了,葬了; 下到陰間;第三天從死裏復活;後升天,坐在無所不能的父上帝的右 邊;將來要從那裏降臨,審判活人、死人.
我信聖靈;一聖基督敎會,聖徒相通;罪得赦免;肉身復活;並且永生. 阿門.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불교 사상 중에 반야사상(공사상)과, 유식사상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런 사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 글을 읽을 사람들 중 선생님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은 하고 싶습니다.
유식 사상 중에 "마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눈이나, 귀, 코 등으로 외부 인식을 받아들이듯이 외부 사물을 받아들이는 다른 한 종류의 식(識)입니다. 그런데 이 마나식을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이 마나식은 "의식을 통일하여 자아의 축이 되는 의식"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기도 하고, "외부 대상에 투영시켜 영원한 존재라고 믿게 하는 의식"이라고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마 모르실 것입니다. 당연히 저도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사람은 서로 다르고, 각자의 경험도 다르기 때문에, 같은 사물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본다. 예를 들어 꽃 한 송이가 여기 있을 때, 생물선생님은 탄소동화작용을 하는지 보고, 미술선생님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대상으로 적절한지 보고, 저같은 영어 선생은 이것은 영어로 rose라고 하며 철자는 r-o-s-e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관적으로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나식입니다.
저는 마나식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본래 모든 진리나 배워야 할 핵심은 간단하나, 그것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쉬운 말을 두고 왜 그리 어렵게 설명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학교에 계시는 선생님들은 사전에 나와있는 대로 설명하지 말고, 쉬운 말로 아이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을 하도록 많이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동명사, 부정사, 분사"라는 말은 고등학생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를 떠나니 이런 생각이 더 듭니다.
어쩌다 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오늘은 성철스님이 말씀하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말에 대해 알아보고, 본 글을 마칠까합니다. 이 설명은 김종옥 교수가 두 시간에 걸쳐서 이야기한 것인데, 단 몇 분만에 제가 알기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내가 쳐 놓은 덫에 내가 당하는 격일텐데!
1)산은 산이다. 장미는 장미다. 2)산은 산이 아니다. 장미는 장미가 아니다. 3)산은 역시 산이다. 장미는 역시 장미다.
1)"산은 산이다"라는 것은 보통 사람의 입장으로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즉 저에게 산은 등산의 대상으로 보이고, 미술선생님에게 산은 그림 그리는 대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2) "산은 산이 아니다." 저 산이 나의 등산의 대상으로 보인다는 것은 나의 많은 경험에 의해 내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저 산을 또는 세상을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구별하는 그런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저 산은 내가 등산하기 위해 놓여진 산은 아닐 것입니다. (저) 산은 (내가 생각했던 등산용)산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 공(空)하다고 합니다. 즉 공은 무엇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찌든 경험으로 판단했던 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산은 역시 산이다." 자 이렇게 분별(판단)하는 마음을 없애고 보니 산은 본래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등산을 위한 산도 아니요, 그림을 그리라고 거기에 있는 산도 아닙니다. 뜰에 피어있는 장미도 잘라다가 시장에 팔라고 거기있는 것도 아니며, 그림을 그리라고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장미는 그 자체로 소중한 하나의 생명체로 그리고 경이로운 존재로 거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산이나 장미는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실존적"으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경지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따라서 성철스님은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겸손하게 낮추어 1번처럼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2번이나 3번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부처가 되어야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면 세상은 정말 달라 보일 것입니다. 김선생님은 단지 월 200만원 봉급쟁이로 보이지 않을 것이며, 하나의 기계의 부품처럼 종만 치면 교실에 들어갔다가 종만 치면 밖으로 나오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 자체로 귀중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모습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는 것은 결국 먼지에서 우주를 본다는 이야기이고, 내가 산이고 산이 나인 경지일 것입니다. 자, 이제 세상을 분별(구별)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한 떨기 장미에서 경이로운 우주를 보시길 바랍니다.
(계속)
2009년 6월 6일 |
<2009년 5월 1일 홍도> |
제행무상(諸行無常)-3
"중국 불교는 선불교(禪佛敎)이며, 이것은 인도불교가 아니라 철저히 중국적 「격의 불교(格義佛敎)」의 소산이며, 궁극적으로 노자와 장자의 변용이다."라고 일본의 어떤 학자가 말했습니다. "격의불교"란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식으로 바뀐 불교를 말합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자기 나름의 도가 사상을 갖고 있었기에 인도불교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중국식 불교"로 바꾼 것이 선불교라는 것입니다.
사실 중국의 선에 관한 책을 읽어보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냥 알아서 깨달으라는 것이지요. "선을 하려면 확실히 알고 해라. 그러려면 선의 원조인 벽암록을 우선 읽어라."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최근에 석지현스님이 해설한 여러 권으로 된 벽암록이 나왔습니다만, 내가 선의 전문가가 될 것도 아니고 그럴 시간도 없고, 책값이 비싸기도 해서, 조오현스님이 "사족"을 붙인 벽암록을 구입했습니다.
벽암록은 100가지 이야기로 되어 있는데, 해설이 있으면 조금 알듯 말듯하고, 해설이 없으면 모르는 이야기들이라고 저의 의견을 말해야겠습니다. 좋게 말하면 심오한 이야기이고, 나쁘게 말하면 "왼뺨치고, 오른뺨쳐서 어리둥절하게 만든 후 머리에 찬 물 붓는 이야기(좀더 나쁘게 말하면 「사기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벽암록의 몇 가지 예.
제 7칙
혜초가 법안스님에게 물었다. 혜초: "스님께 여쭈오니 무엇이 부처입니까?" 법안스님이 말했다. 법안: "네가 혜초이니라."
위 대화가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다음을 보시죠.
제 45칙 어떤 납자(=스님)가 조주 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스님: "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이에 대해 조주화상의 대답은 이러했다. 조주: "내가 청주(=중국에 있는 도시)에 있을 때 베적삼을 한 벌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네."
이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면 천만다행이고, 몰라도 그러려니 여기면 될 것입니다. 처음 이야기에서 "네가 혜초이니라"라는 것은 "네가 부처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느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 가면, 하나의 법은 다시 만 가지 법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선(禪)에서는 척하면 알아야지 꼭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담 너머로 소의 뿔이 지나가면, 저기 소가 가는구나라고 알아야지, 가서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연기가 나면 불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꼭 가서 불이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불교에 관한 책을 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침 어떤 부동산 사장님이 저에게 "선의 황금시대"라는 책을 사 주셨습니다. 중국 사람 오경웅이 짓고 류시화씨가 번역한 책인데, 벽암록보다는 덜 어렵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역시 선은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나라 시대의 위대한 선사들이 온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가르쳤던 삶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 책의 저자는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선의 본질이 "마음을 맑게 함(심재), 마음을 잊음(좌망), 그리고 아침처럼 맑음(조철)"이라는 장자의 말을 이해해야만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여튼 말이라는 것은 한정된 것이어서,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에서 화법이 생기고, 시가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선에서는 "~는 ~다"라고 확정짓는 것을 경계합니다. 이것은 노자에 나오는 첫 어구인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도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은 상도는 아니다」, 즉 이것이 도(道)다」라고 하면 그 순간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선에 관한 수 많은 예화가 실려있는 이 책(the Golden Age of Zen)에서 한 두 가지 소개합니다.
제자 한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내는데, 조주가 장례행렬에 끼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수많은 죽은 사람이 단 하나의 산 사람을 따라 가는군."
도의 수행자들이여. 도는 어떤 인위적인 노력이나 행동에 있는 게 아니다. 다만 평상시의 일들, 이를테면 옷입고 밥먹고 똥누고 오줌누며 피곤하면 잠자는 그런 일들 속에 불도가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이 말을 듣고 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 것이다.
구도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로 외부의 다른 것, 다른 사람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건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빨리 그에게서 떠나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어떤 학파를 세운 사람)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깨달은 경지에 오른 사람)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그가 부모일지라도 죽이고, 친척권속이라도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서 최상의 자유인 해탈에 이를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이다.
결국 나는 중국의 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자와 장자를 읽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안동림씨가 번역한 장자를 구입했습니다(사실 이런 책들은 젊었을 때 읽었어야 할 책입니다. 늦었지만 앞으로 중국의 고전을 계속 읽어 볼 생각입니다.) 끊임없는 장자의 이야기 중 공통점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듯이 "무위자연(無爲自然 )" 사상입니다. 즉 인위(人爲=사람 마음대로 하는 것)를 하지 말고, 모든 것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고, 자연의 이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자와 맹자가 인위적으로 "인, 의, 예"를 강조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생각컨대, 인의(仁義)란 사람의 참된 모습이 아니다. 저 인덕을 갖춘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한가!" 정말 그렇습니다. 자연스럽게 살면 좋을 것을, 수 많은 법칙을 만들어 놓고 따라야 하니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합니까?
장자의 양생주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못가의 꿩은 겨우 열 걸음 걸어가서 겨우 한 입 쪼아 먹고, 백 걸음 걸어서 한 모금 마시지만, 새장 속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새장 속에서는 먹이가 충분하여 기력은 왕성하겠지만, 속이 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장자의 인간세 편에서는 "명예와 재물이란 성인도 그 유혹을 이길 수가 없는 법이다."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재물을 얻으려 하고, 쓰러지면서도 명예를 잡고 있는 것을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보게 됩니다. 천승일 세중 나모 회장이 사람들에 밀쳐 넘어지면서 검찰청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도대체 저 노인이 저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저렇게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시 "부와 권력 명예는 성인군자도 멀리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띠쇠(=허리 띠에 다는 쇠 장식)를 훔친 자는 사형되고, 나라를 훔친자는 제후가 된다."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이 없어지지 않는다."
"옛날에 소위 뜻을 이룬다함은 높은 벼슬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었다.그 이상 즐거움을 더할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사람은 태어나면 걱정과 더불어 살아가게 되어 있다."
노자의 도덕경도 저는 처음 읽어보는 책입니다. 서점에 가보니 누가 번역했는가에 따라 값이나 부피가 많이 다르더군요. 여기서 도덕은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 과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도"는 "도의 원리"를 이야기하고, "덕"은 "도의 적용"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것이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라"는 내용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중 눈에 띄는 어구 몇 가지를 보면:
"가장 훌륭한 군주: 백성들이 임금이 있다는 것만을 아는 군주. 두 번째로 훌륭한 군주: 백성들이 친근감을 갖는 군주. 형편없는 군주: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군주. 가장 형편없는 군주: 백성들이 업신여기는 군주." 그렇다면 우리 나라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현재 이명박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들이 위의 네 분류 중 어디에 해당되는지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큰 도가 없어지니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이 있게 되고, 인간에게 지혜라는 것이 생기니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
사람은 땅의 법칙에 따르고, 땅은 하늘의 법칙에 따르며, 하늘은 도의 법칙을 좇고, 도는 자연의 법칙을 좇는다. 즉, 도는 천지만물 앞서는 존재이다. 사실상 도는 이름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억지로 도라고 이름하였으나, 단지 편의상 붙인 이름이며 일시적인 표현 수단에 불과하다.
남들은 강한 것, 있는 것이 유익하다고 가르치지만 나는 약한 것, 없는 것이 유익하다고 가르친다.
학문을 하면 날마다 할 일이 더 많아지고, 도를 하면 날마다 할 일이 줄어든다. ---정말 진리인 듯 함!!!---
강과 바다가 능히 모든 계곡의 왕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강이나 바다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겸손해야 한다는 뜻---
<2009년 5월 1일 홍도>
현각스님이 쓰신 "부처를 쏴라"라는 책의 한 구절을 소개하고 오늘 글을 마칩니다. 숭산 스님의 말씀입니다.
"깨달음이란 말을 붙인 것에 불과해. '깨달음'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깨달음'이 존재하게 돼. 그러나 깨달음이 존재하면 깨닫지 못함도 존재하지. 그로 인해 상대적 세계가 만들어져.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깨달았다 깨닫지 못했다, 이 전부가 상대적 세계야. 이러한 세계는 순전히 생각일 뿐이야. 그러나 진리는 생각이 일어나거나 상대적 세계가 나타나기 이전의 절대적 세계야. 그렇기 때문에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를 만들면 이를 취하게 되고, 따라서 그것은 곧 장애가 돼 버려. 그러나 아무 것도 만들지 않으면 모든 걸 얻게 된다 이 소리야. 이해가 돼?"
<본 "제행무상"은 제 4부에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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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행무상(諸行無常) 4
저의 형제는 4남매입니다. 누님이 한 분 계시고, 형님이 두 분 계십니다. 많은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철저한 유교 또는 불교적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큰 형의 딸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집안 망할 징조이니, 당장 교회에 다니지 말라고 온갖 협박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큰 형집 식구 전체가 교인이 되었습니다. 곧 작은 형 집 식구는 모두 천주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누님은 불교 신자입니다.
우리 작은 집도 물론 철저한 유교적 또는 불교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집 큰 아들(저의 사촌 동생)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고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큰 아들은, 동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난 끝에 연세가 90에 가까운, 지금까지 불교 사상에 젖어 있던 작은 어머니를 결국 교회에 나가게 만들었습니다. 나머지 두 명의 사촌 동생이 언제 교인이 될지, 아니면 끝까지 이 거대한 흐름에 저항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 또한 일년 뒤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을지, 또는 불교 신자가 되어있을지, 아니면 이슬람이 되어있을지, 그것도 아니면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 있을 지 한 치의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실정인 것 같습니다.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기독교 신자를 갖게 된 것이 한국이라고 합니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증(xenophobia)를 갖고 있는 것이 한국인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입니다. 동남아에서 온 사람들이 특히 천대를 받는 것이 한국입니다. "우리"라는 말로 뭉친 것이 한국이요, "우리 것이 좋은 것여"를 외쳐대는 것이 한국인입니다. 길거리에서 한 두 마디 영어를 하면, "뭘 잘났다고 씨부렁거리나?"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 바로 어제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것을 그렇게 "사랑"하는 한국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이렇게 쉽게 다른 나라의 종교인 기독교에 빠져드는 것일까요? 저는 지난 두 달 반 동안에 "도올 인도를 만나다"라는 EBS 강좌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45분짜리 28강으로 되어 있는 이 비디오는 제목과는 관계없이 "불교 강좌"입니다. 불교의 기본 교리를 강의하고 끝 부분은 금강경을 강의 합니다. 저는 28강의 강의를 들으면서 역시 많은 것을 배웠고, 도올은 정말 아는 것도 많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올의 말에 따르면, 한국인이 이렇게 쉽게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샤머니즘(=무당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삼국 시대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나라 전 국토에 샤머니즘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불교가 들어와서 샤머니즘을 덮어 버렸지만, 여전히 저 깊은 내부에는 샤머니즘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습니다. 그 뒤 조선 시대에 유교 정책을 썼지만, 지구의 내부에 화산이 훨훨 타고 있듯, 우리의 내부에는 여전히 샤머니즘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3월이나 4월이 되면 산악회는 시산제를 지냅니다. 시산제에 참가해 보면 돼지와 떡을 제단 위에 놓고, 기독교 신자건 불교 신자건 절을 합니다. 학교에서도 건물을 하나 지으면 떡을 해 놓고 절을 합니다. 심지어는 학교의 어떤 부서가 다른 교실로 옮기면 또 떡을 해 놓고 절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동차를 새로 산 후, 자동차 앞에 떡을 해다 놓고, 자기의 종에 불과한 자동차에 절을 하기도 합니다. 불교 신자건 기독교 신자건 결혼 때, 사주 팔자를 들먹이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닙니다. 아이가 대학에 갈 때, 점집에 찾아가는 것도 드문 일도 아닙니다. 불교 신자도 기독교 신자도 이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불교 신자요, 기독교 신자라고 믿고 있지만, 저 밑바닥의 무의식에는 샤머니즘의 불이 훨훨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당이 신명이 나서 주술을 외우면서 춤을 추는 것, 우리가 교회 부흥회에서 볼 수 있듯이 땅을 치고 울면서 기도하는 기독교인들, 2002년 월드컵에서 기뻐 울면서 아무나 부등켜 안고 울부짖는 것이 모두 다 이 샤머니즘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위 세 현상에서 "신명나다"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정서에 맞기에 기독교가 빨리 퍼졌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 때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 등 네 개의 교단에서 나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아마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이렇게 여러 교단에서 나와 자기들 방식의 장례 의식을 갖는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이 영결식이 세계로 방송이 되었을 텐데, 이것을 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흔히 한국을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와 불교가 주를 이루지만 시골에 가면 유교를 믿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태원에 가면 이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공원에 앉아 있으면 "도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합시다."라고 누군가가 말을 걸어옵니다. 잘 아시다시피 천도교도 있고 증산도도 대순진리교도 있습니다. 몰몬교도 있고, 여호아의 증인도 있고 통일교도 있습니다. 말하면 무엇하겠습니까만, 저의 고향인 금산에 가면 석막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워서 그곳을 두 번이나 가보았고 거기 있는 사람과 이야기도 나누어 보았습니다. 한 계곡 전체를 마치 에덴 동산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거기에 세워진 수 많은 비석은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계곡 전체가 성전입니다. 지금은 감옥에 있는 정명석 목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만든 교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이비라고 하건 말건, "비록 지금 정명석 목사님은 자유로운 몸이 아니시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 힘들게 지내시고 계시지만, 오직 주 하나님 사상과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원망치 않고 계속 기도하시는 참목자이시다"라고 그곳 신도들은 말합니다.
제가 미국에 태어났다면, 저는 자연적으로 또는 운명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 태어났다면 자연스럽게 일본식 불교인이 되었을 것이고, 이란에 태어났다면 당연히 이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묻지도 않고 따질 필요도 없이"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기에, 불교인이기도 하고 기독교인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불교인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니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우리 집만 보더라도, 제사를 지내되 몇 사람은 절을 하고 어떤 사람은 묵념만 하는, 말은 안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껄끄럽게 여기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아내를 10년 동안 설득하여 교회를 다니지 못하게 한 남편이 있는가 하면, 10년 동안 남편을 설득하여 교회에 나가게 만든 아내도 있습니다. 종교가 달라 이혼한 사람도 찾아 볼 수 있으며,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와 말 싸움 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종교와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라. 틀림없이 그대의 목적을 이루리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말하지만, 자신을 결코 양보하지 않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종교인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무릇 모든 종교는 자신들의 종교가 이러이러해서 옳은 종교이고, 다른 종교는 이러이러해서 옳은 종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수억 명이 불교를 믿고 있고, 수억 명이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수 억 명이 이슬람 신자입니다. 몇 만 명, 몇 십만명은 바보일지 모르지만, 수십 억 명이 엉터리 종교를 믿는 것은 아마 아닐 것입니다.
영어 문법에 변형생성문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래 능동태인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I love you.)"와 수동태인 "당신은 나로부터 사랑을 받는다(You are loved by me)"라는 것은 내면에 있는 구조(deep structure)에서는 같은 하나의 말이었으나, 이것이 밖(surface structure)으로 나오면서 두 가지로 분리해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진리도 본래 하나였으나 밖으로 표출될 때는 여러 개의 모양을 갖춘 형태, 즉 여러 개의 종교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구 저 깊숙한 곳에 용암이 자리잡고 있고, 이들은 무한한 폭발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 용암의 근본 성질은, 무한한 자비와 사랑입니다. 이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라는 용암이 표면으로 한 쪽에서 솟구쳐 오른 것이 불교이고, 다른 쪽에서 분출하는 것이 기독교이며, 또 다른 쪽에서 터져 올라오는 것이 이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진리는 저 밑에서 꿈틀거리며 타고 있는 용암이지만, 사람들은 분화구에 갇혀서 그 뿌리(=큰 용암 덩어리)를 보지 못하고, 용암의 황홀함에 눈멀고 귀멀어, "내 분화구의 용암이 진짜다, 내 분화구가 제일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 뿌리와 한 줄기에서 나온 나무 가지들이, "나만이 진실한 나무 가지이고 옆에 있는 나무 가지는 사이비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두 달 반 동안 저는 불교가 무엇인지 짧은 여행을 하였습니다. 지리산 천왕봉이 불교라면 저는 서울에서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 지리산을 한 바퀴 휙 돌아 보았습니다. 진짜 지리산의 천왕봉에 도달하려면, 차에서 내려 등산 망태를 지고 등산화를 신고 두 발로 끙끙거리며 올라가야 하듯이, 저는 더 많은 공부와 수행과 자비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리산 천왕봉으로 향하지 않고, 저의 차를 몰고 다시 서울로 가렵니다. 그리고 평상심으로 돌아와 전과 같은 생활을 하렵니다.
결국 저는 도(道)라는 것은 "자유" 또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남"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속박이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가한 속박이 아니라, 내 스스로 나에게 가한 속박이라는 것입니다. 신체적, 정신적, 영혼적, 인습적, 사상적으로 나를 칭칭 감고 있는 속박으로부터 뛰쳐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가능하겠지만, 나 자신을 옥졸라 매었던 모든 속박으로부터, 특히 "이것은 옳고, 저것은 옳지 않다"는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바로 도를 닦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곽영을, 너는 좀 더 자유로워 해."라는 말로 이 글을 끝냅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저는 결국 이미 내가 갖고 있는 속박에다가 "좀 더 자유로워야 한다"는 또 하나의 속박만을 뒤집어 쓴 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도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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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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