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공귀(白首空歸)로 귀전원거(歸田園居)를 시작한지도 벌써 6년째. 처음엔 내가 살아오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가슴 설레었습니다.
특히 사서 모으기만 했지 제대로 읽지도 않고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300여권의 책들, 이사 때만 되면 큰 짐이 되어 아내는 도서관에다 기증하라고 했지만 끈질기게 끌고 다녔는데, 그 책들을 열심히 읽을 거라는 다짐을 했었습니다. 형식상 농업경영인으로 등록을 했지만 사실은 고작500평의 농사가 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남는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는 白手인 겁니다. 그런데도 시골에 와서 백수인 주제에도 역시나 공염불만 하고 말았습니다. 이 나이가 될 때 까지 고전한권을 제대로 읽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31세에 김영사 사장이 된 박은주 김영사 대표 “아침저녁 얼굴을 씻기 위해 세수하듯, 마음에도 때가 끼게 되잖아요. 마음세수 하듯 금강경을 읽습니다. 뜻을 외우기보다 내 마음의 경을 읽으면서 내 마음을 봅니다.”
가수 박진영. 성공과 실패는 신의 영역이라고 했다. “하지만 성실함이 운에 영향을 줄 수 있어요. 일주일에 하루는 아무것도 안 하고 성경, 꾸란, 불경을 공부합니다. 올바르게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서요.”
이런 기사들이 나태한 나의 의식을 두드립니다. 큰 맘 먹고 금년 3월부터 5월까지 두 달 동안 도덕경을 읽었습니다. 나처럼 끈기가 부족한 사람으로서는 대단한 일입니다. 업무관련서적이나 소설류를 빼고는 온전하게 책 한권을 읽어낸 것이 생전처음입니다. 왜 사람들이 금강경을 자주 거론할까? 그것이 궁금해서 이번에 읽어 보려는 책이 금강경입니다.
우리부부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믿고 따르는 종교가 없습니다.
나는 절에 가면 부처님께 절하고, 명동성당 가까운 곳에서 근무할 때는 미사도 몇 차례 참석해봤고, 교회 부흥회도 한번 접해봤습니다. 아내는 유아영세를 받았고 결혼해서는 절에도 다녔지만 그렇다고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아내가 2000년도 전후로 개포동에 있는 금강선원이라는 곳으로 佛講을 들으러 다닌 적이 있는데 그때 구입했던 책이 책장에 꽂혀있기에 그 책을 읽어보려는 것이지요.
청담스님이 설법하신 ‘금강경대강좌’라는 785p의 두툼한 책입니다.
한글로 풀어놓은 대목을 훑어보니 내용은 어렵지 않은데 불교용어가 어렵습니다. 불교용어를 이해해야 이해가 빠를 것 같아서 용어를 정리했습니다. 따로 불교용어사전이 있지만, 내가 모은 이 글은 인터넷에서 검색한 내용으로 네이버백과사전의 풀이가 주를 이룹니다. 내가 불교신자가 아닌 고로 불교를 찬양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그저 고전으로서의 경전 하나쯤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금강경을 택한 것이고, 혹시 참고가 될까 해서 내가 검색한 자료를 올리게 된 것입니다.
불교 [佛敎, Buddhism]
1. 기원전 6세기경 인도의 석가모니가 창시한 후 동양 여러 나라에 전파된 종교. 이 세상의 고통과 煩惱(번뇌)를 벗어나 그로부터 解脫(해탈)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궁극적인 이상으로 삼는다. 교리에 따라 大乘(대승)인 北方불교와 小乘(소승)인 南方불교로 나누는데, 동양의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煩惱(번뇌) 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解脫(해탈) 번뇌의 얽매임에서 풀리고 미혹의 괴로움에서 벗어남. 본디 열반과 같이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다.
大乘(대승)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불교. 그 교리, 이상, 목적이 모두 크고 깊으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중생의 능력도 큰 그릇이라 하여 이렇게 이른다. 소승을 비판하면서 일어난 유파로 한국, 중국, 일본의 불교가 이에 속한다.
小乘(소승) 수행을 통한 개인의 해탈을 가르치는 교법. 석가모니가 죽은 지 약 100년 뒤부터 시작하여 수백 년간 지속된 교법으로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이 있다. 소극적이고 개인적인 열반만을 중시한 나머지, 자유스럽고 생명력이 넘치는 참된 인간성의 구현을 소홀히 하는 데에 반발하여 대승이 일어났다.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로 삼고 그가 설(說)한 교법(敎法)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교다.
불교라는 말은
1)부처(석가모니)가 설한 敎法이라는 뜻과(이런 의미에서 釋敎라고도 한다)
2)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佛(불타-佛陀)이란 각성(覺性)한 사람, 즉 각자(覺者)라는 산스크리트 ·팔리어(語) 붓다(Buddha)를 음역한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 교단(敎團)이 조직되어 포교가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발전하게 된 것은 그가 죽은 후이며, 기원 전후에 인도 ·스리랑카 등지로 전파되었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서역(西域)을 거쳐 중국으로,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고, 한국에서 일본으로 교권(敎圈)이 확대되어 세계적 종교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14세기 이후로는 이슬람교에 밀려 점차 교권을 잠식당하고 오늘날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아직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티베트에서 몽골에 걸친 지역,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에 많은 신자가 있으며,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불타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 ·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창조자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2)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3)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한다.
4)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5)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6)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7)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 解脫)을 이상의 경지(境地)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불(佛)도 본래는 석가 자체를 가리켰으나 그의 입적(入寂) 후 불신(佛身)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2신(身) ·3身 등의 논, 또는 과거불 ·미래불, 또는 타방세계(他方世界)의 불, 보살(菩薩) 등의 설이 나와 다신교적(多神敎的)으로 되었다.
연기(緣起) 모든 현상이 생기(生起) 소멸 하는 법칙. 이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원인인 인(因)과 조건인 연(緣)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하며, 인연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열반(涅槃)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다. [비슷한 말] 니르바나ㆍ
교의(敎義) 교육의 근본 취지. 어떤 종교의 신앙 내용이 진리로서 공인된, 종교상의 가치. 교법
정각(正覺) 正等覺(올바른 깨달음). 等覺(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
석가(釋迦) 고대 인도의 크샤트리아 계급에 속하는 종족의 하나. 석가모니도 이에 속한다.
카스트제도 따른 인도인의 신분은 브라만(Brahman:사제자,승려). 크샤트리아(Kshatriya:왕이나 귀족. 무사). 바이샤((Vaisya:농민·상인 등의 서민). 수드라(Sudra:노예·수공업자. 일반백성 및 천민) 등 4개로 구분되며 최하층인 수드라에도 속하는 않는 불가촉천민이 있다. 불가촉천민은 '이들과 닿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불교의 개조. 과거칠불의 일곱째 부처로,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이다. 기원전 624년에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바스투 城에서 슈도다나와 마야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29세 때에 출가하여 35세에 득도하였다. 그 후 녹야원에서 다섯 수행자를 교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성립하였다. 45년 동안 인도 각지를 다니며 포교하다가 80세에 입적하였다. 부처님, 부처, 석가모니, 석가세존, 석존, 세존, 석가, 능인적묵, 여래, 불타, 붓다, 불(佛)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석가모니(釋迦牟尼)·석가문(釋迦文)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能仁寂默)으로 번역된다. 보통 석존(釋尊)·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는 샤카(샤키야, Sākya)라는 민족의 명칭을 한자로 발음한 것이고 모니(muni)는 성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석가모니라 함은 본래는 '석가족(族) 또는 샤카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au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ārtha:悉達多)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佛陀)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사찰이나 신도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Tathāgata),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Bhagavat)·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山) 기슭의 카필라성(Kapilavastu:迦毘羅城)을 중심으로 샤키야족(釋迦族)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석가모니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Śuddhodāna:淨飯王)와 마야(Māyā:摩耶)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키야족은 그 왕호가 정반왕, 그리고 정반왕의 동생이 백반(白飯) · 감로반(甘露飯) 등으로 불리고 있는 점에서 미작(米作) 농경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는 크샤트리야 계급 출신이라고 하지만, 샤키야족 내부에 카스트의 구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가 순수한 아리아인(人)이라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네팔계(系) 민족에 속하는 종족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압도적인 아리아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가까워짐에 따라 당시의 습속대로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를 낳았다. 이는 아소카왕[阿育王]이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이 곳에 세운 석주(石柱)가 1896년에 발견·해독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히말라야산에서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이 찾아와 왕자의 상호(相好)를 보고, "집에 있어 왕위를 계승하면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하면 반드시 불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전륜왕(轉輪王) 인도 신화 속의 임금. 정법(正法)으로 온 세계를 통솔한다고 한다. 여래의 32상(相)을 갖추고 칠보(七寶)를 가지고 있으며 하늘로부터 금, 은, 동, 철의 네 윤보(輪寶)를 얻어 이를 굴리면서 사방을 위엄으로 굴복시킨다. [비슷한 말] 윤왕(輪王)ㆍ전륜(轉輪)ㆍ전륜대왕ㆍ전륜성왕ㆍ전륜성제.
그의 생몰연대에 관하여는 이설(異說)이 많으나, 그 중 유력한 것은 스리랑카의 《도사(島史) Dīpavasa》, 《대사(大史) Mahāvasa》에 근거하여 불교학자 W.가이거가 주장한 BC 563∼BC 483년 설이다. 이 설은 중국의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에 전하는 중성점기(衆聖點記), 즉 불멸(不滅) 후 최초의 율장(律藏)이 결집되었을 때 제1점을 치기 시작하여 매년 1점씩 쳐서, 제(齊)나라의 영명(永明) 7년(AD 490)까지 975점에 이르렀으므로 불멸이 BC 485년이라는 설(BC 565∼BC 485년)과도 대략 일치된다. 그외에 BC 624∼BC 544년설, BC 463∼BC 383년설 등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전자를 채용하고 있다.
석가모니는 생후 7일에 어머니 마야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것은 석가모니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그 후 이모에 의하여 양육되었는데,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기예를 배우며 성장하였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16세에 결혼하였다. 부인은 야쇼다라[耶輸陀羅]라고 하며, 곧 아들 라훌라[羅睺羅]도 얻었다.
이같이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던 중 석가모니는 인생의 밑바닥에 잠겨 있는 괴로움의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전설적으로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모습, 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사문(沙門)을 목격한 이른바 사문출유(四門出遊), 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써 설명된다.
사문(沙門) 부지런히 모든 좋은 일을 닦고 나쁜 일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문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 사람을 이르는 말.
석가모니는 29세 때 고(苦)의 본질 추구와 해탈(解脫)을 구하고자,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남쪽으로 내려가 갠지스강(江)을 건너 마가다국(國)의 왕사성(王舍城:Rājagha)으로 갔다.
여기에서 알라라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2명의 선인(仙人)을 차례로 찾아,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선정(禪定)을 배웠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통일에 의하여 하늘에 태어나 보려는 것이었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방법으로써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다고 깨닫자, 그들로부터 떠나 부다가야 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갔다.
선정(禪定) 한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하여 마음이 하나의 경지에 정지하여 흐트러짐이 없음. [비슷한 말] 선정바라밀.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출가자의 풍습이었던 고행(苦行)에 전념하였으나, 신체가 해골처럼 되었어도 해탈을 이룰 수는 없었다. 고행은 육체적인 면의 극소화를 통하여 정신의 독립을 구하는 이원적 극단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6년간의 고행 끝에 고행을 중단하고, 다시 보리수(菩提樹:Bodhi-tree) 아래에 자리 잡고 깊은 사색에 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을 정각(正覺:abhisambodhi)이라고 한다.
그 깨달음의 내용에 대하여 《아함경(阿含經)》에는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사제(四諦: 苦 · 集 · 滅 · 道의 4가지 진리, 즉 현상계의 괴로움과 그 원인 및 열반과 그에 이르는 길) · 십이인연(十二因緣) · 사선삼명(四禪三明) 등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선정에 의하여 법(法:dharma)을 깨달았다고 하겠다. 즉 선정은 강렬한 마음의 집중이며, 여기에서 생긴 지혜는 신비적 직관(直觀)이 아니라 자유로운 여실지견(如實知見:있는 그대로 옳게 봄)이다.
이 지혜가 진리를 깨달아 진리와 일체가 되어 확고부동하게 되었는데, 공포에도 고통에도, 나아가서는 애욕에도 산란을 일으키지 않는 부동(不動)의 깨달음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된 상태이기 때문에 해탈(解脫:moka)이라고 하며, 이 해탈한 마음에 의하여 깨우쳐진 진리를 열반(涅槃:nirvāa)이라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해탈은 참 자유, 열반은 참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성도 후 5주간을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의 기쁨에 잠겨 있었는데, 범천(梵天)의 간절한 권청(勸請)이 있어 설법을 결심하였다. 악마의 유혹, 설법주저(중생이 이해 못할 것을 염려), 범천권청 등은 마음속의 일을 희곡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보이나, 깊은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석가모니는 베나레스 교외의 녹야원(鹿野苑:M鹹gadāva)에서, 일찍이 고행을 같이 하였던 5명의 수행자에게 고락의 양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와 사제에 관하여 설하였다. 이것을 특히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법을 깨달아 제자가 되었다. 여기에 최초의 불교 교단(sagha:僧伽)이 성립되었다.
법륜 [法輪, Dharma cakra] 석가모니의 가르침[敎法]. 범륜(梵輪)이라고도 한다. 석가가 설법하는 것을 법륜을 돌린다[轉法輪]고 한다. 법을 전륜왕(轉輪王)의 수레바퀴 모양의 고대 인도의 무기인 윤보(輪寶)에 비유한 것으로, 세속의 왕자로서의 전륜왕이 윤보를 돌려 천하를 통일하는 것과 같이, 정신계의 왕자로서의 석가는 법륜을 돌려 삼계(三界)를 구제한다. 또한 윤을 법의 뛰어난 점에 비유한 세 가지 의미로 설명한다. 그 한 가지는 원만(圓滿)의 뜻으로, 석가의 교법은 원만하여 결함이 없는 것을 윤의 원만한 모양에 비유하며, 둘째는 타파(打破)의 뜻으로, 석가의 교법은 중생의 망견(妄見)을 타파하는 것을 윤을 돌려 어떤 물건을 부숴뜨리는 것에 비유한 말이며, 셋째는 전전(展轉)의 뜻으로, 석가의 교법이 전전(轉轉)하여 어느 곳에나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이러한 법륜은 만자(卍字)와 함께 불법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불상이 조상(彫像)되기 전 조각이나 회화에서 보리수(菩提樹) ·불탑 등과 같이 부처의 형상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승가(僧伽)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불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집단. 세 사람 이상의 화합된 무리라는 뜻으로, 중(衆)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그의 설법을 통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석가모니는 적극적으로 설법을 계속하여, 그 교화의 여행은 갠지스강(江) 중류의 넓은 지역에까지 미쳤다. 제자의 수도 점차 증가하였으며, 각지에 교단이 조직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아함경》 《율장》 등의 원시불교 경전을 통해 전하여지고 있다. 구전(口傳)되어 오던 것을 후세에 편집한 것이지만, 후세에 정형화된 다음의 교설을 통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원형 또는 그 핵심을 알 수 있다.
삼법인(三法印: 一切皆苦 · 諸行無常 · 諸法無我 또는 一切皆苦를 빼고 涅槃寂靜을 넣기도 한다) ·
사제(四諦: 苦 · 集 · 滅 · 道의 4가지 진리) ·
팔정도(八正道: 正見 · 正思 · 正語 · 正業 · 正命 · 正精進 · 正念 · 正定) ·
무기(無記: 일체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답하지 않음. 실천을 지향함을 말한다) ·
법(法: 모든 존재를 일관하는 보편적 진리) ·
오온(五蘊: 色 · 受 · 想 · 行 · 識의 5가지 존재의 구성 요소) ·
육근(六根: 법의 분류로서 眼 · 耳 · 鼻 · 舌 · 身 · 意의 주체. 이에 대응하는 色 · 聲 · 香 · 味 · 觸 · 法의 객체, 즉 六境을 더한 十二處와, 거기에 眼識 등의 六식을 추가하여 十八界를 말하기도 한다) ·
연기(緣起: 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하여 성립함을 말함. 12연기가 특히 유명하다) ·
열반 ·
일체중생의 평등 등이 그것이다.
六根과 108번뇌 불교에서 중생의 온갖 번민과 고뇌는 백팔번뇌로 통칭된다. 눈, 코, 귀, 혀, 몸, 마음 등 육근(六根)을 통해 일어나는 번뇌가 좋고(好), 나쁘고(惡),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平等) 3가지 작용을 거치면 18가지 번뇌가 된다. 다시 이것이 탐(貪)과 불탐(不貪) 2가지로 나뉘기에 36가지가 되고 이를 전생, 금생, 내생 3가지 세상에서 겪게 되므로 모두 합쳐 108가지라는 것이다.
혹서의 중부인도(印度) 각지를 4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설법·교화를 계속한 석가모니는, 80세의 고령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의 중병에도 불구하고 교화(敎化) 여행을 계속하였다. 이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여러 가지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하여 수행하라" 또한 자기가 죽은 뒤에 "교주(敎主)의 말은 끝났다. 우리의 교주는 없다고 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내가 설한 교법(敎法)과 계율이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등이 그것이다.
마침내 쿠시나가라(Kuśinagara)의 숲에 이르렀을 때, 석가모니는 심한 식중독을 일으켜 쇠진하였다. "나는 피로하구나. 이 두 사라수(沙羅樹)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게 자리를 깔도록 하라"고 말하자,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운명이 가까웠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석가모니는 "슬퍼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말하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은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아니 되느니라. 제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말하리라. 제행(諸行)은 필히 멸하여 없어지는 무상법(無常法)이니라. 그대들은 중단 없이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니라"고 설한 후 눈을 감았다.
석가모니의 사후 그의 유해는 다비(茶毘:화장)되고, 그 유골[舍利:śarīra]은 중부 인도의 8부족에게 분배되어 사리탑에 분장(分藏)되었다. 이 사리탑은 중요한 예배대상으로 되어 후에 불탑신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대승(大乘)불교에서는 불타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가해져 불타에는 법신(法身:진리로서의 불타) · 보신(報身: 보살의 願 · 行에 의하여 성취된 불타) · 응신(應身: 중생구제를 위하여 상대방에 상응하게 나타나는 불타)의 3신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은 2,500여 년 전의 인도라고 하는 특정의 지역·시대에 나타난 응신의 불타로서,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입장에서 석가모니불은 위의 3신을 모두 갖추고 있는 분으로 숭배되고 있다. 그의 탄생지 룸비니 동산, 성도지 부다가야, 최초의 설법지 녹야원, 입멸지 쿠시나가라는 4대 영지(靈地)로서 중요한 순례지가 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 · 성도 · 입멸의 월 · 일에 관하여 최고(最古)의 문헌에는 기록이 없으나, 중국·한국 등지에서는 탄생을 4월 8일, 성도를 12월 8일, 입멸을 2월 15일로 한다. 또한 남방불교에서는 탄생 · 성도 · 입멸이 모두 바이샤카월(Vaiśākha月:4∼5월)의 보름날의 일이라고 하여, 이 날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한다.
중국·한국 등지에서는 석가모니의 전기를 8시기로 구분하여 팔상(八相: 兜率來儀相 · 毘藍降生相 · 四門遊觀相 · 踰城出家相 · 雪山修道相 · 樹下降魔相 · 鹿苑轉法相 · 雙林涅槃相)이라고 부르는데, 회화나 조각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2. 인도와 네팔 남쪽 국경 근처 카필라바스투 석가(釋迦)ㆍ석가문(釋迦文)이라고도 하는 불교의 교조. 일반적으로는 석가세존(釋迦世尊), 줄여서 석존ㆍ세존이라고 한다. 석가는 Śākya의 음역으로 종족(種族)의 이름이며, 모니는 muni의 음역으로 성인(聖人)이라는 뜻이다. 즉 샤카족(族) 출신의 성인이다. 석존은 인도와 지금의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의 성주(城主)인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의 태고자로 태어났다. 성(姓)은 고타마(Gotama)였고 석존의 출가 전, 즉 태자시절의 이름은 싯다르타(Siddhārtha)였다. 어머니인 마야(摩耶 ; Māyā) 부인은 싯다르타를 낳고 7일 만에 타계했고, 이모인 마하파라야파티가 양육했다. 원래 총명해서 과학ㆍ천문학ㆍ의학 등 왕자로서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학문과 브라만교(敎)의 성전인 4베다에 통달했고 무예도 뛰어났다. 그러나 매우 사색적이어서 부왕인 슈도다나는 늘 걱정을 했다.
옛 경(經)에 따르면, 싯다르타가 갓 태어났을 때,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이 관상을 보고, <장성하여 훌륭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나, 혹 출가(出家)한다면 중생(衆生)을 구원할 부다(佛陀 ; Buddha)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 잊혀지지 않아 행여 출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많은 배려를 했다. 싯다르타가 19세가 되자 서둘러서 이웃나라 코리성(城)성주의 딸인 야쇼다라(耶輸陀羅 ; Yaśodharā)와 결혼을 시켜, 출가하기 전에 라훌라(羅喉羅 ; Rāhu-la)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생ㆍ노ㆍ병ㆍ사(生老病死)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고뇌에 관해 매우 심각하게 사색했다. 역시 경에 따르면 싯다르타가 성(城)의 4대문을 나서서 노쇠한 노인, 죽음을 슬퍼하는 가족, 병든 환자, 농사를 짓는 천민들을 통해 인생의 무상과 고뇌를 목격하고 더욱 깊이 사색하던 중 출가 수행자의 편안한 용모를 보고 마침내 출가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를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고 한다.
당시 인도는 1000여 년이나 계속된 브라만교(敎)가 형식화하고 타락하여 부패하였고, 정치ㆍ경제적으로는 신흥국가가 발흥하고 상업이 성행하여 기존 사회체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브라만의 전통적 사상을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가들이 나와 사상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이런 때에 싯다르타는 애마 칸다카와 마부 찬다카를 따라 성을 빠져나가 출가했다. 싯다르타가 29세 때였다. 머리를 깎고 사문(沙門)이 된 싯다르타는 걸식을 하면서 스승을 찾아다녔다. 바르가바(Bhārgava)ㆍ아라다 칼라마(Arāda-kalama)ㆍ우드라카라마푸트라(Udraka-Ramaputra) 등에게 차례로 사사하면서 6년 동안 고행을 했다. 그가 고행하는 동안 부왕 슈도다나왕은 같은 샤카족의 현자(賢者) 5명을 싯다르타에게 보내서 같이 수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고행만으로는 해탈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네란자라강(尼連禪河)에서 목욕을 하고, 한 소녀가 바치는 우유죽을 마시고 기력을 차렸다. 그 후, 부다가야(Buddha-gāyā)의 우루빌라그라마(Uruvilā-gramā) 마을 근처의 보리수(菩提樹) 밑에 길상초(吉祥草)를 깔고 앉아 명상을 한 지 7일 만에 대오각성(大悟覺醒)하고 성도(成道)했다. 즉 부다가 된 것이다.
석존은 고행림(苦行林)에서 사사했던 여러 수행자들을 교화하려고 했으나 이미 죽고 없음을 알고, 함께 고행하던 콘단다(Annā-ta-Kondana) 등 다섯 수행자를 찾아 미가다야(Migadāya)로 갔다. 그들에게 사제(四諦)ㆍ팔정도(八正道)를 처음으로 설하고(初轉法輪), 불교 교단 최초의 비구를 삼았다. 즉 교단이 성립된 것이다. 여기서 야사(耶舍)라는 그곳 장자의 아들을 또 제자로 삼고, 야사의 부모와 야사의 처를 최초의 재가 신도로 삼았다. 이후 왕ㆍ외도(이교도)ㆍ장자 등 수많은 제자ㆍ재가 신도들이 급속하게 불어나서 큰 교단이 생기고, 장자들이 바친 숲과 정사(精舍)에서 불법을 널리 포교하게 되었다. 라자그리하(王舍城 ; Raja-grha)의 빔비사라(Bimbisāra)왕, 사화외도(事火外道 ; 배화교 신자)였던 카샤파(迦葉 ; Kasyapa) 3형제와 그들의 제자 1천 명, 사리푸타(舍利弗 ; Sārjputta)ㆍ모갈라나(Moggallana)ㆍ마아카사파(摩詞迦葉 ; MahāKās-sapa) 등이 귀의를 했으며, 빔비사라왕이 죽림정사(竹林精舍)를 바쳤고, 시라바스티(舍衛城 ; śrā-vasti)의 수다타(須達多 ; Sudatta)가 제타바나비아라(祗園精舍 ; Jetvana -vihāra)라는 큰 절을 바치기도 했다.
이렇듯 29세에 출가, 6년 수행 끝에 성불한 것이 35세이며 그 후 장장 45년 여에 걸쳐 포교활동을 계속하고 80세에 열반에 들었다. 스승의 입멸(入滅)을 서러워하는 제자들을 뒤로 하고, 쿠시나가라(拘尸那羯羅 ; Kuśinagara)의 사라나무 숲에서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서쪽을 향해 모로 누워 입적(入寂)했다. 그곳 대중들과 제자들이 왕 중 왕의 예로 금관에 모셔 다비(茶毘)를 했다. 경이 전하는 비에 따르면 사리(舍利)가 8말 8되나 되었다고 하며, 이 사리를 8분(分)해서 8곳에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열반에 들 즈음 석가는 제자들에게 <자기 스스로를 스승(燈明)으로 삼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마라. 법(法)을 스승으로 삼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마라(自燈明ㆍ法燈明).>라는 유명한 가르침을 남겼다.
옛 경에는 석가의 생애를 8기로 나누는데 이를 팔상(八相)이라고 한다.
즉 도솔천에서 흰코끼리를 타고 이 세상에 오는 상ㆍ
룸비니에서 태어나는 상ㆍ
성(城)의 4대문을 나서서 생로병사를 보는 상(四門遊觀相)ㆍ
애마 칸다카를 타고 성을 나와 출가하는 상(踰成出家相)ㆍ
6년 고행하는 상(踰山修道相)상ㆍ
최초로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는 보리수 밑에서 마군(魔軍)의 항복을 받고 성도하는 상ㆍ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상(雙林涅槃相) 등이다.
지금도 불타가 태어난 룸비니 동산, 성도한 부다가야, 최초로 설법을 했던 미가다야, 입멸한 쿠시나가라를 4대 성지라 하여 관광지로 유명하며, 인도를 순례하는 불자들의 최대 성지가 되어 있다. 불타의 생년과 입멸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으나 불타의 입멸은 기원전 544년이다. 따라서 태어난 해는 기원전 623년이 된다.
조형적 표현을 취한 석가불상은 역사상 실재한 위대한 불교의 교조로서의 석가와 시공을 초월한 각자(覺者), 즉 여래로서의 석가의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 불교성립 초기에는 석가를 표현하는 행위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기원전 2세기경 바르프트나 산티의 부조에서 <불타 없는 불전도(佛傳圖)>로서 역사상의 석가를 그 생애의 설화 중에 표현하는 것이 행하여졌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의 모습을 취하지 않고, 윤보(輪寶), 보리수, 금강좌, 사리탑 등을 이용해서 설법, 성도(成道), 열반을 암시ㆍ상징했다. 불상으로서 나타나게 된 계기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는데, 기원후 1세기경 간다라에서라고 생각된다. 결국 불전 중의 석가를 떠나서 초월적인 여래로서의 단독의 예배상인 석가불상도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도 2세기경의 남인도의 아마라바티나 중인도의 마투라, 사르나트에는 우수한 석가불상이 발견되었다. 불교의 동진에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중앙아시아의 각지에 두 형태의 석가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또한 동남아시아 각지에도 전파되었다. 중국에서의 석가상은 후한의 명제 때에 처음으로 전래되었다고 한다. 유적으로서는 5세기로 기록되어 있는 금동불이 가장 오래되었으며, 그 외에 금동불, 석불에 많은 작품 예가 있다. 결국 북위시대에는 운강석굴에 이어서 용문석굴, 나아가서는 서쪽 끝 돈황막고굴 등 중국 각지에 많은 석굴이 만들어지고, 많은 석가상이 만들어지고, 또한 벽화로 묘사되었다. 중국에서의 석가상에도 여래에 통형의 표현을 취하는 석가불상, 나아가서는 문수ㆍ보현 등의 현시보살을 동반하는 것, 항마ㆍ열반, 또는 산중고행 석가 등의 불전설화와 불가분의 석가상, 나아가서는 『법화경』 견보탑품에 주장되며, <이불병좌도> 중의 석가, 나아가서는 많은 보살에 둘러싸인 석가의 정토를 표현한 <석가정토도> 등이 있다.
불타 [佛陀, Buddha]
‘깨달은 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의 음역.
약칭은 불(佛). 불타(佛馱) ·부타(浮陀) ·부도(浮屠) ·부두(浮頭)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부처라고 하였다. 의역(意譯)하면 깨달은 사람(覺者), 환히 아는 사람(知者)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처, 즉 불타는 BC 6세기쯤에 인도 카필라국에서 출생하여 태자(太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일체의 번뇌를 끊고 우주의 참진리를 알아서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을 위해 설법하고 깨우쳐 주었던 석가세존을 존경하여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불타는 깨달은 사람, 아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불타 즉 부처는 석존에게만 국한된 절대적인 명칭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불타는 일체법(一切法), 즉 우주 만법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서 더할 수 없는 진리를 체득한 대성자(大聖者)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러한 대성자가 석존이기 때문에 그를 불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석존처럼 우주 인생의 진리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진실되게 이해하여 실천 파악하고 자기화시켜,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인격을 완성한 이를 가리킨다.
《대반야경(大般若經)》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여러 경전에서 “일체지(一切智)를 얻었으므로 부처라 한다. 일체제법(一切諸法)을 알므로 부처라 한다”라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에 “제법(諸法)의 실의(實義)를 알았으므로 부처라 하고, 제법의 실상(實相)을 얻었으므로 부처라 하며, 다시 실의에 통달하고 참된 그대로 일체법을 알았으므로 부처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은 모두 앞에서 본 불타의 뜻과 같은 말들이다. 또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의 앞부분에 보면 “부처[佛]란 제악(諸惡)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제선(諸善)을 모두 체득하여, 또 모든 허물이 없이, 제욕(諸欲)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번뇌와 어리석음과 어둠을 부수고 정각(正覺)을 체득하여 이루면 불타가 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불교경전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처의 이름[名號]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遍智)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佛) ·세존(世尊)의 여래십호(如來十號)를 비롯하여, 대자비자(大慈悲者) ·일체지자(一切智者) ·일체견자(一切見者) ·개도자(開道者) ·대사문(大沙門) ·대성인(大聖人) ·양족존(兩足尊) ·천중천(天中天) ·인중인사자(人中人獅子) 등으로 많으며, 경전에 따라서는 60가지, 108가지, 또는 270가지나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부처의 위대함을 찬양하여 표현한 이름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타관(佛陀觀)은 시대와 종파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초기의 석존시대에는 불타라 하면 석존을 가리켰고, 그 제자들에게서 불타는 오직 석존뿐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대승불교 시대로 이르는 동안 불타관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 왔다.
불타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덕상(德相), 즉 신체적 특성으로서 32상(相) 80종호(種好)를 갖추고 정신적인 특수성으로서의 덕성인 십력(十力) ·사무외(四無畏) ·삼념주(三念住) ·18불공법(十八不共法:불타 외에는 아무도 같을 수 없는 불타만의 특수한 18가지 덕성)을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타는 생신(生身)과 법신(法身)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부처의 육신(肉身)을 생신불(生身佛)이라 하고, 부처가 얻은 부처의 본성인 진리[法]를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하여, 2,500여 년 전에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역사적 불타인 석존은 생신(육신)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타라고 할 때에는 보통 법신불을 말하는데, 이 법신불은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불신관(佛身觀)에 의하여 삼신설(三身說), 즉 법신(法身) ·보신(報身:應身) ·화신(化身)이 나타났다. 실제에서 불타로서 인류 역사상에 나타나기는 오직 석존뿐이지만, 많은 불교경전에는 석존의 이전에 이미 비바시불(毘婆尸佛) ·연등불(燃燈佛) 등 과거의 부처와 미륵불(彌勒佛) 등 미래의 부처와 그리고 아촉불(阿閦佛) ·아미타불(阿彌陀佛)등 현재의 부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와 같이 많은 부처들은 모두 역사상의 불타인 석존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서, 즉 과거의 여러 부처들은 석존이 인위(因位:부처를 이루기 위해 수행하는 자리)에서 수행을 쌓을 때 받들어 공양하고 수기(授記)를 얻은 데에 관련이 되고, 또 장래의 부처인 미륵불을 비롯한 미래의 많은 부처들은 석존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그 실제의 몸은 오히려 온세계에 나타나서 교화를 쉬지 않는 모습을 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을 지녔으므로 과거부터 부처의 성품을 개발하여 성불(成佛)한 이가 많았을 것이고, 또 미래의 헤아릴 수 없는 동안에 발심수행(發心修行)하여 마땅히 성불할 자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현재 ·미래와 온세계에 모래알같이 헤아릴 수 없는 부처들이 출현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부처가 출현하지만 이는 모두 큰 법신불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부처는 세 가지의 공통된 것이 있으니, 어느 부처를 막론하고 모두 수행을 쌓는 것이 같고, 법신이 같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같다. 부처(불타)는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여, 깨달음의 활동이 언제나 가득하여 부족함이 없이 원만무애(圓滿無碍)하다. 즉, 자기도 깨닫고 남도 깨우치는 온전한 인간상이다.
여래[如來 ]
부처의 열 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
범어(梵語)로는 타타아가타(tatha-gata)라고 한다. 이 말은 두 단어(tatha-+gata 또는 tatha+agata)의 합성어로, 그 단어에 따라 해석에도 약간의 차이가 따른다. 타타아(tatha-)는 여시(如是) 또는 여실(如實)이라는 뜻이고, 타타(tatha)는 진실의 뜻이 있다. 가타(gata)는 ‘가다[逝]’는 뜻이 있고, 아가타(agata)는 ‘도달한다’, ‘오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타타아가타는 지금까지의 부처들과 같은 길을 걸어서 열반의 피안에 간 사람, 또는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여래는 ‘여실히 오는 자’, ‘진여(眞如)에서 오는 자’라는 뜻이며, 진여세계에서 와서 진여를 깨치고 여실한 교화활동 등의 생활을 한 뒤에 사라져 가는 이로서, 부처와 같은 뜻을 가진 낱말이다.
원시불교시대에는 석가모니가 ‘여래’를 복수형으로 많이 사용하였고, 윤회에서 해탈한 진인(眞人)에 대하여 제3인칭 제3자적으로 사용하였을 뿐, 제1인칭으로서 자신을 호칭할 때 여래라고 한 경우는 없었다. 불(佛)이라는 말도 당시 사람에게는 희귀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여래라는 말은 더욱 이상인(理想人)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석가모니는 자기가 여래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삼가했다.
후세에는 여래와 불이 구별 없이 사용되어 아미타불을 아미타여래, 약사불(藥師佛)을 약사여래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부처에게 있는 공덕상(功德相)을 일컫는 명호를 여래십호(如來十號)라고 하여 대부분의 의식문(儀式文) 속에 이 십호를 넣어 외우도록 하였다. 이 십호는 여래의 열 가지 별칭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외우는 자체가 공덕이 있다고 본 것이다. 십호의 명칭과 뜻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응공(應供):여래는 진리와 상응한 이로서 능히 사람과 천인의 존경을 받고 공양을 받을 수 있는 이라는 뜻이다.
② 정변지(正遍知):여래는 바르고 완전하게 진리를 깨달은 이라는 뜻이다.
③ 명행족(明行足):여래는 천안통(天眼通)·숙명통(宿命通)·누진통(漏盡通) 등의 신통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온전하게 갖추어진 이라는 뜻이다.
④ 선서(善逝):여래는 잘 가는 이라는 뜻으로, 미혹의 세계를 뛰어넘어서 다시는 미혹으로 돌아오지 않음을 나타낸다.
⑤ 세간해(世間解):여래는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의 일을 남김없이 다 아는 이라는 뜻이다.
⑥ 무상사(無上士):여래는 세간에 있어 가장 높은 이라는 뜻이다.
⑦ 조어장부(調御丈夫):중생을 잘 조복(調伏)하고 제어하며 열반으로 인도하는 이라는 뜻이다.
⑧ 천인사(天人師):여래는 능히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 되는 이라는 뜻이다.
⑨ 불(佛):여래는 깨달은 이, 진리의 눈을 뜬 이라는 뜻이다.
⑩ 세존 (世尊):여래는 많은 덕을 갖추어서 세간에서 능히 존경을 받는 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명호 가운데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여래와 불과 세존이며, 응공은 아라한(阿羅漢)을 지칭할 때 많이 사용하고 있다.
열반 [涅槃]
불교에서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의 ‘니르바나’의 음역인데, 니원(泥洹) ·열반나(涅槃那) 등으로 음역하기도 하며 멸도(滅度) ·적멸(寂滅) ·원적(圓寂), 또는 무위(無爲) ·부작(不作) ·무생(無生) 등으로도 의역한다. nir(out)+(to blow)의 어원으로 해석되는 열반의 본뜻은 ‘불어서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하며, 마치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 ·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때 비로소 적정(寂靜)한 최상의 안락(安樂)이 실현된다. 현대적인 의미로는 영원한 평안, 완전한 평화라고 할 수 있다.
남방의 팔리 불교에서는 조림(稠林)이 없는 것으로, 이 경우에도 번뇌의 숲이 없어진 상태를 열반이라고 한다. 부파불교(部派佛敎)에 이르러서는 석가불의 이상화 ·신격화에 따라 열반에 대한 생각도 변하여, 수행자가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는 완전한 열반을 체득하기란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 얻어진 열반은 불완전한 것(有餘涅槃)이며, 사후에 비로소 완전한 상태에 들어간다(無餘涅槃)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석가불과는 달리 열반의 경지가 아니라 아라한(阿羅漢: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승불교에서는 유여 ·무여열반 외에 본래자성 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주장하였다. 전자는 일체중생의 심성(心性)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으로, 진여(眞如:있는 그대로의 진리) 그 자체임을 달관하여 안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하며, 후자는 대승불교에서 이상으로 여기는 열반으로서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것, 즉 열반 비지원만(悲智圓滿:자비와 지혜가 원만함) ·임운무작(任運無作:아무런 조작 없이 있는 그대로 운용됨)의 불 ·보살의 상태를 말한다. 결국 열반이 어떤 특별한 경지로서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범부(凡夫)의 미혹이며, 열반은 유(有)도 무(無)도 아닌 공(空)으로서 윤회나 열반이나 어떤 구분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의 보살의 활동이 강조되었다.
삼장(三藏)
불경에는 경(經)·율(律)·논(論)의 3가지가 있는데 석가의 가르침을 경(經)이라 하고, 석가가 가르친 윤리·도덕적인 실천규범을 율이라 하며, 석가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철학 체계를 논(論)이라고 한다. 장이란 이것을 간직하여 담고 있는 광주리를 뜻한다.
이 3가지를 모은 것을 각각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이라 하며, 이를 총칭한 것이 삼장이다. 또 경장을 가르치는 스승을 강사(講師), 율장을 가르치는 스승을 율사(律師), 논장을 짓거나 가르치는 스승을 논사(論師)라고 한다. 처음에는 석가의 제자들이 이들 경전을 패엽(貝葉:pattra)이라는 나뭇잎에 새겼는데, 경장·율장·논장을 3개의 광주리에 따로 담아 보관하였으므로 3개의 광주리를 뜻하는 삼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중 경장은 부처의 법(法)을 기술한 문장 전부를 포함하는 것으로, 《화엄경》《반야경》《법화경》처럼 ‘경’자가 붙은 모든 경전이 이에 포함된다. 율장은 불제자가 지켜야 할 생활규칙과 교단의 계율을 설명한 전적으로, 5계·48경계·250계 등의 계법(戒法) 또는 계율이 이에 속한다. 논장은 경장과 율장을 해석하고 그 정신을 밝힌 것으로, 《구사론(俱舍論)》《대지도론(大智度論)》처럼 ‘론’자가 붙어 있다.
현존하는 한역 경장은 1,500여 부에 이르며, 율장은 약 300부, 논장은 약 250부 남아 있다. 경·율은 원시불교 시대에, 논장은 부파불교(部派佛敎) 시대에 성립되었다. 경장과 율장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석가가 열반한 뒤 마하가섭(摩訶迦葉) 등 500 비구가 모여 편찬한 제1차 불전 결집 때이다. 당시의 경전은 단문인 수트라나 시구(詩句)로 이루어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결집을 거쳐 경장과 율장으로 정리되었다.
논장이 성립된 것은 BC 250년에서 기원 전후에 이르는 부파불교 시대로, 석가의 가르침과 계율의 해석을 둘러싸고 교단이 여러 파로 나뉘면서, 각 파가 이를 정리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 때까지 경·율에 대한 해석은 경장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금강경(金剛經)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의 약칭이다. 지혜의 정체(正諦)를 금강의 견실함에 비유하여 해설한 불경으로 우리나라 조계종의 기본 경전).
『금강경』은 서기 150-200년 사이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최초로 번역된 연대는 402년 요진(姚秦)의 삼장법사(三藏法師)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에 의해서다.
『금강경』은 대승경전(大乘經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읽히는 불타의 가르침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임제류의 선(禪)을 적통(適統)으로 하는 선종(禪宗) 중심의 역사이며 선종에서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삼는 것이 『금강경』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금강경』이야말로 선종의 기초 경전인양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선종과 『금강경』은 역사적으로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금강경』이 선종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금강경』에서 선종이 나온 것도 아니다. 선이란 중국의 당대에 와서 이전의 일체의 교학불교를 부정하는데서 생겨난 불립문자(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등의. 문자를 부정하는 반불교적(反佛敎的)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경』역시 선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되어야 할 교학불교(敎學佛敎)의 대표경전 중의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금강경』이 항상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금강경』이 선종의 대표경전인양 착각되어온 데는 아래의 두 가지 이유 즉 역사적 이유와 논리적 이유가 있다.
역사적 이유라 함은 중국선의 실제 개조(開祖)라 할 수 있는 육조 혜능(六祖 慧能‘ 638-713)이 불교에 입문하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반드시 머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이라는 구절 때문이었고 또한 오조 홍인(五祖弘忍)이 『금강경』을 강설하였으며 더 나아가 혜능의 수제자인 하택 신회(荷澤 神會)는 아예 5조 6조부터가 아니라 초조 달마(初祖 達磨)로부터 이 『금강경』을 가장 중요한 경전으로서 전승하여 왔다고 못 박았다. 따라서 하택신회 이래 신수계(神秀系)의 북종(北宗)이 『능가경』을 중시한데 비하여 혜능계의 남종(南宗)에서는 『금강경』이 그 소의경전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논리적 이유라 함은 『금강경』의 성립(AD 150-200)과 선종의 성립(8세기 초)사이에는 5. 6세기의 시간거리와 인도와 중국이라는 문화적. 지리적 거리를 가지고 있다. 흔히 『금강경』을 그 자체의 단일경전(單一經典)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금강경』은 『반야경』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반야경』역시 단 권의 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반야사상을 표방하는 일군(一群)의 책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경』은 4처 16회 600권으로 구성된 『대반야바라밀다경』의 제 9회 577권의 (능단금강분)을 번역한 것이다. 여기에서 반야사상이란 당시의 부패한 부파불교의 흐름에 반기를 든 혁신운동 즉 보살사상을 앞세운 대승불교운동의 사상이며 『금강경』은 그러한 반야운동의 초기에 성립한 반야바라밀사상을 완성시킨 결정체인 것이다. 이『금강경』의 반야사상속에 선종이 추구하는 모든 사상적 가능성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금강경』이 부정되어야 할 문자로 이루어진 초기경전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선종의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등의 내용을 가장 잘 포함하고 있으며 그 자체가 하나의 선(禪)이요, 가장 ‘선(禪)적인’ 경전으로 선사(禪師)들에게 비추어졌던 이유이다. <현진스님>
카스트 [caste]
인도 사회 특유의 신분제도.
사성(四姓)·계급·등급·족보 등으로 번역되지만 어느것도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다. 카스트라는 말은 포르투갈어 카스타(casta:혈액의 순수성 보존을 위한 사회적 說法이라는 뜻)가 인도-유럽계(系) 언어로 전화한 것으로, 인도의 바르나(varna) 즉 ‘색(色)’, 나아가서는 피부의 색을 나타내는 말에 해당한다.
카스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는데, 복잡한 인도의 사회와 역사, 그리고 카스트의 기원(起源) 등에 관한 제설(諸說)과도 관련되어,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카스트의 성립은 아리아인(人)의 일부가 인도에 침입한 것을 기원으로 하며 대략 BC 1300년 전후 무렵이다. 이 침입을 당하여 선주민(先住民)인 문다인(人)·드라비다인은 아리아인의 지배를 받게 되어 다사라고 하는 노예의 위치에 놓이고 말았다.
다사는 이란어의 다하에 해당하는데, 고대 이란에는 제승(祭僧)·무사(武士)·농민·공장(工匠)의 네 다하가 있었다. 아리아인이 침입했을 때만 해도 인도에는 아리아인의 일반 자유민과 선주민의 두 사회구분(신분 또는 계층), 즉 두 바르나가 생겼을 뿐이다. 그런데 이란의 네 다하가 이 인도의 신분제도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마침내 아리아인은 바라문교 문화를 완성하고, 그후 많은 변천을 거쳐 사제자(司祭者)와 무사가 분화했으며, 선주민은 오직 육체노동이나 잡역에만 종사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라문 또는 브라만(Brahman:사제자), 크샤트리아(Kshatriya:귀족·무사), 바이샤(Vaisya:농민·상인 등의 서민), 피정복민(被征服民)으로 이루어진 수드라(Sudra:노예·수공업자)의 네 바르나, 즉 카스트로 나타났다.
수드라를 제외한 세 카스트는 종교적으로 재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드비자(再生族)라고도 한다. 네 카스트는 존귀한 자와 비천한 자라는 고저(高低)의 서열을 나타내고 있어, 보다 높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은 보다 낮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의 곁에만 가도 더럽혀진다고 할 정도로 본다. 낮은 카스트에 속한 사람은 부정시(不淨視)되었고, 따라서 각 카스트는 직업을 세습하였으며, 카스트 상호간의 통혼(通婚)은 금지되었다.
또한 이 네 카스트 밑의 불가촉민(不可觸民:언터처블·하리잔)을 아웃 카스트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카스트제(制)라고 할 때는 불가촉민도 포함된다. 이같은 신분제도는 처음에는 엄격하지 않았으나 오랜 세월과 더불어 많은 금기(禁忌)를 지닌 사회규범으로 굳어졌고, 인도인들은 누구나 이 카스트 중의 어느 하나에 자동적으로 귀속되었다.
1947년 독립 후 인도 정부는 차별적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하층 카스트를 지원하기 위하여 헌법에 공공 부문에서 하층 카스트 고용할당제를 명문화하였다. 또 근대화와 교육 그리고 경제성장 등의 요인으로 수천 년간 이어져온 카스트제도는 점차 붕괴되고 천민·노예 계층이던 수드라가 오늘에 이르러서는 평민에 해당하는 등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가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인도인의 생활 저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카스트에 따른 인도인의 신분은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왕이나 귀족). 바이샤(상인). 수드라(일반백성 및 천민) 등 4개로 구분되며 최하층인 수드라에도 속하는 않는 불가촉천민이 있다. 불가촉천민은 '이들과 닿기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각 계급에서도 구체적인 직업에 따라 계급이 세분되어 바이샤와 수드라의 경우 2천여 개 이상으로 세분된다.
1947년 카스트제도는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나 인도사회에서는 여전히 카스트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신분이 다른 계급 간에는 혼인을 금지하며 이름에서부터 신분간의 차이가 있다. 카스트는 힌두교의 업과 윤회사상을 근거로 정당화되며 사람들에게 이를 숙명으로 여기게 한다.
카스트제도는 기원전 1300년께 고대 인도에서 인도-유럽 계통인 아리안족이 인도를 침입하여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을 정복하고 지배층으로 등장하면서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성립했다.
북인도에 침입해 온 아리아인은 현재의 유럽인과 같은 백인종 계통이었다. 그들은 원주민(유색인종)을 평정한 다음 지배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바루나'나 불리는 신분제도를 만들었다.
아리아족
인도 유럽어족을 두고 아리아인이라고 하며 이들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첫 무대는 오늘날 남러시아 일대 초원입니다. 이들은 유목민이고 코카서스 계통으로써 백인이었으며 푸른 눈과 갈색 혹은 금발 머리를 지녀 사실상 백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이 아리아인들이 세계 각지로 퍼지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유럽과 오늘날 팔레스타인, 이란, 그리고 인도 입니다.
유럽의 아리아족
이들이 바로 게르만 및 켈트족 입니다. 이 두 종족은 같은 북유럽인으로써 기원은 같지만 곧 분류되게 됩니다. 켈트족은 곧 중유럽으로 떠나 수렵에서 갈수록 농업에 종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게르만족은 오랫동안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다 뒤늦게나마 동쪽으로 우크라이나 서쪽으로 라인강 일대까지 뻗게 되고 켈트족이 점차 농업 민족으로 전환할 때 오히려 수렵 민족으로 남게 됩니다. 오늘날 아리아족 중 고유 순수한 모습을 제일 잘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유럽의 아리아족 즉 게르만족 입니다. 켈트족은 로마에 상당히 동화되어 특색을 많이 잃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아리아족
대표적인 종족이 블레셋 족속 입니다. 이들은 강력한 철제 무기와 주변의 고도의 문화를 영향으로 강성해 집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집트에서 온 이스라엘 족속과 치열한 전쟁을 벌입니다. 오랜 전쟁은 결국 블레셋의 패배로 끝나고 나중에 블레셋은 아시리아 왕국의 침략으로 철저히 멸망당하고 소멸합니다.
이란의 아리아족
기원전 9세기 경부터 점진적으로 러시아 초원에서 남하해 온 푸른 눈에 금발 머리의 아리아 유목민이 우수한 승마술로 오늘날 이란 고원에서 세력을 넓히고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바로 페르시아 입니다. 그 후 페르시아는 수많은 부족과 나라 등을 정복하고 마침내 강대국인 메디아 등을 멸망시키며 같은 백인 계통이지만 다른 코카서스 계통인 셈 족의 나라들도 압박하기 시작하며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마침내는 대제국을 이룹니다. 그러나 오늘날 페르시아인들은 원주민들과 많이 동화되고 아랍인들과도 수많은 동화를 통해 그 옛날의 모습을 많이 잃었습니다. 오늘날 이란인의 모습은 아랍인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하긴요...금발 머리와 파란눈이 열성이니까...
인도의 아리아족
이들도 이란의 아리아족과 똑같은 운명이었습니다. 즉, 원주민인 드라비안족을 정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적으로 압도적으로 많은 이들과 피가 섞이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음으로 아리아족 고유의 모습을 많이 잃고 대신 마치 인도 원주민인 드라비아족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와 갈색 눈을 소유하게 됩니다.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 원주민과의 동화를 피할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 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도인 중 상류 계층에서 여전히 아리아족 고유의 모습을 지닌 사람들을 여전히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즉 갈색 머리에 푸른 눈에 흰 피부 그리고 건장한 체격 등을 말합니다.
현재의 인도인은 인종적으로는 북방의 아리안족(族)과 남방의 드라비다족(族)이 주류를 이룬다. 아리안족은 인도게르만족의 분파로서, 키가 크고 피부는 백색에 가까우며 코가 높고 눈이 깊숙한 용모로 유럽인에 가깝다. 드라비다족은 키가 중간 정도이며 피부색은 검은 편이고 비교적 편평한 용모가 많다.
드라비다족은 옛날에는 인도 전역에 분포했으나, BC 1500년경부터 아리안족이 이란고원 방면에서 인더스강 유역과 갠지스강 유역으로 거주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인도반도 남부로 남하하게 되었다. 북방에 남아 있던 드라비다족은 아리안족과 혼혈되거나, 그 사회에 동화되었다. 산간 지역에는 드라비다족보다 더 오래 전부터 거주한 오스트로아시아계의 종족과 티베트미얀마계의 종족이 인종의 섬을 만들며 산재한다.
'바루나' 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색'을 의미한다. 결국 피부 색깔에 의해서 신분의 상하가 구분된 것이다. 당연히 지배자이며 피부색도 흰 자신들을 상위에 올려놓고 피지배 민족을 그 아래에 두었다.
그 후에 아리아인 중에서도 사회적 기능에 따르는 구분이 생겨난다. 카스트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카스트라는 말은 혈통이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카스타(Casta)'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16세기 포르투갈인이 인도의 신분제도를 보고 붙인 이름이다.
따라서 고대 신분제도인 바루나가 인도 카스트 제도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브라만교 [婆羅門敎(바라문교), Brahmanism]
1. 고대 인도에서 브라만 계급을 위주로 《베다》를 근거로 하여 생성된 종교로 한자어로 바라문(婆羅門)이며 특정 교조가 없는 것이 특징.
브라만교는 힌두교 및 기타 인도 종교의 바탕이 된 종교로서 베다시기에 만들어져 베다교 또는 베다브라만교라고도 불린다. 삼히타(Samhita), 브라마나(Brahmana), 아란야카(Aranyaka), 우파니샤드(Upanishad) 등 총 4개의 베다문헌에 수록된 진언(眞言)을 따르고 있으며 제물을 신에게 바치는 종교적 의례가 특징적이다. 숭배의 대상으로는 자연현상의 배후에서 어떠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주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인격적 주체로 구체화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고대종교처럼 강, 불과 같은 요소를 숭배하여 이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례를 행하였고, 사람들은 장수, 다산(多産) 등을 바랬다. 이러한 숭배 행위는 현재 힌두교에도 전해지고 있다.
브라만교는 기원전 1500년 경 아리아인들이 인도 북서부로 침입하면서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을 노예화하거나 남부로 몰아낸 후 갠지즈강에 정착한 후 기원전 1000~800년 경 만들어진 종교이다. 브라만교 성립은 제설혼합의 종교 집대성 문헌인 베다를 빼놓을 수 없는데, 리그베다 성립시기인 기원전 1000년까지를 전기 베다시대, 이후부터 기원전 600년까지를 후기 베다 시대로 구분한다. 즉 국가가 출현하고, 창조자와 피조물의 동질성 등 철학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 이른바 카스트 제도라는 계급제도가 정형화 되었다.
초기 브라만교는 다양한 신을 숭배했고 인간의 안위를 바라는 의미에서 이들에게 제물을 헌납하는 등 상당히 단순한 형태였다. 태양신은 수르야(Surya), 어둠과 축복의 신은 푸샨(Pushan), 선의 신 미트라(Mitra), 공기의 신 인드라(Indra) 등 삼라만상의 존재를 신격화했다. 또한 초기에는 신들을 위한 사원이 없었지만 브라만 사제들이 제물을 바쳤는데, 주로 말, 소, 양, 염소 등 살아 있는 생물체와 쌀, 밀 등의 곡물이었다.
이후 브라만교는 우파니샤드가 탄생하면서 두 부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관례적 측면에서 사회적 제한이나 의무, 종교적 의례가 확대되는 분파가 있었던 반면, 이론적으로 브라만교는 개인의 해탈을 위해 개인 신을 숭배해야 하며 여기에 따른 제물만 헌납해야 한다는 주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과 전자는 우파니샤드에 종교 의례와 철학이 반영된 반면, 후자는 브라만 사제들에 의해 명맥이 이어져왔다.
브라만교에는 대중적인 기도와 제사 등 의례적 측면 이외에도 고도의 철학적 내용이 있다. 제사와 사회제도 등의 실천적인 면은 후에 《가정경(家庭經)》, 《대계경(大啓經)》, 《법경(法經)》 등의 경서를 낳았고, 철학적 면은 이른바 6파 철학(六派哲學)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모두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파로서, 이것을 부정하는 불교와 자이나교 등과는 대립관계에 있다.
브라만교에서는 바르나 아슈라마라(asrama: 생활기)라는 특이한 제도가 있는데, 여기에는 바르나 구성원이 한평생에 반드시 거치는 단계가 설정되어 있다. 즉 학생기·가장기(家長期)·임서기(林捿期)·유행기(遊行期) 등 4단계로 구분된다. 브라만교는 후에 민간신앙을 받아들여 인도 국민 일반에 널리 교세를 떨치려 하였는데, 이것을 힌두교라고 한다
2. 인도 대륙을 정복한 아리아(Arya)인들에 의해 시작된 종교. 기원전 1000∼800년경 카스트(caste) 제도가 확립됨에 따라 브라만(brāhmana, 婆羅門) 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성립된 종교이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의 명확한 체계를 갖춘 종교는 아니고, 고대의 베다(veda) 사상을 계승하여 점차 발달하여 오늘에 이른 인도의 정통 철학사상·신관(神觀)·제례(祭禮) 등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인도의 전통적 생활방식이며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바라문교의 교의(敎義)의 핵심은, 인간은 우주의 절대자인 범(梵, brahman)의 일부인데 관능의 망념(妄念)에 의해 범과 유리되어 윤회하면서 고통을 받는 바, 이 관능의 망념을 없애고 범과 아(我,ātman)가 합일함으로써 윤회를 벗어나 절대적인 세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의는 우주의 생명원리인 「범」과 개인의 생명원리인 「아」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바라문교에서는 범을 실재적 실체(實體)로 보는 점에서 무아(無我) 사상을 기본으로 하는 불교와는 근본적으로 입장이 다르다.
바라문교에서는 일생을 배우며 수도하는 생활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어려서 집을 떠나 스승에게 배우는 범행기(梵行期), 장년이 되어 귀가하여 결혼하고 가사에 종사하는 가주기(家住期), 늙어 아들에게 가사를 맡기고 산림에서 명상하는 임서기(林棲期), 말년에 걸식(乞食)하면서 초탈(超脫)의 경지에서 세상을 편력하는 유행기(遊行期)의 4단계로 되어 있다.
고대 인도에서 브라만 계급을 위주로 《베다》를 근거로 하여 생성된 종교로 한자어로 바라문(婆羅門)이며 특정 교조가 없는 것이 특징.
브라만교는 힌두교 및 기타 인도 종교의 바탕이 된 종교로서 베다시기에 만들어져 베다교 또는 베다브라만교라고도 불린다. 삼히타(Samhita), 브라마나(Brahmana), 아란야카(Aranyaka), 우파니샤드(Upanishad) 등 총 4개의 베다문헌에 수록된 진언(眞言)을 따르고 있으며 제물을 신에게 바치는 종교적 의례가 특징적이다. 숭배의 대상으로는 자연현상의 배후에서 어떠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주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인격적 주체로 구체화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고대종교처럼 강, 불과 같은 요소를 숭배하여 이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례를 행하였고, 사람들은 장수, 다산(多産) 등을 바랬다. 이러한 숭배 행위는 현재 힌두교에도 전해지고 있다.
브라만교는 기원전 1500년 경 아리아인들이 인도 북서부로 침입하면서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을 노예화하거나 남부로 몰아낸 후 갠지즈강에 정착한 후 기원전 1000~800년 경 만들어진 종교이다. 브라만교 성립은 제설혼합의 종교 집대성 문헌인 베다를 빼놓을 수 없는데, 리그베다 성립시기인 기원전 1000년까지를 전기 베다시대, 이후부터 기원전 600년까지를 후기 베다 시대로 구분한다. 즉 국가가 출현하고, 창조자와 피조물의 동질성 등 철학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 이른바 카스트 제도라는 계급제도가 정형화 되었다.
초기 브라만교는 다양한 신을 숭배했고 인간의 안위를 바라는 의미에서 이들에게 제물을 헌납하는 등 상당히 단순한 형태였다. 태양신은 수르야(Surya), 어둠과 축복의 신은 푸샨(Pushan), 선의 신 미트라(Mitra), 공기의 신 인드라(Indra) 등 삼라만상의 존재를 신격화했다. 또한 초기에는 신들을 위한 사원이 없었지만 브라만 사제들이 제물을 바쳤는데, 주로 말, 소, 양, 염소 등 살아 있는 생물체와 쌀, 밀 등의 곡물이었다.
이후 브라만교는 우파니샤드가 탄생하면서 두 부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관례적 측면에서 사회적 제한이나 의무, 종교적 의례가 확대되는 분파가 있었던 반면, 이론적으로 브라만교는 개인의 해탈을 위해 개인 신을 숭배해야 하며 여기에 따른 제물만 헌납해야 한다는 주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과 전자는 우파니샤드에 종교 의례와 철학이 반영된 반면, 후자는 브라만 사제들에 의해 명맥이 이어져왔다.
브라만교에는 대중적인 기도와 제사 등 의례적 측면 이외에도 고도의 철학적 내용이 있다. 제사와 사회제도 등의 실천적인 면은 후에 《가정경(家庭經)》, 《대계경(大啓經)》, 《법경(法經)》 등의 경서를 낳았고, 철학적 면은 이른바 6파 철학(六派哲學)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모두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파로서, 이것을 부정하는 불교와 자이나교 등과는 대립관계에 있다.
브라만교에서는 바르나 아슈라마라(asrama: 생활기)라는 특이한 제도가 있는데, 여기에는 바르나 구성원이 한평생에 반드시 거치는 단계가 설정되어 있다. 즉 학생기·가장기(家長期)·임서기(林捿期)·유행기(遊行期) 등 4단계로 구분된다. 브라만교는 후에 민간신앙을 받아들여 인도 국민 일반에 널리 교세를 떨치려 하였는데, 이것을 힌두교라고 한다.
우파니샤드 [Upanisad]
고대 인도의 철학서. 바라문교(波羅門敎:Brāhmanism)의 성전 베다에 소속하며, 시기 및 철학적으로 그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베단타(Vedānta:베다의 말미·극치)라고도 한다. 현재 200여 종이 전해지는데, 그 중 중요한 것 10여 종은 고(古)우파니샤드로 불리며, BC 600∼AD 300년경, 늦어도 기원 전후에 성립된 것이다. 그후 10수세기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것을 신우파니샤드라고 하며, 모두 산스크리트로 씌었다.
우파니샤드의 원뜻은 사제간에 ‘가까이 앉음’이라는 의미에서, 그 사이에 전수되는 ‘신비한 가르침’도 의미하게 되었으며, 옛날부터 천계문학(天啓文學:śruti)으로서 신성시되었다. 인도의 정통 바라문 철학의 연원으로서, 그 후 철학·종교 사상의 근간·전거(典據)가 되었다. 개개의 우파니샤드는 통일된 사상을 한 사람의 작자가 일정한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긴 세월에 걸쳐 편집·정비하였다고 생각되며, 베다 및 브라마나의 제식만능주의에 대한 반발을 담은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불교흥기를 촉진한 사상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 중에는 신·구의 잡다한 사상이 섞여 있으며 전체로서의 통일이 결여되었지만 그 근본 사상은 만유의 근본원리를 탐구하여 대우주의 본체인 브라만(Brahman:梵)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Ātman:我)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으로 관념론적 일원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의 형성 배경에는 창조관과 동치(同置:upāsana)의 논리를 들 수 있다. 창조의 의미로 사용되는 스리스티(si)는 최고신의 2분에 의하여 자신의 일부를 방출(ésj)함으로써 창조자와 피조물이 동질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주적 실재와 개인의 구성요소를 대응시켜 불사(不死:amta)를 탐구하였던 동치의 논리는 범아일여사상의 원형적인 사고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은 업(業)에 의해 윤회를 반복하지만 선정(禪定:dhyāna)·고행(苦行:tapas)을 투철히 하여 진리의 인식(brahma-vidyā)에 도달함으로써, 윤회에서 해탈하여 상주·불멸의 범계(梵界:brahma-loka)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우파니샤드의 대표적인 사상가로서는 아트만을 만물에 편재하는 내재성으로서의 유(有:sat)로 주장하는 우달라카 아루니(Uddālaka Ārui)와 아트만을 인식주관으로서 불가설·불가괴(不可壞)한 것으로 주장한 야지나발키아(Yājñavalkya) 등이 있으며, 전자의 ‘네가 그것(아트만)이다(tat tvam asi)’, 후자의 아트만은 부정적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는 뜻의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neti, neti)’ 등의 말은 유명하다.
[출처] 우파니샤드 [Upanisad ] | 네이버 백과사전
인도의 종교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갖는 많은 지역이 하나의 인도문화권을 구성하고, 광대한 국가로 통일된 것은 주로 종교의 힘에 의한 것이다. 인도 민중의 대다수는 힌두교를 믿는다. 힌두교는 원래 아리안족의 원시종교인 브라만교에서 발달하였다. 사제계급(司祭階級)으로서 브라만이 많은 자연신(自然神)을 숭배하였으나 그 후 점차 철학적으로 정리되었다.
BC 6∼BC 5세기 도시국가시대에 이르러 많은 사상이 생겨나서 불타에 의한 불교, 마하비라에 의한 자이나교 등이 브라만교에 대한 종교개혁으로서 전도되었다. 이들 신흥종교는 한때 인도를 풍미하였고, 불교는 아시아 각지에 퍼져 지금에 이른다. 그러나 그 후 이슬람교가 들어와서 불교를 배격하여 오래된 브라만교는 민간의 신앙과 결합하여 대중들이 믿게 되었다. 브라만은 여러 신 중에서 비슈누를 최고신으로 하는 비슈누파(派), 시바를 신으로 하는 시바파, 둘가 여신을 신앙하는 샤리티파 등 다수의 종파로 나뉘어 있으나 이것들을 총괄하여 힌두교라고 한다.
이로 인하여 한편으로 깊은 철학을 가진 힌두교는 종교생활에서도 난행(難行)과 고행(苦行), 엄격한 계율을 갖는 것에서부터 성(性)의 숭배로 신(神)에의 접근을 모색하려는 것 등 여러 갈래이며, 인도 민중의 모든 계층을 포괄한다. 힌두교도는 국민의 82.6%를 차지하며 전국의 여러 곳에 성지와 사원이 있고, 농한기에는 마을 도사(導師)를 따라 순례길에 나선다. 인종적·언어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힌두교도로 귀일(歸一)함으로써, 인도의 정신적 풍토가 조성된다고 할 수 있다. 외래의 종교 중에는 이란에서 인도로 이주한 사람들이 신봉하는 배화교(拜火敎)가 있다. 인도반도 아라비아해 연안의 남단에 가까운 코친에는 유대교도의 거주구(居住區)가 있다.
외래 종교 중에서는 이슬람교가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지는데, 10세기경부터 이슬람교도군(敎徒軍)이 델리 지방을 점거, 이슬람 왕국을 건설하고 무력으로 힌두교도를 개종시켰으나 하층의 카스트에 속하는 사람들이 주로 응했다. 이슬람교는 힌두교와는 달리 알라의 신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가 알라의 예언자인 일신교(一神敎)로서 다신교인 힌두교처럼 이교(異敎)에 대한 관용성이 없다. 그래서 때때로 양 교도간에 충돌이 일어났는데, 인도가 독립할 무렵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였다.
인도 쪽에 남아 있는 이슬람교도는 인구조사 결과 전인구의 11%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조사에 응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20%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도의 헌법에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대통령도 이슬람교도 중에서 선임되지만, 지방에서는 때때로 양 교도간에 유혈참사를 일으킨다. 펀자브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시크교는 이슬람교의 박해에 대항해서 일어난 힌두교의 개혁파로서, 무장단결하고 순교(殉敎)정신이 강하다. 신도는 전인구의 약 2%이다. 2002년 2월에는 이슬람교도들이 힌두교도들을 태우고 가던 열차를 습격, 방화함으로써 최악의 종교분쟁이 일어났으며, 이후 서로간의 공격으로 인하여 4월 말까지 850여 명이 사망하였다.
유럽인의 내항(來航) 이래 로마 카톨릭교, 프로테스탄트가 전도되었으며, 영국 식민지시대에 각 도시에 그리스도교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스도교도는 전인구의 약 2.4% 정도이다. 인도전통의 자이나교도는 약 0.5%, 불교도는 약 0.7%에 불과하다.
힌두교 [─敎, Hinduism]
인도에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라문교(婆羅門敎)가 복잡한 민간신앙을 섭취하여 발전한 종교.
인도교(印度敎)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ū)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 ‘신두(Sindhu:大河)’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와 동일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BC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BC 2000∼BC 1500?) 이후 형성된 바라문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바라문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 ·성전(聖典)전설 ·의례 ·제도 ·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통일하여 하나의 종교로서의 구체적인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이다. 이의 기원은 바라문에 규정된 사성(四姓: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제도이지만,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변천하여 현대의 카스트 제도에는 종족 ·직업 ·종교적인 제 조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인도인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도인은 힌두교로 태어난다고 하며 카스트 제도에는 엄격하지만 신앙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고대 바라문교와의 차이점으로는, 바라문교가 베다에 근거하여 희생제를 중심으로 하며 신전이나 신상(神像)이 없이 자연신을 숭배하는 데 비하여, 힌두교에서는 신전 ·신상이 예배의 대상이 되고 인격신이 신앙된다는 점이다. 또한 공희(供犧)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고 있다.
힌두교의 근본 경전은 베다 ·《우파니샤드》이며 그 외에도 《브라마나》 《수트라》 등의 문헌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인도의 종교적 ·사회적 이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경전에 준하는 것으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라마의 기행)의 2대 서사시가 유명한데, 특히 전자의 일부인 《바가바드 기타》는 널리 애창되고 있다. 이 외에 《푸라나》 《탄트라》 《아가마》 《상히타》 등이 힌두교 각 파에서 존중되고 있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많은 신관(神觀) ·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 같아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자를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顯現:權化)이라고 하여 교묘히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푸라나》 문헌 등에 나타나는 트리무르티(三神一體)가 그 좋은 예이다. 이는 별도의 기원에 속하는 우주창조신 브라마, 유지신(維持神) 비슈누, 파괴신 시바의 세 신을 일체로 하여 최고의 실재원리로 삼는 것이다. 그 중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교의 대종파를 형성하였다. 비슈누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속한다. 비슈누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하는 것으로 신앙되고, 비슈누의 10권화(權化) 중의 라마와 크리슈나는 2대 서사시의 영웅이며, 이에 따라 비슈누파는 라마파와 크리슈나파로 나뉘었다.
비슈누파에 비하여 시바파는 사회 하층부에 세력이 있으며, 수행자의 고행 ·주술, 열광적인 제의(祭儀)가 특색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예부터 신비(神妃) 숭배가 성하여 브라마에게는 시라스바티(辯才天), 비슈누에게는 라크슈미(吉祥天)가 배우 여신으로 간주되며, 시바신의 배우 여신으로는 두르가 ·파르바티 ·우마 ·칼리 등 많은 이명이 있다. 이들 여신을 샤크티(여성적 창조력)라고 하며, 이들을 숭배하는 샤크티파도 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輪廻)와 업(業), 해탈(解脫)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윤회와 업 사상은 민간신앙을 채용한 것으로 이미 고(古)우파니샤드에 보이며, 《마하바라타》에 이르러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인의 도덕관념을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숙명론을 심어줌으로써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신들도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한 속박에서 해탈하는 방법으로서, 출가 유행(遊行)의 생활과 고행 또는 요가가 교설되었다. 고행은 주로 육체의 수련이며, 요가는 정신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힌두교 사회에 있어 도덕관념의 기초는 바라문교의 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달마(법 ·의무)이다. 4성(계급)제도와 4생활기(學生 ·家住 ·林住 ·遊行期)가 중심으로서, 자기가 소속하는 카스트에 따를 의무의 수행이 강조되었다. 최고신에 대한 바크티(信愛)와 그 은총은 능력 ·성별 ·직업 ·계급 여하에 관계없이 일반 민중의 구제를 위하여 가르쳐진 것이다. 또한 힌두교는 이슬람교 및 그리스도교와 접촉하여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 근세에는 브라마 사마즈(1828년 창립), 아리아 사마즈(1875년 창립) 등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비베카난다(1863∼1902)에 의한 라마크리슈나 교단(1897년 창립)은 모든 종교가 하나로 귀일(歸一)한다고 하여 보편주의적 종교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
[출처] 힌두교 [─敎, Hinduism ] | 네이버 백과사전
베다 [Veda, 4베다]
고대 인도의 종교 지식과 제례규정을 담고 있는 문헌으로 브라만교의 성전을 총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구전되어 오던 내용을 기원전 2세기와 기원전 1세기 사이 산스크리트어로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대인도의 종교, 철학, 우주관, 사회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역사·문학적 가치가 높다.
베다(Veda)란 ‘안다’라는 고대 산스크리트어 비드(vid-)에서 파생한 말이다. 넓은 의미로는 기록될 가치가 있는 지식 전체를, 좁은 의미로는 성스러운 지식이나 종교적 지식을 뜻한다. 그 명칭이 보여주듯 고대 인도의 종교 및 사상과 관련된 노래, 시, 기도문, 공물 제의 방식, 주문 등 성경의 6배에 달하는 방대한 지식을 담고 있다.
인도 유럽어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베다어(산스크리트 베다어)로 작성된 매우 오래된 성전이다. 학자들은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구전되어 오던 내용을 기원전 1500년~기원전 1600년 경 문자로 편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브라만교 전통에서는 베다를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천상의 영역에서 신의 영감과 계시을 받은 리시(rishi, 선지자)를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베다를 하늘의 성전이라는 뜻의 슈루티(Sruti)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본래는 《리그베다(Rig-Veda)》,《사마베다(Sama-Veda)》,《야주르베다(Yajur-Veda)》가 베다문헌의 전통적인 <3베다> 성전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여기에 민속 신앙의 성향이 짙은 《아타르바베타(Atharva-Veda)》까지 포함해 <4베다>로 부르고 있다. 리그베다는 찬가, 사마베다는 노래, 야주르베다는 공물 제의, 아타르바베다는 마법과 주술에 관한 지식을 주로 담고 있다. 이러한 베다의 구분은 공물제의에 참여하는 네 명의 제관들 각각의 역할인 찬가, 노래, 제사집행, 주술에 따라 나뉘어졌다고도 알려져 있다.
4베다는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뉘는데 삼히타(Samhita), 브라마나(Brahmana), 아라냐카(Aranyaka), 우파니샤드(Upanishad)는 대표적인 베다 분류법이다. 만트라(Mantra)로도 불리는 삼히타는 찬가와 기도문을 담고 있는 본집이자 진언이다. 브라마나는 삼히타에 수록된 문헌으로 기도, 주문, 공물을 바칠 때의 법식을 담은 비디(vidihi)와 그에 대한 교육적인 내용, 즉 제례의 유래와 의의를 담은 아르타 바다(artha-vada)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라냐카는 마을에서 떨어져 숲에서 따로 수련하는 은자들을 위해 작성된 것으로, 아라냐(aranya)는 그 자체가 숲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파니샤드는 우주의 원리에 대한 심오한 사상과 베다 해석 방식을 담은 것으로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며 베다의 궁극이란 뜻의 베단타(Vedanta)로 불린다. 《리그베다》를 《리그베다 삼히타》로, 즉 본집인 삼히타 각각을 4베다로 칭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4베다 각각은 내용에 따라 삼히타, 브라마나, 아라냐카, 우파니샤드 4종류로 나뉠 수 있다.
베다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학파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발전·변형되어져 왔다. 따라서 문헌 자체가 상당히 복잡한 형식을 띠고 있으며 다채로운 신화적·철학적 의의가 부여되어 있다. 베다 문헌 자체의 내용 일부가 사라지거나 새로 삽입되기도 하였을 뿐 아니라 베다를 이해하기 위한 보조학문들인 시쿠샤(Siksa, 음성학), 칼파수트라(제식학, Kalpasutra), 비야카라나(Vyakarana, 문법학), 니루크타(Nirukta, 어원학), 챤다스(Chandas, 음률학), 죠티샤(Jyotisa, 천문학) 등이 발달하기도 했다.
베다는 고대 인도의 종교와 철학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대표적인 문헌으로 꼽힌다. 그리고 종교 뿐 아니라 출생, 결혼, 장례 등 인간의 삶과 계절제와 관련된 의례와 제식들이 총 망라되어 있기 때문에 고대 인도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상을 보여주는 역사 사료로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또한 가장 오래된 산스크리트어 어형을 지니고 있는 베다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어원학과 문학 영역에서도 그 의의가 남다르다
연기 [緣起]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因:hetu)과 조건(緣:pratyaya)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므로, 독립 ·자존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조건 ·원인이 없으면 결과(果:phala)도 없다는 설.
나아가 일체현상의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을 연기라고 한다. 그 간단한 형태는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등으로 표현된다. 이같이 중생이 생사 ·유전(流轉)의 고통을 받는 경우의 연기를 유전연기, 수행하여 해탈로 향하는 연기를 환멸(還滅)연기라고 한다. 원시불교 이래의 사제설(四諦說:네 가지 근본진리)도 일종의 연기설로서 고(苦) ·집(集)의 2제는 유전연기, 멸(滅) ·도(道)의 2제는 환멸연기를 나타낸다. 연기설의 일반적 형태는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12종이 순차적으로 발생 ·소멸하는 것을 나타내는 십이연기이다.
《아함경(阿含經)》에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法:진리)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한 말이나, 연기를 보는 자는 불(佛)을 본다고 설(說)한 것과 같이 연기는 법과 동일한 것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이 된다. 따라서 연기에 관하여 원시불교 이래 대승 ·소승 불교에서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다. 업감(業感)연기 ·아뢰야식(阿賴耶識)연기 ·진여(眞如)연기 ·여래장(如來藏)연기 ·법계(法界)연기 등이 그것이다.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는 업설(業說)이 부가되어 십이연기의 12지(支)를,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걸쳐 있다고 생각하여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로 설명하였다. 이는 시간적인 생기(生起)를 중심으로 연기설을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타파한 것이 대승불교운동인데, 특히 그 최초에 등장한 《반야경(般若經)》류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주장하였다. 이는 인도의 승려 용수(龍樹)에 의해 연기와 밀접히 관련지어져 ‘연기 → 무자성(無自性) → 공(空)’의 해석이 확립되었다. 즉 일체는 다른 것에 인연하여 현상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상호의존하고 있는 상인 상대(相因相待)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각각은 자성을 갖고 있는 존재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사상이다.
중기 대승불교의 하나에 일체의 현상을 마음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유식설(唯識說)이 있는데,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에서는 외계의 일체 현상은 말나식(末那識)의 활동과 이 말나식을 내포하고 있는 아뢰야식에 내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 또 하나가 모든 중생 속에는 깨달음의 가능성, 즉 여래의 인자가 있다고 하는 여래장(如來藏) 사상이다. 여기에서는 본래의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을 둘러싼 외계의 번뇌[客塵煩惱]에 의해 생사에 유전하는 연기를 설명하고 있다.
여래장 사상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의 진여연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화엄경》 법계연기는, 모든 연기를 이상세계로서의 법계의 전개라고 보고 일체의 사물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多卽一)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를 연기무애문(緣起無礙門)이라고도 한다.
간화선 [看話禪]
화두를 사용하는 선법으로 참선 수행법의 일종
간(看)은 보는 것을, 화(話)는 화두를 의미한다. 이는 인도의 선정(禪定)과는 매우 다른 중국 선종만의 독특한 수행 양식이다. 점수(漸修)를 주장하는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과 돈오(頓悟)를 주장하는 혜능(慧能)의 남종선(南宗禪)으로 분파되었는데, 안녹산의 난 이후 혜능의 제자인 신회(神會)의 활약으로 남종선이 주류가 된다. 남종선은 다시 임제종(臨濟宗)ㆍ조동종(曹洞宗)ㆍ법안종(法眼宗)ㆍ운문종(雲門宗)ㆍ위앙종(潙仰宗)의 오가(五家)로 분파하게 된다.
이 중 가장 융성하여 선종의 정통으로 남은 것은 임제종이다. 간화선은 당대 조주종심(趙州從諗)선사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라는 말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송대에 임제종의 정통을 계승한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는 화두를 퍼뜨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고요히 앉아서 좌선하는 조동종의 묵조선에 반대하는 그의 활약에 힘입어 간화선은 임제종의 정통적인 수행법이 되었으며, 임제종이 융성함과 동시에 널리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간화선을 받아들인 사람은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최초이며, 그는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저술하여 널리 퍼뜨렸다. 이후 제자인 진각국사 혜심(惠諶) 등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면서 우리나라에서 선수행의 정통적인 방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화두 [話頭]
화두의 사전적 의미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이되, 불교의 근본진리를 묻는 물음에 대한 선사들의 대답이거나, 혹은 제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언어, 행동을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은 선불교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삶에서 무언가 지속적인 관심이나 몰입의 대상이라는 의미로도 흔히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화두가 갖는 신비의 베일이 완전히 벗겨진 것은 아니다. '화두'는 여전히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어떤 신성하고 초월적인 수행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화두는 기본적으로 어떤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 물음이란 '불교의 근본진리', 혹은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대개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하는 물음의 형태를 갖는다. 이것은 불교의 핵심적인 진리를 묻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긋나서는 안되며, 불교를 수행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넘어야할 관문이다.
그래서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공안이란 관청의 공문서를 말한다. 관청의 공문서는 철저히 이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화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형태가 "이것이 무엇인가(是什麽)?"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물론 불성이다. 즉 선불교에서 수행의 핵심은 불성을 보는 것, 즉 견성(見性)이기 때문이다. 이 화두의 일반적인 형식은 다음과 같다 :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한 물건'이란 불성을 가리킨다.)
본래부터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하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나
항상 작용하는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무엇인가?
불교의 근본진리, 즉 불성을 가리키는 언사는 원칙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선불교에서 전승해 온 화두의 예로는 수천 가지가 있다. 그것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면 하나는 일상적 사물을 그대로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논리적인 언사를 구사하는 것이다. 일상적 사물을 가리키는 예로 대표적인 것은 "뜰 앞의 잣나무"이다. 이 말은 곧 "불교의 근본 진리는 '뜰 앞의 잣나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잣나무는 불성이 구현되어 있는 현상이라는 식으로 따지고 분석하는 것은 화두 참구의 본령이 아니다. 도대체 불교의 근본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왜 "뜰 앞의 잣나무"라는 답이 돌아오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답은 답이면서 답이 아니다. 답이기 때문에 그 이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고, 답이 아니기 때문에 큰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 의심을 푸는 것이 화두를 참구하는 선불교의 수행이다.
다음으로 비논리적인 예로는 "남산에 비구름이 있는데 북산에 비가 온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도대체 상식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이다. 이로써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불성의 당체가 우리의 언어와 사유의 법칙에 반하며 그것을 초월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역시 묻는 이로 하여금 강한 의구심을 품게 한다. 만약 이 화두를 깊이 참구(參究 - 참조하여 연구함. 참선하며 진리를 탐구함)하는 중에 홀연히 그 의심이 풀려서 그렇게 말한 스승의 마음에 계합(契合)할 때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이치로 따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직 스승의 그 말 자체를 의심하는 것만이 요체가 된다. 선불교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가르침인 것은 이렇게 화두를 통해 스승의 마음을 전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스크리트 [Sanskrit]
인도아리아어(語) 계통으로 고대인도의 표준문장어.
중국 및 한국에서는 범어(梵語)라고도 한다. 원어(原語)로는 상스크리타(saskit)라고 하여 완성된 언어, 순수한 언어를 의미하며, 속어 프라크리트(praktā)에 대칭된다.
언어학상으로 인도유럽어족은 인도이란어파, 슬라브어파, 그리스어·라틴어에 속하는 이탈리아어파, 독일어·영어를 포함한 게르만어파 등 많은 어파로 나뉜다. 산스크리트는 이 중 인도이란어파에 속하는 언어이다.
산스크리트는 BC 5세기∼BC 4세기경의 문법학자 파니니(Pāini)가 당시 서북인도 지식계급의 언어를 기초로 한 문법서 《아시타디야이이:Aādhyāyī》를 지어 문법체계를 완성하였다. 이것을 고전산스크리트, 또는 간단히 산스크리트라고도 하여 그 이전의 《베다》를 중심으로 하는 베다어와 구별한다.
이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산스크리트는 종교·철학·문학 용어로서 지식계급 사이에 사용되어 왔다. 불교경전은 처음 그 경전이 사용된 각 지방의 속어에 의해 전해졌지만, 부파(部派)불교시대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경전을 산스크리트로 쓰기 시작하였다.
또한, 인도 일반에 산스크리트가 사용되는 경향에 따라 속어로 쓰여졌던 것도 산스크리트화하였다. 한역(漢譯)된 불전의 원본에는 팔리어(pāli) 등의 속어로 된 것, 후기의 혼효(混淆)된 산스크리트(Hybrid Sanskrit), 순수한 산스크리트, 서북 인도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쳐 사용된 간다라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아비달마(阿毘達磨)로서, 초기대승불교경전은 고전산스크리트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의 후기대승불교경전은 혼효산스크리트로 되어 있다.
불교의 종파
한국 불교의 종파
삼국 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한국 불교에서는 때로는 새로운 종파가 성립되기도 하고 때로는 기존의 종파들이 통합되기도 하면서 여러 종파들이 성립 · 발전하였다.
삼국 시대에는 계율종이 큰 역할을 하였고, 남북국 시대와 고려 초기에는 선종의 9산이 성립되면서 5교9산이 확립되었다.
고려 중기에는 5교9산이 교종의 5교와 선종의 조계종 · 천태종의 5교양종으로 바뀌었다.
조선 시대에는 7종으로, 또 그 이후에는 선교 양종으로 폐합이 이루어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31본사제가 시행되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불교의 고유성을 되찾는 운동이 전개되어 1962년에 대한불교 조계종이 발족되었다. 또한 대한불교 조계종 이외에도 대한불교 천태종 · 대한불교 진각종 등의 18종의 신흥 종파와 새로운 형태의 신흥불교인 원불교도 성립되었다.
삼국 시대의 불교 종파 / 불교의 전래와 호국 불교
한국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전진(前秦)의 순도(順道)가 불상과 불경(佛經)을 전한 것에서 비롯된다. 고구려의 전래보다 12년 뒤인 침류왕(枕流王) 원년인 384년에 동진(東晋)의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와서 백제에 불교를 전하였다. 신라에의 불교전래는 자못 수난을 겪은 바 많았으나 법흥왕(法興王) 14년(527)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고비로 하여 공인되었다.
삼국시대의 불교 전래는 국가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국가 중심적인 종교로 되었으므로 호국적(護國的)인 성격을 강하게 풍기게 되었다. 개인적인 치병(治病)이나 구복(求福)도 포함되지만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신앙(護國信仰)이 강렬하였다. 나라를 보호한다는 유명한 《인왕경(仁王經)》을 위주로 한 백좌강회(百座講會) 의식이 성행하였고, 이를 통하여 국태민안을 기도하였다. 백제나 신라의 많은 절이 호국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특히 왕흥사(백제) · 황룡사(신라)는 호국의식을 전담한 사찰로서 그 규모는 대단하였다.
교종 5교의 성립
국가 위주의 불교는 종파성립에도 큰 영향을 미쳐 삼국시대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종파는 ① 계율종(戒律宗)이었다. 백제의 겸익(謙益)과 신라의 자장(慈藏)이 대표적인 계율종의 인물이었다. 특히 자장은 대국통(大國統)으로서 신라 불교를 총관장했다. 고구려에서는 말기에 보덕(普德)이 중심이 되어 도교(道敎)의 불로장생사상을 척파하기 위하여 모든 중생은 영원불멸의 불성(佛性)을 갖고 있다는 ② 열반종(涅槃宗)을 세우기도 하였다.
삼국 통일 이후 의상(義湘: 625-702)에 의하여 ③ 화엄종(華嚴宗)이 개종(開宗)되었으며, 그는 중국 화엄의 대종장인 지엄(智儼)에게 수학한 이후 귀국하여 영주에 부석사(浮石寺)를 창건, 화엄종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입당유학을 하지 않고 학승으로 숭앙받은 원효(元曉: 617-686)는 ④ 법성종(法性宗)을 분황사(芬皇寺)에서 개창했으며, 법성종을 내세웠다고는 하나 화엄종, 기타 어느 종에도 치우침이 없었다. 그의 시호인 화정(和靜)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일체를 화(和)로 통일시키려 했으므로 그 종을 해동종(海東宗)이란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때는 유가론(瑜伽論)과 유식론(唯識論)을 중심교학으로 연구체계화한 ⑤ 법상종(法相宗)이 진표(眞表)에 의하여 금산사(金山寺)에서 개종되었다. 진표는 미륵신앙이 강하였으며 미륵설계와 점찰법(占察法)으로 민간을 선도하였는데 대단한 교세를 이룩하였다. 위의 교종의 여러 파는 귀족사회에 환영을 받은 바 있지만 신라사회를 휩쓸었던 것은 미타신앙(彌陀信仰)인 정토교(淨土敎)의 형성이다. 이것은 원효의 무애가(無碍歌) · 무애춤에서 전교가 비롯된 신라 민중신앙의 대맥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선종 9산의 성립
8세기 말∼9세기 초부터 선종(禪宗)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다른 종파가 소의경전(所依經典)에 의하여 그 종파의 특색을 나타내는 데 반하여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내세우는 것이다. 천만언설(千萬言說)에 의하지 않고 다만 직지인심(直指人心)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종파이다. 이와 같은 선종은 달마(達磨)에 의하여 중국에 유입되고 6조(六祖) 혜능(慧能)에 의하여 가장 성하였다.
신라에는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때 전래되어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 때 도의(道義)에 의하여 크게 떨쳐 신라 9산(山)을 이룩하였는데 그 9산은 보림사(寶林寺)를 중심으로 도의(道義)가 개산(開山)한 가지산(迦智山)파, 실상사(實相寺)를 중심으로 하여 홍척(洪陟)이 개산한 실상산(實相山)파, 대안사(大安寺)를 중심으로 하여 혜철(惠哲)이 개산한 동리산(棟裡山)파, 굴산사를 중심으로 하여 범일(梵日)이 개산한 사굴산파, 봉림사(鳳林寺)를 중심으로 하여 현욱(玄昱)이 개산한 봉림산파, 흥녕사(興寧寺)를 중심으로 하여 도윤(道允)이 개산한 사자산(獅子山)파, 봉암사(鳳岩寺)를 중심으로 하여 지선(智詵)이 개산한 희양산(曦陽山)파, 성주사(聖住寺)를 중심으로 하여 무염(無染))이 개산한 성주산파, 광조사(廣照寺)를 중심으로 하여 이엄(利嚴)이 개산한 수미산(須彌山)파이며, 앞서 교종과 합칭하여 5교9산(五敎九山)이라고 한다.
고려 시대의 불교 종파
고려에 와서도 5교 9산이 유지되다가 의천(義天: 1055-1101)이 천태종(天台宗)을 세우므로 9산이 합쳐 조계종(曹溪宗)이 되어 5교 양종으로 이룩되었다.
조선 시대의 불교 종파
조선 태종(太宗: 재위 1400-1418) 때 종파 통합을 꾀하여 7종(曹溪 · 天台 · 華嚴 · 慈恩 · 中神 · 摠南 · 始興)으로 하고, 세종 때는 선교 양종으로 폐합되었다. 선종은 봉은사(奉恩寺)가 본사가 되어 천태 · 총남 · 조계의 3종이 합치고, 교종은 봉선사(奉先寺)가 본사가 되어 화엄 · 자은 · 중신 · 시흥의 5종이 통합하여 선교 양종의 면목을 세웠다.
일제 강점기의 불교 종파
그러다가 1911년 일본의 사찰령(寺刹令)으로 불교교단은 31본사제(本寺制)로 화하고 본사 주지는 총독, 말사(末寺)는 도지사 · 군수가 명하게 하여 해방될 때까지 유지하였다.
현대 한국의 불교 종파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불교의 고유성을 되찾는 운동이 전개되어 1954년에서 1962년까지 승단정화(僧團淨化)의 기치를 내세워 1962년 4월 12일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이 발족되고 25교구(敎區) 본산제도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대처(帶妻) 측은 끝내 불응하여 대한불교 태고종(太古宗)을 별립(別立)해 나갔고, 조계종단은 교세를 단합하여 한국불교가 직면한 3대불사(도제양성 · 포교사업 · 역경간행)에 박차를 가하였다.
앞서 조계종 이외에도 18종의 신흥불교가 우후죽순격으로 파생되었는데 이를 간결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법화신앙계(法華信仰系)를 중심으로 한 대한불교법화종 · 한국불교법화종 · 천태종 · 불입종 · 일승종(一乘宗)이나, 밀교(密敎)를 중심으로 한 진각종(眞覺宗) · 진언종(眞言宗), 정토신앙계(淨土信仰系)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불교용화종 · 정토종 · 법상종 · 미륵종 · 천화불교 등이며, 원효를 중심적 사상으로 하는 새 종파가 있는데 원효종 · 화엄종 · 총화회 등이며, 이외에도 등록되지 않은 단체로 영산법화사관음종 · 구세불교가 있고, 비구니교단(比丘尼敎團)으로는 보문종(寶門宗)이 1972년에 등록을 필하였다. 불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지만 불교를 내세우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신흥불교인 원불교도 있다.
인도불교 원시 불교 · 소승20부·부파 불교《설일체유부》 · 상좌부 불교 · 대중부 불교 · 대승 불교《중관파 · 유식유가행파 · 밀교》
일본 불교 남도육종《구사종 · 법상종 · 삼론종 · 성실종 · 율종 · 화엄종》 · 선종《보화종 · 일본달마종 · 임제종 · 조동종 · 황벽종》 · 니치렌슈·일련종 · 일련정종 · 정토진종 · 진언종·밀교 · 천태종
중국 불교 밀교 · 법상종 · 비담종 · 삼계교 · 삼론종 · 선종《법안종 · 운문종 · 위앙종 · 임제종 · 조동종》 · 섭론종 · 성실종 · 열반종 · 율종 · 정토종 · 지론종 · 천태종 · 화엄종
티베트 불교 겔룩파 · 닝마파 · 사캬파 · 카규파 · 카담파
한국 불교
신라·고려의 5교《계율종 · 법상종 · 법성종 · 열반종 · 원융종》 · 기타《정토교 · 진언종·신인종·밀교》 ·
신라·고려의 9산《가지산 · 도굴산 · 동리산 · 봉림산 · 사자산 · 성주산 · 수미산 · 실상산 · 희양산》 ·
고려 중기 이후의 5교 양종 《남산종 · 자은종 · 중도종 · 시흥종 · 화엄종 / 조계종 · 천태종》 ·
고려말· 조선초의 11종과 7종 《시흥종 · 자은종 · 조계종 · 중신종 · 천태종 · 총남종 · 화엄종》 ·
조선 세종 이후의 선교 양종《선종 · 교종》 · 일제 강점기의 31본산
현대·통불교《조계종 · 조동종 · 진각종 · 천태종 · 태고종》
종교(宗敎)
1. 종교의 역사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 모든 민족에게서 보이는 문화 현상이다 종교는 정치·경제·사상·예술·과학 등 사회의 전 영역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가치 체계로서 기능해 왔다.그러나 종교는 절대성·궁극성이라는 자기 주장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발전 단계를 반영하고 있는 구체적인 문화 현상이다.종교라는 말은 원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을 의미하는 불교어였다. 그런데 그 말이 19세기 말 일본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서양의 ‘religion’의 번역어로 쓰이게 되면서 일반화된 것이다.
‘religion’의 어원은 라틴어의 ‘religio’로서,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외경의 감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의례 등의 행위를 의미한다. 고대 유럽에서는 기독교권의 성립과 함께 교의(敎義)와 의례의 체계를 갖춘 종교 집단을 가리키는 개념이 되었고, 중세에는 비세속적인 수도원 생활까지도 이 개념으로 불렸다.
현재 ‘religion’의 번역어로서의 ‘종교’는 불교·기독교·이슬람교·유교 등의 개별 종교들을 총칭하는 유(類)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식적으로 종교는 신이나 부처 등 초자연적인 존재에 관한 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종교의 기본 요소는 신·부처·영(靈)·법·원리·도 등으로 불리는 초월적·절대적 존재에 대한 체험이다. 종교는 이러한 종교 경험을 핵으로 하여 그러한 경험을 공유하고 또한 공유하고자 하는 일정한 공동체(종교 집단)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에 도달하기 위한, 혹은 그런 절대 경험을 서술하기 위한 교리적·이론적 체계를 갖는다. 또한 기도, 예배, 수양 등 궁극적 실재와 만나거나 합일(合一)하기 위한 실천 체계를 갖는다.
여기서 종교는 인간이나 자연의 힘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한 경험에 기반을 둔 교의·의례·시설·조직을 갖춘 사회 집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상으로서의 종교는 역사의 발전 단계나 민족적·문화적 전통의 차이에 따라 현저한 다양성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논자의 관점과 대상에 따라 종교에 대한 엄청난 수의 정의가 시도되고 있다.
이 정의들을 크게 세 가지 계통으로 나누어 보면, ① 신이나 절대자 등과 인간과의 관계로서 보는 정의, ② 신성감, 외경의 감정 등 종교에서 보이는 특정한 심리 상태를 기준으로 하는 정의, ③ 특정한 가치 체계를 갖춘 인간의 생활 활동으로서의 정의가 있다. 종교에 대한 이 세 가지 정의 가운데 어느 하나가 옳다고 판단내리기는 어렵지만, 인간의 삶의 영위로서 종교를 파악하는 견해가 좀더 포용적인 정의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종교의 역사적 소임, 이데올로기적 특징 등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동시에 도입하여야 한다.
종교는 원시 시대에서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발전과 함께 그 사회적·문화적 기능을 달리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현상적으로만 보면, 문화와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관여했던 봉건 사회 이전에 비해서,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그 활동 범위가 좁아졌고, 종교 본래의 영역에 한정되어 온 경향이 있다.
- 한국 종교사의 체계 -
종교는 하나의 문화현 상이므로, 객관적인 역사 단계에 상응하는 발전 단계를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역사적 발전과 그에 상응하는 종교 문화의 특질을 서술하는 것이 한국 종교사다.
종교학자 윤이흠(尹以欽)은 종교적 신념 체계의 유형(types of belief system)이라는 정신적 동기를 한국 사회의 역사적 변천과 결합시켜 한국 종교사의 체계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종교적 신념 체계의 유형을 ① 기복형(祈福型), ② 구도형(求道型), ③ 개벽형(開闢型)의 세 가지로 나눈다. 이 세 가지 유형은 각각의 사상적 동기 및 사회·윤리적 태도를 보여 준다.
① 기복형 : 사상 내용에서 현실적·현세적이다. 현실 조건과 사회 질서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극단의 문화적·사회적 보수주의로 드러난다.
② 구도형 : 개인의 고행과 자아 완성을 통한 진리 추구가 제일의 목표이다. 결과적으로 사회 질서의 유지를 묵인하는 보수주의적 성향으로 드러나기 쉽다.
③ 개벽형 : 현존의 사회 조건에 불만을 가지고 이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급진적 태도를 가진다. 급진적 사회 개혁주의를 보여 준다.
기복·구도·개벽의 3대 동기는 인간의 종교적 염원의 3대 범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종교적 신념 유형은 각각 혹은 둘 이상이 상호 작용하면서, 또는 시대마다 각 신념 유형이 그 강도를 달리하면서 한국 종교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 드러난다.
① 삼국 이전 : 세계 종교가 유입되기 이전 한국 종교 문화의 유형적 특징은 주술적 기복 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② 삼국 시대 : 유교나 불교와 같은 고도의 이론을 갖춘 종교가 유입되면서 기복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주술적 현세주의가 극복되고 구도형의 고전 문화로 이행되어 간다.
③ 후삼국 시대 : 고대 사회가 붕괴되는 전환기로서, 변혁에의 광범한 요구와 함께 신라 말에 개벽 이념형의 대표라 볼 수 있는 미륵 사상이 정치적으로 전면에 대두된다.
④ 고려시대 : 유교와 불교가 대립과 조화를 꾀하는 시대였다. 이때 민간 신앙을 깊이 수용한 불교는 ‘기복-구도형’의 신념 유형을 형성하여 고려 불교의 특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유교는 정치적 개혁 의지와 결합. ‘구도-개벽형’의 사상을 형성해 정치 체제의 이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고려 중기 이후에 유입된 성리학은 이러한 역사적 책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조선 왕조의 개국 이념으로 발전해 간다.
⑤ 조선 전기 : 성리학이라는 ‘구도-개벽형’의 신념 유형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은 안정된 왕조 권력의 이데올로기로서 점차 개벽적인 모티브를 상실한다.
⑥ 조선 후기 : 성리학의 ‘구도-개벽형’의 사상을 회복하려고 하는 실학 운동과, 원래 유교가 결여하고 있던 기복적 요소가 표출된 ‘개벽-기복형’의 동학 운동이 나타난다.
한국 종교사는 개별 종교 전통들의 병렬적 합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 종교사를 연구·서술하는 데에서는 다양한 신념 유형들의 복합적 상호 작용 현상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 한국 종교의 역사적 전개 1 -
1. 상고대의 원시신앙
개국 설화 및 시조 설화
한국의 가장 오랜 원시 신앙의 내용과 형태는 고조선 시대로부터 고대 부족 국가의 형성기인 삼국 시대 초기에 걸친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개국 설화 및 시조 신화에 나타난다.신화나 설화는, 비록 구전되어 내려오는 것이지만, 고대인들이 생활하면서 형성한 신앙 의식의 표현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한국 고대의 원시 신앙을 구명할 수 있다.
한국 고대 신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하늘[天]을 지고신(至高神)의 존재로 의식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단군 신화의 환인(桓因)은 ‘하늘' 또는 ‘하느님'이라는 우리말의 음역(音譯)이며, 환인의 아들로서 태백산에 하강한 환웅(桓雄)도 ‘하늘'이라는 발음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 민족에게는 단군 신화의 형성기에 이미 지고신으로서의 ‘하늘'에 대한 신앙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천신은 지상적(至上的) 내지 초월적 존재로서 피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인간의 세계에 하강하여 세상을 다스리거나(光明理世) 혹은 인간을 이롭게 한다(弘益人間)는 임무를 실현하려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천신의 현현(顯現) 내지 하강은 고대인의 신앙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단군 신화에 보이는 바와 같이 천신이 인간으로 화신하여 출현하는 것은 신화의 결정적인 계기인 것이다.
천신은 그 자체가 인간으로 성육(成肉)하지 않더라도 햇빛[日光]·번개[電光]·붉은 구름[紫雲] 등으로 나타난다. 심지어는 꿈속에 나타나 계시를 하기도 한다. 또, 고대인의 신앙 속에서 표현되는 천신의 현현은 흔히 세계 안의 구체적이고 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고대 한국인의 신앙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태양·산악·나무·숲·신단(神壇) 등에 대한 숭배 현상은 그것이 천신의 구체적 현현으로, 혹은 신이 하강하거나 거주하는 곳으로 생각되어, 생명력의 상징으로서 신성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된 결과였다.
고대인의 신앙 대상으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던 땅[大地]·물[水] 등도 신화에서는 여성적 생산력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주몽 신화에서는 하백(河伯)의 딸이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강에 살며 거기에서 천제(天帝)의 아들을 만났던 것이다.
이러한 고대 한국인의 신앙 속에서의 궁극적 대상은 신성성을 현현하는 모든 구체적 자연 대상의 위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하늘이다.
하늘은 자연의 모든 신앙적 대상의 신성성을 확보해 주는 근원이며, 신화 속에서 인간의 육신으로 출현하여 국가의 시조로 숭배된다. 시조의 강생 신화는 곧 국가 질서를 최고의 신적 존재에 근거시키고 있는 것이다.
제의와 무속
고대 한국인의 신앙은 제의를 통하여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제의는 신화의 신앙 내용을 현실 속에 실천하는 행위이며 신화적 이념의 실현인 것이다. 고구려의 동맹이나 예의 무천은 모두 가을에 추수를 마치고 드리는 제사였다. 제사의 대상은 주로 천신이었던 것 같으나, 아마도 천(天)으로 상징되는 국조신 및 그 밖에 제사의 목적에 관련되는 다른 대상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 당시의 제사 방법이 어떠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집단적인 가무·음주는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의례를 통하여 신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조화와 질서가 이루어져 세상이 밝게 다스려지는 이상 세계가 실현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또, 고대 한국인의 원시 신앙은 현재까지도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이어져 내려 오고 있는 무속과 거의 일관된 사고 구조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일반적으로 한국의 원시 신앙은 한국 무속의 원형으로 생각되고 있다.
2. 삼국 시대
원시 신앙의 쇠퇴
삼국 시대에 들어와 국가다운 제도와 조직이 마련되고 중국으로부터 불교·도교 등이 수용됨에 따라 상고대의 원시 신앙도 변모되었다. 제정 일치 시대인 상고대에는 부족의 족장은 사제인 동시에 왕이었다. 이는 고대 조선의 부족 사회를 거쳐 신라 초에 이르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무(巫)는 왕이었고 왕은 바로 무였다.
그러나 고대 국가로 발전돼 가면서 제사와 정치는 분리되고, 무는 종교적인 제의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직업으로 독립되었다. 삼국 시대의 무는 제사를 집행하는 외에도 의술·예언 등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무가 의술로써 질병의 치료를 담당하는 의무(醫巫)의 직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나, 미래의 일 또는 미지의 사실에 대하여 예언하는 점복적(占卜的)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자주 보인다.
삼국 시대에 이르면, 그 이전에 전래되어 오던 무격신(巫覡神)이 분화되어 다양해졌다. 이에 대한 증거가 연오랑(延烏郎)과 세오녀(細烏女)의 설화다. 그러나 삼국 시대 무속 신앙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남방적 성격을 띤 해양 문화의 용 신앙(龍信仰)이 크게 보급되었다는 사실이다. 신라 문무왕이 임종 때 호국의 대룡(大龍)이 되어 불법과 나라를 수호하겠다는 유언을 한 것도 용 신앙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려 주는 한 증거다.
또, 삼국 시대에는 천하대장군으로 알려진 장승이 벌써 액(厄)과 잡귀를 막는 촌락 수호신의 기능과 경계를 구분하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삼국 시대의 무속 신앙은, 왕권이 불교와 밀착하여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장려하게 되자, 그것이 차지했던 지위를 점차 불교에 넘겨 주게 되었다.
그 뒤 무속 신앙은 불교·도교 등 외래 종교와 타협, 조화되면서 역사의 표면에서보다는 사회의 저변에서 한국 문화의 성격이나 한국인의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 데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유교의 수용
삼국은 모두 가부장적 가족 제도가 발달하고 전제적 왕권이 성장함에 따라 충과 효의 덕목을 요구하였고, 따라서 사회 도덕으로서의 유교를 중요시하였다. 삼국 시대에 들어와 유교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을 세우고, 태학 박사를 두어 귀족 자제에게 오경을 비롯한 유교의 경전을 가르쳤다. 그리고 평양 천도 뒤에는 각 지방에 경당(扃堂)이라는 사립 기관을 둬 평민 자제들에게도 경전과 활쏘기를 가르쳤다.
백제에서도 오경 박사와 의(醫)·역(易) 박사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유교 교육 기관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백제는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 등이 유교를 일본에 전파할 정도로 유교 수준이 매우 높았다. 왕인은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으며, 백제는 그 뒤에도 자주 일본에 오경 박사를 보내곤 하였다.
신라는 삼국 통일 후인 682년(신문왕 2)에야 국학을 세워 유학을 가르쳤으므로 백제나 고구려에 비하여 뒤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흥왕 순수비에서 충과 신을 장려하는 것이나,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에 충과 효가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법흥왕 무렵에 유교 도덕이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화랑도들이 가장 중요시한 유교의 덕목은 충과 신이었다. 횡적으로는 신을 통해 사회적인 결합을 이루고, 그것이 다시 충을 통해 종적으로 왕권과 연결됨으로써 유교는 국민을 결합시키는 중요한 사회 도덕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유교는 삼국 시대의 신라에서 충과 신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결속 이념으로서 중요시되었지만, 통일 신라에 들어와서는 주로 6두품(六頭品) 출신의 유학자들에 의해 도덕 정치의 이념으로서 주장되었다.
불교의 전래와 발전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는 재래의 토착 신앙이 신앙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으나, 삼국이 고대 국가로 정비되면서 불교가 전래되어 국가적으로 공인되었다. 삼국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여 왕권이 확립돼 갔음에도 불구하고 신앙 면에서는 각 부족이 성장한 지역을 토대로 산천 숭배나 조상 숭배가 여전해 고대 국가의 완성에 장애가 되었기 때문에, 국왕은 부족 간의 개별적인 신앙을 초월한 새로운 국가적인 종교를 요청하였다.
이에 왕실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데 선봉적인 구실을 하였다. 불교가 고대 국가에서 정신적 지주로서 국민 사상의 통일에 적합했고 왕권의 강화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대적·국가적 요청에 의해 전래된 불교도 토착의 무속 신앙을 전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불교는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재래 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토착화의 길을 걸으면서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 때문에 삼국 시대의 불교는 불교의 근본 정신과는 달리 재래의 현세적인 기복 신앙을 연장한 데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372년의 일이다. 중국의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순도(順道)와 불상 및 불경을 고구려에 보내 왔으며, 2년 뒤에 아도(阿道)가 왔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세움으로써 불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의 불교는 삼론종(三論宗) 계통의 의연(義淵)과 승랑(僧朗) 등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백제에는 384년에 인도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인도로부터 중국을 거쳐 들어옴으로써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 불교는 계율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한국 율종(律宗)의 선구가 되었는데, 특히 여기에 공헌한 사람이 겸익(謙益)이다. 그는 526년 인도로부터 범본(梵本) ≪오부율 五部律≫을 직접 가지고 들어와 18명의 이름난 승려들과 더불어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하였다.
고구려·백제의 불교는 일본에도 전해졌다. 고구려의 혜관(慧灌)은 625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으며, 588년에는 일본의 선신니(善信尼) 등이 백제에 유학하여 율학을 배우고 돌아가 일본 율학의 시조가 되었다.
신라에는 눌지왕 때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에 의하여 불교가 전래되었다. 그러나 토착 신앙의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던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는 초기에 많은 저항과 박해 속에서 포교되었으며, 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비로소 공인되었다.
그런데 삼국의 불교는 장구한 역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불교의 교단이나 종파의 사상이 누구로부터 발단되었고 그 뒤에 어떻게 계승·발전되었는가 하는 계보적인 문헌이 거의 없다.
다만 누가 어떠한 종(宗)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였으며, 누가 어떠한 경(經)과 논(論)을 주소(註疏)하였는가 등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한편, 신라에는 당나라에서 성립된 불교의 여러 종파가 수입되고 고승들이 배출됨에 따라 신라 통일기에는 교종(敎宗)의 오교(五敎)가 성립되었다.
이미 삼국 시대 말기에 고구려의 보덕(普德)에 의하여 열반종(涅槃宗)이, 신라의 자장(慈藏)에 의하여 계율종(戒律宗)이 성립되었으며, 통일 후에는 의상(義湘)에 의하여 화엄종(華嚴宗)이, 원효(元曉)에 의하여 법성종(法性宗)이, 그리고 진표(眞表)에 의하여 법상종(法相宗)이 각각 개창되었다.
이 다섯 종파는 모두 불교의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를 흔히 ‘오교’라 한다.
원효의 법성종은 특히 역사의 흐름에 따라 각각 이론을 달리한 여러 종파를 화합하여 하나로 귀일하게 하려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화쟁론(和諍論)이다. 화쟁이란 집착 없는 무애(無碍)의 입장에서 만법(萬法)을 보는 것으로서, 만법은 결국 하나로 귀일된다는 논리다.
원효의 화쟁 사상은 일반 민중을 중심으로 한 화합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하향식 불교였는데 원효에 이르러 민중 불교로의 길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원효는 또 정토종(淨土宗)을 통한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정토종이란 교리에 대한 깊은 연구 없이도 단지 ‘나무아미타불’만 외워도 죽은 뒤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갈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이다. 이러한 현실 부정적이고 대중적인 정토종의 유행이 신라 불교의 한 특징이다.
9세기부터는 선종(禪宗)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선종은 경전의 연구에 주력하는 교종과는 달리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이심전심(以心傳心)’과 ‘견성성불(見性成佛)’에 의한 깨달음에 주력한다.
선종이 처음 전래된 것은 7세기 중엽이었으나 8세기 후반부터 신행(神行)과 도의(道義) 등의 활동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마침내 9개의 종파를 형성하였다. 이것이 바로 선종 구산(禪宗九山)이다.
불교는 이 밖에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큰 구실을 하였다. 일찍이 구법승(求法僧)들의 내왕을 통하여 중국의 발달된 문화를 수입하여 학문 발전에 큰 구실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상·탑·조각 등 한국의 예술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교의 전래
중국으로부터 우리 나라에 도교가 전래된 것은 삼국 시대 말기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도교적인 문화 현상으로 볼 수 있는 산악 신앙이나 신선설 및 각종의 방술(方術)이 행해지고 있었다.
고구려에는 624년(영류왕 7)에 당나라 고조(高祖)가 도사와 천존상(天尊像) 및 도법(道法)을 보내어 정식으로 도교가 전해졌다. 이 때에 고구려에 온 도사는 ≪도덕경≫을 강론했는데, 왕 이하 일반인 수천 명이 이를 청강하였다. 643년(보장왕 2)에는 연개소문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로부터 8명의 도사를 맞이했다. 왕은 불교 사원을 도관(道館)으로 변조했으며, 도사를 유사(儒士)보다 높이 대우했고, 도사들은 국내의 명산 대천을 진호(鎭護)하는 재초(齋醮)를 행하였다.
그런데 북위(北魏)의 구겸지(寇謙之)에 의하여 정비된 신천사도의 원형인 오두미도(五斗米道)가 크게 신봉되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도교는 영류왕 훨씬 이전부터 고구려에 수입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 도교가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노장 사상 및 신선 사상 등은 일찍부터 전해 오고 있었다.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近仇首)가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을 때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도덕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무모한 추격을 중지하도록 한 것을 보면, 이미 4세기 중엽 이전에 도가 사상이 백제에 들어와 있던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도가 사상과의 접촉은 삼국 중 백제가 가장 빠른 것이 된다.
백제의 와전(瓦塼) 중에 산경문전(山景文塼)으로 불리는 것은 삼신산(三神山)과 도관(道觀) 및 도사를 표현하고 있어 신선 사상 내지 도교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신라의 도교 전래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738년(효성왕 2)이지만 도교적인 문화 현상은 삼국 중 가장 현저했다.
신라 때에는 선풍(仙風)이 크게 성행하고 선가(仙家)의 인물이 많았다. 시조 혁거세(赫居世)를 선도성모(仙桃聖母)가 낳았다는 전설, 이른바 신라의 4선(仙) 또는 참시선인(旵始仙人)·물계자(勿稽子) 등에 관한 신선 설화가 전해 오며, 화랑도를 국선(國仙) 또는 선랑(仙郎)이라 부르는 것 등은 모두 도교적인 사상과의 연관을 보여 준다.
특히 최치원(崔致遠)은 우리 나라에 고래로 유·불·도를 포함하는 현묘한 도가 있는데, 그것을 ‘풍류(風流)’라 하며 그 사실이 ≪선사 仙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중국의 도교와는 다른 우리 고유의 선도(仙道)가 전해 내려 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시대에는 또 도교 수련의 전통이 세워졌다. 최치원·이청(李淸) 등은 당나라에 들어가 김가기(金可紀)로부터 단술(丹術)을 배우고 그것을 국내에 전파했다. 최치원은 도맥을 후세에 전해 준 인물로 추앙되었다.
3. 고려 시대
무속 신앙
고려 시대에 민중들의 의식을 지배해 온 신앙 중의 하나는 유교 혹은 불교가 수용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무속 신앙이다. 무속 신앙은 시대 전반에 걸쳐 민중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고려를 창건한 태조는 불교와 함께 무속에 기대어 건국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태조 이후 고려의 역대 왕들도 무속적 신앙에 따라 정치 기능의 일부를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각종 의례나 종교적 행사에 있어서도 무속적 행사가 공식적으로 시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려사≫에 300여 건이나 실려 있는 기우 행사(祈雨行事)였다. 기우 의식은 농경 사회에서 곡식의 풍요를 비는 행사인데, 고려조에서는 기우제에 무격(巫覡)이 동원되었다.
많을 때에는 무격이 300여 명이나 모여 의례를 갖추었다고 한다. 이러한 무의(巫儀)는 결과적으로 신의(神意)를 얻어 비를 내리게 함으로써 한재(旱災)를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어 국왕까지도 스스로 기우제에 나섰던 것이다.
무속의 제재초복적(除災招福的) 성격으로 인해 왕 및 왕족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까지 무격이 동원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산천에 사신을 보내어 태자의 병이 낫기를 빌기까지 하였다.
민간에서도 기자(祈子)·초복(招福)·제화(除禍)·제액(除厄)·구역(驅疫) 등을 위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성황 신앙(城隍信仰)이 넓게 퍼져 있었다.
고려조는 또 덕적산·백악·송악·목멱산 등 4대 산을 정하여 무녀로 하여금 봄과 가을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이는 명산에는 산신이 머물러 있는 것으로 믿어서, 그 산신을 위로하고 제사함으로써 국가의 태평과 백성의 안전을 기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려 시대의 이러한 무속 신앙은 삼국 시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무격신은 분화되어 다양해졌고, 불교·도교 등이 전래되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무속신앙은 이들 종교와 혼합되었다.
무와 불·도와의 혼합 현상은 앞서 말한 기우 행사에서도 볼 수 있다. 즉, 기우제에서 무사(巫事)가 치러지는 한편, 도교의 술사(術士)와 불승(佛僧)들에 의한 기우 행사도 함께 행해졌던 것이다.
유교의 발전
태조 때부터 국가의 통치 원리로 받아들여지던 초기 유학은 광종이 문치주의를 표방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유교와 한문학의 교양을 지닌 사람을 관리로 등용하기 시작하고, 성종 때 최승로(崔承老)의 건의에 따라 모든 의례를 유교의 예법에 따르게 하며, 국자감을 두어 유교 경전을 가르친 뒤로는 신라 시대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발전했다.
이 시기의 유학은 그 자체가 통치 질서의 이념으로 채택되어 발전되었므로, 주로 인간의 내면 정신 생활을 주도해 왔던 불교와는 크게 대립되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의 지식인들은 유교와 불교를 아울러 연마하는 자가 많았다. 이 점이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과 다른 점이다.
유교의 발전은 문벌 존중의 풍조와 짝하여 사학의 발전을 가져 왔다. 문종 때 해동공자(海東孔子)라 불리던 최충(崔冲)은 구재학당(九齋學堂)이라는 사숙(私塾)을 만들어 9개의 전문 강좌를 두었으며, 그 문도를 최공도(崔公徒) 또는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렀다.
최충의 구재학당 이후 사학이 계속 발전하여 사학 12도(徒)가 생겨나 관학(官學)의 침체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에 예종은 관학이 떨치지 못함을 염려하여 국학에 칠재(七齋)와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고 궁중에 청연각(淸讌閣)·보문각(寶文閣) 등을 두어 유교 경전을 연구하게 하였다.
안향(安珦)은 충렬왕 때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하였다. 이 때부터 고려 후기의 유학은 고문 경학(古文經學) 중심에서 사서오경 중심으로 발전되면서 송나라의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주자학은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이치를 밝히려는 철학적 성격이 농후한 유학인데, 의리와 명분을 존중하고 이단의 배척에 철저하였으므로 불교와의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고려 말기에 주자학 전래 초기의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 등은 불교 자체를 공격하지 않고, 단지 승려와 교단의 타락 등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에 이르러서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불교 배척론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불교 배척론은, 유교와 불교의 공통성과 차이점을 제시함으로써 당시 불교 사회를 유교 학술 사회로 전환시키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는 점에서, 종래의 배불론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발전과 폐단
삼국 시대의 불교는 왕권에 의해 뒷받침을 받아 국가 권력과 밀착, 그 그늘 밑에서 교세를 확장해 갔다. 이러한 삼국 시대 불교의 특징은 고려조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그 호국적 성격 때문에 더욱 보호·장려되었다.
태조는 그의 건국 대업을 불법의 가호에 의한 것으로 확신하여 개경에 7층 탑, 서경에 9층 탑을 세웠으며, 개경에는 흥국사·왕륜사·법왕사 등 10여 개의 사찰을 세웠다. 태조가 불교를 보호, 권장한 이후 역대의 왕들도 숭불책을 추진하여 많은 사찰과 사탑이 건축되었다.
이러한 국가의 불교 보호는 승려의 사회적 지위도 보장하였다. 국가는 승려에 대한 출세의 길을 마련하기 위하여 승과(僧科)라는 국가 시험 제도를 두었고, 사원에는 전지(田地)와 노비가 급여되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이 베풀어졌다. 그리고 이 같은 보호와 장려 아래 사원과 승려의 속권(俗權)이 확대되어 승려는 귀족 신분을 이루었고 사원 경제가 팽창해 갔다.
그런데 고려의 불교는 이와 같이 외형상으로는 융성했으나 교리 자체의 발전은 별로 없었다. 이러한 불교계에 새로운 자극과 혁신을 불러일으킨 인물이 의천(義天)이다.
그는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송나라에 가서 화엄 교리(華嚴敎理)와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웠다. 귀국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내세워 교(敎)·선(禪)의 대립을 해소하고 그 상의합작(相依合作)을 주장하여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천태종은 화엄종과 같은 교종에 속한 종파였지만, 교종으로서는 가장 진전된 사상 체계를 가졌다. 또, 그것은 과거의 불교를 정리하고 교와 선의 대립을 절충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므로 천태종의 성립은 과거의 불교에 대한 비판과 직결되었다. 의천의 출현은 고려 불교의 황금기를 가져 왔을 뿐만 아니라 실로 한국 불교사의 흐름을 전환시킨 계기를 마련하였다.
무신 집권 이후에는 선종이 크게 진흥되었다. 지눌(知訥)은 조계종이라는 독특한 선종을 창설하여 조계종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 의천이 교종을 중심으로 교와 선의 일치를 주장하는 데 비해, 그는 선을 주로 하는 교와 선의 조화와 정(定)과 혜(慧)의 쌍수(雙修)를 추구하였다.
그의 교·선 조화의 구체적인 내용이 돈오점수(頓悟漸修)이다. 돈오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는 것으로, 그 방법은 좌선을 위주로 하여야 하나 때로는 염불이나 독경에 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닫는 돈오 이후에 점수(漸修)가 요청된다. 돈오 이전의 수행은 참다운 수행이 아니며, 점수란 돈오 이후에 부처로서 살아가는 수행을 일컫는다. 그 뒤 고려 불교계는 종래의 오교·구산 대신 오교·양종으로 개편되었다.
고려 불교의 특기할 만한 사실은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격퇴시키려는 염원에서 착수된 대장경의 조판이다. 대장경의 조판은 비록 국민의 막대한 부담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했지만, 동양의 불교 문화에 이바지한 공헌은 막중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고려의 인쇄술의 발달을 자극하여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를 만들어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고려 시대의 불교는 호국적 성격 외에도 현세 구복적인 특징을 지녔다. 팔관회 등은 국가와 개인의 현세적 행복을 구하는 구복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것은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내세적인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복락을 구하는 기복적인 것으로서 재래의 무속 및 도교 신앙과 결부된 것이다.
고려 불교는 국교로서 왕실과 귀족의 적극적인 비호 아래 성장하여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나, 그 세속화에 따른 사원의 무리한 확대와 사찰의 난립 및 고리대업의 성행 등 여러 가지 사회적 폐단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불교의 사회적 폐단은 고려 말에 새로이 전래한 주자학에 국가 이념으로서의 위치를 이양하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도교
무속 신앙 및 불교와 혼합돼 왔던 고려 시대의 도교는 주로 재앙을 제거하고 복을 비는 국가적 행사로서 고려의 역대 왕들과 민중들까지도 신봉하였다. 우리의 토착 민간 신앙에 이미 있었던 산악 신앙은 물론이고 천지·일월성신 등의 신앙은 그대로 고려에 계승되어 도교적 의례인 초제(醮祭)에 흡수되었다.
신라 때부터 시작된 팔관회는 고려에 이르러 그 내용이 도교적인 것에까지 확대되어 천령(天靈)과 오악(五岳)의 명산 대천을 제사하였다. 연등 행사도 뒤에 도교적 성격이 짙은 당악가무희(唐樂歌舞戱)를 도입함으로써 도불잡유(道佛雜糅)로 되었다.
고려 도교의 특징인 불교와의 이러한 혼합 현상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사례가 팔성당(八聖堂)의 건립이다. 인종은 묘청(妙淸)의 설에 따라 즉위 9년(1131)에 이중부(李仲孚)를 시켜 서경의 임원궁(林原宮)에 팔성당을 건립하고 거기에 팔선(八仙)의 회상(繪像)을 안치시켰다.
그런데 팔성당이라는 것은 도교가 불교의 여러 신격(神格)을 결합시켜 국내의 명산에 봉안한 것으로 우리 고유의 산악 숭배 신앙과도 혼합된 것이다.
교단 조직과 이론면에서 한층 완비된 본격적인 중국 송대의 도교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은 예종 때이다. 도교를 독실하게 신봉한 송나라의 휘종은 고려에 도교를 전했다. 예종 또한 도교 신앙이 매우 깊어 도교 신상의 안치와 도관의 건설 등을 추진, 도교가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예종은 이중약(李仲若)의 건의에 따라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도관인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송나라의 휘종이 보낸 도사에 의하여 양성된 고려의 도사들이 각종의 도교 의례를 집행하였다.
고려 사회에서는 도교의 초제 행사 외에도 수경신(守庚申)의 습속이 상하에 널리 행해졌다. 경신일(庚申日)에 수야(守夜)하는 것은 도교의 장생법(長生法)과 사과신적(司過神的) 신앙에서 출발한 것이다.
원종 때에는 궁중에서도 태자까지 참가한 대규모의 경신수야의 모임이 있었는데, 이것은 조선 시대에까지 계승되어 더욱 축제적인 행사로 변모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또 신라 말기의 도선(道詵)에 의하여 선전된 풍수 지리 사상이 크게 유행하였다. 풍수 지리설은 지리 도참설이라고도 한다. 이 사상의 영향으로 과거에 지리과(地理科)가 생겼으며,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어 비보사찰(裨補寺刹)을 관장하게 하였다.
또, 도참 사상가인 김위제(金謂磾)의 건의로 숙종 때에 삼경제(三京制)가 나타났다. 명종 이후로는 삼경제 대신 삼소제(三蘇制)를 시행하여 3소에 이궁(離宮)을 짓고 왕이 순주(巡駐)하였다.
- 한국 종교의 역사적 전개 2 -
4. 조선 전기
유교 지배의 확립과 발전
여말선초 왕권 교체기에 유학자들은 정도전·권근 등 두 왕조의 임금을 섬긴 자와 정몽주·길재(吉再) 등 절의를 지켜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은 자로 구분되어 의리론이 조선 시대 유교의 중요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경국전≫·≪경제문감≫의 저술을 비롯하여 조선 사회의 통치 구조와 이념을 유교 이념에 의하여 정착시키려는 개혁 정책과 더불어 <불씨잡변 佛氏雜辨>·<심기리편 心氣理篇> 등 불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비판하는 저술을 통하여 적극적인 불교 배척에 나섰다.
이 무렵 도교도 억압되어 초례소(醮禮所)가 폐지되고, 그 뒤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러 소격서(昭格署)까지 문을 닫았다.
의리론에 따라 훈구파에 대립하여 나타난 사림파는 길재·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으로 학통이 계승되면서 성리학의 연마와 수양적 실천을 통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러 초야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다. 성종 때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 등이 관료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앙의 관계에서도 세조의 왕위 찬탈 문제로 사육신과 생육신이 출현하였다. 이들이 보인 절의는 의리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세속적 정치 권력에 저항하는 도학 정신의 발휘였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도 사림 출신인 김일손의 직필(直筆)이 발단이 되어 훈구 세력의 모함을 받는 데서 시작되었다. 중종 때의 기묘사화도 유교적 정치 이상을 실현하려는 조광조 등의 개혁적 정책에 반발하는 보수적 훈구 세력의 권력 투쟁에 사림 출신이 희생당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유교는 자기 완성의 학업이며[爲己之學], 홀로 있으면 선을 닦아야 하는 것[獨善其身]이지만, 자기의 구원으로 끝날 수 없고 모든 사람을 바르게 이끌어주는 법[治民方法]이요, 세상을 선하게 이룩하려는 것[兼善天下]을 지향한다.
따라서, 조선 시대 유학자의 이상은 자신의 덕을 밝혀 백성을 새롭게 함으로써 지선한 데까지 이르는 진지하고 엄숙한 도학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조광조 자신도 유교의 이상 사회인 요순 시대를 현재의 이 땅에다 실현시키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창하다가 세속적 세력에 희생되었던 참된 유교인였다. 조선 시대 사회는 이러한 유교적 정신을 존중하여 군왕에게도 선비를 특별히 우대할 의무가 부여되고 있었다.
제도적으로도 간관(諫官)은 직언으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언로를 확보하는 기관이다. 언로가 통하는지 막히는지가 국가의 안위에 가장 긴요한 것으로 인식되어 서민들의 여론까지도 반영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언관의 직책을 사림이 장악하여 무수한 희생을 겪으면서도 의리 정신에 입각한 직언을 함으로써 언관은 조선 사회가 지향하는 정당성과 이상의 규범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는 또한 도학의 내면적 깊이와 이론적 심화를 새로운 차원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성리학의 주요 문제로서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논쟁이 벌어져 유교의 학통은 대체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갈라졌다.
겉으로 보면 이러한 학파의 분열은 파벌을 조성하여 당쟁의 실마리를 이루고 무의미하고 관념적인 논쟁을 벌이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는 도학의 근본 과제인 인간의 심성을 철학적으로 구명하려는 요구와, 이에 상응하는 진지한 노력으로 충만되었던 때이며, 종교적 신념의 논리적 기반을 구축하는 시기라 볼 수 있다.
심성의 본질을 분석하면서, 선과 악의 근원, 선의 확장 등의 문제가 궁극적 관심이었다. 그 방법론의 입장에 따라 인심 내면의 도덕적 근원에 관심을 기울여 이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하는 입장과 우주론적 체계에서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를 주장하는 입장의 양립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유교 철학의 이해가 심화될 때 유교 의례로서의 예학(禮學)도 정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리학 도입 초엽부터 정몽주에 의하여 3년 상제(三年喪制)와 가묘제(家廟制)가 도입된 이후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 의한 제도 논의와 권근의 ≪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을 통해 예학에 대한 관심이 성장하여왔다.
퇴·율 성리학의 절정 이후에 유학은 정구(鄭逑)·김장생(金長生) 등의 예학파로 이어졌으며, 왕실의 상복 문제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이황의 청원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사액된 이후 지방 유림에 의해 서원이 전국적으로 건립되어 선현에 대한 향사(享祀)가 유교 공동체의 기본 의례로 확대되었다.
상례의 오복제(五服制)와 종법제(宗法制) 및 가묘의 설치와 제사전에 따른 적서(嫡庶)의 구분, 입후(立後)의 제도 등 가족 제도가 정비되었다. 그리고 사직과 종묘와 문묘는 가족 단위의 가묘와 더불어 유교적 신앙 대상의 기본을 이루었다.
이익(李瀷)이 유술(儒術)을 이학(理學)과 예학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교리와 의례가 이념과 제도의 양면처럼 상호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불교의 성쇠
조선을 창업한 태조는 독실한 불교도였다. 그는 즉위 후 조계종의 자초(自超, 無學)를 왕사로 삼고 천태종의 조구(祖丘)를 국사로 삼아 대장경의 인쇄를 완성하고, 조계종의 본사가 된 흥천사를 세워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태종 이후로는 적극적인 불교 억압 정책을 실시하였다. 70개의 사찰을 제외한 나머지의 사원과 재산을 강력히 제한하고 승려의 사찰 소유와 노비의 범위를 한정하였다. 종전 11개의 종단을 7개로 줄이고 왕사·국사의 제도를 폐지하였다. 국가가 승려에게 신분을 인정하고 병역 의무를 면제해 주는 제도로서 도첩제(度牒制)를 강화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 승려로 기화(己和)는 <현정론 顯正論>·<유석질의론 儒釋質疑論>을 지어 유교와의 적응을 모색하였다. 그는 유교의 ‘고요하면서 항상 감응함(寂而常感)’과 도교의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음(無爲而無不爲)’을 불교의 ‘고요하면서 항상 비움(寂而常照)’의 논리와 비교하면서 세 종교의 회통을 주장하였다.
또한, 세종은 초기에 7종을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시키는 등 불교를 억제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세종 자신이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여 유교인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궁중에 내불당(內佛堂)까지 지은 일이 있었다.
즉위 이전부터 독실한 신자였던 세조는 간경도감에서 각종 불교 경전을 출판, 번역하고 자신이 <영산회상곡 靈山會上曲> 등을 짓기도 하였다. 원각사 등 사원을 설립, 중흥하고 불교 문화 사업을 적극 펼쳤는데, 신미(信眉)·수미(守眉)·학조(學祖) 등은 이 때 활동하던 승려들이었다.
그러나 성종과 연산군으로 이어지면서 불교는 다시 배척받기 시작하여 염불소·간경도감·도첩제·승과, 양종의 도회소(都會所, 本寺) 등이 연이어 폐지되고, 심지어 승려를 관의 노비로 삼았다. 중종 때에는 사원의 토지를 향교에 편입시키고 사찰의 불상과 종을 병장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등 심한 억압 정책이 전개되었다.
다른 한편,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은 유학자로서 불교에 입문하여 선과 화엄과 법화에 관한 저술을 남겨 불교에 대한 깊은 학문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대 인물로서 정심(正心, 碧溪)은 고려 보우(普愚)의 법맥을 이어 온 곤수(混修)·구곡(龜谷)·각우(覺雨)를 계승하였다. 정심을 이은 지엄(智嚴)은 여러 제자를 배출했는데, 특히 영관(靈觀)은 휴정(休靜)과 선수(善修) 등의 고승을 길러 면면히 법맥을 이었다.
또한, 명종 때 문정 왕후가 섭정하면서 불교는 중흥의 기운을 보였다. 곧, 백담사의 보우(普雨)를 봉은사에 맞아 들여 양종을 세우고 승과를 부활시켰으며 황폐한 사찰을 새로 일으켰다.
보우는 <일정론 一正論>을 저술하여 유교와 불교의 교리적 연관성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즉, 우주적 원리(一)와 인간의 도덕적 원리(正)를 대조시키면서, 불교의 화엄과 선 사상을 바탕으로 역과 중용의 원리를 융합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문정 왕후가 죽은 뒤 보우는 죽음을 당하고, 불교도 다시 억압을 받아 침체하게 되었다.
도교의 부침
유교 중심의 조선 사회에 들어 와서 유신(儒臣)들에 의하여 이단으로 규정됨으로써 도교는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되기는 했지만, 왕실과 민간에서의 도교 신봉은 여전하였다.
특히, 왕실의 도교 신봉은 고려 시대에 못지 않아 도교 신전과 초제의 폐지를 둘러싸고 왕실과 유신들 사이에 심각한 대립을 일으켜 사화의 간접적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도학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으며, 이 도학의 기본적 특징은 이단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점에 있었다. 따라서 유학자 관료들은 도교의 여러 신전을 결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연히 도교 신전의 폐지를 끈질기게 건의하였고, 이에 조선왕실에서도 송도의 소격전 한 곳만을 남겨두고 모두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세조 11년에는 소격전이 소격서로 격하되었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 등의 끈질긴 반대로 소격서마저 잠시 폐지되었다. 그러나 중종은 기묘사화 뒤에 모후(母后)의 병을 구실로 유신들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소격서를 다시 부활시켰다.
그런데 이처럼 소격전을 소격서로 개칭하는 문제나 소격서의 폐지와 관련해 왕실과 유신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의 이면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깃들여 있었다.
유학자들이 소격서의 혁파를 주장한 것은 물론 유학의 강한 벽이단 정신에도 근거하고 있지만, 실은 하늘에 대한 제사는 오직 천자만이 행할 수 있고 제후는 자기 구역 안의 사직 내지 산천에만 제사할 수 있다는 중국 중심의 모화적 사대주의에 입각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격전에서 최고신인 옥황상제를 모시고 제사하는 것은 중화(中華)의 법도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유신들이 신전의 뜻을 가진 소격전을 관서의 의미인 소격서로 개칭한 것도 소격전의 신성성을 격하시키려는 의미에서였던 것이다.
한편, 왕실측에서 그렇게 끈질기게 소격전을 유지시키면서 계속 초제를 거행했던 것도 양재초복(禳災招福)이라는 생각만이 아니라, 초제를 통하여 최고의 신에게 직접 제사함으로써 내적으로라도 국권의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심리가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고려조에서 여러 가지 정치 문제를 일으켰던 지리 도참 사상은 조선 시대에 들어 와서도 크게 유행하였다. 태조는 하륜(河崙) 등의 학자들에게 풍수를 연구하여 새 도읍을 정하게 하였다.
지리 도참 사상이 이렇게 국가적으로 크게 중요시됨에 따라 민간에서도 각종의 비기(祕記)와 참위 술수에 관한 서적들이 만들어져 지리 도참에 관한 신앙이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태종 17년에는 참위서에 대한 금령(禁令)이 내려져 민간에 유포되어 있는 참위서를 회수하거나 소각하였다. 이것은 미신의 만연을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참위서에 의하여 혹시라도 역성 혁명과 같은 반란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조선 시대 도교의 특징은 종래에 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신봉되던 수련적인 도교인 단학(丹學)이 두드러지게 성장하면서 도맥을 형성했던 점이다.
조선 전기에 이루어진 ≪해동전도록 海東傳道錄≫에는 도법을 전수한 인물과 그들의 저서가 많이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살펴 보면, 그 당시 조선 단학파의 계통이 종리권(鍾離權)에 연원을 둔 중국 전진교(全眞敎)의 계통임을 알 수 있다.
단학의 양생 사상은 또 조선의 의학 발전에 큰 구실을 하였다. 허준(許浚)에 의하여 편찬된 ≪동의보감≫은 우리 나라 최고의 걸작품으로서 중국과 일본에서도 크게 유행하였는데, 그 내용은 도교의 원리를 근본으로 해 의술을 논한 것이다.
5. 조선 후기
실학의 대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적 혼란과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유교는 그 이념과 현실적 적응 간의 괴리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학이 유교의 본래 이념인 도의 현실적 실현에 배반되는 공리 공담에 젖는 폐단으로 나타나자, 유학계 안에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 경세제민·실사구시·이용후생을 주창하는 실학파가 나타났다.
유형원(柳馨遠)·이익·안정복(安鼎福)·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박제가(朴齊家)·정약용(丁若鏞)·김정희(金正喜) 등 실학자들은 경학·역사·지리·경제 등 다양한 방향에서 연구와 저술을 통해 활발한 학술 활동을 벌였으며, 때로는 반주자학적(反朱子學的) 입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가까운 데에서 먼 데로 나아가고 비근한 데에서 심원한 데로 추구하는 방법, 즉 존재의 선후론이 아니라 당위의 선후론을 존중하였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실학파의 입장은 주자학파와 모순된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방법의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요동 땅에 들어 가서 그 백성들의 규모 있는 생활 양상을 보자, “이용을 이룬 다음에야 후생을 할 수 있고, 후생을 이룬 다음에야 정덕(正德)을 이룰 수 있다”는 실학적 방법론을 제기하였다. 그가 지향한 것은 이용·후생의 방법을 수단으로 하고 정덕의 이념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었다.
실학파가 공리적 실질을 통해 주자학파의 의리 사상이 지닌 관념적이고 형식적인 허구성을 비판한 것은 의리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 기반이 없는 의리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의 공효를 추구하면서 사상을 사고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행동의 세계로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실학 사상은 그 당시의 정책에 거의 반영되지 못하고 말았으며, 주자학적 정통성에 대한 대립 세력으로 성장하지도 못했다.
천주교의 전파
영·정조 시대로부터 천주교가 유교적 전통 사회에 전파되면서 하나의 커다란 사회 문제와 사상적 갈등을 보여 주었다. 특히, 실학파의 주류를 이루는 기호 남인의 일부가 천주교의 연구와 신앙 활동에 참여하자 유학계뿐 아니라 정부도 천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탄압을 가하였다.
이벽(李檗)·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용 형제 등 당대의 명문 사족(士族)이 천주교 신앙에 입교하자 뒤따라 비판의 공격이 집중되어 이들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그리고 정치적 권력 투쟁과도 얽혀 천주교 신앙을 배교하더라도 형벌을 면할 수 없었다.
더욱이 부패한 관료 계층에게 억압을 받던 하층 서민 속으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자 유교적 전통 질서가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이에 정부는 국법으로 모역죄에 해당시켜 천주교 신도들을 신유사옥 등으로 엄격하게 탄압하였다.
조선조 말기에는 이미 유교 이념의 진지한 도학 정신은 쇠퇴하고 도학 질서의 말폐가 극도에 달하여 사회 붕괴가 일어났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정착한 유교 체제는 제사를 거부하고 유교적 가족 윤리와 국가 윤리에 대해 이견을 내세우는 천주교를 가장 위험한 이단으로 배척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유교와 천주교가 갈등하는 초기에 정조는 천주교 신앙이 발생하는 이유를 유교 정신의 쇠퇴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유교 이념의 근원적 활력을 회복시켜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항로(李恒老)와 그의 제자 김평묵(金平默)과 유중교(柳重敎) 등은 천주교의 궁극 존재는 이가 아니라 기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로서의 상제는 자기 스스로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형기(形氣)를 지닌 성인을 통해 증험(證驗)될 수 있다고 하였다.
양명학
한편, 우리 나라에 양명학이 들어온 것은 명종 때로 볼 수 있다. 다만, 이황이 <전습록논변 傳習錄論辨>을 통해 양명학을 이단으로 비판한 이래 표면적으로는 거의 논의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양명학은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의 글에서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고, 정제두(鄭齊斗)에 이르러 조선 유학 속에 양명학파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학파의 일부 인물에게도 이해되었다.
최근세에는 박은식(朴殷植)이나 정인보(鄭寅普)에게서 양명학적 입장의 계승과 재현이 이루어졌다.
불교의 중흥
불교는 선조 때에 이르러 묘향산에 주거하던 서산대사 휴정의 출현으로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그는 선풍(禪風)에 깊이 통달하여 선교 양종 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됨으로써 교종과 선종으로 구별되던 조선 불교를 통합, 선과 교가 일체임을 강조하였다. 곧 그는, 교는 부처의 말씀(佛語)이요 선은 부처의 마음(佛心)임을 지적하고 교와 선을 아울러 수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저술인 ≪선가귀감 禪家龜鑑≫은 선종의 기본 정신을 집약적으로 밝혀 조선 불교의 선학에 지침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유가귀감 儒家龜鑑≫과 ≪도가귀감 道家龜鑑≫이라는 삼가귀감(三家龜鑑)을 저술하여 유·불·도의 3교가 형식에서 차이가 있지만 한 마음을 밝혀 미혹한 데서 깨달은 데로 이끌어가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3교 회통론의 정신을 제시하고 있다.
휴정을 통하여 불교 교단의 내부적 통합을 이루고 선풍의 새로운 활력을 일으켜 유정(惟政)·언기(彦機)·태능(太能)·일선(一禪) 등 도통을 계승한 고승들이 출현하였다.
또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산속에 숨어 명맥을 유지하던 승려들은 왜병에 항거하는 의병을 일으켰다. 묘향산에 있던 휴정은 팔도선교 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 되어 의승군(義僧軍)을 이끌었다.
그의 제자 유정은 금강산 및 관동 지역에서 일어나고, 영규(靈圭)는 청주와 금산에서 일어났으며, 처영(處英)은 지리산 및 호남 지방에서 일어났다.
그 밖에 의엄(義嚴)·언기·경헌(敬軒)·신열(信悅)·일선 등의 휴정의 제자가 각처에서 분전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국가의 위기에 불교 교단이 국가 수호의 호국 정신을 발휘함으로써 사회적 내지 역사적 소임을 뚜렷이 하였던 사실은 조선 시대 불교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것이었다.
한편, 휴정의 동문인 선수(善修)도 명승이었다. 그는 장로(長老)에게서 득도하고 영관(靈觀)에게서 심법을 얻었으며, 그의 인품과 덕성이 널리 알려져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하여 융성한 선풍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 각성(覺性)·희언(熙彦)·응묵(應默)·희옥(希玉)·성현(聖賢)·인문(印文)·담수(淡水) 등의 7파는 그의 선문을 더욱 번성시킨 한국 불교의 주역들이었다.
각성은 인조 때 팔도 도총섭이 되어 용맹을 떨치고, 그뒤 화엄사에 있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모아 항전하였다. 저술로는 ≪선원집도중결의 禪源集圖中決疑≫ 등이 유명하며, 그의 문하에서 수초(守初)·처능(處能) 등 쟁쟁한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한편, 유정의 법맥은 응상(應祥)을 거쳐 명조(明照)로 이어졌다. 휴정의 문하 중 언기의 파가 가장 왕성하였는데, 그를 계승한 의심(義諶) 밑에서 정원(淨源)·설제(雪霽)·도안(道安) 등의 명승이 나와 화엄 교의의 교화에 주력하였다.
조선 불교는 외형적으로는 거의 국가의 통제 정책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종파와 교단이 타율적인 통폐합을 거듭해 오다가 휴정과 선수 이후 중흥의 기미를 보인 것은 분명히 선종의 계열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력한 것은 화엄경의 연구였으므로 교학 중심의 면모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판승(理判僧, 工夫僧)과 사판승(事判僧, 事務僧)의 둘로 나뉘어지고 승려의 수행은 선·교·염불로 구분되게 되었다.
이 때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이가 긍선(亘璇)이었는데, 그는 ≪선문수경 禪文手鏡≫이라는 저술을 통하여 선을 조사선(祖師禪)·여래선(如來禪)·의리선(義理禪)으로 나누었다.
이에 대하여 의순(意洵)은 여래선과 의리선을 같은 등급으로 놓으면서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그 제자들에게까지 선학에 관한 활발한 토론이 번져갔다. 한편, 염불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희구하는 신앙도 널리 퍼졌다.
승직에는 양종의 실무 대표인 판사(判事)가 있었는데, 명종 때 양종과 함께 폐지되었다가 선조 때 총섭의 직책이 나왔다. 그리고 승려의 기강을 관리하기 위한 승풍 규정소(僧風糾正所)가 있었다.
도교의 민간 신앙화
조선 전기에 걸쳐 왕실과 유신들 간에 끊임없이 논란이 돼 오던 소격서는 마침내 임진왜란 이후 1592년(선조 25)에 영구히 폐지되었다. 도교 초제의 대상이었던 칠성·옥황상제·태상노군(太上老君)·염라대왕·사해용왕(四海龍王)·신장(神將) 등의 제신격(諸神格)은 소격서가 폐쇄된 뒤에는 민간 신앙에 흡수되었다.
도불잡유적(道佛雜糅的)인 현상은 조선 시대에 들어 와서는 더욱 구체화되고, 이러한 것은 특히 도교의 현세 중심적 사상에 의해 종합되었다. 조선조 후기의 도불잡유적 현상의 대표적인 것이 매복(賣卜)·기축(祈祝)·독경(讀經)을 업으로 삼는 소경의 등장이다.
이들 소경들은 각자 맡은 소임이 달랐는데, 이들을 분류하면 매복·명과(命課)·독경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특히, 명과맹인(命課盲人)의 경우에는 삭발을 한 도불잡유적 맹승(盲僧)이 있었는데, 이들은 선사(禪師)라고도 불리며 사회적 지위도 아주 높아서 왕이 궁궐을 출입할 때 조사(朝士)나 사마(司馬)와 같은 대열에 참가하였다.
독경을 하는 맹인이 사용하던 경은 비불비도(非佛非道)의 경이며, 간혹 불경이나 도경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맹인들이 독경을 하거나 매복, 기양(祈禳)하는 것은 중국에는 없는 것으로 우리 나라에만 있는 특징이다.
이 밖에 민간의 신앙으로서 고려 때 성행하였던 수경신의 습속이 일부에서 신봉되었고, 전각이나 문루의 기와 위에 신상을 안치하거나 혹은 가옥 신축 뒤에 행하는 안택(安宅) 등이 세간에 널리 행하여졌다.
그리고 칠성 신앙이 두드러졌는데, 우리 풍속 중에 시체를 매장할 때 칠성판을 밑에 까는 것은 칠성 신앙에 근거한 것이다. 사찰에서도 칠성각을 지어 복이나 자식을 얻기 위하여 칠성을 제사하였는데, 이런 것도 도불잡유적인 현상이다.
조선 말기에는 또 각종의 참위설과 풍수 사상이 사회의 혼란에 편승하여 인심을 크게 동요시켰다. 이 때 ≪정감록≫이 크게 유행하였고, 병화(兵火)가 미치지 않는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고향을 등지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또, 국가적으로 도교가 폐지되고 민간에서는 도교 사상이 미신적 속습으로 흐르는 중에도 진정한 수련을 위한 단학파들은 깊은 산으로 숨어들어 그들의 도맥을 이어갔다.
신라 시대에만 해도 표면에 나타난 선파(仙派)가 근대에 접어 들수록 점차 은둔하여 지금은 그들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찾아볼 수는 없으나, 단학의 성질상 그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의 단학파로서는 곽재우(郭再祐)·권극중(權克中)·이사연(李思淵) 등이 전해 온다.
천주교의 확산과 탄압
병자호란(1636) 이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북경에서 독일인 신부 샬(Schall, A.)을 만나 서양의 과학 기술과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에 앞서 선조 때 이수광(李睟光) 등이 ≪천주실의 天主實義≫를 소개하였고, 허균(許筠)은 천주교의 기도문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천주교와 서양 문명에 대한 포괄적인 평가는 이익에 이르러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천주실의≫를 평하여, “천주라는 존재는 유교에서의 상제이나, 그를 공경하여 섬기고 두려워 하여 믿는 것은 곧 불교의 석가와 같다”고 언급함으로써 천주의 초월성과 신앙 대상의 성격을 유교와 구분하여 불교에 견주었다.
그의 제자 신후담(愼後聃)·안정복은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였으나, 18세기 후반부터 성호학파에 속하는 인물 중 이벽·권철신(權哲身)·이승훈·정약용 등이 천주교 교리를 신앙하는 데로 발전하였다.
곧, 1777년부터 권철신을 중심으로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를 열었고,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오는 것을 계기로 1784년부터 신앙 집회가 일어났다.
그리고 1785년에 이들이 중인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신앙 집회를 갖다가 적발, 체포되었으나 김범우만 처벌되었다. 또 1787년에는 이승훈·정약용 등이 교리 연구를 위하여 성균관 근처의 사가에 모이는 사실이 동료 유생인 이기경(李基慶)·홍낙안(洪樂安) 등에 의해 비난받았다.
천주교 신앙 운동이 발전하여 몇 사람의 지하 활동 단계를 벗어나자 전통 사회와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1791년에 진산군에 있는 윤지충(尹持忠)이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상례를 갖추지 않고, 그의 친족 권상연(權尙然)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일이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천주교는 멸륜난상(蔑倫亂常)의 사도(邪道)요, 제사를 폐지하고 예속을 어지럽히는 사설(邪說)이라고 단죄되었던 것이다.
정조는 재위 기간 동안 천주교 신앙 문제를 확대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금교령이 있었으나 중인들의 주도 아래 신앙 운동이 활발히 성장하였다. 1794년 중국의 주문모(周文謨)가 최초의 신부로 입국하였고, 전교와 신앙 생활의 지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고 대왕 대비 김씨가 섭정을 하자 천주교도에 대한 대규모 탄압으로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전국에 실시하여 천주교도를 색출, 고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유교전통의 조선정부가 천주교신앙을 국가의 정통성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이고 정치적 총력을 기울여 제거, 정화시키겠다는 결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체포령으로 이가환·권철신이 매 맞아 죽고, 이승훈·정약종(丁若鍾) 등이 참수되었으며, 정약용이 유배되는 등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되었다. 이때 중국인 신부 주문모도 자수하여 처형되었다.
이에 황사영(黃嗣永)은 북경 주교에게 천주교의 박해와 주 신부의 처형 사실을 알리면서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여 호소하는 긴 편지(帛書)를 써서 발송하려다 발각되었다.
이를 접한 조선 정부의 입장은 천주교가 교리의 옳고 그름을 넘어 국가 통치권의 자주성과 독립성에 대한 일대 도전적 위협을 보인 데 놀라고, 사교로 대중을 미혹하는 데 앞서 반역적 행위로 판단하였다.
천주교 신앙 운동과 조선 정부의 정통 고수 태도는 순조 이후 더욱 정치적 긴박감으로 대립하였다. 1835년에는 모방(Maubant, P.) 신부를 비롯하여 프랑스 신부들이 잇달아 입국하여 지하 전교 활동을 벌여 교세가 확장되자, 1839년 서양 신부들을 비롯한 다수의 신도가 희생된 기해교난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때에는 천주교도의 세력에 유력한 사대부 계층은 거의 없고 선비들의 척사 상소도 별로 없었던 사실로 보아 국내 천주교도의 정치 세력이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배척하는 과정에서 이를 학문적 내지 신앙적 문제로 다루지 못하고 정치 문제로 가혹화시켰던 이유는 유교 사회에 교화될 수 없는 서민 집단이 형성되어 천주교가 유교 정치 제도 수행에 커다란 불안 요소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6. 최근세
개화론·수구론·유교 개혁 운동
대원군은 집정 후 타락한 유림의 세속화를 혁신하기 위하여 정조 때 이미 650개나 되었던 서원과 사우를 47개만 남기고 철폐하는 일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신성성의 종교적 경험을 통한 새로운 이념적 제시가 없는 한 유교의 자기 개혁은 불가능하였다.
전면적인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는 개화론과 구 제도와 의례를 고수하는 수구론이 대립하는 가운데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변복령과 단발령이 내려졌다. 전통적 제도의 상징이 순식간에 전면적인 억압을 당한 것이다.
병인양요 당시 척양론을 주장하고 나온 이항로를 중심으로 한 척사위정파 내지 한말 의리학파는 서양의 무력 침략에 저항하는 방법을 천주교 교리의 비판과 유교 이념의 재천명에서 추구하였다.
이들은 화하 문화(華夏文化)의 정통성을 밝히고 의리의 비판적 저항 정신을 고취하여 강상(綱常)의 윤리 규범과 예악의 의례 제도를 재현하기 위한 정열과 신념에 넘쳐 있었다.
유중교는 변복령에 대하여, “의복이 바뀌면 명분이 달라지고, 명분이 달라지면 의리가 독립할 수 없다”며 전통 의례를 지킴으로써 유교 정신을 보존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밝혔다.
최익현(崔益鉉)과 유인석(柳麟錫) 등은 위정척사론에 입각하여 외세의 압력에 따라 구 제도를 개혁하려는 개화 정책에 저항하고, 의병 운동을 일으켜 민족적 항쟁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의 변화를 외면한 수구는 객관적 효력을 상실하였고, 마침내 일제의 무력에 분쇄당하고 말았다. 식민지 통치 아래 근대적 개혁을 진행할 때 성균관과 향교 등 유교적 교육 기관은 무력화되고 전통적 사회 제도의 파괴와 타율적인 신 제도가 수립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 변화 속에서 유교의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이병헌(李炳憲)은 강유웨이(康有爲)의 영향을 받아 공자교 운동을 전개하며 ≪유교복원론 儒敎復原論≫을 저술, 제시하였고, 신기선(申箕善)은 대동 학회 내지 유교 학회의 조직을 추구하였다. 이승희(李承熙)는 만주에서 공자교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박은식은 ≪유교구신론 儒敎求新論≫을 통하여 개혁론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유교 개혁 운동은 극소수의 노력이었고, 이 때의 유교는 대부분 새로운 사회 질서의 형성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하였다. 전근대적·봉건적 구 질서도 비판의 채찍을 받았으며, 다만 가정 의례로 잔존하고 관습적 도덕 의식 속에 유지돼 왔던 것이다.
불교 교단의 변화
조선 말기를 지나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불교에 대한 탄압을 지양하고 이를 국가의 관리 하에 놓기 위해 1906년에 이보담(李寶潭)과 홍월초(洪月初) 등이 원흥사(元興寺)에 ‘불교연구회’를 설립하였다.
그 이전에는 이곳에 단지 총괄 관리서를 두고 대법산(大法山)·중법산(中法山) 제도를 실시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관리서는 곧 폐지되고, 승단에서 운영을 맡게 되어 일본 정토종 계열의 불교 연구회가 세워졌던 것이다.
이것이 얼마 가지 않아 1908년에 거국적 교단인 원종(圓宗)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종정 이회광(李晦光)의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종속적 연합 계략이 밝혀지자, 박한영(朴漢永)·한용운(韓龍雲) 등의 반대를 시작으로 1911년 송광사에서 임제종(臨濟宗)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몰락과 함께 불교도 일제의 지배 밑에서 선·교 양종의 이름 하에 31개의 본산으로 규합되어 중앙 총무원과 중앙 교무원이 각황사(覺皇寺) 안에 각각 사무소를 두고 서로 다투었다.
그러다가 1925년에는 재단법인 조선 불교 교무원으로 타협점을 찾았고 이것이 발전, 보완되어 1941년에 태고사(太古寺)를 세우고 방한암 선사(方漢岩禪師)를 종정으로 조계종의 발족을 보았다.
광복과 더불어 사찰령이 폐지되고 박한영이 교정(敎正)이 되어 각 도에 교무원을, 중앙에 총무원을 두어 식민지 정책의 불교를 벗는 대중 교화와 교육·문화적인 과제를 해결해 갔다.
신흥 종교의 출현
기존의 종교 교단이 지탱해 오던 한 사회의 가치 질서가 붕괴되고 민중의 의식이 동요하게 될 때 새로운 종교가 발생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조선 말기에 민중은 정치적 부패에 시달리면서 각종 재난과 외세의 위협을 당했으며, 종교적으로는 유교 질서가 혼란해져 천주교가 사회 저변에서 지하 운동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연히 현실에 대한 불안과 위기 의식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유교·불교·도교 등 기존의 교리를 종합, 보완한 새로운 종교가 출현함으로써 민중의 좌절과 염원을 흡수, 극복하려 하였다. 사회 변혁의 측면에서 유토피아의 도래를 염원하는 후천 개벽 사상이 나왔는데, 이는 정감록적 민간 신앙의 구세주 사상과 택지(擇地, 十勝地)사상에 영향받은 바 컸다.
최제우(崔濟愚)의 동학을 시작으로 김항(金恒)의 정역(正易)과 강일순(姜一淳)의 천지공사(天地公事)가 그 대표적인 예들인데, 이들 종파의 교주들은 대부분 무교적인 체험인 신명 사상(神明思想)의 논리에 기초한 카리스마적 전능을 가지고 출현하였다. 이들은 크게 동학계·유교계·불교계·국조계(國祖系)·기타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① 동학계 : 동학은 우선 그 명칭에서부터 서학(西學, 天主敎)에 대응하는 의미로 붙여졌고, 당시 동양의 중심 사상인 유·불·도의 3교와는 그 운수[運]와 진리[道]는 같으나 그 이치[理]가 다르다고 하였다.
동학은 하느님(天主)을 내세운 점에서 오히려 서학과 유사한데,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운 것은 우리 민족이 믿어 오던 하느님의 뜻(天命)을 따르지 않음이요, 그 뜻을 아는 길이 지성감천(至誠感天)의 방법이라 제시한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하느님을 진정으로 공경하게 되고, 최제우가 언급하였듯이 “나의 도에는 성(誠)·경(敬)·신(信)의 세 가지가 있으면 그만이다”라는 교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분명히 믿는다는 것이 마음[心]으로 그친다면 불충분하다. 역시 어떤 신체적인 것을 아울러 요구하는데, 이것이 기의 문제이다.
기는 생명을 가지고 운동하는 것이요, 신령한 기운이고 무궁하며 자존하는 것으로 본다. 또, 동학에서는 우주를 하나의 발전, 진화하는 것으로 보고 그 본체 생명을 기로 파악한다. 이 기가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며, 현실 세계의 모든 만물의 번성하고 쇠퇴하는 교체를 필연적인 변화로서 조화라고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최시형(崔時亨)에 와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 만물이 다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범신관으로 확대되고, 손병희(孫秉熙)에 와서는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이론으로 확대되어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事人如天)’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절대군주 체제 하에서 매몰된 개인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자각인 것이며, 한국적 인간 존중 사상의 한 결실인 것이다.
따라서,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세상을 제도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도는 면면히 동학 교도 사이에 흘러 들어 갑오 농민 운동의 지도 이념이 되었다.
동학은 손병희에 의하여 천도교로 개칭, 발전하였고, 시천교(侍天敎)·상제교(上帝敎, 天眞敎)·수운교(水雲敎) 등의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증산교(甑山敎)는 동학의 삼교 합일설 내지 인내천의 사상에 ≪정역 正易≫의 후천 개벽론을 첨가하여 ‘천지공사’의 사상 체계를 세웠다. 즉, 말세의 운수를 뜯어 고치기 위해 이념이나 규범과 질서 등을 개혁해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신(地方神·文明神·萬古逆神)의 부조화로 인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통일 신단을 결성하고, 이들의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신명(神明)을 보은(報恩) 줄로 이어 줘 화목 협동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천 시대의 오류를 수정하여 후천의 새로운 세계를 이룩한다는 조화의 이념을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선·후천의 재난과 액운을 없애어 신명의 원을 푼다는 액운공사(厄運公事), 세계의 분쟁과 반목을 공동체의 이념으로 교화한다는 세운공사(世運公事), 그리고 유교·불교·기독교·민간신앙의 정수를 통일, 결집하여 종교적 합일을 도모한다는 교운공사(敎運公事)의 개혁이론을 내세웠다. 종교의 계열에는 보천교(普天敎)·태극도(太極道) 등이 갈라져나왔다.
② 유교계 : 정역 이론을 확립한 김항은 스승 이운규(李雲圭)에게서 ≪주역≫을 공부하고 역(易)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여기서 그는 선·후천의 개념을 원리적 의미로부터 역사적 의미로 설정하고, 중국의 원시 경전으로서의 ≪주역≫에서 사상의 실마리를 끌어 오면서 우주의 새로운 질서와 원리를 규명하였다.
음양의 조화를 통한 사회적 평등과 평화를 제시하고 인간의 본성에서 신명성을 계발하여 신과 인간이 합치할 수 있는 경지를 제시한 것이다.
그의 제자 송철화(宋喆和)가 영가무도교(咏歌舞蹈敎)를, 하상남(河相男)이 대종교(大倧敎)를, 황대순(黃大淳)이 대동교(大同敎)를 각각 일으켰고,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일순도 이 논리를 체득하였다. 또, 강대성(姜大成)이 개창한 일심교(一心敎)는 유교를 중심으로 제종교의 규합을 추구하고 있다.
③ 불교계 : 조선조 불교가 여러 종파로 분열과 통합을 거듭해 오면서 새로운 종교의 면모를 보이는 것도 많았으나 1916년 박중빈(朴重彬)이 개창한 원불교(圓佛敎)를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그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고 종교 신앙과 도덕 훈련으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낙원 시대의 건설을 염원하였다.
인류 구원과 평화 세계를 건설하려던 성현들의 깨달음이 모두 하나의 진리라고 하여 법신불일원상(法身佛一圓相)의 진리를 신앙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고 사은(四恩)·사요(四要)·삼학(三學)·팔조(八條)로써 강령을 삼았다.
④ 국조계 : 1893년 김염백(金廉白)으로부터 시작된 단군 신앙은 단군이 신인으로서 이 배달 민족을 가르치고(敎化) 다스리기(治化) 위하여 강림하였다고 한다. “구름·비·바람·우뢰와 해·달·별들을 차지한 신장(神將)·선관(仙官)이 다 한배님의 부리심이며, 공자·노자·석가·예수 같은 이도 다 한배님의 나느심이다”라고 하면서, 이 땅의 인간들은 상제국조(上帝國祖)에 순응할 때 구원된다고 한다. 이런 계열로는 대종교·단군교 등이 있다.
⑤ 기타 : 관운장의 위엄을 믿고 관운장의 신명을 제사하는 관성교(關聖敎)가 있는데, 관우(關羽)의 묘(廟)는 서울의 동묘(東廟)와 계룡산의 무량천도(無量天道)에 있다.
그 밖에 도교 계통이나 무속 계통의 작은 종파들이 다양하게 발생하여 한정된 지역에서 성장하다가 소멸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근대에 접어 들면서 서구의 문화가 침투하기 시작하여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발전함에 따라 이전부터 내려오던 도교의 여러 속습들이 상당히 퇴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요소들은 여전히 풍습으로서 또는 신앙으로서 민간에서 행해졌다.
이 시기에는 정통적인 도가 또는 도교적 요소가 사회의 표면에서 대부분 사라져 버린 관계로 뚜렷한 문헌이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드물게 저술을 남긴 이는 1910년대를 전후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전병훈(全秉薰)이다. 전병훈은 그의 저서인 ≪정신철학통편 精神哲學通編≫에서 당시에 전래한 서구 사상은 물론 유·불·도의 제 사상을 도교의 단학 사상하에 통합하려 하였다.
그는 자신의 도교 사상을 단군의 ≪천부경 天符經≫과 연결시킴으로써 단군을 만세 학술의 조종이라 극찬하여 민족주의적 도교의 요소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의 도교 사상이 종래와 다른 특징은 신선학을 개인적인 선화(仙化)에서 나아가 사회적 대중 구원의 원리로 승화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는 도교의 교리를 서양의 의학설과도 연관시켜 도교의 원리를 현대적인 인식과 체계화로 나아가게 의도하였다.
또, 정신·심리·도가 하나로 일치함을 밝히면서 도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세계 통일 공화 정부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세계의 지도자들이 만약 도교의 신선학에 욕심을 두어 불로 장생의 선학을 익히게 되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줄어 나라 간의 전쟁이 종식되고 세계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개신교의 전파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는 귀즐라프(Gutzlaff, C.)목사였다. 그는 1832년 서해안 일대에 와서 한문 성서와 교리서를 나누어 주며 전도하고 돌아갔다.
1872년 영국의 매킨타이어(Macintyre, J.)와 로스(Ross, J.) 목사가 만주에 와서 이응찬(李應贊)·백홍준(白鴻俊)·이성하(李成夏)·김진기(金鎭基) 등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했고, 1884년에는 미국 북장로교에서 서상륜(徐相崙)·정공빈(鄭公斌)·최명오(崔明梧)·백홍준을 전도사로 임명하였다.
1887년에는 서상륜이 이 두 선교사와 함께 ≪신약전서≫를 번역, 간행하였으며, 이들 동료와 함께 각지에 흩어져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활약하던 이수정(李樹廷)도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조하였다.
1882년 미국과 수호 조약이 맺어지고 미국 북장로교 목사 알렌(Allen, H. N.)·언더우드(Underwood, H. G.)와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 H. G.)가 들어와 본격적으로 의료 및 선교 사업에 종사하였다. 이때 광혜원(廣惠院)이 세워지고 이어 스크랜턴(Scranton, W. B.)·헤론(Heron, J. W.) 선교사에 의해 제중원(濟衆院)이 개설되어 서양 의술을 통한 선교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885년 배재학당과 예수교 학당(儆新學校의 전신)이 설립되었고, 1915년에는 연희전문학교라는 고등 교육 기관까지 세워졌다. 1887년 아펜젤러는 정동교회를 세우고, 1895년에는 한국인 자력으로 소래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이를 이어 영국 성공회(1890)·침례교(1890)·캐나다 장로교(1898)·안식교(1904)·성결교(1907)·구세군(1908)이 선교 구역을 정하여 사업을 펴나갔다.
1892년 기독교 전교가 금지되었을 때에는 전도사 백홍준이 비밀리에 전도하다 발각되어 옥중에서 사망함으로써 우리 나라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개신교는 전교가 자유로운 시대에 성장하였다.
이 무렵 우리 나라 최초의 교회 신문인 ≪조선그리스도인회보≫(1897)가 아펜젤러에 의해 발간되었다. 그리고 언더우드·아펜젤러·스크랜턴·헤론 등은 성서 번역 위원회를 조직하여 ≪신약전서≫를 간행하였다.
기독교회는 일제에 항거하는 강력한 단체가 되었는데, 해서(海西) 교육 총회 사건, 신민회(新民會) 및 105인 사건(1910), 국민회 사건 등을 비롯하여 3·1운동 때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안창호(安昌浩)·이승만(李承晩)·이동휘(李東輝) 등 기독교인의 국내외 활약이 뚜렷하였다. 또한, 이상재(李商在)와 윤치호(尹致昊)는 여병현(呂炳鉉)과 함께 한국 YMCA를 세워 청년 운동의 디딤돌을 마련하였다.
기독교의 일본화를 도모한 일본의 신종교 정책이 진행되는 한편, 1·2차 교회 진흥 운동을 통한 길선주(吉善宙) 목사 등의 신령주의적 부흥회 활동은 이 시대 한국 개신교회의 성격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속적이고 광범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천주교의 전교
천주교의 지하 신앙 활동 기간에 한국 전교를 담당하였던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는 달레(Dallet, C. C.)신부가 ≪조선교회사≫(1874)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1886년 한불 수호 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전교의 자유를 확보하고 적극적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887년에는 원주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던 신학교를 서울의 용산으로 옮겨 예수 성심 신학원으로 명명하였다. 1890년대에는 서울 시내에 약현성당(藥峴聖堂)과 명동성당이 차례로 건립되었고, 여러 수도회와 수녀회의 진출과 함께 고아원·병원 등 사회 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교육 사업에는 그다지 주력하지 않았고 개신교에 비하면 전교 방법에서 훨씬 소극적 면모를 보여 주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어느 쪽이나 서양 문명을 배경으로 하였으므로, 개화 이후 근대화과정에서 새로운 시대 조류에 일치하는 종파로서 1900년대 이후 폭발적인 교세의 팽창이 일어났다. 일제의 침략 속에 민족 운동가의 참여가 있었고, 광복 이후 전쟁과 사회 불안 속에서 가속적으로 교세가 확장돼 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는 전통 문화와의 이질성으로 토착화의 문제에 많은 난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교 활동이 일반화되면서 현대 한국인의 신앙 속에 광범한 조직과 기반을 형성하였고, 사회적 소임도 적극화되고 그 비중도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 인간의 정신문화 양식의 하나로 인간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에 관하여 경험을 초월한 존재나 원리와 연결지어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힘을 빌려 통상의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인간의 불안·죽음의 문제, 심각한 고민 등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종교의 기원은 오래이며, 그 동안 많은 질적 변천을 거쳐 왔으나 오늘날에도 인간의 내적 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성 초경험적·초자연적이면서 의지를 가진 존재로 믿어지는 것이 신이나 영혼이며, 원리로 인정되는 것이 법·도덕이다. 이것들은 단순한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종교적 상징으로 만자(卍字)나 십자가(十字架)는 물론, 신상(神像)과 같은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또 신의 초인간적 행동이 신화로서 전해지고 숭배의 일정한 형식인 의례(儀禮)가 행해지는데, 이러한 종교의 특징이 고대로부터 철학자·지식인들 사이에 종교에 대한 경멸심을 일으키게 하고, 과학의 인식과 모순된다고 지적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상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체험할 수 없는 구체성·실재감(實在感)이 사람들의 종교를 지탱해 가는 매력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신앙을 함께하는 자들끼리 신앙적 공동체를 갖는 데 있다. 같은 신앙을 가진다는 원칙 위에 결성된 집단을 교단(敎團)이라고 하는데, 교단은 승려나 목사와 같은 전문가를 양성하여 신자에게 교리를 철저히 가르치며 공동체의 유지를 도모하는 한편, 외부에 대해서는 새로운 신자를 획득하는 행동, 즉 전도(포교)를 한다. 또한 교단에는 사회에서의 지배적인 종교를 볼 때,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입하는 경우와, 자기의사에 따라 가입하는 경우가 있다.
기원 종교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이유로 발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이미 원시시대, 수렵의 성공을 기원하는 벽화나 장법(葬法)에서도 영혼의 관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기원설의 자료가 된 것은 지금도 원시적 생활을 계속하는 미개인의 종교였다.
신비한 힘을 가졌다고 믿어지는 주물(呪物)을 기원으로 보는 페티시즘설(說), 사자(死者)의 숭배를 최고(最古)로 보는 설, 꿈과 죽음의 경험에서 육체 이외에 영혼을 상상한 것이 기원이라고 보는 애니미즘설, 마나(에너지와 같은 힘에 대한 원시신앙)를 애니미즘 이전의 신앙형태로 보는 마나이즘(manaism)설, 동식물과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의 신념을 원초(原初)로 보는 토테미즘(totemism)설 등이 19세기 말 이래 잇달아 제창되었다.
또 물질문화가 빈약한 미개민족에게 인격을 가진 지상신(至上神)이 많다는 점에서 연유된 원시 지상신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단순한 관념으로부터 복잡한 관념으로의 경과에서 파악되는 심리적 억측에 의거하고 있으므로 실증적인 근거는 희박하다.
전개 과정
미개종교에서는 각자가 당연한 습관으로서 전해진 것을 믿고 있으며, 개인적인 면보다 사회적인 면이 강해서 제사(祭祀) 등의 의례가 그 중심이 되었다. 다만 종교를 주재하는 신관(神官)의 계급이 생기고 국가형성의 진전과 더불어 각지의 신들이 통합되고, 신들의 친자관계와 그 역할 등이 체계화되었다. 이것이 전형적인 다신교(多神敎)의 시대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이집트 ·오리엔트제국(諸國) ·중국 ·페루에서와 같이 종교가 국가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국왕은 신 또는 신의 자손으로 여겨진 때도 있었다. 종교사상(宗敎史上) 최대의 질적 전개는 기원 전후 약 10세기 동안에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다.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의 전개(BC 8세기), 이스라엘 예언자의 활약(BC 8∼BC 7세기), 중국의 공자를 비롯한 제가(諸家)의 활동(BC 6∼BC 5세기), 그리스의 탈레스로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에 이르는 철학의 발생과 전개(BC 6세기 이후) 등이 주요한 것들인데,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미치고 있다. 이들 사상가의 특징은 합리화라고는 하지만 신화나 주술(呪術)에서 분리하여 체계적인 사상을 부여함으로써 철학 ·윤리 등이 독립하고, 정치와 종교의 밀접한 관계도 이루어졌다.
세계의 종교
세계적인 여러 사상이 나타난 시기에 발전한 종교사상 중에서 후세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현세부정의 사상이다. 미개 ·고대의 시대에는 타계(他界)관념은 있었어도 현세의 가치는 부정되지 않았는데, 이 시기의 종교는, 인간은 영원히 이 세상에 전생(轉生)하며 고통을 경험하여야만 된다든지, 타고난 죄(원죄)의 관념 등을 가르쳤다. 이와 같은 문제의 해결에는 이미 현세의 인간관계에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구제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내세에서 달성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민족 특유의 종교로부터 세계적 ·보편적인 종교가 출현하였다.
그 중에서도 BC 5세기에 힌두교에서 나온 불교, 1세기에 유대교에서 출발한 그리스도교, 7세기에 아라비아의 민족종교에서 발생한 이슬람교가 가장 세력을 떨쳤다. 이 종류의 종교는 석가, 예수 그리스도, 무함마드와 같은 교조가 있어서 각기 교단을 형성하고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서 전도(포교)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그 내부에서는 여러 가지 변천이 있었으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조직은 존속되어 정치적 집단에 비해 훨씬 오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근대 이후의 종교 근대에 들어와서 종교의 위치는 크게 변화하였다. 예술·도덕 등이 종교로부터 분화되고, 정치·경제·교육 등의 사회제도에서의 종교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신앙의 자유, 철저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 등이 그 일례이다. 또 한편으로는 계몽사상과 과학의 발전이 종교의 진리성과 존재의식을 위협하고 있고, 따라서 종교비판도 활발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는 끊임없이 그 현대적 존재의의가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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