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11(월)
고운 최치원의 발자취는 전국적으로 여러 곳 전해지는데 그중의 한곳인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 용연마을을 찾았다. 마을가운데로 흘러내리는 두 갈래 계곡물이 하나로 합쳐지며 못을 이루는 곳, 이름하여 쌍계계곡이다. 계곡 위쪽으로 석성과 극락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금석문이 최치원이 쓴 것인가에 관하여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특히‘쌍계(雙溪)’라고 쓴 것은 글씨의 크기나 필체가 쌍계사 입구의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최치원이 홍성군 장곡 지역에 금석문을 남긴 것은 그가 지금의 충남 서산인 부성군 태수를 할 적에 인접 지역인 이곳에 자주 와서 둘러보고, 이곳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나중에 은거하면서 여생을 마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치원은 신라말기인 헌안왕(47대, 857-861)원년에 태어났다. 이 시대는 중앙 귀족들의 권력투쟁으로 국정이 극도로 문란하였고, 지방호족들은 경제와 군사력을 갖추어 성을 쌓고 성주를 자처하며 지배권을 행사하는 등 말기증상이 심화되던 혼란의 시기였다.
진성여왕이 물러난 후 효공왕(52대, 897-912)재위시 나라가 분열되어 후삼국시대로 접어든다.
견훤 후백제건국(900), 궁예 후고구려건국(901), 왕건 고려건국(918), 신라 고려에 항복(935), 후백제 멸망(936)으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고려가 다시 한반도의 통일을 이룬다.
한편,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골품제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망국의 험한 세월, 최치원은 12살의 어린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고, 18세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황소의 난 때 토황소격문을 지어 유명해졌고, 그 후로 계원필경 등을 지어 이름을 날리다가 28세 때인 884년에 귀국하였다.
나라가 극도로 혼란을 겪던 시기에 그는 지방의 태수자리를 전전하다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껴 40여 세의 젊은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소요(逍遙)하다가 마침내 은거하였다고 한다.
908년(효공왕 12)말까지 생존했던 것은 분명하나 그 뒤의 행적을 전혀 알 수가 없고 방랑하다가 죽었다거나 우화등선(羽化登仙)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위성지도를 확대하면 흘러내리는 두 줄기 계곡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유적지
고려 현종은 고운 최치원(857∼ ?)에 문창후란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종향토록 했다. 그러나 선생의 행장에 대하여는 44세인 901년에 우화등천(羽化登天,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했다는 설이 일관되게 전해지면서 그 후의 행장과 묘역에 대하여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보한집(補閑集)에서 최자(催滋)는‘최치원은 합천 가야산에서 은거하다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집은 나간 뒤 갓과 신발을 숲 속에 남겨 놓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 해인사에 봉안하고 제사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이때가 선생나이 50대 후반이며 삼국사기(三國史記46. 列傳)에 그 제자들이 고려조에 출사한 사람이 많았다고 전한다. 또한 여러 가지 사료를 통합해 볼 때 가족들을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끝을 마쳤다(引帶家入伽倻山而終焉)는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에 서유구와 이규경은 계원필경(桂苑筆耕)과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에서 ‘선생의 장례는 호서의 홍산에서 지냈으니 신선이 되었다는 말은 망령된 말이다. 홍산의 선생의 묘는 중국주칠에 있는 노자의 묘와 같고 황제의릉과 같으며 묘비가 있는데 비액은 자필이고 음기는 후손 최흥효(崔興孝)가 썼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홍주향토문화연구회원들이 10여 년 간의 조사연구 끝에 금석문과 강당지(講堂址)와 은거지로 추정되는 곳을 찾았는데 최종적인 발굴조사가 남아 있다. [출처: 홍성군청홈페이지]
은거지로 전해지는 곳이다.
용은별서(龍隱別墅. 가로 23㎝,세로 26㎝): 용은 농막에 숨어있다. 別墅(별서)는 별장과 비슷하나 농막으로 쓰이는 점이 다르다. 세상의 벼슬을 마다하고 조용히 여행을 보내고자하는 최치원선생의 심경을 표현했다.
<龍隱別墅의 뒷면. 7-8㎝>
質凝雲彩 文折龍鱗 坐待明月 醉留佳賓 (질응운채 문절용린 좌대명월 취류가빈)
경관은 구름 무지개 되어 엉키고, 문필은 물결져 용비늘처럼 꺾이는데, 앉아서 밝은 달을 기다리는 밤, 취기는 정든 소매 잡는다.
月峽(월협): 흐르는 계곡물에 달빛이 비치는 골짜기 곧 달빛 계곡이라는 말이다.
醉石(취석) 돌의 아름다움에 도취됨.
<뒷면> ○○孤雲彩○ (고운채) ○○○○鯁陰 (경음) 마모되어 뜻을 알 수 없음.
人百己千(인백기천) 다른 사람이 백 번을 노력하면 나는 천 번을 노력한다는 의미로 신라시대 최고의 천재였던 최치원이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때, 아버지가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부자의 연을 끊겠다며 써준 글귀라고 한다.
서당 앞에서 국수를 만들기 위하여 밀가루를 반죽할 때 쓰던 돌.
端凝挺立 如眞官 縝潤削成 如珪璨(단응정립 여진관 진윤삭성 여규찬. 7㎝ )
엄숙하게 정립함이여, 빛나는 관작이로다. 치귈한 깍음질이여, 영롱한 큰 홀이로다.
흘러내려온 두 줄기 계곡물이 하나로 합쳐지며 못(소,沼)이 만들어졌다. 이곳을 용연(龍淵)이라고 했을 것이며 장곡면 월계리의 용연부락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암각문이 있는 계곡, 아래에서 위로 볼 때 암감문은 왼쪽 석벽에 새겨져있다.
龍巖(용암. 7㎝)
翠石 ⃞ ⃞ 色玲瓏(취석 ⃞ ⃞ 색영롱) <2줄 14자 중 4자만 확인됨 : 글자크기 6㎝) *翠石: 비취색돌.
雙溪 崔孤雲書(쌍계 최고운서. 雙溪85cm. 崔孤雲書8cm.)
翠屛(취병. 9㎝): 비취색병풍
錦石(금석. 8-9cm)
무슨 글인지 알 수가 없다. ???禮敎(예교, 초서체 크기 85㎝)
강당지로 전해지는 곳.
내포지방유적
-.세이암∙고운(洗耳嵒∙孤雲) 예산덕산
-.해일(海溢, 海夫) 보령남포
-.부성사(富城祠) 서산부석
-.過仙閣 서산읍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보령성주산
영남지방유적
-.진감선사비명(眞鑑禪師碑銘,국보47호) 하동쌍계사
-.야유암(夜遊巖) 경북문경
-.지필암(池筆岩) 해인사입구.
-.월영대(月影臺) 마산해운동
-.쌍계∙석문(雙磎∙石門) 하동쌍계사입구
-.광제암문(廣濟嵒門) 산청군 단속사입구
-.농산석벽시(籠山石壁詩) 합천홍류동석벽
-.해운대(海雲臺) 부산 동백정
-.영정각(影幀閣, 상서장) 경주 인왕동
-.고정(古井) 경주 배반동
-.파향정(坡香亭) 태인 태창
-.자천대(紫泉臺) 옥구향교
-.가야서당(伽耶書堂, 학사당) 합천 가야홍류동
-.문창서원(文昌書院) 옥구
[인물 한국사] 유불선 통합을 주장했던, 신라최고의 천제 최치원
최치원(崔致遠, 857~?)은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하지만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난세를 산 그의 삶은 그가 이룩한 높은 경지만큼 불행했다.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아라. 나 역시 아들이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열심히 하거라.”868년 어느 날, 당나라로 떠나는 열두 살의 최치원에게 아버지는 말했다.
먼 곳으로 어린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당부로는 지나치리만큼 매서운 이 말 속에는 대대로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얻었던 최씨 집안 자손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6두품으로서 느끼는 한과 비애가 숨어 있었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열 살 때 사서삼경을 읽었다.”라는 기록이 전할 만큼 총명한 아들이었지만 신라에서는 그 재능을 다 펼치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였다.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이었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골품제라는 한계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했던 6두품들은 당나라 유학의 길을 많이 선택했다. 837년 한 해 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 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
유학을 떠나는 최치원의 각오도 아버지 못지않았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6년 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했다. 그냥 합격도 아니고 장원이었다. 빈공과는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로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귀국 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코스였다.
과거에 합격한 2년 뒤인 876년 율수현의 현위로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이쓰인 것은 이때의 일이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
이렇게 시작한 글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며 겁을 주기도 하고 “나는 한 장의 글을 남겨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기회를 보아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해라.”라고 회유하기도 한다.
고변은 황소가 장악한 모든 지역에 이 글을 뿌렸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소의 난이 진압된 뒤중국 황제는 최치원에게 자금어대를 하사했다. 자금어대는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로, 이것을 받았다 함은 그 능력을 황제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다.
[토황소격문]으로 문명(文名)을 떨쳤고 황제에게 인정도 받았으나, 고국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인지 최치원은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을 결정한다. 884년 당 희종이 신라 왕에게 내리는 조서를 가지고 귀국할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신라의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신라 조정에서 당에 올리는 표문을 비롯한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다. 헌강왕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당나라 유학생 출신들을 귀국시켜 학문적인 전문가로 측근에 두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한 젊은 최치원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최치원 또한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과 기량을 고국에서 제대로 펼쳐보이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7월 헌강왕이 승하하자 최치원은 곧 외직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 외직으로 나간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는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나라에 유학해 얻은 바가 많아서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신라가 쇠퇴하는 때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될 수 없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헌강왕이 세상을 떠난 직후임을 살펴볼 때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펼치던 헌강왕의 측근으로서, 헌강왕의 정책에 반발하던 진골 귀족들의 눈 밖에 난 것일 수도 있다.
그 무렵 신라는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지방에서 호족들이 등장하여 중앙 정부를 위협하고, 세금을 제대로 거두어들이지 못한 국가의 재정은 어려웠다. 889년에는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 상태에 빠졌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고국생활이었지만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혼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최치원은 외직으로 떠돌며 대산군∙천령군∙부성군 등의 태수를 역임했다.그러나 이듬해 7월 헌강왕이 승하하자 최치원은 곧 외직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 외직으로 나간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는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나라에 유학해 얻은 바가 많아서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신라가 쇠퇴하는 때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될 수 없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헌강왕이 세상을 떠난 직후임을 살펴볼 때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펼치던 헌강왕의 측근으로서, 헌강왕의 정책에 반발하던 진골 귀족들의 눈 밖에 난 것일 수도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진성여왕은 그의 시무책을 받아들여, 최치원을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아찬에 제수하고 그의 제안대로 개혁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당나라에서는 이방인이라는 한계가, 고국에 돌아와서는 6두품이라는 한계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이후 최치원은 은둔을 결심하고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며 열정적으로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으나, 그가 남긴 마지막 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따르면 908년까지 생존했던 듯하다. 그 뒤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고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최치원 자신은 신라인으로 남아 은둔 생활로 일생을 마쳤지만, 유교에서 그의 선구적 업적은 최승로로 이어져 신흥 고려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최치원은 한국유학사상 최초의 도통으로 모셔지고 있으나, 사실 그의 사상은 유교와 불교, 도교를 통합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지증∙낭혜∙진감 등 선승들의 탑 비문을 썼고,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있었으며, 유∙불∙선의 통합을 주장했다.
한편, 최치원이 왕건에게 “계림(신라)은 누런 잎이고, 곡령(고려)은 푸른 소나무”라는 글을 올려 고려에 대한 지지를 완곡하게 표현했으며, 심지어 이 때문에 신라왕의 미움을 받아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했다는 말들이 전한다. 그러나 최치원이 은퇴할 당시 왕건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으로 궁예 휘하의 장수에 불과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20년이나 더 지난 뒤의 일이다.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히 신라에 대한 강한 애착과 호국에 대한 굳은 의지를 글로 표현했던 최치원이 은밀히 왕건을 지지했을 것 같지는 않다.
[출처: 네이버캐스트 / 인물한국사/ 글윤희진, 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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