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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영탑사(靈塔寺)

백수.白水 2016. 12. 9. 05:18

2016.12. 03(토)

 

백제시대 대중국문화교류의 유출입통로였던 가야산협곡의 보원사는 백제-고려시대에 걸쳐 번창했던 절로 알려져 있다옛터의 규모로 미루어볼 때 가야산에 있었다는 100여개 사찰의 본거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원사지로부터 직선으로 89km거리에 있는 당진의 안국사나 영탑사도 그 당시에 같은 가야산권역이었을 것이다.

 

가야산의 옛 이름은 본래 상왕산(象王山)인데 지금의 남연군묘자리에 가야사가 생기면서 그 이름이 가야산으로 바뀌었다가야는 산스크리트어로 코끼리를 뜻한다고 하니 (코끼리)을 쓴 상왕산이나 가야산이나 그 이름이 지니는 의미는 모두 '부처가 머무는 곳'이라는 하나의 맥으로 통하게 된다

지금은 마애삼존불상에서 용현계곡너머 정서(正西)쪽 봉우리(309m)를 상왕산으로 부르고 있지만, 영탑사가 자리한 이곳 당진군 면천의 산도 상왕산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

 

확실치는 않으나 흥선대원군이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서 가야사를 불태웠을 때 가야사승려들이 법당금종과 금동삼존불 등을 이곳 영탑사로 옮겨왔다고 하니 관심을 끈다.

 

 

 

 

 

영탑사 [靈塔寺]는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하리 상왕산(象王山)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말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지금의 큰 방앞에 오층석탑을 세우고 영탑사라 했다고 한다. 그뒤 무학 자초(自超)가 지금의 법당 자리에 있던 천연 암석에 불상을 조각하고 절을 중건했으며 대방 앞 정원에 있던 오층석탑을 법당 뒤의 바위 위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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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영조 36)에 편찬한 여지도서"영탑사는 군의 서쪽 5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보임에 따라 조선 후기 절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1798년에는 연암당 지윤이 유리광전을 중수하였다. 1911년 신도들이 중수하고 1988년 대웅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유리광전·산신각·요사채가 있다.   <출처: 이하 유적유물설명은 두산백과에서 옮김>

 

 

 영탑사 전각 및 유물배치도

 

 

1대웅전(범종) 2적묵당 3인법당(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4산신각 5요사채 6유리광전(약사여래상) 7칠층석탑

 

 

 

 

전각들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단정하고 아담하며 입구에서부터 수령100400년의 아름드리느티나무가 열 그루도 넘게 자리하고 있어 예스러운 풍치를 더해준다

 

 

 

 

 

 

<대웅전> 

 

대웅전대적광전이라고도 부르는 대웅전의 법당에는 약사여래상과 지장보살상 및 조선시대의 소형 범종이 있다.

 

 

 

<법당>

 

 

 

<법당 안에 있는 소형범종>

 

 

영탑사범종(靈塔寺梵鐘)은 높이 60cm, 밑지름 46cm인 작은 종이다. 이 종에는 건륭이십오년 경진이월 가야사법당금종백근금입중조성야(乾隆二十五年 庚辰二月伽倻寺法堂金鐘百斤金入重造成也: 17602월 가야사 법당 금종을 백근의 금을 녹여 만든다)’라는 기록이 있고 덕산홍주면천의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이 있다. 이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이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묘를 쓰기 위해 불태운 절이다. 사찰이 불탔을 때 가야사 승려들이 가야사 법당 금종과 금동 삼존불 등을 영탑사로 옮겨왔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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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서울 봉원사에도 연대와 가야사라는 명문(銘文)이 있는 비슷한 종이 대원군의 별저를 옮겨 지은 염불당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사에서 같은 해에 비슷한 형태와 크기의 종을 두 개씩 만들었다는 것이 흔하지 않은 일이고 이 두 개의 종이 영탑사와 봉원사로 옮겨진 것은 깊은 인연이 얽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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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종은 네 발을 힘차게 펼치고 있는 용의 굽혀진 몸통 아래에 달려 있다. 음통은 없고 조그만 구멍이 뚫어져 있으며 상대에는 범자문(梵字文)을 돌렸다. 유곽(乳廓)에는 간략화된 연화문 유두를 배치하였으며 유곽 사이에는 원형의 두광(頭光)을 표현한 보살 입상을 배치하였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범종 양식을 갖춘 종이다

 

 

 

<적묵당>

 

 

 

 

 

 

<인법당>

 

인법당의 대형금고 안에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친견하지 못해 문화재청의 사진을 올린다.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靈塔寺金銅毘盧遮那佛三尊坐像)>

 

 

고려 중엽에 조성된 금동삼존불(보물 409)은 연꽃에서 출현한 삼존불이 나란히 연화대좌 위에 좌정하고 있는 특이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크기는 전체 높이 51cm, 본존 높이 27.5cm, 좌불 높이 17.8cm, 우불 높이 18cm로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명문이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조성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또한 언제부터 이 불상이 영탑사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김규보 기자의 우여곡절 불교문화재

1928812일 오후 630, 당진 영탑사에 모셔진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8각형 연꽃무늬 대좌 위에 본존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이 계시고, 양 옆으로 협시보살이 있는 삼존불 구도인 금동불상은 구도와 형태 등에서 고려불상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다행히 범인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911일 서울 광화문 종로거리에서 붙잡혔는데, 취조해보니 전직 총독부 순사 이모씨였다. 그는 범행을 저지른 뒤 서울로 상경, 일당과 공조해 2000원을 받고 불상을 넘기려다 덜미를 잡혔다. 영탑사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의 첫 번째 수난이었다.

 

시간이 흘러 196495, 보물 409호로 지정돼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두 번째 수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75630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야음을 틈타 법당에 잠입했다. 그들은 사전에 범행 대상으로 점찍어놨던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법당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는 어둠 잠긴 경내의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들은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을 들고 영탑사를 빠져나왔다. 16개월에 걸쳐 이어지게 될 보물 도난 사건의 시작이었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이 신속하게 수사에 착수했지만 범행 윤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다 서울동대문경찰서가 1976122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주택을 급습해 전과 9범 김씨, 전과 8범 이씨 등 일당 5명을 검거했다. 당시 주택에서는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이 발견됐는데, 본존불과 협시불이 분리된 상태였다. 게다가 오른쪽 협시불은 손목이 3cm 정도 뜯겨져 있었다. 그들은 왜 불상을 분리했던 것일까.

 

사건의 주범은 전과 9범 김씨였다. 그는 절도죄로 대전교도소에 복역하던 중 영탑사에 값비싼 불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귀가 솔깃해진 그는 함께 복역하던 송씨를 회유해 범행을 계획했다. 영탑사 대웅전 문을 드라이버로 뜯고 들어간 그들은 훔친 불상을 송씨 집에 숨겨뒀다. 하지만 송씨가 그해 11월 자살하자 김씨는 그의 아버지에게 불상을 돌려줄 것을 종용했다. 부산에 장물업자가 있으니 불상을 팔아 300만원을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불상을 받은 김씨는 불상을 세 부분으로 분리해 유씨에게 왼쪽 협시보살상을 300만원에 팔고 본존불과 오른쪽 협시보살은 교도소에서 만난 이씨에게 판매를 부탁했다. 금동비로자나불삼존좌상은 돈에 눈 먼 김씨에 의해 갈가리 찢어졌던 것이다.

 

유씨는 왼쪽 협시보살상을 부산으로 보내 보관토록 했다. 이씨는 본존불과 오른쪽 협시보살을 일본인에게 5000만원에 팔기로 하고 제주도를 매매 장소로 결정했다. 일본인과는 이듬해인 1977년 초 제주도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됐다. 대한민국 보물이 자칫 일본으로 반출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당이 검거되면서 범행 일체가 드러났고,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 또한 막을 수 있었다. 검거 당시 붙잡히지 않았던 유씨는 대구의 친구집으로 도망쳐 숨었지만 126일 발각돼 서울동대문경찰서로 압송됐다.

 

한편 대학을 졸업하고 공주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유씨는 국보과 보물을 훔친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있었다. 1963년 서울 봉은사에서 보물 321호 청동 은입사 향완을 훔쳐 처분하려다 체포됐으며 1966년 양산 통도사에서도 불상을 훔쳐 처벌을 받았다. 19681월 현충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1974년 공주 동혈사에서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을 훔치기도 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유씨는 선조들이 만든 고귀한 문화재를 만져보고 읽어본 것만도 만족한다. 범행에 대한 후회는 없다고 했으나 굶고 있는 처자식을 돌봐 달라고 경찰에게 애원했다고 한다.

 

<출처: 2016.05.02. 법보신문 김규보 기자>

 

 

<요사채와 산신각>

 

 

 

 

 

 

 

 

 

 

 

 

 

<유리광전>

 

유리광전 안에는 마애불과 1994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제석천룡도가 봉안되어 있다마애불은 높이가 1.8m이며결가부좌한 형태로 얼굴이 몸체에 비해 크게 조성되어 비례감이 다소 떨어지는 고려 중엽 이후의 불상 양식을 보인다전설에 따르면고려 말에 자초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던 중 갑자기 기암괴석이 나타나그 상서로움을 신성하게 여겨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전각에 걸려 있는 편액은 8살짜리 어린아이의 글씨로, 1835(헌종 1)에 면천면 대치리에 사는 이씨 부인이 마애불에 백일기도를 올린 후 낳은 아들이 썼다고 한다.

 

 

 

 

 

영탑사 약사여래상(靈塔寺藥師如來像)은 유리광전(琉璃光殿) 안에 있는 석불이다자연 암벽에 양각을 한 좌불로 하반신은 잘 보이지 않으나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모습이다. 머리에는 육계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큰 편인데 입과 코만 튀어나오게 하였고 눈, 눈꺼풀, 눈썹 등은 선으로 조성하였으며 귀는 크고 길다. 옷주름도 선으로 표현하였는데 선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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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는 삼도(三道)가 있고 통견의(通肩衣)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광배(光背)에는 조각이 없고 손바닥 부분이 명확하지 않게 비사실적으로 뭉퉁그린듯 하여 약단지를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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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은 당당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우람한 거불로 세련미는 없지만 둔중하고 친근미 나는 고려시대 지방양식의 마애불이다. 고려 말에 무학대사가 바위에 이 약사여래상을 새기고 나라가 태평하며 국민의 생활이 평안하기를 빌었다고 한다.

 

 

 

 

 

 

<칠층석탑>

 

 

영탑사 칠층석탑(靈塔寺七層石塔)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유리광전 뒤 암벽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석탑은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이 사방(寺房) 앞의 정원에 5층석탑으로 세웠는데, 무학대사가 천연암석에 마애불을 조각하면서 석탑도 법당 뒤의 바위로 옮겼다고 하며 1911년에 신도들이 그 위에 2층을 더 올려 7층으로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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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은 조선시대인 1798(정조 22) 승려 지윤이 유리광전을 보수할 때 그 뒤 바위에 5층탑을 세우고 절 이름을 영탑사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묘를 쓰기 위해 덕산면 가야사와 금탑을 불지르고 부셨는데, 그때 영탑사로 옮겨왔을 것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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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단부가 없이 자연 암반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특징인데, 탑과 자연석이 만나는 부분이 어긋나 있다. 탑신과 옥개석(은 각각 1개의 돌로 만들었고 탑신에는 우주(隅柱)를 조각하였다. 옥개석은 유각(柳角)의 선이 약간 반곡되어 있고 전각(轉角)은 직선으로 조성되었으며 낙수면은 유각의 곡선을 따라 경사가 완만하다. 개석 받침은 3단으로 새겨져 있고 개석받침에서 추녀에 이르는 부분의 반곡이 약간 있다. 새로 쌓은 6, 7층은 옥개석의 반곡이 심하고 개석 받침의 두께도 얇게 새겨져 있어 5층까지와는 다른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탑과 비슷한 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