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전원거(歸田園居) .... 시골에 돌아와 살며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전체는 되는대로

여행 이야기/태국-라오스

[45] 비엔티안 거리를 걷다.

백수.白水 2015. 3. 30. 15:58

2015.02.13.()

 

전날 방비엥의 여행사에서 예매(1인당 5k)한 미니밴을 타고 비엔티안에 도착했다. 시내에 들어서는 순간 지금까지 라오스의 다른 도시에서 보았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펼쳐진다. 깨끗하게 치장된 현대식건물, 곧게 쭉쭉 뻗은 넓은 깨끗한 도로, 길게 늘어선 자동차의 행렬을 보면서, 라오스가 가난한 나라라는 걸 잠시 잊을 뻔했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이곳도 별수 없이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매연의 공해로 매캐한 공기가 역겨웠고, 도심 대로변 전봇대와 전봇대를 잇는 전선은 전깃줄일까 아니면 통신선일까? 도대체 몇 가닥일까? 난마처럼 뭉치로 얽힌 전선이 위태롭고 가슴을 몹시 답답케 했다.

 

메콩강변과 야시장(), 국립문화회관과 박물관(), 대통령궁과 왓쌰씨켓(), 파응움 왕 동상(西) 등을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교차점 요지에 위치하는 와이야콘(Vayakorn)게스트하우스에 숙소를 정했다.

더블룸 하루숙박비 180,000k.

 

 

비엔티안(Vientiane)

 

라오스의 수도이다. 메콩강을 끼고 있으며 태국과 인접해 있다. 이 도시는 1953년부터 라오스의 수도였으며, 프랑스 통치시기에도 행정수도 기능을 수행하였다. 라오스의 정치와 경제 중심지이다. 인구와 규모의 측면에서 라오스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메콩강() 하구에서 1,584km 상류인 해발고도 300m 지점에 위치하며, 메콩강으로 흘러드는 지류 남바사크강에 의해서 동서로 나누어져 있다.

비엔티안은 옛 라오족() 왕조 이래의 고도(古都)이다. 왕궁과 파고다 등이 많이 남아 있다. 1354년에 파응움(Fa Ngum) 왕이 라오스의 전신인 최초의 통일 왕국 란쌍 왕국(Lan Xang)을 건설하면서 비엔티안은 중요한 행정도시가 되었다.

세타티랏 왕(Setthathirath)은 공식적으로 1563년에 버마의 침략을 피해서 비엔티안을 공식수도로 선언하였다. 1707년 왕위다툼으로 란쌍 왕조가 분리되면서, 비엔티안과 루앙프라방은 각각 독립을 선언하였고 비엔티안은 독립된 비엔티안 왕조’(Royal Lao Government)가 되고, 라오스는 사실상 분단국가가 되었으며, 머지않아 1779년에는 태국의 시암(Siam) 왕조의 식민지가 된다.

1827년 비엔티안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아누위(Anouvong) 왕이 시도했던 태국 시암 왕조로부터의 독립이 실패하면서 비엔티안의 라오스 유산은 철저히 파괴된다. 비엔티안은 원래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많은 사찰과 탑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때 대부분의 불교문화유산이 파괴되었다.

이후 비엔티안은 프랑스군의 추가 공격을 받고 1893년부터 1953년까지 비엔티안은 프랑스 통치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파괴된 라오스의 절을 다시 지었다. 이후 2차 대전 동안 비엔티안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45년에 프랑스 공수부대의 침투로 해방된다. 해방 이후로도 라오스는 내전 등으로 계속 불안정한 상태를 겪다가 이후 1975년 라오스 공산당이 라오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비엔티안을 점령하여 비엔티안은 라오스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된다.

최근 비엔티안은 라오스 경제성장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특히 외국인직접투자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도시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2011년에는 한국의 도움으로 주식시장을 개장하기도 했다. 이 나라 최대의 충적평야인 비엔티안 평야를 끼고 있어 쌀과 야채 재배가 성하며, 건기에는 사탕수수와 잎담배를 산출한다.

도시의 명소로는 1566년 세타티랏왕이 건설하였고 1953년 재건된 불교사원 비엔티안의 파탓루앙(Pha That Luang)을 비롯하여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 세운 개선문 팟투사이(Patuxai), 비엔티안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인 왓 시사켓(Wat Si Saket), 고고학박물관이 위치한 왓 프리케오(Wat Pra Keo), 검은 탑으로도 알려진 댓 댐(That Dam) 등이 있다. 대부분의 절들은 파괴되었다가 해방 이후 다시 건설되었다.

400km 하류의 사반나케트까지 정기항로가 통하며, 상류의 루앙프라방까지의 180km 지점은 급류를 이루고 암석이 많아 배가 아닌 내륙 교통이 발달하였다. 또 메콩강 서쪽 4km 지점에는 와타이 공항(Wattay Airport)이 있다.

 

방향잡기가 어려워 내가 편리한대로 지도의 상하좌우(上下左右)를 반전시켰다.

 

아름다운 달이 떴다. Vientiane(비엔티안)은 Vieng = ‘도시Tiane = ‘이 만나 달이 걸린 땅을 의미하는데 메콩강변을 지나가던 달이 도시의 매력에 취해 잠시 멈추었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로 통한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식당 밖 숯불화덕에서 소금을 뿌려가며 물고기를 굽고 있는데, 고기는 딱 이 고기 한 종류만 구워서 파는 전문점이다. 다금바리를 닮았는데 빠밈(?)이라고 하던가?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주인이 강에서 직접 잡아온다고..

 

고기가 얼마나 큰지 찰밥을 주문해서 다른 반찬 없이 배를 불렸다. 식대는 둘이서 48,000k(6,000).

식당 집 딸! 예뻐서 모델을 부탁했더니 얼굴이 발개지며 수줍어한다. 다음날 또 먹으러 갔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이런 시절이 있었지...

 

 

 

국립문화회관

 

 

 

아침해가 떠오른다.

(That Dam)은 16세기에 건설된 된 벽돌탑 양식으로 1,995년에 재건축했다. 탑이 검은색을 띠고 있어서 탓 담(Dam은 검다는 뜻)이라고 불린다. 7개의 머리를 가진 나가(Naga)rk 살고 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시암이 비엔티안을 침략했을 때 나가가 탑에서 나와 도시를 보호했다고 한다. 비엔티안은 1,828년에 씨암에 점령당했기 때문에 그저 전설로 남아있을 뿐이라고...

 

시암이 비엔티안을 침략했을 때 나가가 탑에서 나와 도시를 보호했다고 한다.

비엔티안은 1,828년에 씨암에 점령당했기 때문에 그저 전설로 남아있을 뿐이라고...

 

라오스의 國花인 프랜지파니(frangipani) 라오스에서는 독 참파(Dock Champa)라고 함.

Dock = 꽃이므로 참파 꽃

 

 

 

 

루앙푸라방에 위치했던 한 무앙의 왕자가 변란을 피해 크메르로 들어가 왕실에서 성장하여 앙코르 공주와 결혼을 하는데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파 응움Fa Ngum(재위: 1,353년- 1,373년)이다. 그는 캄보디아 왕실에서 뛰어난 전사로 성장하였고, 왕의 지시로 북부의 각 무앙에 대한 원정을 지휘하여 루앙프라방까지 점령하고, 마침내 1,353년 소국을 통일하여 라오스 최초의 왕국인 란쌍 왕국Lan Xang(Lane Xang)을 세우고 캄보디아로부터 독립했다. 란쌍은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으로 강력한 국력을 표출하는 이름이다. 란 쌍의 건국은 이 지역에 소승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특히 파 응움의 크메르인 왕비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파응움 왕은 1,356년 비엔티안 점령을 시작으로 영토를 확장해 오늘날의 라오스 크기의 통일국가를 이룬다. 그는 크메르공주와 결혼했으며, 남방불교를 받아들이고 신성한 황금불상인 파방 Pha Bang(프라방 Prabang)을 란쌍 왕국으로 가져온다. 파방이 전래되면서 수도이름도 씨앙통 Xieng Thong(황금의 도시라는 뜻)에서 루앙프라방으로 바뀐다.

파 응움의 시대는 1,374년까지 계속되었고 란쌍의 영역은 줄곧 확대되었다. 특히 북동부 지역 그러니까 과거 운남 지역으로부터 따이족들이 이주해 내려오던 방향으로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코랏(Korat) 평원 지대(*)를 정복해 라오인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메콩호텔과 아파트

 

 

라오스 대통령궁(주석궁)

대통령궁에서 빠뚜 싸이(독립기념관)으로 가는 길, 7개의 머리를 가진 나가상이 부처를 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