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정촌 고분에서 완벽한 형태 금동신발 발견
▲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23일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인접한 정촌 고분(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3호)에 관한 발굴조사 결과 완벽한 형태의 백제계 금동 신발 등 마한시대 수장층의 돌방무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다수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고분 중 최대 규모의 방대형 고분인 것으로 알려진 전남 나주 정촌 고분에서 완벽하게 보존된 금동신발이 출토됐다.
문화재청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나주 복암리 고분군(羅州 伏岩里 古墳群·사적 제404호)과 인접한 정촌 고분(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13호)에 관한 발굴조사 결과 완벽한 형태의 백제계 금동 신발을 비롯한 다수의 유물이 확인됐다고 23일 밝혔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부터 삼국 시대 복암리 일대 마한 세력의 대외관계와 세력 동향 등을 파악하기 위해 정촌 고분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정촌 고분은 마한 시대 수장층의 돌방무덤인 것으로 파악됐으며, 백제는 물론 신라·가야와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 또한 출토됐다.
지난해 조사에서는 고분의 규모와 돌방무덤(석재를 쌓아서 만든 무덤), 돌덧널무덤(지하에 깊이 움을 파고 부정형 할석 또는 덩이돌로 직사각형의 덧널을 짠 무덤), 옹관묘(크고 작은 항아리 또는 항아리 두 개를 맞붙여서 관으로 쓰는 무덤) 등 다양한 매장시설 9기가 확인됐다.
이 중 고분 안에 만들어진 돌방무덤 3기에 대한 내부 조사를 올해 벌인 결과, 금동 신발·금제 귀걸이·금제 장신구·마구·화살통 장식·화살촉·옥·토기·석침(石枕·돌배게)·개배(蓋杯·뚜껑 접시) 등의 중요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금동 신발이 출토된 1호 돌방무덤은 최대 길이 485㎝, 너비 360㎝, 높이 310㎝로 현재까지 알려진 마한·백제권의 초기 대형 돌방무덤 가운데 가장 크다.
이 무덤에서 발견된 금동신발은 길이 32㎝·높이 9㎝·너비 9.5㎝ 크기로, 발등 부분에는 용 모양이 장식돼있고 발목 부분에는 금동판으로 된 덮개가 부착돼 있다. 신발 바닥은 연꽃과 도깨비 문양을 투조(透彫·금속·목재 등 재료를 도려내어서 모양을 나타내는 조각 기법)와 선각(線刻·선처럼 파서 새긴 그림이나 무늬)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연꽃 문양은 8개의 꽃잎을 삼중으로 배치해 중앙에 꽃술을 새겼으며, 도깨비 모양은 부릅뜬 눈과 크게 벌린 입이 정교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돼 있다.
그동안 충남 공주 무령왕릉과 전북 고창 봉덕리 등에서도 금동신발이 발견된 바 있으나, 부분적으로 훼손된 채 수습됐다. 몸체는 물론 장식까지 완벽한 상태로 출토된 금동신발은 정촌 고분 1호기에서 이번에 발견된 신발이 유일하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 유물이 백제의 지방 지배와 관련된 하사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측은 "금동 신발은 백제와 관련이 깊은 유물로, 백제가 영산강 유역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시점과 토착 세력과의 관계 등 당시의 복잡한 정치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유물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정촌 고분에선 금동 신발 외에도 백제·신라·가야와의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마구·고리칼·금제 장신구 등의 유물도 출토됐다. 유사한 형태의 유물이 남원 두락리, 월산리의 가야계 고분을 비롯해 경주 황남대총 등에서도 확인된 바 있어 정촌 고분의 주인이 백제뿐 아닌 가야·신라와도 교류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는 추가 발굴조사를 통해 유물 수습을 완료하고, 오는 11월 말 최종 발굴 성과를 발표하고 국민을 대상으로 공개 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지난 1996년부터 5회에 걸쳐 발굴된 나주 복암리 고분군에선 금동 신발·은제 관식·고리칼 등 1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돼, 영산강 고대 문화의 보물창고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일보>
'금동신발' 마한 수장의 무덤, 정자가 지킨 1500년전 역사
정촌고분 발굴 현장
나주 영산강 복암리 '정촌고분'
임씨 가문 소유 정자가 지켜 낸 '마한'의 역사
[전남 나주=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영산강 북쪽지역에 자리한 전남 나주 다시면 복암리 잠애산. 참나무 숲으로 이뤄진 이곳 산사면에 삼국시대 이 지역 최대 규모의 방대형(네모난 평면에 윗면이 평평한 형태) 정촌고분이 남아 있다. 이 고분 안에서 최근 용머리 장식을 한 금동신발이 출토됐다. 앞서 확인된 16점의 마한·백제권 금동신발보다 화려한 장식을 자랑하면서도 형태적으로 완벽하다.
23일 정촌고분 발굴현장에 찾았다. 이곳에 서면 확 트인 시야로 드넓은 평야와 영산강이 내려다보인다. 마을 주민들은 예부터 '칠조산'이라 불리는 7기의 고분이 복암리 평야에 있었다고 전한다. 논밭에 남아 있는 고분 4기는 지난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상대적으로 고지대에 위치한 정촌고분 현장에는 과거 봉분 위로 세워져 있었던 정자(亭子)의 흔적도 남아 있다. 지붕의 기왓장, 건물지의 기둥 자리 등이 보인다.
이러한 영산강 주변 마한·백제 시대의 수많은 고분들과 출토유물은 서해안 연안 해로와 강줄기를 따라 교역의 요지가 됐던 이 지역의 위상과 문화를 드러낸다. 특히 나주 지역의 마한 토착세력들이 당시 인접해 있던 백제, 신라, 가야국 등으로부터 직접 지배당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문화들을 수용해 왔던 모습을 짐작케 한다.
1호석실 유물출토 상황
엑스레이로 찍은 금동신발 바닥 모습. 연화문 위아래로 도깨비 문양이 새겨져 있다.
◆'용장식 금니총(金履塚)' 정촌고분, 마한 토착세력의 위상 = 최근 조사된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안에서는 5세기 후반 한성백제 시기부터 6세기 사비백제 시기까지의 유물들이 다량 출토됐다. 금동 신발부터 금제 귀걸이, 금제 장신구, 마구, 화살통 장식, 화살촉, 옥, 토기, 석침(石枕, 돌베개), 개배(蓋杯, 뚜껑 접시) 등이 나왔다.
정촌고분 1호 석실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길이 32㎝, 높이 9㎝, 너비 9.5㎝로, 발등에는 용머리 장식이 달려 있다. 용머리 장식은 왼쪽 신발만 남아 있는데 오른쪽은 같은 장식이 떨어져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신발 바닥 중앙에 장식된 연꽃 문양은 8개의 꽃잎을 삼중으로 배치했고, 중앙에 꽃술을 새겼다. 도깨비 문양은 부릅뜬 눈과 크게 벌린 입, 형상화된 몸체 등이 연꽃 문양을 중심에 두고 앞뒤로 2개가 묘사돼 있다. 이 같은 연화문과 도깨비 문양은 백제가 받아들인 불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고고문화인류학과)는 "1995년 평야에 위치한 복암리 대고분군에서 물고기 달린 금동신발을 발굴한 이후 19년 만에 나주지역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이라며 "용머리 장식도 유일하고, 부식 없이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평했다.
오동선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연구사는 "금동신발은 백제가 남하하면서 기존 마한의 토착세력에게 힘을 실어주고 국가를 통합하려는 노력을 상징한다"며 "마한 유력자를 회유하기 위해 선물한 하사품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반면 일부 학자들 사이에선 독자적으로 강성한 힘을 지녔던 마한의 토착세력이 금동신발을 직접 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마한의 수장'으로 추정되는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 뿐만 아니라 가야, 신라, 왜와도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해석되는 다양한 유물들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금동신발의 연화문이 공주 무령왕릉에서 나온 은제탁잔의 문양과 비슷한 것처럼 재갈과 고리칼, 토기 등이 남원 두락리, 월산리의 가야계 석곽을 비롯해 경주 황남대총 등에서 확인된 유물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몸통에 구멍이 뚫려 있고 입이 벌어져 있는 모양을 갖춘 토기는 왜(일본)에서 유행했던 토기와 유사하다.
현재까지 고분조사를 통해 나주 일대 출토된 인골은 총 43구다. 정촌고분에서는 1호석실에서 1구가 나왔고 복암리 대고분군에서 23구, 영동리 고분에서는 17구 등이 확인됐다. 이 인골들은 마한사람을 복원연구하는 데 활용된다.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류.
정촌고분 멀지 않은 복암리 대고분군. 현재 4기가 남아있다.
◆'나주 임씨' 정자가 지키고 있던 1500년 전 역사 = 정촌고분은 영산강 유역 고분 중에서 최고 수준의 위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잠애산(해발 112m)의 서쪽 사면에 축조돼 평지나 낮은 구릉에 조성된 복암리 3호분 등 영산강 유역의 다른 고분들에 비해 탁월한 조망권을 확보하고 있다. 정촌고분 주변은 과거부터 나주 임씨 집성촌이 마을을 이뤄왔다. 고분 위로 임씨 가문 소유의 정자가 있어 일제강점기 때 도굴의 위험을 피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고분에서 출토된 기왓장들과 기둥의 흔적들이 정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남아있는 고분의 크기는 짧은 변 37.3m, 긴 변 40.0m, 높이 11.6m 규모다. 하지만 고분의 정상부가 후대에 일부 훼손됐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면 원래 고분의 높이는 13m 가까이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 외벽은 사면보호와 장식효과를 위해 돌을 깔아 놓았고, 둘레에는 석축을 쌓아 봉분을 보호하고 있다. 석축을 지지하는 장대석이 고분 북쪽과 서쪽 사면 중하위에서 자리한다.
정촌고분 안에는 돌방무덤(석재를 쌓아 만든 무덤), 돌덧널무덤(지하를 파서 직사각형 덧널을 짠 무덤), 옹관묘(항아리를 맞붙여 관으로 쓰는 무덤) 등 9기가 확인됐다. 이 중 3기의 돌방무덤에 대한 내부 조사가 올부터 실시됐다. 금동 신발이 나온 1호 돌방무덤은 최대 길이 485㎝, 너비 360㎝, 높이 310㎝로, 현재까지 알려진 마한·백제권의 초기 대형 돌방무덤 가운데 가장 크다. 복암리 대고분군에서 발견된 석실의 1.5배 크기다. 내부 구조는 돌방 바닥 부분에서 천장 쪽으로 올라갈수록 좁아 들게 축조하고, 출입구에는 석재 문틀을 만들었다. 고분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돌덧널과 옹관 등 6기는 대부분 훼손된 상태다. 대신 남서쪽 사면에 설치된 굴식돌방과 남동쪽 기저부에서 확인된 돌덧널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향후 조사가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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