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국내여행. 산행

창경궁과 낙산한양도성 길의 가을, 그리고 인사동

백수.白水 2015. 11. 6. 10:32

낼모레(11.08)立冬, 당장 겨울이 시작되는 건 아니지만 미세먼지 나쁨 상태의 축축한 가을이 끝자락을 향해가면서 오늘부터 연사흘 비소식이 있다.

 

어제는 서울대병원에 가는 날이다. 10여 년 전에 협심증으로 스텐트 삽입시술을 받았는데 일 년에 두 차례 담당 의사를 만나 점검을 받고 6개월분의 약을 처방받게 된다. 혹시나 재발할까봐 평생 동안 약을 매일 복용해야한다. 늦었지만 다행히도 3년 전부터 담배를 끊었고, 술도 많이 줄이고, 꾸준히 운동을 한 덕분에 관리가 아주 잘 되고 있다. 담당 의사선생님을 뵐 때마다 굿! 아주 좋습니다.’라는 칭찬을 듣고 온다.

 

서울출입이 잦지 않은 나는 가급적이면 이날은 지인들과의 만남을 약속하게 된다.

1230분 충무로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10시 반쯤에 진료가 끝났으니 여유시간이 늘어진다.

창경궁의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조망처(眺望處)는 서울대병원암병동 6층의 옥상공원이다. 느긋하게 창경궁을 보고,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서 낙산에 올라, 한양도성 성곽길을 걸어서 동대문 까지 가기로 했다.

 

미세먼지 때문에 아쉬움이 컸지만 강물처럼 멀리 흘러가 버린 옛 추억들이 가을빛으로 아른거리는 하루였다. 집에 돌아오니 저녁 8시가 되었다.

 

창경궁

 

 

 

 

나는 5월 창경궁의 봄과 11월의 가을을 어김없이 보면서 평생을 사는 셈이다.

 

 

 

 

2014.07월초 촬영

 

 

 

늦은 시월 단풍에 가을 햇볕도 시리다. 불같은 빨강, 여문 노랑, 아직도 초록, 고개 숙인 갈색

지친 듯 거친 듯 나무들이 뿜어내는 염료가 짙은 강물에 풀린다. -양회성-”

 

곱다! 참 곱다. 가을단풍을 이리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해국(海菊) 해변국(海邊菊)이라고도 한다. 바닷가에서 자란다. 줄기는 다소 목질화하고 가지가 많이 갈라지며 비스듬히 자라서 높이 3060cm로 된다. 잎은 어긋나지만 달걀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양으로 밑에서는 모여나며 두껍다. 양면에 털이 빽빽이 나서 희게 보이고 잎가장자리는 밋밋하거나 톱니가 약간 있으며 주걱 모양이다.

 

꽃은 711월에 피고 연한 보라빛 또는 흰색이며 가지 끝에 두화(頭花)가 달린다. 총포는 반구형이며 포조각은 털이 있고 3줄로 배열한다. 열매는 11월에 성숙하고 관모는 갈색이다. 한국(중부 이남일본에 분포한다.

 

 

 

 

 

 

마로니에공원

 

 

 

 

 

마로니에 공원에 서있는 고산 윤선도 오우가비(孤山 尹善道 五友歌碑). 시비 서있는 자리가 고산의 生家 터다.

 

 

 

 

 

 

 

 

 

윤선도(尹善道)는 선조 20년(1587)에 나서 광해군, 인조, 효종 대를 거치고 현종 12년(1671)에 돌아갔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유례없는 변란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심해지는 가운데 서인이 득세한 시기였다.

그의 집안은 누대에 걸쳐 벼슬을 한 명문이었고 재산도 유족했지만 남인 집안이었다. 이 때문에, 또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고 따지고 들어서 때로 ‘도량이 좁다’는 평을 듣기도 했던 자신의 꼬장꼬장한 성격 때문에 윤선도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85세라는 장수를 누렸으나 그 가운데 세 차례에 걸친 유배로 20년 남짓한 세월을 보냈고 그 사이사이에 해남의 금쇄동과 보길도 부용동 등에서 19년 가량을 숨어 살았다.

그러나 그의 은거는 ‘골짜기에서 고사리를 캐는’ 생활은 아니었다. 그는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오히려 화려하다고 할 만한 은거 생활을 하였고, 그 가운데서 저 유명한 「오우가」를 포함한 「산중신곡」 「산중속신곡」이라든지 「어부사시사」 「몽천요」 등 그 자신을 우리나라 단가 문학의 거성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작품들을 남겼다.

윤선도의 자는 약이()이며 호는 고산() 또는 해옹()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후사가 없던 해남윤씨 종가에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아버지 이외에는 특별한 스승도 없었으나 경사백가()를 두루 읽고 의약, 복서(), 음양, 지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독서하여 교양을 쌓았다. 특히 소학을 평생 가까이하며 처신과 공부의 지침으로 삼았다.

진사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 유생으로서 공부하던 30세(광해군 8년, 1616) 때 윤선도는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격렬히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처음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에는 경상남도 기장으로 이배되었고 인조반정(1623)이 일어나 이이첨 일파가 처형되기까지 8년 동한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가 풀린 후에 의금부 도사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가서 지냈다.

42세 되던 인조 6년(1628)에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송시열과 함께 봉림대군·인평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총애에 힘입어 공조좌랑, 형조 정랑, 한성부 서윤 등을 5년간 역임했다. 그후 예조정랑,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으나 48세 되던 해에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성산 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에 파직, 해남으로 내려갔다. 이 무렵부터 그는 당쟁으로 번잡한 세상을 멀리하고 숨어 살 뜻을 가졌다고 한다.

51세 되던 인조 15년(1637)에 왕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세상을 멀리하고자 제주도로 향하던 도중에 보길도를 발견, 그 빼어난 산수에 매혹되어 그곳에 자리잡고 부용동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이듬해에, 난이 평정된 뒤에도 그동안 고초를 겪은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유배되었지만 이번에는 1년 만에 풀렸다.

이후 10년 동안, 윤선도는 보길도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해남 현산면의 금쇄동을 오가며 자연에 묻혀 지냈다. 이때 금쇄동에서의 소박한 산중생활과 한가한 정서를 읊은 것이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들이었고 65세(효종 2년, 1651)에 보길도를 배경으로 지은 것이 「어부사시사」이다. 금쇄동과 보길도 부용동은 윤선도 시가 문학의 2대 산실이 된다.

효종은 즉위한 후, 봉림대군 시절의 사부였던 윤선도를 서울로 불러 동부승지, 예조참의 등의 관직을 맡겼으나 윤선도는 서인과의 대결에서 밀려 사직하거나 삭탈관직을 당하기도 했다. 「몽천요」()는 66세에 예조참의를 사직한 후 경기도 양주땅 고산에 은거하며 지은 것이다.

1659년 효종이 죽자, 평소 효종의 비호를 받던 윤선도의 입지는 아주 약해졌다. 윤선도와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 세력은 효종의 능을 정하는 산릉문제와 조대비의 복제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립했는데 결국 윤선도 쪽이 져서 삼수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때 윤선도의 나이는 73세였다. 이 귀양살이는 광양으로의 이배를 거쳐 8년 후, 그가 81세가 되어서야 풀렸다. 그는 부용동으로 돌아가서 지내다가 낙서재에서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윤선도는 학자이기도 했고 당쟁의 와중에서 남인의 투사로서 앞장서 싸운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이름은 시인으로서 가장 빛난다. 자연과 그 안에서 얻어진 정서를 한자투가 아닌 우리말로 술술 풀어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데 그를 앞설 사람은 없었다. 그는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 시대의 3대 가인으로 꼽히지만 다른 두 사람과 달리 가사는 빼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를 남겼다. 그의 친필로 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 등이 해남 녹우당에 전해온다. <답사여행의 길잡이>

 

 

 

 

 

 

 

옛 서울대학교 본관

 

 

 

 

 

 

 

 

 

 

 

 

낙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골목 길

 

 

 

 

 

 

 

 

 

 

 

낙산공원 서쪽 서울대병원 방면

 

 

 

 

 

 

 

낙산공원 동쪽 삼선교 방면

 

 

 

 

 

 

 

 

 

 

 

 

 

 

동대문(興仁之門, 흥인지문)

 

 

 

 

 

 

 

 

 

 

 

 

 

 

 

충무로에서 점심을 먹고 인사동까지 걸었다.

 

 

 

 

수표로와 청계천

 

 

 

 

 

 

인사동거리

 

 

 

 

 

 

 

 

 

 

 

 

 

 

正明堂

 

 

 

골동품가게가 아니고 중국에서 생활다기(生活茶器)와 도자기 홍차류를 들여와 판매하는 곳이다.

인사동 1014 김춘희(010 - 8078 - 9599)

 

 

 

 

 

 

 

 

 

 

상호인 正明은 불교의 교리인 팔정도(八正道)에 나오는 말로 바른 생활, 곧 올바른 직업을 가지고 충실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주인장은 이 분야에 식견이 깊고 성품이 반듯하다. 오랜 시간동안 보이차를 비롯해 이름도 생소한 여러 종류의 차를 우려 끊임없이 마시며 많은 대화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