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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成三問)선생의 생가. 유허지(遺墟址)

백수.白水 2016. 12. 25. 21:58

2016.12.25(일)

 

홍성군 홍북면 한솔기권역마을에 있는 성삼문관련유적과 최영장군의 사당을 찾았다

홍북면은 홍성군의 최북단으로 용봉산과 내포신도시를 포함하며서쪽으로 예산덕산면북쪽으로 예산삽교읍동쪽으로 예산응봉면남쪽으로 홍성읍과 홍성금마면의 경계를 이룬다.

 

한솔기권역마을은 노은리(상리마을하리마을)와 대인리(신사마을내동마을)의 2개리로 구성되었다.

노은리(魯恩里)는 고려 때 적동리(赤洞里)라 하였는데조선조 때 금곡(金谷)이라 하다가숙종 때 우암 송시열이 매죽헌 성삼문(成三問)이 난 곳이라 하여 노은동으로 고쳤다.

 

노은(魯恩)이라는 칭호를 불리게 된 것은 숙종이 즉위하고 2년에 이량을 비롯한 선비와 유생들의 상소에 의하여 매죽헌 사당이 창건되고 그 후16년이 지난 1692년에 당대 학자이며 세도가 였던 송시열에 의해 노은(魯恩)서원이 창건되었다.

단종의 호 노산(魯山)의 첫 자와 은의(恩義)의 첫 자를 따서 노은서원을 창건하게 되었으며 그 뜻은 단종을 왕으로 다시 세우고자 했던 매죽헌 성삼문의 의로움에 은혜로 보답한다하여 魯恩書院(노은서원)이라 명명하였던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고려 명장 최영장군과 사육신의 한 분인 성삼문이 났으므로 적동의 무(赤洞之武)와 금곡의 글(金谷之文)이라 하여 유명하다.

 

 

 

 

역사 앞에 당당하고자 죽음도 불사한 기개.  백이숙제를 비웃은 성삼문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 찬사 얻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한 인물.

단종복위 거사 실패 후 고문에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랐던 빛나는 충절. 

 

성삼문(1418~1456)의 본관은 창녕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충남 홍주(洪州) 홍북면 노은동(魯恩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전설에 의하면, 그를 막 낳으려고 할 때에 하늘에서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났기에 하늘이 세 번 물었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삼문(三問)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형제는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이 있는데, 삼빙은 삼문의 형인지 동생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생육신인 성담수, 성담년은 그와 6촌간이며 이기, 이행 등은 외종질이다.

1435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1438년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 이후 관직에 올라 집현전 학사의 한 사람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

 

하위지는 그의 과거 급제 동기생이다. 세종이 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 성삼문과 박팽년, 신숙주, 최항, 이개 등을 항상 대동하고 고문으로 삼았다.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시 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양위로 즉위하자 그는 이를 찬탈(簒奪)로 규정했다.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했다.

성삼문은 국새는 옮겨졌지만 주상(主上)이 아직 계시고 우리가 있으니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며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했다.

이후 받은 녹봉은 월별로 표시해 취하지 않고 집 근처의 곳간에 별도로 쌓아두고 손도 대지 않았다.

 

단종복위 거사가 실패로 끝나자, 체포된 다음날 달군 쇠로 다리의 살을 뚫고 팔이 잘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는 기개를 보였다. 68일 그는 성승,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팽년, 박중림, 김문기, 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성삼문은 사형에 임해 죽기 전에 시 한 수를 지었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지언정 채미를 먹는 건가 / 아모리 푸새엣 것인들 그 뉘 땅에서 났다니'

 

성삼문의 일가도 멸족을 당했는데 아버지 성승을 비롯해 삼빙, 삼고, 삼성과 아들 맹첨(孟瞻), 맹년(孟年), 맹종(孟終) 등 남자는 살해당해 혈손이 끊기고 조부 성달생의 묘는 훼손됐다.

아내와 딸은 박종우의 집 노비로 분배됐고 다른 딸들은 관비가 됐으며 재산은 몰수됐다.

박씨와 엄씨 집으로 시집 간 두 딸만이 화를 모면했다.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그의 부모 묘소 근처에도 성삼문의 유품을 동리 선비들이 묻고 제사를 지내던 가묘(假墓)가 전한다. 그의 유품을 모신 묘소 근처에는 1668년 송시열의 문인이자 관찰사로 왔던 민유중이 추모표를 세우고, 뒤이어 숙종 때 우암 송시열이 묘소의 실전을 막기 위해서 친필로 쓴 유허비가 세워졌다.

 

주나라 땅의 고사리를 뜯어 먹으며 연명한 백이, 숙제 형제를 비웃으며 역사의 당당함을 택한 성삼문과 멸문의 화도 달게 받은 성씨 가문의 충절은 우리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출처: 국방일보한국사 인물열전 <25>  2014.12.28.>

 

 

 *사육신(死六臣)은 조선 세조 2(1456)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6명을 가리킨다. ‘병자사화(丙子士禍)’라고도 불리는 당시의 사건에서 이들 외에 권자신(權自愼)권저(權著)김문기(金文起)박중림(朴仲林)박기년(朴耆年)박대년(朴大年)박인년(朴引年)박쟁(朴崝)성승(成勝)성삼고(成三顧)송석동(宋石同)심신(沈愼)윤영손(尹令孫)이유기(李裕基)이의영(李義英)이호(李昊)이휘(李徽)조청로(趙淸老)최득지(崔得池)최사우(崔斯友)최치지(崔致池)허조(許慥)황선보(黃善寶)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 화를 입었다.

 

계획을 주도한 성삼문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성승유응부윤영손권자신박쟁송석동이휘 등은 1456710(음력 68)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조정의 신료(臣僚)들이 모두 입회한 상태에서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하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집에서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의 친자식들도 모두 목을 매어 죽이는 교형(絞刑)에 처해졌으며,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가 되었고, 가산도 모두 몰수되었다.

 

*생육신(生六臣)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의 대비하여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았지만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사람을 생육신이라 하는데,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이다. 사육신이 절개로 생명을 바친 데 대하여 이들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또는 방성통곡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하였다.

 

 

마우스왼쪽을 클릭하면 지도를 원본크기로 볼 수 있다.

 

 

성삼문선생유허지(成三問先生遺墟址)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104번지에 있는 유허지는 성삼문이 출생한 집터이며, 그의 사후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서원이 건립된 곳이다. 입구 길가에 두 개의 비가 세워있는데, 하나는 유허비로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노은서원 유허비이다. 유허 안에는 사당인 충문사(忠文祠)가 있고, 왼쪽 언덕에 노은단이 있다.

 

이곳은 성삼문(成三問)의 외조부 박담(朴膽)의 고택이 있던 곳이며, 성삼문이 출생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676(숙종 2) 사인(舍人) 이량(李湸)과 유생들이 성삼문 등 사육신의 절의와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성삼문의 탄생지에 사우를 건립하였다. 1685(숙종 11)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를 추가 배향하였다.

 

1692(숙종 18)에 조정에서는 이 사우를 녹운서원(綠雲書院)이라 명칭하고 사액하였다가 1712(숙종 38) 노은서원(魯恩書院)으로 개칭하였다. ‘노은은 민진후(閔鎭厚, 인현왕후 오빠)와 송시열(宋時烈)이 노산(魯山)자와 은의(恩義)자를 따서 동네 이름을 노은이라 했던 데에 기인한다.

 

노은서원 옆에는 별사(別祠)를 건립하여 성승(成勝, 삼문의 아버지)의 위패를 1687(숙종 13)에 봉안하였다. 이후 1784(정조 8)에 성승은 별운검(別雲劒)으로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던 점이 인정되어 신원된 후 제향되었다.

 

그러나 노은서원은 1864(고종 1)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었다. 당시 유생들은 사육신의 위패를 현 노은단 자리에 매안하고 단을 모아 노은단(魯恩檀)’이라 하고, 매년 음력 1015일 제향을 올렸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홍성고적현창회에서 삼문을 개축하고 정화하였다.

 앞쪽 비각 안에 유허비가 있고, 비각 왼쪽에 노은단, 오른쪽에 사당인 충민사가 자리한다.

 

앞쪽 비각 안에 유허비가 있고, 비각 왼쪽에 노은단, 오른쪽에 사당인 충민사가 자리한다.

 

 

 

 

↑ 사당인 충문사에서 올려다본 노은단 

 

노은단(魯恩壇) 

 

노은단에서 내려다 본는 풍경 ↓

 

 

 

 

 

 

노은단에서 보는 마을의 입구 하리마을(아랫마을)

 

 

사당인 충문사(忠文祠) 전경

 

 

충절문

 

 

충문사

 

 

성삼문[成三問,1418(태종 18)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청남도 홍성출신. 개성유후(開城留后) 성석용(成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달생(成達生)이고,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1435(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는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으며,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하였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했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이개 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 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와 1446929일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453(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 인·김종서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고는 그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는데 이를 사양하는 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 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를 강요할 때, 그가 국새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후 아버지 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박팽년·유응부·허조·권자신·이개·유성원 등을 포섭,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456(세조 2) 6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는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그의 아버지 승과 유응부·박쟁(朴崝) 등 무신들에게는 세조와 윤사로·권람·한명회를, 병조정랑 윤영손 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김질에게는 그의 장인인 정창손으로 하여금 상왕 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어 거사는 일단 중지되었다. 이에 거사는 세조가 친히 거둥하는 관가(觀稼: 임금이 봄에 권농하기 위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던 행사) 때로 미루어졌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 종친에 대한 호칭)’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을 변호해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그 달 8일 아버지 승과 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유응부·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그 때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 및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해 혈손이 끊겼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그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節臣 : 절개를 지킨 신하)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특히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그의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에서 대의를 위해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높은 절의를 기록, 후세에 전하였다.

 

1691(숙종 17)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1758(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 있다.

 

장릉(莊陵: 端宗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쓴 홍주성선생유허비(洪州成先生遺墟碑)연산성선생유허비(連山成先生遺墟碑)가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 매죽헌집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