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독감예방접종을 받는 계절.
만65세 이상은 전국보건기관이나 위탁의료기관(병의원)에서 무료접종을 받을 수 있다.
시골의 보건기관으로 시군단위의 보건소가 있고, 면단위 보건지소가 있으며,
면소재지는 아니지만 주변마을의 거점이 되는 큰 마을에 보건진료소가 있다.
나는 덕산면보건지소보다 가까운 나박소보건진료소를 찾아갔다.
간판에 보이는 "나박소"라는 이름이 특이하지 않은가.
고려 때 내박소(乃朴所)가 있었고,
조선 때는 나박소면(羅朴所面)이 있었다 하여
현재까지 전해지는 이름이다.
고려 때와 조선 때의 지명 한자표기가 왜 다르냐고 따져 물을 것은 없다.
우리말지명을 한자로 표기할 때,
사람에 따라서 또는 경우에 따라서 각기 다른 한자로 표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니
이 경우에도 차용된 한자가 그저 하나의 발음기호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앞으로 ‘내박’ 또는 ‘나박’의 어원이 정확히 밝혀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까지는 한자의 어의(語義)나 새김으로 해석코자 애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내박’과 ‘나박’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이를 궁궐 안에서 내명부(內命婦)인 궁인 궁녀를 일컫는
나인 ↔ 내인(內人) · 나(奈) ↔내(奈)의 관계처럼 모음동화현상의 하나로 보고자한다.
즉 모음동화현상 중 앞 음절의 후설모음(喉舌母音,혀의 뒤쪽에서 발음되는 모음) ㅏ ㅓ ㅗ ㅜ는
뒤 음절의 전설모음(前舌母音, 혀의 앞쪽에서 발음되는 모음) l 가오면 이에 끌려서
전설모음 ㅐ ㅔ ㅚ ㅟ로 변하는 현상(아비→ 애비. 먹이다→메기다 등) 말이다.
‘나박소’라는 지역은 법정리(法定里)인 지금의 내라리(內羅里, 내나리)와
외라리(外羅里, 외나리)지역으로 내박소의 안과 밖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농협주유소 등 덕산농협에서 경제사업을 하는 지점이 있고,
1945년 개교하여 72년의 전통을 이어가는 수덕초등학교가 있어
조선시대 나박소면지역의 거점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로 법정리란 지번의 기준이 되며,
행정(行政里)리는 따로 이장을 두고 행정 처리를 하고 있다.
광천리는 법정리. 광천1리, 광천2리는 행정리가 된다.
광천1리나 광천2리의 지번은 공히 광천리 oo번지인 것이지,
광천1리 oo번지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나박소’라는 지명에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존속한 특수한 지방하급행정구획 “향·소·부곡(鄕·所·部曲)”과
고려·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군현(郡縣)의 특수구역인 “월경지(越境地)”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선시대의 자료에 따르면 내박소(乃朴所)는 덕산현(德山縣)소속이었지만
18리 떨어진 홍주 운천향내(洪州 雲川鄕內)에 소재하고 있었던 월경지(越境地)였다.
향·소·부곡 (鄕·所·部曲)
향·소·부곡의 사람들은 일반적인 양민과 달리
그 신분이 노비(奴婢)·천민에 유사한 특수한 열등계급이었다.
그 발생은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정복전쟁(征服戰爭)에 패배하였거나 투항 또는 귀순한 집단지,
촌락 본래의 형태인 공동체의 보존과 사회계층의 분화에 따른 예속관계와의 대립·모순,
또는 반역죄인의 집단적 유배지, 귀화인의 집단부락,
기타 특수한 생산노비의 집단거주 등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사회발전에 따른 공동체의 통합과 붕괴, 계급분화에서 야기된 것으로 이해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조선 전기에는 13개의 향·소·부곡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그 이전에 있던 것으로 파악된 것은 향 138, 소 241, 부곡 406 등 모두 785개가 있던 것으로 전한다.
이 중에서 부곡은 217개가 신라의 본거지인 경상도 지방에 집중되어, 부곡의 전성기가 신라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향·부곡은 대체로 같은 것으로 보이며 농업생산에 치중하였으나, 소는 수공업 생산을 담당하였다.
부곡이라는 말은 본래 중국에서 한(漢)나라 때는 군오(軍伍)의 뜻이었고,
위(魏)·진(晉)·남북조시대에는 관사(官私)의 병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뒤 당나라 때는 천민(賤民)의 칭호로 변하여 양민과 노비와의 중간층을 이루었다가 명나라 때 이르러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러한 신분적 의미와 함께 행정구획으로도 사용하였다.
부곡민은 매매·양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노비보다 신분적 지위가 높다고 할 수 있으나, 이들도 역시 천적(賤籍)에 따라 장악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형식은 지방의 호장(戶長)이 주·군·현의 행정기관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으로 이들의 천적을 장악하였다.
이 부곡이 붕괴된 원인은 가부장적 대가족 구성으로부터 단혼가족으로의 분화와 천인의 반란, 대외전쟁 등에 기인하며, 그러한 변화과정과 아울러 붕괴의 법제적 조치라고 할 수 있는 신라시대의 9주(州) 창설, 고려 성종 때의 12목(牧) 설치, 조선 건국 초의 행정구획 재편 등이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한편, 소는 그 발생이 향·부곡에 뒤지고 있어, 고려시대 군현제(郡縣制) 확립의 일환으로 처음 실시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소는 중앙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을 생산·공급하는 기구였으며, 주민의 신분은 공장(工匠)이었다.
예컨대 자기소(磁器所)·철소(鐵所)·은소(銀所)·금소(金所)·동소(銅所)·사소(絲所)·지소(紙所)·주소(紬所)·와소(瓦所)·탄소(炭所)·염소(鹽所)·묵소(墨所) 등의 명칭으로 수공업 생산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였다.
소는 향·부곡이 호장 등 토착관리가 통제하던 것과는 달리, 국왕의 권한 아래에서 소속 주·군·현의 기관을 통해 직접 그들의 천적이 장악되었다.
부담하는 공물(貢物)도 그 부과와 징수가 보다 직접적으로 중앙정부와 결합되었으며, 수취(收取)도 매우 가혹하였다.
소도 역시 12세기 후반 이후 쇠퇴하였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국가의 수요가 소의 생산능력을 초과하게 되자, 그 부담에 고생하던 소 주민들의 저항운동이 격화되어 그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한 데 있다.
한편, 이를 더욱 조장한 것은 이 시기 이후 한국의 사회적·정치적 변동, 즉 대토지 소유의 증가, 귀족층의 항쟁, 대외 전쟁 등의 계속으로 그 영향이 소에 직접·간접으로 끼쳐 양적인 감소와 질적인 변화를 촉진하였다.
소는 조선 전기에 이르러 지방관이 없는 행정구획의 정리로, 15세기 후반에는 군·현으로 승격되거나 소속 군·현에 흡수되어 완전 소멸하였다.
이 같은 향·소·부곡과 일반 군현의 행정구획과의 구분 기준은 호구(戶口)의 다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부곡 중에는 현보다도 많은 호구를 갖는 예도 많았고, 또 반란 등이 있던 군현은 부곡으로 강등되거나 반대로 공로가 있는 부곡은 현으로 승격하는 수도 있었다.
향·소·부곡의 주민들은 양민에 비해 신분적인 차별을 받았다.
예를 들면, 국학(國學)에 대한 입학이 금지되고, 형벌은 노비와 동등하였으며, 자손의 귀속도 잡척인(雜尺人)과 동일한 대우, 즉 양민과의 소생도 그대로 부곡에 남아야 하였고, 승려가 되는 것도 금지되었다.
향·소·부곡의 해체와 붕괴는 특수한 하층 지방행정 조직에서 벗어나 일반 지방행정 조직으로 재편성되는 과정이며, 고려의 군현제에서 조선의 군현제로의 이행과정이었고, 이러한 속에서 전체 국민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출처: 두산백과>
월경지(越境地)
월경지는 고려·조선 시대에 전국적으로 존재한 군현(郡縣)의 특수 구역으로
비입지(飛入地) 또는 비지(飛地)라고도 하였다.
≪대동여지도≫에 섬처럼 보이는 각 읍의 월경지는 소속 읍의 구역 안에 있거나 붙어 있지 않고,
중간에 끼여 있는 다른 읍의 영역을 뛰어넘어 따로 위치하였다.
그리하여 가까운 읍의 통치를 받지 않고 멀리 떨어진 소속 읍의 지배를 받았다.
조선 초기실록과 ≪경상도지리지≫·≪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이를 월경지라 하였다.
다른 칭호인 비입지, 약칭 비지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1906년 9월 24일 지방구획정리건에 관한 칙령 제49호에 “비입지란 갑군토(甲郡土)가 월재을군(越在乙郡)한 자를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월경지는 고려 현종 9년(1018) 주현(州縣)의 영속(領屬)관계가 확립된 이후
종전의 임내(任內: 속현·향·소·부곡 등)가 분리, 독립한 데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 또는 조선시대로 내려옴에 따라 그것의 형성 배경도 다양해졌다.
조선시대의 월경지는 대개 고려시대부터 유래했지만,
함경도·평안도 해안에 있는 월경지는 15세기 이후에 새로 생겼다.
서해안과 남해안에 있는 월경지는 상당수가 조선시대에 새로 생겼고,
15세기 초 임내의 주읍화(主邑化)와 소속의 변경에 따라 새로 생긴 것도 많았다.
월경지의 생성배경은 크게 임내의 분리 독립, 임내의 소속 변동, 과거의 연고지,
어염(魚鹽)과 같은 물자 조달, 조운(漕運)·조창(漕倉)과의 관계 및 해안의 곶이나
반도·도서지방을 열읍(列邑)이 쟁점(爭占)하는 것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월경지 이전의 상태는 크게 임내와 직촌(直村)으로 나눌 수 있다.
임내는 다시 속현과 향·소·부곡으로 구분되어
하삼도(下三道)에는 대체로 임내가 많고, 경기·강원도 이북지방에는 직촌이 많았다.
고려 중기 이래 조선 말기까지 월경지의 생성과 소멸이 계속되었다.
15세기 초에는 150곳 안팎이었고, 1906년 완전 정리될 때까지 70여 곳이 있었다.
월경지는 군현 구획이 복잡하고 속현과 향·소·부곡이 많은
경주 · 안동 · 진주 · 전주 · 나주 · 충주 ·청주 · 천안 · 홍주 등 대읍(大邑)지방과
서해안 및 남해안에 집중 분포되어 있었다.
규모는 속현에서 1개 촌에 이르기까지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것은 1개의 월경지가 여러 곳에 분산되거나 월입(越入 : 구획을 뛰어넘어 들어옴)해 있었다.
소속 읍과의 거리는 250리가 넘는 곳이 있는가 하면 30리 이내에 있는 것도 있었다.
100리에서 50리 사이에 있는 것이 가장 많았다.
15세기 이래 군현 병합이나 행정구역 개편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월경지 정비론이 대두하였으나 월경지는 쉽게 소멸되지 않았다.
1906년까지 존속한 이유는 조선시대 지방통치체제가 미비했고, 수취체제에 모순이 많았으며,
군현 토착세력과 주민의 이해관계 등이 밀접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 금산군(錦山郡)소속의 안성소(安城所)는 115리나 떨어진 長水 북쪽(茂朱 서쪽)에 있었다.
*.임내(任內): 관할 내, 소관 내라는 말로 고려·조선 초 때 일종의 특수행정구역이며
일체의 부역·과세·공납 등을 위임 집행하는 곳으로 속현과 향·소·부곡으로 구분된다.
이 구역은 호장(戶長)이 다스리고, 중앙의 행정관(行政官)이 파견되지 못한 지역으로
조선 초에 혁파하였으나 세종 25년(1443) 경까지 간혹 존속하였다.
*.직촌(直村): 군현의 수령이 직접 통치하는 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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