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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禮山 花田里 石造四面佛像)

백수.白水 2017. 1. 6. 19:43

2016. 01. 05(목)


학계에서는 백제가 대외적으로 팽창하던 웅진도읍기에 중국과 교역을 할 때 아산만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시기에 석조사면불상이 발견된 이곳 예산지역은 아산만과 웅진을 잇는 교통로로 보고 있다

따라서 사면석불의 조성시기를 늦어도 525(백제성왕 한강유역으로 진출시도)이전, 빠르면 웅진도읍기로 올려보고 있다.

따라서 내포지역의 태안마애삼존불<국보 307>. 서산마애삼존불<국보 84>. 예산사면석불<보물794>)3곳의 백제석불 중에서 화전리사면석불을 백제화를 시도한 우리나라 사면석불의 시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비해 태안마애삼존불과 서산마애삼존불은 7세기 초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禮山 花田里 石造四面佛像)은 충남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 산62-3에 있는 백제시대의 불상으로 높이 310cm, 110cm, 두께 80cm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사면불은 큰 돌이 비스듬히 묻혀 있던 것을 발굴·조사 후 원위치인 지금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주변에서 정면 3, 측면 3칸의 건물지와 탑자리 등이 함께 발굴 됐으며, 훼손된 것으로 알려졌던 3구의 불두는 공주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남향을 한 본존좌불(本尊坐佛)은 머리 및 팔이 없어졌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우측 무릎과 광배(光背)의 우측 일부가 다소 파손되었으나, 나머지는 양호한 편이다.

서향을 한 여래입불(如來立佛)은 마모가 심한 머리 부분이 남아 있고북향을 한 여래입불의 머리는 수습되었으나, 나머지는 없어졌다잔존한 여래불은 대체로 조각이 선명하나 4면 모두 대좌(臺座)가 파손되었고, 팔은 따로 조각하여 연결한 홈이 있다.

서향을 한 입불 이외에는 모두 두광(頭光) 내의 연화(蓮華)무늬가 뚜렷이 부조(浮彫)되어 잘 남아 있다.









보호각을 세우기 전의 모습 <사진: 한국불료미술대전>





남향을 한 본존좌불(本尊坐佛)

 


동향을 한 여래입상.



북향을 한 여래입상.



서향을 한 여래입상.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禮山 花田里 石造四面佛像)

 

원래 암반 위에 돌출한 돌기둥을 4면으로 깎아 각 면에 사방불상을 새긴 것이다. 돌기둥은 원래 남북 면이 넓고 동서 면이 보다 좁은 것인 듯 현재 원모습대로 다듬어 남···서의 순차에 따라 너비가 좁아지고 있다.

 

가장 넓은 남면에는 좌상을 새기고 동··서면에는 입불(立佛)을 새겼다. 남면불이 이 돌기둥의 주불(主佛)로 생각되며, 따라서 불전(佛殿)의 주불도 남방불로 생각된다. 이와 유사한 형식의 사방불로는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이 있다. 단지,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본존불이 좌불상으로 봉안되지 않은 것이 다를 뿐이다.

 

남면 남방불상(南方佛像)은 현재 머리, 두 손, 오른쪽 무릎 부분 등이 파손되었다. 하지만 발굴 때 머리의 발견으로 원 모습을 충분히 복원하여 볼 수 있다. 얼굴에 표현된 미묘한 묘사는 잘 알아볼 수 없도록 깨어졌지만 전체 윤곽에서 듬직하고 박력 있는 불력(佛力)을 느낄 수 있다.

 

체구는 두꺼운 옷 속에 감싸여 있어서 가슴이나 배 등의 양감 표현이 없다. 하지만 장대한 상체에 어깨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흘러내렸으며, 전체적인 윤곽이 퍽 세련되어 당대의 뛰어난 걸작으로 생각된다. 두 손은 결실되었지만 손을 끼우던 구멍 자리와 출토된 손 모양으로 보아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짓고 있었으리라 본다.

 

불의는 통견의로 오른쪽 어깨를 덮어 내린 대의(大衣)의 한 자락은 가슴을 거쳐 배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왼쪽 어깨를 덮어 내린 대의의 한 자락은 거의 직선에 가깝게 흘러내려 다리를 거쳐 상현좌(裳懸座: 불의가 아래로 흘러내려 보이지 않는 대좌)를 이루고 있다. 직선적인 옷주름이나 평행 계단식의 힘차고 강인한 주름선은 인도 굽타 불상을 기원으로 하는 운강석굴 불상에 유행되었던 고식(古式)을 따르고 있어서 주목된다. 특히 대의 안에 비슷한 불의를 입고 있는데 이것은 상의(上衣)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광배는 160나 되는 거대한 주형 거신광(舟形擧身光)이다. 두광(頭光)은 연꽃무늬·빗살무늬·덩굴무늬가 차례로 새겨졌으며, 이 주위로 불꽃무늬가 외곽으로 새겨져 있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이나 익산 연동리 석불여래좌상(보물 제45)과도 친연성이 있지만 소박하면서 박진감 넘치는 것이어서 보다 고식으로 평가된다.

 

동면 동방불상은 입상인데 남방 좌불상보다 다소 소박하고 단순하다. 등신대(等身大)의 이 불상은 비교적 당당하고 세련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 넓은 가슴, 균형 잡힌 어깨와 양감 있는 팔, 자연스러우면서도 곧은 하체 등에서 이 불상의 우아하고 세련된 형태미를 볼 수 있다.

 

통견의 불의는 소박하면서도 단순하게 처리되었지만 산뜻하고 우아한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광배는 8엽의 단판연화문(單瓣蓮花文: 홑잎의 연꽃잎무늬)을 새긴 두광만 있을 뿐 신광은 내만한 처리로 대신하고 있다.

 

북면 북방불상은 동방불상과 흡사하지만 노출되었던 부분도 있어서 원모습에서 어느 정도 변형되었다. 서면 서방불상은 전면 노출되어 마멸 때문에 원모습을 상당히 잃어버렸다.

 

이러한 사방불상의 특징은 중국의 공현석굴(鞏縣石窟)1·3·4(517528)과 친연성이 가장 강하고 용문 양식(494525)과 상통한다. 그리고 백제의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등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도 보다 선행한 양식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백제 작으로 자랑할 수 있는 작품 중 가장 이른 것이며, 세련미에서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에 버금갈 만한 중요한 대작이라 하겠다.

 

또한 이 불상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석조사방불이라 할 수 있으므로 그 조형 의지상 의미심장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불상은 우리 나라 조각사 연구 내지 백제 미술사상 가장 귀중한 작품의 하나로 생각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면석불(위 아래 사진3장)1983년에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유일의 사면불을 그대로 재현하여 사방에,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미륵존불을 조성한 불상으로 2008년 수덕사에 봉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