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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태국-라오스

[60] 왓 마하 탓(Wat Maha That) / 아유타야

백수.白水 2015. 4. 10. 08:06

아유타야

 

 

방콕에서 북쪽으로 76Km정도 떨어진 곳에 아유타야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한때 매우 강성했던 왕국의 흔적이자 불교유적지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곳은 동서 교류의 중심지로 불리던 국제 무역항이었다. 방콕에서 육로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얼핏 생각하면 바다와는 전혀 상관없는 도시인 듯하다. 그러나 아유타야에는 바다로 연결되는 차오프라야 강이 흐르고 있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현재의 수도 방콕을 비롯해 시암 왕국의 모든 수도들은 이 차오프라야 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태국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왕조의 수도였던 아유타야 역시 차오프라야 강 하류의 삼각주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은 중국과 인도, 유럽을 묶는 중간지점이자 풍부한 양의 쌀이 생산되는 곡창지대이기도 했다사람과 물자가 모이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던 아유타야는 곧 국제적인 무역도시로 성장했다. 전성기의 아유타야는 네덜란드, 프랑스, 포르투갈, 중국, 인도, 일본, 페르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또한 비단, , 도자기, 후추, 향료, 향나무, 은 가공품, 상아, 가죽 제품 등 동서양의 진귀한 물건들이 모였다. 다양한 거래 품목과 뛰어난 접근성 덕분에 아유타야는 중개 무역의 중심지로 발돋움했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불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도시였지만, 워낙 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던 탓에 아유타야에서는 종교로 인해 차별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없었다. 1511년 포르투갈 사람들이 왔을 땐 이들을 위해 작은 정착촌을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고, 이 정착촌에는 3개의 교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아유타야 왕조의 제29대 왕 나라이(Narai)는 교회 짓는 일을 후원하기도 했는데, 프랑스 왕 루이14세는 나라이가 기독교에 관심이 있다고 오인하여 대규모의 선교단을 보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아유타야에는 프랑스의 선교 건물까지 지어졌다.

심지어 나라이 왕 재임 시절에는 그리스 출신의 콘스탄틴 파울콘(Constantine Phaulkon)이 왕국의 재무 및 외무장관을 역임하고 실질적인 총리 역할까지 수행하기도 했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상대적으로 외국인들에게 너그럽고 개방적이었던 아유타야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1350년 우통(U-Thong)왕이 세운 아유타야 왕조는 1767년까지 417년간 33명의 왕이 통치했다. 왕조의 수도인 아유타야에는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크메르, 중국, 유럽, 페르시아 등 외국 문화의 영향이 더해져 화려한 문화가 꽃피었다. 전성기에는 3개의 왕궁, 375개의 사원, 29개의 요새, 그리고 94개의 대문이 있었다고 하니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했던 이곳은 16세기경부터 집요하게 침입을 해온 버마(지금의 미얀마)에 의해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버마군은 도시의 건물들을 파괴했고, 사원 안에 있는 불상의 목을 잘라버렸다.

 

무너진 건물과 바닥을 굴러다니는 붉은 벽돌들, 그리고 목이 잘린 불상들은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버마군의 파괴도 찬란했던 아유타야 왕조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못했다. 도시의 중심사원으로 창건된 왓 프라 마하탓, 왕족의 여름 궁전으로 이탈리아와 그리스, 중국의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방파인 별궁, 왕궁 부지 안에 세워진 왓 프라시산펫, 거대한 와불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왓 로카야수타, 버마군의 침략에도 전혀 파괴되지 않은 채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왓 나프라멘 등 화려했던 아유타야 문화의 유산은 이곳이 여전히 매력적인 여행지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1991년에는 그 역사적문화적 가치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체계적으로 관리·보호되고 있다.

 

 

 

 

왓 마하 탓(Wat Maha That)

 

 

왓 프라 씨 싼펫과 더불어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원으로 라마 공원 동쪽, 타논 치(Thanon Chee Kun)과 타논 나레쑤언(Thanon Naresuan) 거리의 교차로에 위치했다. 왓 마하 탓은 1,384년에 나레수엔 왕에 의해서 세워졌으며 아유타야에 있는 프랑(크메르 양식의 탑)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다.

 

관목 숲 군데군데에 남아 있는 프랑과 불당의 흔적을 보고 당시 사원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원 여기저기에는 머리가 잘려나간 불상, 머리만 남은 불상 등이 나뒹굴어 참혹한 과거를 말해준다. 특히 잘려나간 머리가 나무뿌리에 감긴 불상은 세월에 묻혀버린 과거를 대변하는 듯하다.

 

1956년 태국정부가 아유타야의 파괴된 유적을 재건하기로 했을 때 예술부(Fine Arts Department)는 이곳에서 금불상 몇 점과 금, 루비, 크리스털로 만든 장식품들이 들어 있는 상자를 발견했다. 이 유품들은 현재 방콕에 있는 국립 박물관에 전시돼있다.

 

 

 

 

 

 

 

 

 

 

 

가운데의 프랑은 높이가 50m에 달했다고 하나 지금은 심하게 파괴되었다.

 

 

 

 

 

 

 

 

 

 

 

 

 

 

 

 

 

 

 

 

세계유산인 사원과 조각난 불상들

 

 

 

 

 

버마군에 의해 목이 잘린 불상들.

 

 

 

 

 

 

 

 

 

 

 

'왓 마하 탓'의 나무 뿌리에 감긴 불상 머리. 세월의 생채기가 서린 아유타야의 대표적 상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