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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수덕여관과 나혜석, 일엽스님, 이응노화백. 공민왕의 거문고.

백수.白水 2018. 3. 11. 09:48

자주 들르는 수덕사이지만 이번에는 경내중심구역이 아니라 변두리 쪽으로, 모두 돌아보기가 아니라 그동안 소홀히 지나쳤던 곳을 자세하게 살피며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돌았다.

 

 

 

 

선문(禪門)을 지나서 오른쪽 부도전위로 난 산길로 오르다가 벌집처럼 해골처럼 생긴 바위를 만났다.

이러한 바위는 전에 수덕사를 우측에서 감싸 안고 있는 산줄기(右白虎)를 오를 때도 몇 군데서 눈에 띄었다.

 

 

 

 

이렇게 구멍이 숭숭 뚫린 형태의 바위를 타포니(tafoni, 풍화혈 風化穴)라 하는데, 역암(礫岩 자갈돌: 자갈이 점토·모래 등과 섞여 굳어진 암석)으로 된 암벽이 동결과 융해를 반복하면서, 자갈성분의 암석이 수직암벽에서 떨어져 나가 크고 작은 구멍들이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진안 마이산에 많다는데 나는 아직 그곳을 가보지 못했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수덕산정상의 통신중계탑이 보이고 그 아래로 금선대가 눈에 들어온다.

 

수덕여관

 

한때는 절집 아래 유일한 여관이기도 했던 수덕여관은 일엽스님(18961971)과 나혜석(18961948) 그리고 고암 이응노화백(19041989)과 관련된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이다.

 

1939년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1896-1946)이 스님이 되기 위해 수덕사를 찾아왔다가 당시 조실이던 만공 스님으로부터 "중노릇할 사람이 아니다"며 한마디로 거절당한 뒤 5년 동안 기거하면서 그림을 그리며 소일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1944년 나혜석이 그 집을 떠나자 고암이 사들인 다음 본부인 박귀희(2001년 사망)씨에게 운영을 맡기고 머물면서 주변 풍광을 화폭에 옮긴 것으로 전해지는데 수덕여관과 고암의 인연은 고암이 1958년 21세 연하의 박인경과 함께 프랑스로 떠나면서 끝나게 된다.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는 고암이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다음인 1969년에 몸을 추스르기 위해 두 달 정도 머물 때 새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수덕여관은 본부인 박귀희씨가 식당을 겸한 여관으로 운영해 오다가 2001년 사망함에 따라 폐허가 되었다.

 

파란만장한 삶은 살다간 그들의 이야기를 옮긴다.

 

 

수덕여관 손님, 나혜석과 김일엽

[출처: 이야기가 있는 문화기행 / 2005.08.17.-18. 오마이뉴스 이정근]

 

 

백두대간을 따라 뻗어내린 태백산맥에서 말을 갈아타고 서해를 향하던 차령산맥이 잠시 쉬어가는 곳에 수덕여관이 있다. 충남 예산 덕숭산 자락에 수덕사가 있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왼쪽에 곧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 한 채가 수덕여관이다. 한때는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은 주인도 객도 떠나가고 곰팡이 냄새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돌계단을 올라 마당에 들어서니 이응노 화백이 자연석에 새겨놓은 '수덕여관'이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쇠락한 초가집을 뒤로 하고 숨고르기를 하며 돌계단을 바라보니 종실 큰스님으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듣고 의기소침하여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계단을 올라오던 69년 전 나혜석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임자는 중노릇 할 사람이 아니야."

 

세파에 휩쓸려 지친 몸을 이끌고 친구 김일엽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수덕사를 찾은 나혜석에게 만공선사가 꾸짖듯이 한 말이다. 만공선사가 누구인가? 1871년 정읍에서 태어나 태허스님을 은사로 당대의 큰스님 경허를 계사로 사미계를 받아 득도하고 근대 선()불교를 중흥시킨 큰스님이다. 이러한 스님으로부터 중 되는 것을 거절당했으니 나혜석의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종실 큰스님이 김일엽은 불제자로 받아들이고 나혜석은 "안 된다"라고 했다면 득도한 스님이 가지고 있는 잣대는 무엇이었을까? 만공스님에게 불자의 길을 거절당한 후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나혜석과 만공스님의 잣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자리매김한 두 여자의 행로가 궁금해진다.

 

김일엽이 1921921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부인 의복개량에 대하여 한 가지 의견을 드리나이다>라는 계몽성 글에, 요샛말로 표현하면 딴지를 걸고 동성인 여자를 형()이라 칭하는 나혜석의 발칙한 칼럼이 <김원주 형의 의견에 대하여>였다.

 

물론 동아일보가 당대의 신여성 두 사람의 논쟁을 유도하여 구독 부수를 올리려는 저의도 있었지만 여성성에 대한 시각이 다르고 자존심이라면 쌍벽을 이루는 당대의 페미니스트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김원주는 김일엽의 본명이다. 일엽(一葉)이라 하면 달마대사가 한 잎의 갈대로 배()를 삼아 중국으로 건너간 고사에서 유래하지만 26세에 요절한 일본의 전설적인 여류작가 히구찌 이찌오(一葉)1896년 사망하던 해에 김일엽이 태어났기 때문에 김일엽이 문학작품 활동을 시작할 무렵 그 의미를 살려 춘원 이광수가 지어준 이름이다.

 

평남 용강에서 목사의 맏딸로 태어난 김일엽은 진남포 삼숭 여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다 일본 닛산학교로 유학 간 신세대 여성이었다. 미국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내정된 이노익이라는 40세 된 신사와 22세 때 결혼한 김일엽은 결혼생활 4년 동안 한쪽 다리가 불구인 남편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많이 겪었다.

 

일본 유학시절 본처가 한국에 있는 시인 노월 임장화와 간통한 사건으로 이혼한 김일엽은 일본 명문가 출신 오따 세이죠와 열애에 빠져 아들 김태신을 낳아 오따에게 넘겨주고 귀국했다. 그 후 친구 유덕의 애인이었던 방인근과 삼각관계에 빠져 스캔들을 일으키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국기열과 동거에 들어가게 된다.

 

이즈음 불교에 서서히 심취하던 김일엽은 독일 부르크스 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백성욱 박사의 불교논리에 매료됨은 물론 인간 백성욱과 사랑에 빠졌으나 백성욱이 속세를 털고 비구승이 되어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리자 불교를 더 깊이 알고 싶다는 일념으로 재가승 하윤실과 동거에 들어간다.

 

신시(新詩)의 효시로 알려진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년 빠른 1907'동생의 죽음'이라는 시를 써 사실상 우리나라 신시의 지평을 열고 구한말에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변화무쌍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불가에 귀의하여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가부장적인 사회인습에 숨 막혀 하던 김일엽은, 여성은 남성을 위한 소모품이 아니라고 절규했고 여성은 남성을 위한 장식물이 아니라고 부르짖으며 몸을 던져 연출한 행위 예술가이며 전위 예술가였다. 또 여성은 어머니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적 기독교 신화에 반기를 든 용기 있는 행동가였다.

 

나혜석이 이혼의 아픔을 안고 충남 예산에 있는 덕숭산 자락을 찾아든 이유는 거기에 나이도 같은 동갑이고 잡지 <폐허><삼천리>에서 동인으로 활동하던 김일엽이 파란만장한 32년 속세의 삶을 접고 여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수덕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은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했지만 답은 똑같았다.

 

몇 년 전 경성에서 만났을 때,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 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텅 빈 여관방에는 지친 몸을 누이던 나혜석의 체취는 간데없고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시위하던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찾아왔다.

 

그 소년이 누구냐 하면 김일엽이 일본 유학시절 일본 명문가 출신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사생아이며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주었다.

 

이때 나혜석 역시 모성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였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을 못 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관리인도 떠나버린 여관에는 잡초만 무성할 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인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쓰레기가 어지러이 널려 있고 곰팡이 냄새만 넘쳐나는 여관방 어디에도 모정에 굶주린 태신에게 가슴을 열고 봉긋한 젖무덤에 소년의 손을 끌어다 얹어주던 나혜석의 모습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78년 전 1927. 그 당시 일반인들은 감히 꿈도 못 꾸는 세계여행을 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돌아와 서양화를 그리는 최초의 여류화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뭇 남성과 사랑도 많이 했고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나혜석이 홀로 산사(山寺)에 있는 친구를 찾아와 여관방에서 친구의 아들에게 가슴을 열어준 사연은 무엇일까?

 

1896. 김일엽과 같은 해에 경기도 수원에서 부유한 관료의 집안에서 넷째 딸로 태어난 나혜석은 서울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에 유학, 유화를 공부한다. 유학시절 오빠 친구인 게이오 대학생 최승구와 열애에 빠졌고 결핵을 앓던 최승구가 사망함으로서 그들의 관계는 막을 내리지만 첫사랑 최승구는 나혜석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된다.

 

귀국 후 내청각에서 여성화가 최초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한 그림 활동을 하는 한편 동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폐허> <삼천리>를 비롯한 신문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신여성으로서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이때 춘원 이광수와 교분을 쌓는가 하면 1919년 김마리아 등과 함께 3·1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1920. 그의 나이 24세 때 부유한 집안의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김우영과 정동 예배당에서 결혼한다. 결혼의 전제조건이 지금 생각해도 첨단적이고 도발적이다. 나혜석은 그의 첫사랑 최승구의 비석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고 혜석과 결혼하기에 급급했던 김우영은 그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여 신혼 여행지를 최승구의 무덤이 있는 전남 고흥으로 정하여 비석을 세워줬다.

 

나혜석은 이듬해 첫딸 선()을 낳은 후 26년 아들 진()을 낳고 남편 김우영과 세계 일주여행에 나선다. 1927619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7월에 파리에 도착한 혜석은 남편 김우영이 법률 공부하러 독일 베를린으로 떠났지만 파리에 머무르며 야수파 비시에르에게 사사받는다.

 

여기에서 문제가 터졌다.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로 천도교 교령이던 최린(崔隣)이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을 때였다. 한국 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최린을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빠져버린 혜석은 불타는 사랑에 빠진다. 이러한 염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김우영이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는 것으로 그들의 사랑은 막을 내릴 수 있었지만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생활을 청산하는 이혼의 빌미가 되었다.

 

남편과 함께 파리를 떠난 나혜석은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 미 대륙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하와이 경유하여 태평양을 건너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다. 도쿄에 잠시 머무른 후 일본을 출발 부산에 도착함으로서 그들의 세계 일주여행은 끝났지만 파리에서의 최린과 나혜석의 만남은 사랑이었지만 남편 김우영에게는 아내의 스캔들이었으므로 결혼생활은 파탄의 시작이었다.

 

귀국 이듬해 셋째 아이 건()을 낳았지만 남편 김우영과 결혼 당시 '나만을 사랑한다'는 전제조건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고 새로운 여자와 신접살림을 꾸린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창살 없는 감옥이었고 지옥이었다.

 

애정 없는 결혼생활은 인생의 낭비라고 결심한 혜석은 1930년 가을 김우영과 이혼하고 '이혼의 비극은 여성해방으로 예방해야 하고 시험결혼이 필요하다'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칼럼을 <삼천리> 잡지에 기고하여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때 비로소 육()과 영()이 결합하는 사랑이 지고지순한 사랑이라는 낭만적 사랑론에 머물러있던 여자(女子) 나혜석이 육과 영이 분리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열정적 사랑을 찬미하는 섹슈얼리티 여성(女性) 나혜석으로 재탄생했음을 그 당시 신문사 문화부에 있던 여기자와 오간 서간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동생은 아직도 연애가 무엇인지 모르는 모양이로군! 서로 눈동자만 바라보고 앉아서 좋기는 뭣이 좋아, 수박 겉핥기지, 육체의 신비를 모르는 것은 연애가 아냐…… 그런 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요, 연애를 하는 그 순간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야, 나는 지금도 그 때 생각만 하면 미칠 것만 같아, 이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사람같이 바보는 없을 거야...

 

뿐만이 아니다. '삼천리' 잡지에 기고한 <이혼 고백장>에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오.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오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을 발표하며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관념을 통렬히 비판함으로서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켰다. 나혜석, 그녀의 사회 인습에 대한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에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詛嚼)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이혼에 대한 상처를 씻으려고 일본에서 그림공부에 몰두하던 혜석은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제전(帝典)에 출품하기 위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그림을 그려 제 12회 제전에서 입선하고 다시 귀국하여 선전(鮮典)에 출품하기 위하여 금강산과 해금강을 주유하며 그림 공부에 열중하지만 "육체의 신비를 모르는 것은 연애가 아냐"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나혜석이기에 그림공부에 몰입할 수 없었는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이때, 이혼의 아픔을 극복하려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는 한편 신문 잡지에 여성 인권신장을 위한 칼럼을 기고하던 혜석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자신에게 성()을 가르쳐준 최린을 상대로 '유부녀의 정조를 유린했으니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한다. 조건 없는 열정적인 사랑을 주장하던 혜석으로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다.

 

경성 장안에 화제를 뿌리며 조롱거리의 주인공으로 전락한 혜석은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최린측의 제의로 사건을 합의하고 종결하지만 혜석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린 딸과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병이 되어 신경쇠약과 손이 떨리는 수전증까지 찾아와 병든 몸을 이끌고 전국을 유람하다 수덕여관에 찾아온 것이다.

 

만공선사로부터 중이 되는 것마저 거절당한 혜석은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중이 되게 해달라고 1인 시위를 하는 한편, 붓 가는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찾아온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 사람이 화가 이응노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여기에서 잠깐, "육체의 신비를 모르는 것은 연애가 아니야"라고 거침없이 주장하는 나혜석과 청년 화가 이응노가 깊은 산속 여관방에서 만나 숙식을 같이 하고 있으니 육과 영이 하나 되는 모종의 사건이 있지 않았을까? 호기심이 발동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노랑(老郞) 팔자를 가진 여자는 연하의 남자(男子)를 남성(男性)으로 보지 않는다.

 

나혜석의 첫 남편 김우영과 20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며 혜석이 상대한 남자들이 대부분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노랑 취향의 여자에게 있어서 연하의 남자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 풋내기 머슴아일 뿐이다. 더구나 상대는 연하의 소녀 취향을 가지고 있는 이응노이었기에 더더구나 불이 지펴지지 않았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버린 이응노는 나혜석이 이곳을 떠날 무렵 1944년 아예 수덕여관을 사버리게 된다. 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훗날 21세 연하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버리고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희가 여관을 운영했으나 그마저 2001년 사망함으로서 폐허가 되어버렸다.

 

뒤뜰을 돌아보니 고암 이응노가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후 심신을 추스르기 위하여 머물렀을 때 자연석 너럭바위에 문자를 추상화 기법으로 암각화(岩刻畵)한 작품이 뒷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그 바로 옆에는 당시에 식수로 이용했던 우물이 폐수에 썩어가고 있었다. 역시 샘물은 퍼내야 새로운 물이 고이나 보다.

 

만공선사로부터 중이 되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느낀 혜석은 수덕여관을 나와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 아닌 수도생활을 하면서 잠시 머물다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안양 양로원을 거쳐 청운 양로원에 기거하던 혜석은 양로원 생활이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음인지 양로원을 뛰쳐나와 길거리를 헤매다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져 서울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눈을 감았다. 그때가 19481210일이다.

 

자형 초가집 수덕여관 안마당에는 이름 모를 잡초가 자라고 있고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재래식 구들장을 깔은 여관방을 덥히기 위한 난방용 굴뚝이리라. 그 굴뚝을 타고 올라가던 담쟁이 넝쿨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 허공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어쩌면 더 이상 오를 곳을 찾지 못해 좌절한 혼백(魂魄)이 하늘에서 내려와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사찰전각은 아니지만 경내에 있는 수덕여관은 이제 ()미술관과 함께 관광객들이 꼭 둘러보는 명소가 되었다.

 

 

 

초가지붕인 수덕여관과 왼쪽 마당 아래로 파란색 지붕이 보이는 선()미술관

 

 

 

문자적 추상암각화가 새겨진 돌.

 

 

 

 

여관 뒤편 장독대와 이응노화백이 사용하던 우물,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건물이 환희대의 보광전이다.

 

 

 

문자적 추상암각화

 

 

 

 

수덕여관 뒤편으로 환희대가 보인다.

 

 

 

일엽스님(18961971)1928년 불교에 귀의하여 환희대에서 주석하다가 1971년 열반하였다하는데...

환희대(歡喜臺) 표지석을 따라 마당으로 들어섰지만 환희대라는 건물을 찾을 수가 없다.

 

아래 기록을 종합해보니 지금의 <원통보전·보광당·난야> 등의 건물이 자리한 일대에 환희대가 있었고,

환희대에 견성암이 있었는데 일엽스님이 그곳에서 수도하였으며,

여승당인 견성암은 어느 시기엔가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임을 알 수 있다.

     

견성암은 1908년에 만공(滿空)이 창건하고 1930년도흡(道洽)이 중건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면서 비구니들의 수련도량으로 사용되어 왔다.

창건 당시에는 지금의 환희대(歡喜臺)에 견성암이 있었으나 그 뒤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현재 덕숭총림(德崇叢林)으로 이름을 바꾼 이 암자는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1926년에 창건된 환희대(歡喜臺)는 비구니들이 기거하며 수도하는 곳으로 일엽 스님(18961971)이 주석(駐錫: 승려가 입산하여 안주함)하다가 열반한 암자다.

일엽스님이 입적 후 방장 원담스님의 뜻에 따라 월송 선니가 1984~5년에 걸쳐 원통보전(圓通寶殿) 보광당(普光堂) 난야(蘭若)를 건립 기념도량으로 정비하였다.

 

 

 

 

난야(蘭若)는 범어인 아란야(阿蘭若, aranya)에서 온 말로 고요한 곳이란 뜻으로 사원을 이르는 말이다. 인적이 끊기고 쥐 죽은 듯 적막한 이곳이 아마도 난야일 것이다. 출입금지구역이다.

 

수덕사의 석양 <일엽스님>

덕숭산 수덕사의 지는 해는

청춘을 불살랐던 여승들의 최후와 같이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노을빛이 덕숭산과 수덕사 계곡을 붉게 물들이며

새털구름 속으로 얼굴을 가리고

청춘을 빨갛게 불사른 채

열반에 들어간다.

 

산 길 백 리 인적 없는 수덕사에 어둠이 내리면

법당엔 하나둘 등불이 켜지고

창호문 사이로 배어 나오던 외로운 그림자들!

청춘을 불사르다 가신 님들의 그림자들!

그 님들은 지금 어디로 가셨는가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 혼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다 하셨던 간절한 님들의 말씀

오늘은 저녁 쇠북소리 되어

길게 누운 덕숭산 그림자 속으로

옴마니 반메훔을 부르며 울려 나간다

 

 

수덕사의 여승 <송춘희 노래> https://youtu.be/nyBkDfpw578

 

 

http://www.sudeokmuseum.or.kr/ 덕수총림 수덕사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

 

수덕사성보관에는 본,말사의 불교문화재 4000여점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번 추사고택과 기념관을 둘러본 후 추사집안의 원찰인 화암사를 찾았을 때,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이 수덕사성보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기록이 생각나서 처음으로 들어가서 관람했다. 많은 유물 중에서 공민왕의 거문고가 눈길을 끌었다.

 

 

 

 

김정희가 제주도유배 중에 집안의 원찰인 예산 화암사 중창(1846)에 맞춰 써 보낸 글씨다. 서체는 전한시대 거울에 있는 글자를 기본으로 한 예서의 골격에 전서와 해서의 뜻을 더한 새로운 조형미가 물씬 풍기는 글씨이다. 획이 가늘면서도 힘과 멋이 함께 들어있어 제주도 유배시절에 글씨의 새로운 경지에 올랐음을 말해준다.

해남대둔사 무량수각현판과 대둔사 무량수각현판은 글씨가 기름지고 윤기가 나지만, 이 현판은 기름기가 다 빠지고 메마른 듯한 서체를 추구하고 있어 확연한 미적차이를 느낄 수 있다고 평가한다.

 

 

 

 

이 거문고는 만공스님이 고종의 5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공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뒷면에는 조선후기의 대감식안(大鑑識眼) 이조묵이 1937년에 초서로 쓴 찬문(撰文)과 후일 1937년에 서각된 만공스님의 게송이 있다. 찬문에는 이 거문고가 본래 고려공민왕(13301374)의 소장품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청이 모두 벗겨진 채 고색창연한 모습의 수덕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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