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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고려궁지 (江華高麗宮址)

백수.白水 2014. 9. 15. 06:34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에 있는 고려시대의 궁궐터. 사적 제133. 지정면적 7,534.

이곳은 고려가 몽고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읍을 송도(松都)에서 강화로 옮긴 1232(고종 19)부터 다시 환도한 1270(원종 11)까지 38년간 사용되던 고려궁궐터이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최우(崔瑀)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 한다.

 

강화도에는 정궁(正宮) 이외에도 행궁(行宮이궁(離宮가궐(假闕) 등 많은 궁궐이 있었는데, 이곳 강화읍 관청리 부근은 정궁이 있었던 터로 추정된다. 정문의 이름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이 궁은 1270년송도로 환도할 때에 모두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국난시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하여 1631(인조 9) 고려 옛 궁터에 행궁을 건립하였다.

 

전각과 강화유수부·규장외각 등을 세웠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거의 소실되고, 현재 관아건물인 명위헌(明威軒이방청(吏房廳) 등이 남아 있다. 이곳은 외침에 줄기차게 저항했던 민족의 저력이 흐르는 국난 극복의 역사적 현장이다.

 

 

 

고려(AD 9181392, 474년간 34王氏왕조)

 

 

 

 

정문인 승평문(昇平門)

 

 

 

 

 

 

 

 

 

 

 

 

강화유수부이방청 (江華留水府吏房廳)

 

 

199531일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이방청은 강화 유수부 내 육방(六房:·····형방) 중의 하나로서 1654(효종 5) 유수(留守) 정세규(鄭世規:15831661)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한 건물인데, 1783(정조 7) 유수 김노진(金魯鎭:17351788)이 내부를 개수하여 계홀당(桂笏堂)이라는 당호(堂號)를 게시하였다.

 

건물구조는 한식 목조 자형 단층기와집으로 팔작지붕에 민도리 홑처마집이다. 모두 12칸으로 온돌방이 8칸이고 우물마루로 된 청마루가 12칸이며 부엌이 1칸이다. 1915년부터 현재까지 등기소로 사용하고 있다. 수차에 걸친 개수로 옛날 관아의 원형은 찾아볼 수 없다.

 

법전·군무를 제외한 모든 크고 작은 사무를 맡아보았던 곳으로,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이방청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강화 동종 (江華銅鐘)

 

 

 

 

조선시대 강화성문의 여닫는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던 종으로 조선 숙종 37(1711)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그후 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동종이다.

 

종각은 당시의 강화산성 남문주변인 김상용 순절비자리에 있었던 것을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때 고려궁지로 이전되었다.

 

199910월 종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하지 못하게 되자 강화동종을 복제하여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이 동종은 전통적인 한국종의 형태에서 벗어나 옆띠를 몸체의 중앙에 돌려 몸체를 위 아래로 구분하여 놓았고, 어깨부분은 턱이 져 있다. 그리고 어깨에서 훨씬 떨어져 꽃무늬로 장식한 독립된 4개의 유곽을 형성하고, 그 안에 연꽃으로 표현한 9개의 유두를 배치하였다. 특히 옆띠로 구분한 하반부에는 종구에 한가닥의 꽃무늬옆띠를 돌려 구연대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무늬띠와 가운데 옆띠 사이의 넓은 공간에는 장문의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이 명문에는 주종 관계와 개주 관계 등의 사실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종 3(1866) 병인양요 때 침입한 프랑스군이 종을 약탈하여 가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다.

 

종각은 260여 년 전에 강화성의 남문 동쪽에 건립하였던 것을 강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과 함께 현재의 장소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총중량이 3,912에 높이가 198이고 구경이 138에 달하여 조선 시대 후기 동종으로는 거종에 속한다.

 

회화나무

 

 

 

 

 

수령 400. 높이 20m.

 

외규장각 (外奎章閣)

 

 

 

 

17822월 정조(正祖)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의 부속 도서관 역할을 하였다. 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를 비롯해 총 1,000여 권의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1866(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297권의 왕실의 주요행사를 기록한 의궤 191(유일본 30종 포함) 297책을 포함한 도서 359점을 약탈했다. 나머지는 불에 타 없어졌다.

 

1975년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촉탁 직원으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도서관에 조선시대의 도서가 보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목록을 정리하여 그 존재가 알려졌다. 서울대학교는 1991년에 정부에 도서 191279권의 반환 추진을 요청하였고 1992년에 정부는 외규장각 도서목록을 프랑스에 전하여 도서 반환을 요청했다.

 

19939월 한국·프랑스 정상회담에서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경부고속철도부설권을 프랑스의 테제베(TGV)가 따 내기 위한 의도로 휘경원원소도감의궤1권을 가지고 와 외규장각 도서 반환의 의지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외규장각 도서는 약속과 달리 반환되지 않았고 200010월 다시 양국 정상회담에서 한국에 필사본이 없는 63권을 '대등한 문화재 교환 전시' 형식으로 2001년까지 한국에 반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반환 협상이 연기되거나 프랑스 측에서 계속 협상을 지연시키는 등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국제사법재판소의 힘을 빌리더라도 무조건 반환시켜야 한다는 역사·학술·시민 단체의 외규장각 도서 반환운동이 확산되는 등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20101112G20정상회의에서 양국의 대통령 간에 외규장각 도서를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임대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하였고, 2011611145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고려궁지 발굴지

 

 

 

 

 

 

 

발굴지에서 내려다 보이는 외규장각

 

강화 유수부 동헌 (江華留守府東軒)

 

명위헌(明威軒)

 

강화 유수부는 1627(인조 5)에 인조가 강화로 피신했다가 돌아온 뒤 설치한 것으로 종2품 관청으로 삼았다. 1638(인조 16)에 유수(留守) 김신국(金藎國)이 개수하였고, 1769(영조 45)에 유수 황경원(黃景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명명하였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軒)과 이관당(以寬堂)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호(堂號)는 송나라 미남궁체(米南宮體)를 잘 쓰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였던 윤순(尹淳:16801741)의 필적이다. 건물규모는 정면 8, 측면 3, 건평 24칸이고 구조는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國防遺蹟) 복원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현재에 이른 것인데, 오늘날의 군청과 같은 관아건물로서 여러 차례에 걸친 개조로 원형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