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중성(七重城)을 둘러싼 전투역사
-. 백제 온조왕 18년(AD1년) 10월에 말갈이 엄습하여 오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馬韓에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坑殺(산 사람을 묻어 죽이는 것)하였다.
-. 고구려장수왕의 南進(475년경)으로 고구려가 차지했다.
-. 신라 진흥왕(재위 540년- 576년)이 553년 백제의 한강유역 요지를 攻取했을 때 신라의 영토가 된다.
-. 신라 선덕여왕 7년(638년) 10월에 고구려가 北邊 七重城을 침범하매 백성들이 놀라서 山谷으로 들어가니 왕이 대장군 알천(閼川)을 명하여 그들을 안돈케 하였으며11월에 알천(閼川)이 고구려병과 七重城밖에서 싸워 이겨 적을 죽이고 사로잡음이 매우 많았다.
-.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던 태종무열왕 7년(660년), 고구려 말갈연합군이 다시 쳐들어와 다시 칠중성을 포위했다. 성을 지키던 신라의 현령 필부는 20여 일 동안 성을 지켰다. 불리해진 고구려군은 퇴각을 결심한다. 하지만 고구려군과 내통한 신라군 대나마 비삽이“성안에는 양식과 군사의 사기도 떨어졌으니 공격하라”고 고자질했다. 사실을 알게 된 필부는 반역자 비삽의 목을 친 뒤 군사들을 독려했다. “충신과 의사는 죽어도 굴하지 아니한다. 힘써 싸우자! 이성의 존망은 실로 이 한 싸움에 달려있다!”고 주먹을 휘두르며 부르짖자 病者까지도 모두 일어나 싸웠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지르고 안으로 쳐들어왔다. 마침내 현령필부는 빗발 같은 화살에 맞아 온 몸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리면서 죽고 성은 함락 당했다. 그 후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치고 신라군은 이 칠중성을 쳐서 진격로를 개척했다.
-. 문무왕 1년(661년)12월 10일에 유신은 副장군 仁問·眞服·良國 등 九장군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경내로 들어가게 되었다. 문무왕 2년(662년) 정월23일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배에 오르지 못했다. 유신이 말하기를 ‘제군이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여기에 왔겠는가’하고 자신이 먼저 배를 타고 건너니 여러 장졸들이 서로 따라 물을 건너 고구려땅에 들어갔다.
-. 문무왕 2년(662년) 정월에 ....아군이 호로하(瓠瀘河)에 다다랐을 때 고구려의 병마가 뒤를 쫓아와 岸上에 陳을 벌이었다.
-. 문무왕 7년(667년)에 대총관 이적(李勣)이 요동을 친다는 말을 듣고....大軍이 아직 평양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므로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을 쳐서 도로를 개통하고, 大軍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칠중성이 차차 함락되려 할 때....
-. 나당전쟁 때인 문무왕13년(673년) 고구려군이 당나라 이근행군에게 대패를 당해 고구려부흥운동이 와해되었고 고구려군은 신라군에 편입되었다.
-. 문무왕15년(675년) 그후 나당전쟁(羅唐戰爭; 670~676년)시기인 문무왕 15년(675) 당나라가 말갈과 연합해 신라를 침탈할 때, 이성은 잠시 당나라에 넘어갔으나 곧 도로 찾았다. 그해 당나라는 거란과 말갈연합까지 연합해 이성을 공격했지만 막강한 신라군에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가 신라에게는 삼국통일의 중요한 고비였다.
백제·고구려의 부흥운동과 나당전쟁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백제는 복신·흑치상지·도침 등을 주축으로, 고구려는 안승·검모잠·고연무 등을 주축으로 각각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 6년여의 나당전쟁(羅唐戰爭: 670~676년에 걸쳐 진행된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기간 중 이곳 칠중성에서 18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벌였으며, 676년 마침내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다.
칠중성에서 사방을 조망하다.
칠중성에 올라서면 임진강을 위시한 이 지역일대가 한눈에 시원스레 조망된다. 높이 148m에 불과한 이 重城山이 왜 삼국시대부터 전략의 요충지였는지를 짐작케 할 수 있는 대목이다.
태풍이 북상한다고... 어제, 기온은 38도까지 오르며 푹푹 찌지만 하늘이 맑고 시계가 멀리 탁 트였기에 정상에 올랐다.
연천 백학면 학곡리→구미리(사진의 임진강 왼쪽)와 파주 적성면 어유지리(강 오른쪽)
(사진 앞쪽에서 부터) 적성 가월리→비룡대교→백학 노곡리→백학 두일리
적성 주월리 →백학 전동리(오른쪽). (왼편)십자가 모양의 시설물은 연천 장남면 원당리의 번지점프장
파주 파평면의 파평산(496m)
감악산봉우리들 →정상(675m). 임꺽정봉(676.3m), 장군봉, 멧돼지봉.....
감악산계곡(설마천)과 설마치고개
적성 군인아파트 뒷편으로 퇴골계곡(오른쪽)과 큰퇴골계곡(왼쪽)
적성시내(구읍리)
제일 뒷쪽에 보이는 송악산...등 북한 개성의 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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