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급 고려 금강령 출토
사천왕·오대명왕 함께 표현
고려시대 사찰 寧國寺터에 지은 도봉서원 터서 유물 77점 나와
"이 금동제 금강령(金剛鈴)을 좀 보세요. 아랫부분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 위에는 오대명왕상(五大明王像)이 함께 표현돼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금강령은 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서 유일합니다."
21일 오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의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주경미 문화재 전문위원(금속공예사 전공)이 설명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사천왕과 오대명왕의 모습이 정교하게 표현된 길이 19.5㎝의 금강령이었다. 유물의 상태도 좋았다.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나온 고려시대의 비슷한 유물 중에서 기법이 가장 뛰어난 수작(秀作)"이라고 말했다.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정수(精髓)
서울 도봉산 기슭 옛 서원(書院) 터에서 고려 초기의 국보·보물급 불교 유물 77점이 출토됐다. 문화재청(청장 나선화)과 서울문화유산연구원(원장 김일규)은 21일 "2012년 5~9월 서울 도봉구 도봉서원 터의 복원 정비를 위한 발굴 조사 과정에서 유물을 수습했고, 이후 금속 유물에 대한 보존 조치를 거쳤다"며 해당 유물을 공개했다.
동영상보기☞http://www.youtube.com/watch?v=U1sQy-0ar9w&list=UUdp4_yTBhQmB8E339Lafzow#t=35
이 유물 중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금강령은 길이 17.7㎝의 금강저(金剛杵)와 함께 나왔다. 금강저에는 사리를 안치하기 위한 구멍인 사리공(舍利孔)이 뚫려 있는데, 이런 형태의 금강저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것이다. 제작 기법이 뛰어난 이 유물들은 화려하고 세련된 고려시대 금속 공예의 정수(精髓)를 보여주고 있다.
금강저는 방망이 모양의 불교 의식 도구이고, 금강령은 금강저의 한쪽 끝에 방울을 달아 놓은 불구(佛具)다. 여기 표현된 사천왕은 불국토를 네 방향에서 지키는 신(神)인 지국천(持國天), 증장천(增長天), 광목천(廣目天), 다문천(多聞天)이며, 오대명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인 중앙의 부동(不動), 동방의 항삼세(降三世), 남방의 군다리(軍茶利), 서방의 대위덕(大威德), 북방의 오추사마(烏芻沙摩)명왕이다.
함께 나온 물고기 모양의 탁설(鐸舌·흔들면 소리가 나도록 방울 안에 매다는 것)은 구슬을 물고 있는 독특한 모습의 유물로, 역시 유례 드문 것이라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이 밖에 ▲청동제 뚜껑항아리(유개호)와 뚜껑합(유개합) ▲고리가 달린 향로(현향로), 솥처럼 생긴 큰 향로(부형대향로), 짐승 다리 모양 발이 달린 향로(수각향로) 등 다양한 모습의 향로 ▲세숫대야형 용구인 세(洗) ▲향을 피우는 그릇인 향완(香埦) ▲굽 달린 사발인 대부완(臺附埦) 등이 나왔다. 현향로와 뚜껑합 등에는 명문(銘文)이 있어 유물이 나온 곳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옛 절 '영국사' 세울 때 묻은 듯
주경미 위원은 "유물 제작 시기는 12세기 중반 이전으로 보이며, 일부 유물에서는 8~9세기의 특징까지 보이고 있다"며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이르는 불교미술의 중요한 흔적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유물들의 출토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1호선 도봉산역에서 서쪽으로 약 1.5㎞ 떨어진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 6년) 창건된 서원이다. '율곡전서' '대동지지' 등의 문헌에 따르면 이 서원은 영국사(寧國寺)라는 옛 절터에 세워졌다.
도봉구청의 복원 정비 계획에 따른 발굴 조사 결과 실제로 도봉서원이 영국사의 일부 건물·기단을 재활용한 것으로 밝혀졌고, 유물은 과거 영국사의 대웅전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중심 건물 기단에서 발견됐다. 나중에 기단을 파서 묻은 흔적은 없었다. 애초 영국사를 세울 때 부처를 공양하는 의식의 하나로 불교 용구를 묻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발견된 청동 유물에서 '도봉사(道峯寺)'란 글자가 확인됐기 때문에, 영국사의 원래 이름이 고려 초기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도봉사'였을 가능성도 남게 됐다. <조선일보/201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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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명왕-사천왕 새겨진 금강령 황홀
서울 도봉서원 터서 고려 불교유물 77점 발굴
1000년 가까운 세월을 컴컴한 어둠 속에서 머물렀지만 빛을 잃지 않았다.
정암 조광조를 추존하기 위해 세운 서울 도봉서원 사당터에서 출토된 금동제 금강령(金剛鈴)은 은은한 광이 났다.
12세기 중반 이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령은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정수를 품고 있었다. 몸체부(部)에 부조된 오대명왕상(五大明王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은 종이 위에 스케치한 것처럼 정교했다. 오대명왕 중 하나인 오추사마명왕의 몸을 휘감은 뱀의 똬리, 사천왕이 든 칼과 활은 생동감 넘쳤다. 손잡이에는 단아한 연꽃잎이, 고부(고部)에는 역동적으로 다섯 갈래로 뻗은 번개가 있다. 종을 울리는 잉어 모양의 탁설(鐸舌)의 비늘과 지느러미도 선명했다.
문화재청이 21일 공개한 고려시대 불교유물 77점은 2012년 9월 도봉서원 복원정비 작업 중 발견됐다. 불교 의식에 쓰이는 일종의 종인 금강령과 번뇌를 쫓을 때 쓰이는 방망이인 금강저(金剛杵)를 비롯해 청동제 뚜껑항아리와 뚜껑합, 향로, 발우, 숟가락, 대접 등이 거적때기로 감싼 커다란 청동솥 안에 들어 있었다. 문화재청은 도봉서원 터에 있던 옛 영국사(寧國寺)를 창건할 때 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해 대웅전 기단 아래 묻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금강령은 고부가 파손된 순천 송광사 금동요령(보물 제176호)보다 보존 상태와 제작 기법이 뛰어나 국보로 지정될 가능성이 크다.
주경미 문화재청 전문위원은 “지금까지 발견된 금강령 중 가장 제작기법이 뛰어나고 보존 상태도 우수하다”며 “오대명왕과 사천왕이 한꺼번에 새겨진 금강령은 중국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고려시대에 자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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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道峯書院)
‘止’자와 이름 ‘壽增’이 물에 잠겼다.
도봉서원은 현재 복원공사 중이다.
[사진 / 白眉 / 2014.04.02]
☞ http://dobong.grandculture.net/Contents?dataType=01&contents_id=GC04901092
도봉 서원(道峯書院)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 512번지에 있는 서원으로, 서울 시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의 서원이다. 1573년(선조 6)에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한 남언경(南彦經)이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행적을 기리는 뜻으로 도봉 서원을 건립하고 이듬해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후 도봉 서원은 300여 년간 서울·경기 지역 선비들의 주요 교유처가 되었으나, 고종 대에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70년대에 복원을 통하여 3칸 정도 되는 사우(祠宇)와 3개의 문이 남아 있고, 조광조와 송시열(宋時烈)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2011년부터 다시 복원 사업에 들어갔으며, 2014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도봉 서원 주변 계곡에는 조선 시대 문인들이 남긴 글씨들이 새겨진 바위들이 많다. 도봉 서원과 그 주변 유적들에 대한 기록은 조선 후기 주요 문인들의 문집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도봉 서원은 조선 시대 서울·경기 지역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서원이다. 서원의 건립자는 양주에 목사로 부임했던 남언경이다. 남언경이 1573년 도봉 서원 건립을 시작했을 때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사류들이 조정에 대거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해 나가면서 기묘 사림의 복권과 훈신(勳臣)의 축출이 완료 되어가던 때이다. 남언경은 기묘 사림의 우두머리인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도봉산의 영국사(寧國寺)터에 서원을 영건하고 조광조를 제향하였다. 도봉 서원의 설립은 선조 대 이후 사림이 학문적, 정치적으로 급성장하면서 헤게모니를 잡아가던 분위기를 반영한다.
도봉 서원의 공역이 시작될 때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사류들에게 통문이 널리 발해지는 등 전국적인 규모로 서원의 영건이 진행되었으며 1579년(선조 12) 완성되었다. 공역을 주도한 인물은 부제학이었던 허엽(許曄)·좌참찬 백인걸(白仁傑)·이조참판 박소립(朴素立) 등 조광조의 문인들이었다. 이중 허엽은 서원 공역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주변 선후배 사류들에게 재정 지원을 부탁했고, 서원의 규령(規令)을 제정했다는 기록이 이이가 지은 『도봉 서원기』에 있다.
또한 서원 건설이 진행되던 1574년 9월 조정에 있던 부제학 유희춘(柳希春) 등이 도봉 서원의 사액을 청하였다. 이에 대해 선조는 도성의 근처에 있고, 당시 문제가 되던 서원 첩설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으려 했지만 여러 사림들의 청원에 결국 ‘도봉’이라는 사액을 내려주었다. 사액을 받은 도봉 서원에는 막대한 전답이 지급되었는데, 본래 영국사에 소속되어 있던 전지 외에도 호남의 면세지 100여 결이 추가 지급되었다. 이후에도 조광조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경제 지원이 이루어졌다.
도봉 서원은 건립 이후로 서울과 그 주변 지역의 명사들이 계속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으며, 유력 가문 자제들의 수학처, 학문 토론 장소로 이용되었다. 특히 효종 대 이후부터는 송시열·김상헌(金尙憲)·이단상(李端相)·권상하(權尙夏)·윤봉구(尹鳳九)·김수항(金壽恒)·김창협(金昌協)·박세채(朴世采) 등 서인 사류들이 많이 다녀갔고, 노론과 소론의 분기가 이루어진 이후에는 도봉 서원을 둘러싸고 정치적 대립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도봉 서원 향사 여부를 둘러싼 노·소 간의 논쟁이 그것이다. 송시열은 1696년(숙종 22) 도봉 서원에 조광조와 나란히 배향되었지만, 1723년(경종 3) 출향되었다가, 1725년(영조 1) 재배향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775년(영조 51)에 영조가 ‘도봉 서원(道峯書院)’이라는 현판을 친필로 써서 내리면서 도봉 서원은 친필 사액 서원이 되었고, 문묘에 배향된 조광조·송시열 양현(兩賢)을 모시는 명실상부한 최고 서원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03년 도봉 서원 주변 유림들은 서원의 제단을 정비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1970년 양주 향교 전교(典校) 남궁복(南宮墣)을 중심으로 도봉 서원 재건 위원회를 조직하고 서울 유지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서원의 동북쪽에 서향으로 사우를 다시 건립하여 조광조와 송시열을 병향(並享)하고 그 앞에 신삼문(新三門)을 세웠다. 그러나 서원을 옛날 모습처럼 완벽하게 중건하지는 못하였다.
도봉 서원의 건물과 그 배치는 3칸의 사우와 신문(神門)·동협문(東夾門)·서협문(西夾門) 정도만 존재하게 되었으나, 남아있는 여러 기록으로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여러 서원들은 북쪽에 사우가 있고 그 앞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양쪽으로 마주보며, 남쪽에 서원이 있고 그 가운데에 강당(講堂)이 있으며 양쪽에 협실이 있는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도봉 서원도 이러한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면서, 지형을 이용해 서원 주변 계곡가에 행랑(行廊)을 마련하고 문을 만들었다.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서울특별시 도봉구가 총 면적 4,129㎡ 터에 사업비 39억 원을 들여 2011년부터 복원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2014년까지 마무리할 예정이다.
도봉 서원은 조선 시대 근기 지역에 가장 먼저 세워진 서원으로, 서인 명사들의 학업과 교유에 큰 기여를 했던 곳이다. 또한 문묘에 배향된 조광조와 송시열을 향사하던 곳으로, 국왕에게 친필 사액까지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적 의미가 큰 곳이기도 하였다. 현재 서울 지역에 남아있는 서원은 도봉 서원이 유일하기 때문에 서울의 단 하나뿐인 전통 교육 기관으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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