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의 군무속에 감춰진 네트워크의 비밀
새 떼는 극도로 무질서해 보이지만 새들끼리 충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율적인 움직임을 통해 그들만의 질서를 이뤄내기 때문이다. 수학적으로 이를 증명한 ‘군집이론’은 사회학과 공학의 다양한 분야에 활용된다.
《“자연을 지배하거나 ‘개조’하는 데 익숙한 사회에서 이렇게 공손한 모방은 전혀 새로운 접근 방법으로, 거의 혁명에 가깝다. 산업혁명과 달리 ‘생체모방 혁명’은 우리가 자연에서 채취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머니 격인 자연으로부터 배운 것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다.” ―재닌 베니어스 ‘생체모방,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 혁신’(1997년) 중에서》
세계적 디자인상을 휩쓸고 있는 배상민 KAIST 교수(산업디자인학)는 자연을 곧 ‘스승’으로 여긴다. 그는 1997년 파슨스디자인학교 졸업 당시 ‘사운드 펌프’를 만들어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사람의 심장이 피를 뿜어내는 것을 오디오의 증폭기에 응용한 작품이었다. 미국산업디자인협회(IDSA) 상까지 받은 그는 27세 때 파격적으로 모교 교수로 채용됐다. 그 후로도 그는 벌집 모양을 본뜬 천연 아로마 가습기 등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배 교수는 “바이오 디자인은 오래전부터 영감의 원천이 돼 왔다”며 “미적 측면에서 형태를 본뜨는 것도 가능하지만 자연에서 기능이나 시스템 자체를 모방해 성공한 사례도 많다”고 말했다.
비교적 ‘신입’에 속하는 인간이 수십억 년 된 자연에 의지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자연을 모방하는 행위가 유행처럼 번진 건 최근에 이르러서다. 게다가 마치 전에 없던 새로운 사상이 도래한 것처럼 시끌벅적하다. ‘생체모방(Biomimicry)’ ‘생체모방기술(Biomimetics)’ ‘생물영감(Bioinspiration)’ 등 이름도 여러 개다. 신소재개발 연구실, 건축설계사무소, 디자인개발실, 심지어 이동통신기술 연구소까지 자연을 베끼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왜 그럴까. 왜 이제야 사람들은 자연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을까. 그 대답 역시 자연에 있다.
왜 자연인가 1: 자율적이다
수만, 수십만 마리의 새가 한꺼번에 날아올라 군무를 추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물고기 떼가 바다를 새카맣게 수놓으며 이동하는 장면 역시 그렇다. 어떻게 그 많은 개체가 서로 부딪히지 않으면서 일정한 궤도를 이동할 수 있을까.
무질서한 생물 집단이 이뤄내는 질서화된 운동을 ‘군집(Flocking)현상’이라고 부른다. 각 개체는 △서로 일정하게 떨어져 있고(분리성) △주변 개체들이 이동하는 방향의 평균값으로 이동하며(정렬성) △주변 개체들로부터 낙오되지 않아야(결합성) 한다. 펠리페 쿠커와 스티븐 스메일은 2007년 이를 수학적으로(CS 모델) 증명했다.
군집운동의 핵심은 ‘자율성’에 있다. 새나 물고기 떼에는 명령을 내리는 대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각 객체들이 서로 간단한 정보만 교환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질서를 유지하면서 효율적으로 이동한다. 이정륜 중앙대 교수(전자전기공학)는 여기에 복잡한 네트워크 환경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열쇠가 숨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지금도 휴대전화를 쓰다 보면 롱텀에볼루션(LTE), 무선랜(Wi-Fi), 블루투스 등 다양한 망을 넘나들게 된다. 앞으로는 이런 네트워크 환경이 더 복잡해질 것이다. 이 교수는 자율적인 데이터 처리가 필수라고 했다.
“많은 네트워크가 혼재하면 그 사이에 다양한 역학관계가 생기죠. 현재와 같은 중앙 집중적 방식으로는 효율성이 크게 떨어집니다. 각 노드(기지국)가 데이터를 자율적으로 분산 처리해야 하는 거죠. 그 알고리즘을 바로 군집이론에서 가져온 겁니다.” 초기 단계이지만, 국내 한 이동통신사의 네트워크 기술인 ‘워프(WARP)’가 이와 비슷한 경우다.
군집이론은 무인폭격기에서도 사용된다. 무인폭격기의 단점은 실을 수 있는 폭탄 양이 적다는 것. 그래서 큰 타격을 입히려면 3, 4대가 동시에 출격해야 한다. 그런데 조종사 3, 4명이 동시에 원격으로 조종하면 무인폭격기가 서로 충돌할 위험이 크다. 새들처럼 군집비행이 필요한 것이다. 한 대만 원격 조종을 하고 나머지는 그 비행기와 정보를 주고받으며 날도록 설계하는 게 해답이다.
심장 본뜬 오디오…도마뱀 발바닥 접착제…자연이 과학이다
생체모방 알고리즘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개미집단 최적화(Ant Colony Optimization)’다. 개미는 먹이와 집 사이를 오갈 때 길을 잃지 않기 위해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을 땅에 떨어뜨려 놓는다. 수많은 개미가 오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최단거리의 길에 페로몬이 가장 많이 쌓인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개미가 페로몬 향이 가장 짙은 ‘최적화된 길’로 다닌다. 이 이론은 1990년대 후반부터 활발한 연구가 이뤄져 다방면에 활용됐다. 영국 브리티시텔레콤은 이를 데이터 신호를 보내는 최적의 경로를 찾는 데 응용했다. 미국 출판사 맥그로힐은 ‘다음 개미를 만날 때까지 먹이를 나르고, 그것을 바로 넘겨준다’는 수확개미의 단순한 행동방식을 물류창고에 적용해 생산성을 30%나 높이기도 했다.
왜 자연인가 2: 이미 검증됐다
자연 또는 생체를 모방하는 이유는 또 있다. 짧게는 수백만 년, 길게는 수억 년 가까이 특정 상황에 적응해온 ‘검증된 결과’라는 점이다. 자연계에는 각 분야의 최고 고수들이 수두룩하다. 게코도마뱀도 그중 하나다. 이 도마뱀의 발바닥에는 지름 5∼10μm(마이크로미터·1μm는 100만분의 1m)의 강모가 100만 개 이상 있다. 그 끝은 다시 지름 0.5μm 이하의 주걱 모양 섬모 수백 개로 갈라져 있다. 수직의 나무 표면이나 벽을 마음대로 오르내리는 도마뱀의 접착력이 바로 이 구조에서 나온 것이다. 서갑양 서울대 교수(기계항공공학)는 2005년쯤 게코도마뱀 발바닥을 확대한 사진을 우연히 보고선 말 그대로 ‘찌릿함’을 느꼈다.
게코도마뱀의 발바닥에는 주걱 모양의 섬모가 수억 개나 있다. 그래서 어떤 표면이라도 잘 붙고 잘 떨어진다. 이것을 잘 활용하면 영화 ‘미션임파서블 4’에 나온 거미장갑을 개발할 날도 그리 머지않았다.
게코도마뱀의 접착 원리를 처음 밝혀낸 것은 2000년경. 서 교수는 후발주자였음에도 현재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1등이다. 도마뱀의 발바닥 구조를 그만큼 똑같이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액정표시장치(LCD) 패널을 오염 없이 안전하게 옮기는 장치나 심전도 측정 장비를 피부에 붙여주는 패드 등에도 서 교수의 접착제가 쓰일 수 있다. 지난해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4’에서 톰 크루즈가 세계 최고층 빌딩인 부르즈 칼리파 외벽을 기어오르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영화 속 ‘거미장갑’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먼 미래도 아니다. 63빌딩을 자유자재로 기어오르는 스파이더맨이 곧 당신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다.
서 교수는 8월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 ‘네이처 머티어리얼스’에 또 한 편의 의미 있는 논문을 게재했다. 그는 게코도마뱀의 발에 있는 섬모 구조를 서로 맞붙여 강력한 고정 효과를 냈는데, 이런 구조가 딱정벌레에 이미 존재하더라는 것이다. 서 교수는 “딱정벌레가 날지 않을 때 날개를 접어 고정시킨다는 사실을 곤충학자들은 이미 100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며 “우리가 이를 재발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눈은 또 다른 생물체로 향하고 있다. 마찰열이 적은 뱀의 뱃가죽, 한꺼번에 약물을 끌어 모아 분출하는 독사의 이빨, 화려한 색을 내는 심해생물 등이 그것이다.
건축가들에게도 자연은 완벽한 벤치마킹의 대상이다. 스페인의 위대한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1852∼1926)가 대표적. 바르셀로나에 있는 ‘카사 밀라 라 페드레라’는 아예 인간의 골격 형상을 본떠 만든 집이고, 유명한 성가족교회 본당의 천장도 잎사귀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짐바브웨의 이스트게이트 센터(1996년)는 바위 모양의 흰개미집을 모방한 것이다. 마이크 피어스는 흰개미집의 자동정화시스템처럼, 산소가 많은 찬 공기는 아래로 들어오고 이산화탄소가 많은 더운 공기는 위로 빠져나가도록 설계해 에너지 소비를 90%나 절감했다.
김정기 홍익대 교수(도시건축대학원장)는 “간단한 구조체를 세울 때도 인장력과 압축력 등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며 “자연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보완을 거듭해왔기 때문에 구조나 시스템이 완벽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곤충의 날개, 동물의 뼈 등 이미 검증된 생체 구조에서 건축학적으로 배울 부분이 많다는 얘기다.
왜 이제야 자연인가 1: 한계의 인식
생체모방의 선구자 재닌 베니어스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생물학적 조상을 그대로 따라하는 편이 가장 현명한데도 인간은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자연으로부터 독립해왔다.(중략) 기술이라는 막강한 힘을 붙들고 사실상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우리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은 경작의 대상, 정복(개간)의 대상으로 변했다.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던 인간은 자연을 변화시킴으로써 발전을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구성주의’는 “인간의 인식이나 실천은 자연의 존재를 재현, 모방하는 게 아닌 인간이 자신의 틀을 직접 구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인간은 곧 한계에 다다랐다. 엄청난 양의 비료를 뿌렸지만 토지는 갈수록 척박해졌다. 환경의 오염은 인간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신나게 써대던 화석연료도 어느새 바닥을 드러낼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이정우 경희사이버대 교수(후마니타스학부장)는 “자연으로부터 멀어졌던 인간은 이제 생존에 위협을 느끼게 됐다”며 “그런 절박함 때문에 인간이 다시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20세기 들어 앙리 베르그송(1859∼1941)과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를 중심으로 한 ‘존재론적 전회(轉回)’가 주류로 떠올랐다. 이 교수는 “베르그송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쉽게 말해 철학이 객관적이고 자연적인 것에 무게중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뜻”이라며 “동양사상으로 해석한다면 ‘작위의 시대’가 가고 ‘자연의 시대’가 온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훼손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양심적 가책도 생체모방의 필연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세계적 디자이너였던 빅토르 파파네크(1927∼1998)는 “디자이너는 생태계 파괴에 대처하는 데 주저하지 말고 적어도 원형을 회복시키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과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왜 이제야 자연인가 2: 기술의 뒷받침
인간은 무한한 것만 같았던 자신의 능력에도 어느새 한계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지혜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산적한 숙제들 앞에서 좌절을 겪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인간에게 실마리를 던져 준 것은 자연이었다. 인간이 만든 어떤 물건보다 자연은 훨씬 더 정교하고 친환경적인 작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을 날고 싶을 때 독수리의 날개를 연구했고, 빨리 달리고 싶을 때는 맹수의 유선형 몸매를 흉내 냈다.
최근 들어 이런 모방이 훨씬 쉬워진 것은 자연을 관찰하는 인간의 눈이 훨씬 밝아졌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자연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고, 나노 공정의 발달로 자연계의 아주 작은 것도 관찰하고 따라 만들 수 있게 됐다. 서갑양 교수는 “사실 인간이 과학을 시작한 것 자체가 자연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었다. 다만 최근 생체모방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나노기술의 발전 덕분”이라고 말했다.
건축이나 디자인 분야에서도 신소재 개발로 생체모방 프로젝트들이 강력한 추진력을 얻고 있다. 김정기 교수는 “옛날엔 차마 따라 하지 못했던 자연의 구조물들을 최근엔 쉽게 재현해내고 있다”며 “이는 얇고 단단한 새로운 건축자재들이 쏟아져 나오는 덕분”이라고 했다. 사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화제가 됐던 수영경기장 ‘수이리팡(水立方·워터큐브)’도 그런 사례다. 설계업체였던 ‘PTW 아키텍처’는 건물 외피에 합성수지인 에틸렌테트라플루오르에틸렌(ETFE)을 사용함으로써 물의 분자구조 이미지를 구현해낼 수 있었다.
재닌 베니어스는 “양심의 가책이 우리를 고향(자연)으로 밀어주는 한편 자연과학에서 쏟아져 나오는 방대한 새로운 정보도 같은 크기의 힘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이와 비슷하지만 이정우 교수의 정의가 좀 더 쉽고 간단하다.
“생체모방은 지금까지 발전시킨 기술에 새롭게 돌아본 자연을 합친다는 의미입니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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