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열 이화여대 교수 논문서 ‘한국사 최고 외교 군주’ 평가
강력한 힘 가지고도 조공 활용… 라이벌 북위와의 현안 평화적 해결
동시대 백제는 조공 중단 고립 자초… 고구려 침략 받아 수도 한성 내줘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장수왕(394∼491)이 주변국과의 외교에서 힘을 과시하기보단 조공을 적절히 활용하는 등 ‘외교의 달인’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현대 외교로 치면 ‘왕복 외교(shuttle diplomacy)’와 같은 수법을 썼다는 것이다.
구대열 이화여대 교수(국제정치학)는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와 신라사학회의 공동 학술회의에 발표한 논문 ‘삼국통일과 국제정치’에서 장수왕을 “한국사가 낳은 최고의 외교 군주”라고 평가했다. 한반도(백제, 신라)와 중국이라는 2개의 전선에 끼여 전략적으로 취약할 수 있었던 고구려의 안보를 안정적으로 관리했다는 것이다.
구 교수는 특히 장수왕이 79년 동안 집권하면서 중국 북연(北燕)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백제 한성을 무너뜨리는 등 남북으로 크게 위세를 떨쳤는데도 중국 북부 지방의 강자였던 북위(北魏)에 수시로 조공을 바친 점에 주목했다.
‘조공’은 흔히 약한 나라가 힘센 나라에 어쩔 수 없이 각종 공물을 건네야 하는 굴욕으로 여겨지기 쉽지만 장수왕은 주체성을 지키면서도 때로는 상대의 예봉을 피하는 고도의 정책으로 적절히 활용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서기 436년경 북위는 북연과 전쟁에 들어가기 직전 고구려에 군사적 행동 금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장수왕은 이를 무시하고 북위와의 전쟁에 대비하던 북연을 약탈해 전리품을 획득했다. 이에 북위 측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장수왕은 이듬해인 437년 북위의 숙적이자 고구려로 망명한 북연의 왕 풍홍(馮弘)을 사형에 처한 데 이어 조공 사절을 두 달 연속으로 보냈다.
구 교수는 “장수왕은 조공 사절을 양국 간 현안을 해결하고 관계를 복원하는 데 활용했다”며 “이는 오늘날의 ‘왕복 외교’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반면 백제는 조공 외교에 실패해 고립을 자초했다.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에 자리 잡아 고구려처럼 중국과 한반도로부터 동시에 협공을 당할 위험이 적었다. 게다가 고구려는 전성기인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조차 중국 측 공격을 막아내느라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백제를 크게 위협하지 못했다.
백제 개로왕은 472년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에 “딸을 보내 후궁에서 비질을 하도록 하고 아들들을 보내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다”는 표현까지 쓰며 고구려를 함께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북위가 고구려의 강한 군사력에 부담을 느껴 이를 거절하자 개로왕은 조공을 즉각 중단했다.
강대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함으로써 중요한 동맹의 한 축을 스스로 무너뜨린 셈이다. 이후 고립된 백제는 3년 뒤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한성을 빼앗기는 참화를 당했고 이때 개로왕도 목숨을 잃었다. 구 교수는 “백제의 단교는 결국 대(對)고구려 관계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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