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이성을 되찾고 두 사람 틈에 ‘사이(間)를 되살리자.

백수.白水 2011. 6. 17. 20:07

  우리는 매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을 살아간다.

    태생적으로 피할 수없이 맺어지는 혈연관계도 있고,

  운명적으로 맺어지는 인척관계도 있으며,

  학교와 직장 그리고 사회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기도 한다.

특히 요즘에는 온라인상에서 선택적으로 맺어지는 친구나

이웃의 관계가 더해지고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관계가 훨씬 복잡해졌다.

소통의 폭은 넓어졌으나 온라인상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 대면을 하지 않고,

불특정 다중의 예의주시 속에서 이뤄지는 관계 속에서

예기치 못한 일로 겪게 되는 불편함에 상처를 받고 후유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래서 갈등의 해결방법으로 인간관계에 대해서 너무 완벽하려고 하지 말고

인연이 끊어지는 것을 불가피한 일로 생각하자.

        때로는 지긋지긋한 관계망을 찢어버리고

홀로 떠나는 여행을 통해 치유하도록 권하기도 한다.


관계 혹은 인연의 마법/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인연이라 부르고, 호손은 인간성의 고리라 표현하였다. 인터넷이 발전하기 전에는 오프라인상의 관계만이 있었다. 인터넷과 모바일 폰 등 각종 이기들이 등장하자 온라인상의 관계가 새로 나타났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관계망은 서로 합쳐지기도 하고 나누어지기도 하면서 더욱 다양한 관계망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관계망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건 거의 마법이다. <중략>


관계 혹은 인연의 피곤함/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관계를 잇고 끊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게 무지 피곤한 일이다.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윤리와 도덕의 족쇄는 우리를 구속한다.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그 끈에 윤리와 도덕이 달라붙어 있다. 그 관계망에 달라붙어있는 도덕과 윤리를 관리하지 않으면 관계가 끊어지게 되는데, 우리는 이 때문에 두려움과 초조함을 안고 산다. 나는 하나뿐인데 나와 이어진 관계는 무수히 많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피곤하다. 인간관계에 대해서 너무 완벽하려고 하지말자. 우리는 신이 아니다. 인연이 끊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역시 너무 완벽하려고 하지말자. 모든 것이 완벽해도 어느 한 부분이 틀어지게 되면 서먹하거나 원수가 되는 것은 확률적으로도 어찌할 수없는 일이다. <중략>


지긋지긋한 관계망을 찢어 버리자/ 그래서 일시적으로 벗어나게 되면 우리는 행복을 느끼게 된다. 관계망으로부터의 일탈, 그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관계망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성찰할 시간을 갖게 된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고, 내일도 그렇게 살아야할까? 99%이상이 일상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중략> 이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내 삶이 어떠한지는 일단 현재의 삶을 벗어나야만 관조할 수 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자위하지 말라. 그건 용기 없는 변명일 뿐이다.<중략>


홀로 떠나는 여행의 치유/ 늘 해왔던 모든 것들을 집어 던지고 홀로 자연 속으로 들어가자. 그것은 등산이어도 좋고 여행이어도 좋다. 혼자 며칠이라도 좋으니 관계가 주는 부담에서 벗어나 나라는 존재만을 음미해 보자. 인간은 결코 혼자일 수는 없다.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관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의 끝에 위치한 나에 대한 성찰과 관리는 필수적이다. 다 집어던지고 훌쩍 여행을 떠나자. 그래야만 관계망을 지탱하는 나를 온전하게 가꿀 수 있다. [블로그 빈배/ 나는 없고 인연만 남아있지 않나요.에서]


온라인상에서 무엇이 문제를 야기하는가?

익명성이라는 것과 대면상대라는 점을 빼면 오프라인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여러 문제를 들 수 있지만 예의범절의 실종과 거리유지의 실패를 꼽을 수 있다.

 

친절서비스분야에 회자되는 ‘최소율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자면 고급레스토랑에서 시설과 분위가 최고급이고, 음식 맛도 좋고. 종업원들 서비스도 최상인데,

주차장에서 직원도 아닌 주차관리요원이 손님에게 불쾌하게 대해 기분을 잡쳤다고 치자.

그러면 고객은 그 레스토랑에 대해서 평균점을 주며 그래도 괜찮은 음식점이라고 애써 칭찬하지 않는다.

평가는 주차요원의 점수로 매겨져서 그 음식점 형편없다며 발길을 끊고 만다.

인간관계에서도 다 잘하다가 한번 상처를 받으면 형편없는 친구라며 서먹해지게 되고

심하면 원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예의범절을 특별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온라인의 블방에는 실명이든 비실명이든 간에 수많은 사람이 드나든다.

수많은 인파가 오고가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끌어안고 키스를 해대는 철없는 애들처럼 민망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블방을 오고가는 사람들이 낯 뜨겁지 않도록,

서로가 오고가는 말에 가급적 감정을 죽여서 너무 튀지않게 절제해야 되고 

다중을 의식하고 배려하면서 소통을 해야 하는 공공장소임을 인식해야 된다는 말이다.


거리유지는 인간관계에 필수적이다.

너무 가깝게 다가서면 반작용으로 언젠가는 서로 상처를 받고 튕겨나게 되어있다.

참으로 어려운 것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인데 ‘

이규태 코너’의 글에서 그 답을 찾으면 어떠할지?

그래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바람이 일렁이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내 스스로 다짐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산가족만나는 장면을 계속보고 있노라면, 어느 한 공통된 상봉유형을 발견할 수가 있다. 혈육임이 확인된 순간 끌어 앉고 울부짖는다. 이렇게 감정반응으로 만남은 시작된다. 한동안 끌어안고 흐느끼다가는 눈물을 씻고 ‘아버님 어머님 절 받으십시오’하고 거리를 잡고 넙죽 엎드려 큰 절을 한다. 감정반응이 규범반응으로 옮겨간다. 이 같이해서 상봉충격으로 이지러진 규범과 이성을 되찾고 두 사람 틈에 ‘사이(間)가 되살아난다. 만약 절이라는 차단제가 없었다면 엿처럼 엉겨 붙은 그 벅찬 감정적 교착을 어떻게 감당했을까하는 의구심마저도 든다.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절이긴 하지만 사이를 잡아주는데 절이 이처럼 필요한 것인가를 절감케 해주었다. 이세상은 부자, 모자, 부부, 고부, 형제, 사제, 노사, 이웃, 위아래, 동료, 동업...등등 사이러 얽혀져있다. 그사이는 너무 밀착돼도 또 너무 격리돼도 갈증과 증오가 생겨난다. 그래서 너무 멀어지면 접근하고 너무 접근하면 거리를 두는 적정한 ‘사이’유지가 필요한 것이다. 부모 앞에 설 때는 자기 키 이상 접근해서는 안되고 스승은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바로 ‘사이’유지의 전통적 슬기였던 것이다.  [1986년판 이규태코너/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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