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어, 고등어, 새우, 낙지, 배 등 먹을거리와 관련된 조상들 지혜 엿보여
가을엔 마음이 여유롭다. 사계절 가운데 몸과 마음이 가장 넉넉해지는 때는 역시 결실의 가을이다. 이런 생활과 정서가 듬뿍 담긴 속담들을 훑어보면 가을엔 역시 풍요의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황금들판에 일렁이는 곡식처럼 사람들 맘도 한껏 여유로워진다.
특히 먹을거리와 관련된 속담들이 흥미롭다. 그래서 “가을 들이 딸네 집보다 낫다”고 했다. 일손이 모자라는 가을엔 손만 조금 거들면 먹을거리가 생겨 배가 두둑하게 된다는 뜻이다.
비슷한 경우로 ‘가을 들판이 어설픈 친정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가을비는 떡비요, 겨울비는 술비다’ 라는 속담도 있다. 가을철에 비가 오면 곡식이 넉넉하니 떡을 해먹으며 쉬고 겨울철에 비가 오면 술을 마시며 즐겁게 논다는 뜻이다.
계절별론 ‘밥은 봄같이 먹고, 국은 여름같이 먹고, 장은 가을같이 먹고, 술은 겨울같이 먹으랬다' 가 재미있다. 밥은 따뜻하게, 국은 뜨겁게, 장은 서늘하게, 술은 차게 마셔야 한다는 음식과 술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온도를 사계절 기후변화에 빗대 재치 있게 나타낸 지혜가 돋보인다.
농업이 주축이었던 예전에 가을은 일손이 가장 아쉬웠던 계절이었다. 그래서 ‘가을 들판에는 대부인 마님도 나섰다’‘가을철에는 부지깽이도 저 혼자 뛴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심지어 ‘가을 들판에는 송장도 덤빈다’는 말도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가을 날씨는 예나 지금이나 변덕이 심했던 모양이다 ‘가을 날씨 좋은 것과 늙은이 기운 좋은 것은 믿을 수 없다’ ‘가을 날씨와 계집의 마음은 못 믿는다’고 했다.
더욱이 가을장마는 농작물에 치명적 피해를 끼쳐 ‘가을장마에 다 된 곡식 썩인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선인들은 가을의 풍요로움에만 취하지 않았다. 살림살이가 어려웠던 까닭인지 가을 뒤에 잇따를 내년 봄을 준비하는 꼼꼼함도 보였다.
풍성한 가을에 곡식을 아끼고 춘궁기를 넘긴다는 뜻에서 ‘가을 곡식을 아껴야 봄 양식이 된다’ ‘가을 죽은 봄 양식이다’고 말했다.
‘가을 가지는 며느리가 먹으면 해롭다’는 말이 있다. 가을에 속까지 잘 익은 가지는 떫은맛이 적어 날로 먹기 좋으므로 찬거리를 위해 밭 나들이를 자주하는 며느리가 가지를 따 먹을 기회가 많으니 아예 못 먹게 하는 방법으로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문헌에 보면 아이를 많이 낳아야할 며느리가 가지를 많이 먹으면 자궁을 다칠 위험이 있어 못 먹게 하는 말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가을에 전어를 구우면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 그만큼 가을 전어가 맛있다는 뜻이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란 말도 있다. 9∼11월 초에 잡히는 전어는 살이 통통하고 비린내가 적으며 뼈가 무르고 맛이 고소하다. 전어의 절정은 11월이다. 가을 전어 맛의 비밀은 풍부한 지방이다. 전어의 지방함량은 계절마다 크게 다르다. 가을은 봄의 3배다. ‘가을 전어의 대가리엔 참깨가 서 말’이란 구전은 이래서 나왔다.
‘가을 고등어와 가을 배는 며느리에게 주지 않는다’는 속담은 가을고등어는 며느리에게 주기 아깝다는 의미다. 고등어의 산란기는 여름이다. 산란을 마친 고등어는 겨울을 나기 위해 가을에 먹이를 양껏 먹어둔다. 이에 따라 지방함량이 높아져(20% 이상) 기름이 자르르 흐른다.
배는 사과와 함께 대표적인 가을과일이다. 만생종인 신고 배는 10월 초에 본격 출시된다. 배의 당도는 사과보다 낮다. 그러나 더 달게 느껴진다. 배를 먹고 남은 속으로 이를 닦으면 이가 잘 닦인다. ‘배 먹고 이 닦기’란 말의 유래다.
‘가을 상추는 문 걸어놓고 먹는다’는 상추를 여름채소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장마가 물러난 뒤부터 가을까지가 제철이다. 상추는 성질이 찬 식품인 데다 서늘하고 시원한 날씨를 좋아한다.?줄기 쪽에 수면·진정성분인 라튜카리움이 들어있다.
반면 길어지는 가을밤에 불면으로 고생하는 사람의 저녁상엔 상추쌈을 올릴만하다.
상추는 쓴맛과 단맛이 잘 섞여 있는 채소다.
‘가을 아욱국은 마누라 내쫓고 먹는다’ '가을 아욱국은 사위만 준다' ‘가을 아욱국은 사립문 닫고 먹는다’는 비슷한 속담도 있다. 서리가 내리기 전의 아욱은 맛이 유난히 좋다.
된장국엔 철마다 다른 재료가 들어간다. 봄엔 냉이·달래 등 봄나물과 조개, 여름엔 근대·시금치·솎음배추, 가을엔 아욱·배추속대, 겨울엔 시래기가 훌륭한 건지감이다.
아욱은 동양인이 주로 먹는 채소다. 서양인이 최고의 웰빙 채소 중 하나인 시금치보다 단백질·칼슘 함량이 두 배에 이른다.
‘가을 새우는 굽은 허리도 펴게 한다’는 속담은 장수와 호사의 상징이었던 새우 모습이 허리를 구부린 노인과 닮았다고 해서 해로(바다의 노인)라고도 불린다.
노인의 굽은 허리를 펴게 할 만큼 가을 새우 맛이 뛰어나다는 것을 비유한 속담이다. 굽은 허리를 교정해주지는 못할지언정 뼈 건강엔 유익하다. 칼슘이 멸치 못잖게 풍부해서다.
한방에선 새우를 남성의 양기를 북돋워주고 스태미나 원천인 신장을 강하게 하는 강장식품으로 친다. “총각은 새우를 먹지 말라”는 말이 이래서 나왔다.
‘봄 주꾸미, 가을 낙지’란 말처럼 낙지가 맛있는 계절은 가을이다, 쓰러진 소도 벌떡 일으킨다는 낙지의 효능은 기를 더해주고 피를 보충해주는 음식으로, 온몸에 힘이 없고 숨이 찰 때 효능이 있다고 한다.
낙지엔 자양강장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타우린 성분이 낙지 반 마리에 해당되는 100g당, 871mg이 들어있다. 굴 100g당 396mg, 미역은 200mg이 들어있는 것에 비하면 원기를 돋우는 음식으로 단연 으뜸이다.
한편 봄이 여성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남성의 계절에 비유됐다. ‘가을바람은 총각바람이고 봄바람은 처녀바람이다’ ‘여자는 오뉴월에 살찌고 남자는 구시월에 살찐다’는 평범한 표현과 함께 ‘남자의 가을은 무쇠도 뚫는다’ ‘여자의 봄은 쇠 젓가락도 녹인다. 가을은 쇠판도 뚫는다’처럼 걸쭉한 육담과 노골적 언사가 옛사람들의 진솔한 생활태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찬바람이 솔솔 부는 가을밤엔 임 생각이 간절해져 ‘장장추야(長長秋夜)에 임 기다린 듯한다’고 읊었다.
'가을 날씨와 늙은이 기운 좋은 것은 믿을 수 없다.' 조선시대 유교적 도덕관, 가족관을 드러내는 속담도 있다. ‘큰 어미 죽으면 풍년 든다’는 큰어머니 밑에서 잘 얻어먹지 못한 첩의 아들을 빗댔고, ‘딸은 가을볕에 내보내고 며느리는 봄볕에 내 보낸다’는 딸과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차별대우를 상징한다. 선선한 가을엔 딸을, 따가운 봄엔 며느리를 내보낸다는 얘기다. 그런데 풍족한 가을도 내내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안?선인들은 이런 자연의 철리에 순응하는 삶의 지혜를 속담 속에 녹였다.
‘매화도 한철이고 국화도 한철이다’ ‘가을 곡식은 재촉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아시아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