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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대왕(顯宗大王,1827∼1849)태실(胎室)

백수.白水 2016. 11. 27. 20:15

 

조선시대에 왕손이 출생하면 백자항아리에 태를 넣어 명당자리에 태실을 만들고 뒤에 임금으로 등극할 경우 개건했다. 태봉에 안치된 태의 주인공이 보위에 오르면 가봉(加封)했는데, 이는 등극한 임금의 태실을 다시 손질하는 것으로 귀부석(龜趺石)이 가봉(加封)시에 설치되며 그 지역이 한 단계 승격됐다.

덕산현이 덕산군으로 승격된 것이 24대 헌종13(1847) 때인 것을 볼 때 태실 고장에 대한 예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태실의 설치는 군현의 위상과도 밀접히 관련됐고, 영역확대 등의 특혜가 주어지는 경우도 있어 태실을 자기 지역에 유치하기 위해 지역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태함(백자항아리)은 대부분 일제 때 도굴되었다.

 

 

 

옥계저수지는 1957년에 준공되었다.

 

 

1827(純祖27) 718일에 태어난 헌종대왕(憲宗大王)의 태실은 예산가야산자락 옥계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明月峰)에 있다. 헌종(18271849)8세 때 조선24대 왕으로 올랐고, 재임 중이던 1847년 태를 묻은 곳을 단장했다헌종대황의 태실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7년부터 서삼릉(西三陵)으로 어태(御胎)를 이안한 후 파괴된 채로 현재까지 방치되어왔다

 

 

 

 

 

 

 

 

거북등에는 커다란 비석이 있었는데 1970년대 누군가 훔쳐 가려다 너무 무거워 끌고 가지 못하고 태실 앞 저수지로 굴려버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2015. 9월 20일 수중탐사를 통해 이 비석을 옥계저수지에서 인양했으나 아쉽게도 상단은 없어진 상태다.

 

 

 


 

 

헌종의 태실에 1847(헌종13) 석물을 단장한 뒤 주변의 산세를 함께 그려 왕실에 보고하기 위하여 남쪽에서 바라본 정면그림이다.

 

 

헌종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憲宗胎室加封石欄干造排儀軌)

 

 

순조실록(純祖實錄271112안태사(安胎使) 이 지연(李止淵)이 이달11일에 태를 모시고, 덕산현(德山縣) 가야산(加倻山) 밑 명월봉(明月奉) 태봉소(胎封所)에 가서 그 날 신시(申時)에 태를 봉안하였다고 치달(馳達)하였다.’

 

아지태실은 순조27(1827)1111일에 봉안 되었으며 태실 가봉은 1846년 봄에 거행하자는 비답이 있었으나 그 해가 좌약에 구기된 바 있다는 예조(禮曹)의계에 따라 다시 다음해로 미루어졌다.

 

태실가봉(胎室加封)1847년에야 이루어졌는데, 그 준비 작업은 이미 184610월말부터 추진되었고 107일에는 택일(擇日), 1110일에는 석물(石物)등 태실체양(胎室體樣)을 영조조(英祖朝)태실석물 가봉시례(胎室石物加封時例)에 따라 마련한다는 것 등의 결정사항이 있다. 작업은 예정대로 321일에 태봉의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1847128일부터 321일까지 대략 2개월간 진행되었으며, 동원된 부역군은 1000명 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