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10.일 천안에 살고 있는 아들네 집에 내려왔을 때, 잠깐 짬을 내어 예산봉수산에 있는 임존성(任存城)을 보러온 적이 있었다.
그날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날이 어두워져서 대련사만 둘러보았고, 그 다음날인 12.11일에 다른 코스(미사리)를 선택하여 임존성을 답사한 후 블로그에 글과 사진을 올렸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3년6개월이 지난 오늘, 대련사를 거쳐 봉수산에 올라 임존성을 한 바퀴 돌아 내려왔다.
다시 보는 대련사와 임존성, 그리고 그때 올렸던 글과 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딱히 옛글을 수정하거나 보충해야 될 내용도 그리 많지 않다.
그때는 겨울이었고 지금은 여름이니 바뀐 풍경사진이나 좀 올리고, 오류가 있는 부분을 수정하여 옛것을 그대로 옮긴다.
대련사에서 임존성 남문지로 오르는 길에서 만난 싱아.
뱀딸기.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혹시나 뱀이 침을 발라놓지 않았나 싶어서 나는 먹지 않는다.
대련사에서 올라가 남문지(南門址)를 만난다.
남문지(南門址)쪽에서 본 임존성의 남벽
엉겅퀴
성벽을 오른쪽으로 끼고 북벽(北壁)을 향해 오른다.
성벽위에는 옛날 건물지(建物址)였을 것으로 보이는 꽤나 너른 공지가 많이 나타난다.
성벽안쪽으로 난 길은 경사가 급하지 않고 평탄해서 걷기에 편하다.
도둑놈의갈고리
성벽과 전망대가 보인다.
망루2가 보이고 북장대지다.
북장대지에 있는 전망대에서 예당호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산개벚나무 열매?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산개벚지나무가 맞단다.
멀리 보이는 예당호의 방죽과 수문.
예당호의 물은 무한천으로 내려간다.
북벽길을 걷는다.
산딸나무.
옛 관아가 있는 대흥면소재지
그늘진 숲길.
신나무.
봉수산 정상으로 가는 길, 300m쯤 떨어져있다.
곰딸기
저 봉우리가 봉수산 정상이다.
쥐똥나무
봉수산정상은 484m로 결코 높은 산은 아니다.
봉수산(鳳首山)
충청남도 홍성군의 동쪽 금마면에 위치하는 산이다(고도:483m). 예산군 대흥면과 경계를 형성한다.
봉수산은 홍성군의 안산(案山)에 해당하며, 일명 대흥산(大興山)이라고 불리는 산정상부에는 백제 시대의 임존산성이 있다.
이 산의 산세는 매우 험준하며, 북쪽 산록에는 비티(飛峙)라는 험준한 고개가 있는데, 과거에 홍성지방과 대흥을 잇는 길목이다. 현재에도 비티고개와 큰비티고개[大飛峙]가 산정상부에 존재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봉수산은 "홍주 동쪽 21리에 위치하며 대흥현과 경계를 형성한다."고 기록하였다.
『여지도서』에는 오서산에서 북으로 뻗은 산줄기로 대흥의 주산이라고 기록하였다.
봉수산이라는 이름은 산이 봉황새의 머리를 닮았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대흥면에 있는 산이라 하여 '대흥산(大興山)'이라고도 불린다.
봉수산의 지명표기는 조선 시대에 제작된 지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즉, 『조선지도』, 『대동여지도』, 『1872년지방지도』(대흥)에서는 현재의 이름과 동일하게 표기되어 있지만,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 등에서는 '鳳壽山(봉수산)'으로 표기하였고 『1872년지방지도』(홍주)에서는 '鳳峀山(봉수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해동지도』에 산성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형도』에서는 현재의 지명과 동일하게 표기되어 있다.
정상 동남쪽에는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인 임존성(사적 제90호)이 남아 있다.
"임존성(任存城)이 바로 백제의 복신(福信), 지수신(遲受信),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거하던 곳이다.
지금의 본읍 관아 서쪽 13리 지점에 옛 돌성이 있는데, 그 주위가 5,194척이며, 안에 3개의 우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심컨대 이 성이 아닌가 한다."라고 적혀 있다.[지명유래➣➣예산 봉수산 참조]
참싸리
바위채송화(산채송화)로 보인다. 더 확인해보겠다.
아래사진을 클릭해서 원본크기로 보니 바위채송화가 아니라 돌나물이 맞다.
위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크기로 볼 수 있다.
꿀풀(하고초)
돌로 쌓은 성벽안쪽을 이렇게 자갈이나 돌로 채우고 다진 ‘내탁법 (內托法) 축성’의 흔적.
멀리 홍성시내가 눈에 들어온다.
서벽을 내려가면서 본 내상산(內上山,384m)
남쪽의 미사리마을과 맨 뒤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정상이 평평한 오서산(790.7m)
남쪽성벽
남벽과 오른쪽의 내상산
느티나무를 닮았다. 임존성내 우물 앞에서 가지를 넓게 펼쳐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나무, 아내가 앞마당에 저런 나무하나 심었으면 좋겠다고 이름을 알아보란다.
한국, 만주 및 중국북부가 원산지인 느릅나무(과) 시무나무(속)의 낙엽활엽교목인 시무나무다.
20리마다 심었다 하여 ‘스무나무’라 하던 것이 시무나무로 변했다.
동양에 1속 1종이 있을 뿐으로 높이 20m에 지름 2m까지 직립으로 자란다니 정원수로는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마사리에서 임도를 타고 올라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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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모두 2013.12.11일에 올린 글과 사진임]
백제·고구려 부흥운동
도침·지수신·흑치상지 - 백제의 부활을 꿈꾸다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階伯)이 이끈 5천 결사대를 물리친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은 곧장 사비성(泗泚城)으로 진격합니다. 또한 소정방이 이끄는 당(唐)나라의 13만 대군 역시 금강 기벌포(伎伐浦)에 상륙하여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사비성을 향해 쳐들어왔습니다. 서기 660년 7월 12일 사비성에 집결한 나·당 연합군(羅唐聯合軍)은 도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합니다. 결국 일주일 만에 사비성은 함락되고, 백제는 678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멸망하고 맙니다. 당시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은 백제의 의자왕(義慈王)과 태자 그리고 왕자 3명을 비롯하여 대신과 병사 88명, 1만 2천 87명의 백성들을 당나라로 끌고 갔습니다. 당나라는 백제를 자신들의 영토로 삼아, 웅진(熊津) 등 5도독부(五都督府)를 설치해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백제의 역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백제의 부활'을 위해 복신(福信)·도침(道琛)·지수신(遲受信)·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이 당나라에 맞서 전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백제 부흥운동은 무왕(武王)의 조카이자 의자왕(義慈王)의 사촌형제인 복신(福信)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복신은 승려인 도침(道琛)과 힘을 합쳐 주류성(周留城 :?충남 한산)을 근거지로 삼아 당나라에 맞서 싸우면서 백제의 부활을 꿈꾸었습니다. 그들은 왜국(倭國)에서 부여풍(扶餘豊)을 모셔와 백제의 왕으로 옹립한 후 독립 왕국을 세워, 사비성을 포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패하자, 포위를 풀고 퇴각해 임존성(任存城 : 충남 예산)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당시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은 스스로 장군(將軍)이라고 부르면서, 백제 부흥군을 불러 모아 세력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들은 백제의 옛 영토를 다시 찾는 한편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보급로를 끊는 등 나·당 연합군에게 큰 타격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백제 부흥운동은 부흥군을 이끈 복신과 도침이 서로 반목하게 되면서, 큰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복신은 도침을 살해하고 그 휘하에 있던 군대를 장악하자,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부여풍(扶餘風)과도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결국 복신의 '암살 계획'을 눈치 챈 부여풍은 미리 손을 써 복신을 죽였습니다. 그 후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국에 군사 지원을 요청해 당나라와 맞서 싸웠습니다.
부여풍은 서기 663년 백제 부활을 판가름 짓는 일대 격전을 준비하고 백강(白江)으로 나갑니다. 당시 백제 부흥군은 왜국(倭國)에서 보낸 지원군과 연합하여,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대전투(大戰鬪)를 치릅니다. 이 전투가 바로 '백강전투(白江戰鬪)'입니다. 그러나 백강전투가 신라·당나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백제 부흥군의 주요 거점인 주류성(周留城)마저 함락당하자, 백제 부흥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때 부여풍은 고구려로 몸을 피해 달아났고,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가 남은 부흥군을 이끌고 당나라에 항복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장수와 그를 따르는 부흥군만은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면서, 투항을 거부하고 싸움을 계속했는데, 그 장수는 지수신(遲受信)이었습니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백제의 패잔 병사 3만여 명을 다시 불러 모아 나·당 연합군에 맞서 전투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복신 이외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백제의 또 다른 부흥군의 총지휘관이었습니다. 흑치상지는 복신·부여풍과 협력하여 백제 부흥을 위해 싸우다가, 부여풍이 백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주류성마저 함락당하자 당나라에 항복했습니다. 당나라는 투항한 흑치상지에게 지수신이 이끄는 임존성의 마지막 부흥군을 토벌해 '당나라에 정성을 보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결국 임존성은 흑치상지의 공격을 받아 함락당하고, 지수신은 고구려로 몸을 피했습니다. 당나라에 투항한 흑치상지는 한때나마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쳤던 '백제 부활의 꿈'을 스스로 짓밟는 악역조차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임존성에 남은 마지막 부흥군마저 토벌당한 후, 백제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출처: 백제·고구려 부흥운동 (한국사 천자문, 포럼)>
백제부흥운동 최후의 격전지 임존성! 제일 높은 봉우리가 봉수산인데 그 높이가 겨우 484m에 불과하다고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원뿔모양으로 사방이 깎아지른 듯 경사가 가파르고 험준하기 그지없는 악산(嶽山,惡山)이다. 그나마 급경사오르막길이긴 하지만 예산군 광시면 동산리에서 대련사 까지 오를 수 있는 찻길이 있다. 대련사에 주차하고 임존성의 남문지(南門址)까지는 670m로 25분쯤 걸린다.
좀 더 편한 길은 광시면 마사리에서 임존성 남벽까지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林道가 있는데, 이곳도 가팔라서 아찔하기는 마찬가지다. 꼬불꼬불 오르막길을 한 번에 틀어 오르기가 만만치 않아, 후진했다가 방향을 틀어 다시 전진해야 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운전경력이 짧으면 동네에 주차해놓고 그냥 걸어 올라가는 편이 안전하다.
나는 첫날 자동차로 대련사 까지 올라갔었는데, 때가 너무 늦어 곧 어두워진다고 절에서 만류하는 통에 그냥 내려왔고, 다음날 아내의 운전 실력을 믿고 마사리에서 자동차로 林道를 타고 올라갔다.
산봉우리의 팔부능선을 테처럼 둘러싼 테뫼산성으로 남쪽보다 북쪽성벽의 고도가 훨씬 높다. 따라서 남벽에서 북벽으로 오르는 동벽과 서벽의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규모는 북벽:773m(470m정상부 ~ 420m봉우리). 동벽:190m. 서벽:373m 남벽:1090m. 총 둘레:2,426m. 면적:288,000평이라는 자료가 있는데 수치가 정확한지는 불분명하다.
임존성(任存城)
임존성은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의 표고 480m인 봉수산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다. 이 산성에서는 무한천을 비롯한 주변 지역이 쉽게 한눈에 들어오고 있어 이를 감시하기 위하여 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임존성은 테뫼식(山頂式) 석축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2,426m이다. 지형은 북고남저(北高南低)의 형태이다. 성벽은 대부분이 붕괴된 상태이다. 북벽의 일부는 성벽이 완전히 붕괴된 데다가 성내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성벽을 뒤덮고 있어 마치 토성처럼 보일 정도이다. 다만 일부 구간은 성벽이 원형(原形)에 가깝게 잘 남아 있는데, 이렇게 남아 있는 성벽을 통해서 볼 때 대체로 4가지 정도의 서로 다른 축성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북벽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일정한 크기로 다듬은 화강암 석재를 사용하여 성벽을 바른층 쌓기 방식으로 한 단 한 단 쌓아 올리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아 올리되 성벽의 상단부와 하단부의 성돌 크기를 같게 한 방법이고, 세 번째는 할석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외면만 맞추면서 쐐기돌로 메우는 방식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성벽 하단부에 큰 성돌을 사용하고, 상단부로 올라갈수록 작은 성돌을 사용하여 역학적인 안정감을 꾀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성벽의 잔존 상태를 통해서 볼 때 임존성은 적어도 시축된 후 3번 이상의 개·수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파악된다.
성벽은 편축식(片築式)으로 축조하고 석재로 뒷채움하였는데 고대지(高臺址)로 추정되는 구간에서는 협축식(夾築式)에 의해서 축조되었다. 남벽과 북벽에서는 한쪽 면만을 직각으로 돌출시켜 ‘ㄱ’자 형태로 축조하여 치성(雉城)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축조하고 있어 특이하다. 북벽(北壁)은 봉수산의 정상부에 해당하는 해발 470m 지점에서부터 동쪽의 또 다른 봉우리인 해발 420m의 봉우리를 에워싸면서 축조되었다. 자연지형을 이용해서 축조한 북벽의 전체 길이는 773m이다. 북벽과 동벽이 만나는 구간은 성벽이 3~4m 정도의 높이로 남아 있는데 화강암 석재를 다듬어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쌓아 올렸는데 경사도가 10˚정도로 거의 수직에 가깝게 축조하였다. 이 구간에서는 성벽을 보강하기 위하여 시설한 45˚경사도의 기단보축(基壇補築)이 확인된다.
동벽(東壁)은 해발 420m의 동쪽 봉우리 정상부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가 계곡부를 끼고 성벽이 내만(內彎)하면서 남벽으로 이어지는 구간으로 전체 길이는 190m 정도이다. 남벽은 성내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해당하며, 전체 길이는 1,090m이다. 성벽은 대부분 편축식으로 축조되었으나 능선이 이어지고 있는 지점에서는 협축식으로 축조하였다. 서벽은 봉수산 정상부를 향하여 급경사면을 올라가면서 북벽과 이어지고 있는데, 1번 이상의 수·개축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임존성의 부대시설로는 문지(門址) 2개소가 확인되었으며, 20개소의 건물지, 3개소의 우물지, 5개소의 고대지(高臺址), 1개소의 수구(水口), 그리고 남벽에서 여장(女墻)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성문은 남문지와 북문지가 확인되는데 둘 다 개거식(開据式)의 형태를 하고 있다. 북문지는 북벽의 중간부분에 시설하였는데, 출입구의 너비는 약 5.7m로 추정된다. 남문지는 남벽상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위치하는데, 문폭은 2.4m이며, 10m의 긴 통로가 시설되어 방어력을 높이고 있다.
건물지(建物址)는 성내 곳곳에서 확인되었다. 이렇게 많은 건물지가 남아 있는 것은 임존성이 장기간에 걸쳐 기능한 산성임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물은 3곳에서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지리지에 기록된 내용과 그대로 부합되는 것이다.
고대(高臺)는 성벽의 네 모서리와 서벽상에 1개소가 있어 모두 5개소가 확인된다. 이 고대에서는 다량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산재하고 있어 각루(角樓)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배수구는 남벽의 가장 낮은 부분인 계곡부에 시설되어 있는데, 성벽 기저부에서 1.8m 높이에 조성하였다. 배수로의 통수단면은 계단상으로 축조하여 올라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배수구를 이루는 상하 석재는 길쭉한 세장방형의 석재를 사용하였는데, 규모는 길이 0.7m, 높이 0.3m이다.
이 성에서 수습된 유물은 기와와 토기편이 주류를 이루는데, 기와편 중에는 백제 와편(瓦片)과 함께 ‘임존(任存)’, ‘존관(存官)’, ‘임존관(任存官)’ 등 명문와(銘文瓦)가 포함되고 있어 백제 부흥운동의 시발지로 사서에 나타나는 임존성임을 말해 주는 물적 증거로 이해된다.
[禮山 任存城(忠南發展硏究院, 2000)]
마사리에서 임존성으로 오르는 林道가 있다.
광시면 마사리에서 林道를 오르면 임존성 남벽(南壁)의 중간지점에 이른다.
이 곳이 새로 복원된 남벽의 서쪽(왼편)부분이고, 아래 사진은 동쪽(오른편)부분이다.
임존성은 테뫼식 산성이다. 테뫼란 산에 테를 둘렀다는 순우리말이다.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7~8부 능선을 거의 수평에 가깝도록 둘러쌓아 성을 축조한 것으로, 마치 산기슭을 수직으로 깎아내린 것처럼 보인다.
내가 올라온 길. 산아래로 보이는 마을이 ‘마사리’이고 좀 더 멀리 보이는 곳은 광시면이다.
나는 남벽의 중간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남문지-동벽-북벽-서벽을 돌아 다시 남벽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축성은 산의 경사면에 의지해 겉을 돌로 쌓고 안쪽으로 잡석이나 흙을 채워 넣고 다지는 내탁외축법(內托外築法)을 택했다.
성의 西南쪽인 홍성군 금마면이 보이고, 이 방향으로 좀 더 가면 내포신도시(충남도청)다 .
이곳이 남문지(南門址)다. 이곳에서 대련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내탁법(內托法)으로 성을 쌓았기 때문에 성의 四方둘레에 넓은 자리가 많이 생겼다.
현재까지 발굴 된 건물자리만 해도 21곳에 이른다.
건물지(建物址)에서 쉽게 발견되는 1400여 년 이전의 기와조각들
잘 보존된 동쪽성벽의 일부.
북방대지(北方臺址)가 있는 망루2다.
예당호(무한천) 상류지역
예당저수지를 만들기 전에는 무한천의 상류였으며, 옛날에는 아산만의 바닷물이 무한천을 따라
임존성이 있는 봉수산 아래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正面의 산 너머에 삽교읍이 보인다.
북방대(北方臺)에서 바라본 봉수산(484m) <가운데 봉우리>
북문지에서 남벽이 있는 우물지로 내려가는 오솔길
북벽 길이다.
북쪽성벽 길가에 으름나무가 많다.
북벽은 봉수산정상을 30m 앞둔 서장대지(망루1)에서 끝이 나고, 성벽은 왼쪽으로 심히 굽어 돌며 서벽이 시작된다.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서벽이 시작되는 지점에 옛성벽이 일부 잘 보존되어 있다.
망루1이 있는 477m봉우리, 서장대지가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내탁법이란 돌로 쌓은 성벽안쪽을 이렇게 자갈이나 돌로 채우고 다진 것이다.
잘 보존된 서벽의 일부
서벽을 내려가면서 본 내상산(內上山,384m). 봉수산에 둘러싸인 산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남쪽성벽
이곳은 흙으로 다졌다.
내상산, 봉수산의 남쪽 연봉이다.
묘순이 바위
남쪽성벽 안쪽에 있는 터가 가장 넓다.
옛날 옛적 그 우물이다.
百濟任存城淸水(백제임존성청수)
예당호가 있는 광시면 장전리에서 임존성의 북장대(망루2)가 보인다.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예산군 대흥면은 조선시대에 대흥군이었다. 본래 백제의 임존성 또는 금주(今州)라고 불리던 고을로 신라의 경덕왕이 임성군(任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대흥으로 고치고 현종 9년에는 홍주에 딸렸다가 명종 2년에 감무가 되며, 조선 태종 7년에 군으로 승격되었고 13년에 다시 현감이 되었다. 이 고을의 진산은 봉수산으로, 그 산에 대련사(大蓮寺)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임존성(任存城)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제의 복신, 지수신, 흑치상지 등이 당나라 장수 유인궤에게 대항하던 곳이다. 지금의 본 읍 관아 서쪽 13리 지점에 쌓은 석성으로 그 둘레가 5,194척이며 그 안에 우물 세 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이 임존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실려 있다. 이 성에서 공주와 부여가 80리쯤 떨어져 있기 때문에 백제가 수도를 웅진과 사비로 천도한 뒤부터 수도 방어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임존성은 높이 480.9미터의 봉수산이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봉우리를 에워싼 테뫼형 산성으로 일명 봉수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성벽 구조는 내탁외축(內托外築)이며 둘레가 약 2,450미터로, 백제 때 축조된 산성으로는 최대 규모에 이른다. 세계에서 유일한 수정식 성으로, 가장 높은 곳에 우물을 파서 성안에 물을 모아두었다가 적이 공격할 때 물꼬를 터트려 곤경에 빠뜨리도록 특별히 고안되었다. 현재 성문과 수구문 그리고 우물지와 건물지가 남아 있다.
산성의 서쪽 산꼭대기와 동쪽 작은 봉우리로 이어지는 잘록한 허리 부분에는 남북으로 통하는 길이 있으며, 이 통로가 만나는 북벽에 너비 6미터의 1북문지가 있다. 남문지는 조금 서쪽으로 치우쳐서 성 밖으로 갈라지는 언덕과 성벽이 연결되는 지점에 있으며, 산의 주봉에는 약간 넓은 평지가 있어 건물이 있었을 곳으로 여겨지는데, 시계가 확 트여서 전망이 좋다. 또한 남쪽 성벽 안에도 넓은 평지가 지형에 따라 형성되어 있으며, 백제시대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이 성은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한산의 건지산성과 함께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백제의 멸망 뒤 주류성을 근거지로 한 사비성 탈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최후의 거점인 이 성에서 흑치상지 등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신라군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여 나당 연합군을 괴롭히는 한편,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던 것이다. 백제부흥군은 흑치상지 장군을 중심으로 하여 3만 명쯤의 병력을 거느린 채 이곳 임존성에 진을 쳤다. 7만이 넘는 당나라 군대는 백제군의 용감한 기상에 놀라 일단 물러갔으며, 그 이듬해에 유인궤를 앞세워 다시 공략해왔다.
그 무렵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왕자 풍이 복신을 죽이는 내분이 일어나 백제 군사의 사기는 크게 꺾였으며, 결국 흑치상지는 유인궤에게 투항하였다. 비운의 성 임존성은 그 뒤 후삼국이 쟁투를 벌이던 때에도 결전장이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관할에 있던 임존성을 공격하여 후백제의 장군 형적 등 3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출처: 천하의 길지 남연군 묘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기벌포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강(白江)은 곧 지금의 금강이고, 금강의 하구가 곧 기벌포라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신라·백제가 서로 자국의 발전을 노려 싸우던 중 553년에 신라·백제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와해되어 더욱 상호항쟁이 격화되었다. 이에 645년에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신라와 당나라 군대는 660년에 기벌포에서 연합해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켰고, 다시 668년에는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평양 근처에서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직접 지배하고 신라까지 복속시키려 하면서 신라의 자주성을 빼앗았다. 동시에, 고구려의 평양 이남과 백제 땅을 신라에 주기로 약속한 영토분할 약정을 위배하였다. 이에 격분한 신라는 당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당전쟁(對唐戰爭)을 감행하였다.
신라의 대당전쟁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지속되었다. 신라는 북쪽 경계로 남하하는 당나라 군대를 맞아 675년 천성(泉城)과 매소성(買肖城)에서 크게 이겼다.
이에 당은 육로로 신라의 한강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676년 11월 금강 하구 기벌포에 설인귀(薛仁貴)가 지휘하는 당 함대를 침입시켜 신라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기벌포는 백제의 수도인 부여 방어를 위해 중시되던 지역이다. 이곳은 강의 하구라기보다 바다의 만(灣)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지역으로 기벌포를 장악하면 서해를 남북으로 양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해의 제해권과 관련해서도 아주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앞서 신라는 673년에 함선 1백 척과 해군을 서해에 배치시켜 방비하고 있었다. 676년 설인귀의 당나라 해군이 기벌포로 내려오자,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함선을 이끌고 기벌포에서 설인귀군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그러나 크고 작은 전투 22번에 걸쳐 결국 당나라의 수군 4천여 명의 목을 베고 승리하였다. 기벌포 전투에서 당나라의 해군을 격파함으로써 신라가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얻게 되었다. 이 싸움은 대당전쟁을 승리로 끝맺은 마지막 회전이었다.<출처: 프레시안>
[참고] http://blog.daum.net/sirius2375/1323 (의자왕을 위한 변명)
http://blog.naver.com/byunsan/140021838901(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98131112220147<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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