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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제주도

제주 화산섬의 형성과정

백수.白水 2016. 1. 27. 07:27





제주도의 화산활동은 신생대 제4기(약 180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인류의 원시 조상이 출현한 시기이며 빙하기와 간빙기가 수만 년 주기로 교차하며 고생대 이후 가장 한랭한 기후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의 빙하기&mipot;간빙기 교차에 의해 해수면(海水面)이 130여m씩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였다.

따라서 제주도 형성 이전의 남해 지역은 빙하기 때는 드넓은 평야지대가 되었다가 간빙기가 되면 수심 100여 m의 대륙붕이 되기를 반복하였다.


제주도의 화산활동은 수성화산활동(水性火山活動)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물이 풍부한 대륙붕 위에서 화산활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마그마가 차가운 물과 만나면 마그마는 급격히 냉각되고 부스러지면, 물은 급격히 기회하고 팽창하여 폭발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화산분출 양식을 수성화산활동이라고 하는데, 제주도의 수성화산활동은 1백만 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그 결과 제주도의 용암대지 밑에는 무수한 수성화산(응회환과 응회구)이 여러 겹으로 겹쳐 쌓이게 되었고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육지와 바다에 쌓여 “서귀포층”이라는 지층을 만들게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수성화산의 일부는 용암대지 위로 돌출해 있으며, 단산, 군산, 용머리, 당산봉 등이 그 예이다.


수성화산활동에 의해 서귀포층이 쌓여감에 따라 제주도 지역의 고도가 전반적으로 높아지고, 결국은 빙하기의 평균적인 해수면(현 해수면 下 50~60m 고도) 위로 제주도가 성장하여 간빙기 때도 물에 잠기지 않을 만큼 높은 지형(섬)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수성화산분출은 점차 줄어들고 중기 플라이스토세(약 40~80만 년 전 사이)부터는 용암 분출이 우세하게 일어났다. 이렇게 분출한 용암은 서귀포층 위에 겹겹이 쌓이며 서서히 넓은 용암대지를 만들어 나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타원형의 제주도가 서서히 만들어졌으며, 용암분출은 섬의 중심부에 집중되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생인류가 출현하여 구석기 문화를 이루던 수만 년 전에는 남한의 최고봉인 한라산이 제주도의 한복판에 만들어지게 되었고 제주도는 거의 완성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지구환경이 지금과 거의 동일해지고 현생인류가 신석기 문화를 이루던 현세 중기(약 7천~5천년 전)에 마지막 수성화산분출이 제주도의 동쪽 끝과 서남단에서 일어났으며, 이 분출에 의해 성산일출봉과 송악산이 만들어졌다. 이 화산들이 침식되며 주변 연안에 신양리층과 하모리층과 같은 현세퇴적층이 쌓였고, 그 위에는 선사시대의 사람발자국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제주도의 화산분출은 역사시대까지도 지속되었다.



제주의 역사선사시대 제주도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78만년 전의 구석기시대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선사시대 제주사람들은 주로 동굴생활을 하였는데, 구석기시대 유적인 빌레못동굴유적(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에서는 타제석기와 함께 오늘날 시베리아나 알래스카 지방에서만 서식하는 순록과 황곰의 뼈가 발굴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경면 고산리 선사유적(12,0008,000년 전)이 있는데, 화살촉, 첨두기(창끝)와 같은 사냥도구와 다량의 토기들이 출토되어 집단생활을 하며 수렵과 채집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탐라시대 제주의 옛이름인 탐라(耽羅)라는 명칭은 6세기에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데, 이는 주변의 다른 지역집단과 구분되는 해상도서집단으로서 나름대로 결속력이 있는 일정한 통치체제가 제주도에 갖추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치?사회집단은 대략 기원전 23세기경부터 제주도에 출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에 모흥혈(삼성혈)에서 제주도의 고, , 부 성씨의 시조인 삼성신이 용출하여 벽랑국 공주와 혼인하고 농목생활을 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제주시 삼양동에서 크고 작은 움집, 창고, 경계석축, 배수로 등 240여기가 넘는 주거지로 구성된 남한 최대의 고대 마을유적(B.C.200A.D.200)이 발견되어, 탐라국 형성기에 이미 제주에 대규모 마을이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탐라국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국호를 탁라(?), 탐라(耽羅)라 하고 한반도의 백제, 고구려, 신라와 각각 교역하였으며,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직후(A.D.660)에는 바다건너 일본과 중국 당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었다.

 

고려시대 한반도에 고려가 세워지면서, 탐라 태자가 고려에 입조하기도 하였으나, 12세기경에 탐라국은 고려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관리지역으로 편입되면서, 제주(濟州)라는 지명을 갖고 시기에 따라 군, , 목 등으로 바뀌면서 편제되었다. 13세기 몽고의 침입기에는 끝까지 몽고에 굴복하지 않았던 삼별초의 최후거점이 되기도 하였으며, 삼별초 붕괴 후에는 몽고가 탐라총관부라는 직할 기관을 두고 20여 년간 제주를 직접 관리하였다. 이때 제주도에 몽골마 160필이 들어오면서 목마장의 시초가 되었다. 1294년 제주도는 다시 고려로 반환되었지만, 토착화한 몽고세력의 영향은 1374년 최영장군에 의해 목호(몽골인 목자)의 난이 평정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시대 고려를 이은 조선초기 제주에는 제주목과 대정현, 정의현의 12현제가 정립되고, 관아의 설치와 성이 구축되면서 인구도 고려시대 1만명을 상회하는 수준에서 6만명 이상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1517세기에 걸쳐 장기간 흉년이 지속되면서 인구가 급감하게 되자 조선조정은 제주도민의 출도를 금지하는 국법을 만들기도 하였다. 한편, 제주도는 육지와는 격리된 절해고도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조선왕조 약 500년 동안 2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귀양살이했던 유형지이기도 하다. 유배인의 신분은 광해군과 같은 폐왕이나 왕족, 정치인, 학자로부터 승려와 환관도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었다. 이들 유배인은 사사 혹은 타지역으로 이송되기도 하였지만, 일부는 사면 후 제주도에 정착하여 입도조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근현대일제강점기인 1915년에는 제주도의 군제(郡制)가 폐지되고 도제(島制)가 실시되었고, 1917년에는 해안을 따라 환상(環狀)의 일주도로가 개통되었다. 그러나 일제에 항거한 주민들의 항일투쟁이 1918년부터 1932년까지 이어졌는데, 특히 제주도 동부지역 해녀들의 항일운동은 연인원 17천여명이 참여하는 국내 최대의 여성운동이었다. 한편,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미군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일제는 미군의 제주도 공략을 예상하고 제주 주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주요 오름과 해안지역에 90개가 넘는 진지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제주도는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지방행정체제를 갖추었지만, 1948년 좌우익의 이념대립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하는 4·3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4·3의 비극을 극복하고 인류평화를 염원하는 도민의 역량을 모아 2000년 제주는 세계평화의 섬으로 선포되었고, 2006년에는 국제자유도시로 새롭게 발돋움하기 위하여 제주특별자치도(2행정시, 7, 5, 31)’가 출범하였다.


세계지질공원(Global Geopark)

 

세계지질공원은 지질학적으로 뛰어난 가치를 지닌 자연유산 지역을 보호하면서 이를 토대로 관광을 활성화하여 주민소득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유네스코 프로그램이다.

 

다양한 화산지형과 지질자원을 지니고 있는 제주는 섬 전체가 세계지질공원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지질명소는 섬 중앙에 위치한 제주의 상징인 한라산, 수성화산체의 대표적 연구지로 알려진 수월봉, 용암돔으로 대표되는 산방산, 제주 형성초기 수성화산활동의 역사를 간직한 용머리해안, 주상절리(柱狀節理 : 화산폭발 때 용암이 식으면서 부피가 줄어 수직으로 쪼개지면서 5~6각형의 기둥형태를 띠는 것)의 형태적 학습장인 대포동 주상절리대, 100만년전 해양환경을 알려주는 서귀포 패류화석층, 퇴적층의 침식과 계곡·폭포의 형성과정을 전해주는 천지연폭포, 응회구의 대표적 지형이며 해뜨는 오름으로 알려진 성산일출봉, 거문오름용암동굴계 가운데 유일하게 체험할 수 있는 만장굴, 2014년 추가로 대표명소로 지정된 우도, 비양도, 선흘 곶자왈 12개 대표명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