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줄곧 영남에서 교직에 몸담고 있다가 은퇴 후 귀향한 죽마고우의 집들이에 참석하느라고 지난 주말(3.31 토) 고향 금산에 다녀왔다.
처음에 맘먹기는 가는 김에 한 이틀 묵으면서 진악산 등 몇 곳을 둘러올 생각이었으나 갑자기 다음날 석축공사를 하게 되었고, 그 일이 아니라하더라도 미세먼지가 심한 탓에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아 다음기회로 미루고 진악산에 있는 보석사만 보고 왔다.
고향사람들은 진악산의 정기를 타고났고 진악산의 정기를 품고 산다고 생각한다.
우뚝 솟은 진악산은 고향땅 어느 곳에서나 보이고 눈만 뜨면 보게 되는 아주 친근한 산이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고 신발장수가 장마철에 맨발로 다닌다고 나는 늘 동경만 했지 여태껏 올라본 적이 없다.
진악산(進樂山,737m)은 충청남도에서 서대산(903.7m) 대둔산(877.7m) 계룡산(845.1m) 오서산(790m)에 이어 다섯 번째로 높은 금산의 진산(鎭山)이다.
진산이란 도읍의 배후에 있는 큰 산으로 主山이라고도 한다.
진악산은 금산군남이면의 성곡리·석동리·상금리·하금리와 금산읍의 음지리·계진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대산은 북방을 진수하고 진악산은 남방을 가리었다"하고,
동일 문헌에 "진악산은 군의 남쪽 7리에 있다. 동쪽 봉우리 아래에 석혈(石穴)이 있는데 서너 걸음 들어가면 물소리가 요란하여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전하는 말로는 용이 사는 곳이라고 하는데 날이 가물 때 호랑이 머리를 집어넣으면 감응이 있다고 한다."고 하여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금산군지(1,969)에서는 "진악산의 정기는 바로 금산의 정기로 동일시되어 왔다. (중략) 진악산은 금산의 수호신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고,
금산군지(1,987년)에도 "금산의 진산(鎭山)으로 금산의 정기를 대표하는 산이기도 하다."라 하여 금산의 중심 산으로 진악산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진악산이 금산의 진산 또는 주산으로 기록된 것은 확인되지 않고, 『여지도서』에 진악산이 있는 남쪽이 지도의 상단에 표시된 경우는 있다.
보통 고지도의 표현에서 지도의 위쪽에는 지역의 진산 또는 주산이 위치한 경우가 많은데, 금산의 경우 지금은 그 이름조차 사라진 읍치 북쪽의 소산(所山, 비비미)이 진산이자 주산으로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흥미로운 부분이다.
일설에는 "진악이란 명칭이 즐거움이 크게 일어나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는데, 옛날 홍수가 났을 때 이 산만 지네만큼 남았다 하여 진악산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산에는 관음봉·문필봉·노적봉·물금봉 등 여러 봉우리가 있는데, 그중에서 관음봉은 강처사가 관음굴에서 어머니 병환을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여 산신령의 계시로 인삼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일면 마장리 봉황천변에서 찍은 진악산(2017.8.28)
부리면 신촌리 금강상류에서 찍은 진악산(2017.8.28)
남일면 삼태리 고향마을 뒷산에서 본 진악산(2015.11.16 곽영을)
남일면 삼태리 고향마을 뒷산에서 본 진악산(2015.11.16 곽영을)
금산읍 금산향교에서 본 진악산(2014.4.6)
보석사(寶石寺)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885년(헌강왕 11)에 조구(祖丘)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절 앞산에서 채굴한 금으로 불상을 주조하였기 때문에 절 이름을 보석사라고 하였다.
그 뒤에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고종 때 명성황후가 중창하여 원당(願堂)으로 삼았으며, 현재의 도량은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한때는 이곳에 강원(講院)이 있어서 많은 학승이 배출되었고, 1912년부터는 31본산의 하나로서, 전라북도 일원의 33개 말사를 통괄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진영각·심검당(尋劒堂)·산신각·응향각(凝香閣)·체실(體室)·요사채 등이 있고, 진영각은 휴정(休靜)·유정(惟政)·영규(靈圭)의 영정을 모셨던 곳이나 최근에 영정을 도난당하였다.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
공주의 청련암과 보석사에서 무예를 익힌 뒤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중봉 조헌(重峰 趙憲)과 함께 순절한 기허당 영규대사의 순절사적비로서 1840년(헌종 6년)에 금산군수가 보석사입구에 세웠다.
비문은 우의정 조인영이 지었고, 금산군수 조취영이 글씨를 썼다.
비의 앞면에는 큰 글자로 ‘義兵僧將’이 새겨져 있으나 자획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왼쪽 면에는 창건화주 낙봉대인 등 건립당시의 관계 인물의 이름을, 오른쪽 면에는 창녕위 김병주(昌寧尉 金炳疇)가 썼음을 기록하고 있다.
1940년 일본 경찰이 비각을 헐고 자획을 훼손하여 땅에 묻혔던 것을 1945년 정요신(鄭堯臣)이 찾아서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 비신 높이 243cm, 폭 84cm, 두께 42cm
금산보석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 365 호)
소 재 지 : 충남 금산군 남이면 석동리 709
보석사 맞은편 산자락의 비교적 완만한 경사지에 서 있는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높이 40m, 가슴높이둘레 10.72m, 가지의 길이는 동-서쪽 24m, 남-북쪽이 20.7m이며, 나이는 약 1,000살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가 오래되어 위로 뻗은 가지가 땅으로 뻗었고, 다시 그곳에서 2∼3m 높이의 움싹줄기가 수없이 돋아나 뿌리가 100여 평에 걸쳐 땅속에 퍼져있는데, 중심가지는 부러지지 않고 남아있어 장엄하고 위압적인 외형을 갖추고 있다.
이 나무는 보석사창건(886년)주 조구대사가 제자 5인과 더불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는 뜻에서 둥글게 여섯 그루를 심은 것이 하나로 합해졌다고 한다.
1945년 광복 때와 1950년 전란 때, 1992년 극심한 가뭄 때 등 나라에 이변이 있을 때는 24시간 소리내어 울었다고 전해지며, 보석사신도들이 매년 음력2월15일(경칩)에 은행나무 밑에서 대신제(大神祭)를 지낸다.
보석사는 초등학교소풍 때의 추억이 고스란히 서린 곳이다.
심검당(心劒堂)
보석사대웅전상량문
보석사는 명성황후의 원찰로서 1882년 순종비인 순명효황후의 아버지 좌찬성 겸 이조판서 민태호(閔台鎬 1,834∼1,884)가 고종과 명성황후의 명을 받아 시주(施主)로서 대웅전을 중건하고 ‘보석사대웅전상량문’을 썼다. 명성황후와 보석사의 관계, 상량문의 해석은 다음블로그를 참고하기 바람.
☞ https://blog.naver.com/mmk0418/220538889473
12폭포를 거쳐 성봉과 성치산도 한번 올라봐야 할 곳으로 이번에 내를 건너 등산로입구를 알아 놨으니 다음에 진악산과 연계산행을 할 것이다.
이곳이 금강의 지류인 봉황천, 그 발원지에서 아주 가까운 최상류지역이다.
금강 상류 제1지류인 봉황천은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 가오리골에서 발원하여 남일면, 부리면을 지나 제원면 대산리에서 금강으로 합류한다.
수계는 본류인 봉황천과 지류인 조정천, 기사천, 금산천, 관천, 보석천, 신정천, 궁동천, 역평천으로 하천연장은 23㎞이다.
금산천(錦山川)
금산읍 양지리 열두봉재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양지리·아인리·상옥리 등 읍내 중심을 관통하며 상옥교· 금산교(錦山橋,큰다리)·금천교(錦川橋,쇠전다리)를 놓게 하고, 계속 동쪽으로 흘러 신대리의 여사 마을 앞에서 봉황천에 유입되는 하천이다.
군의 행정중심지인 금산읍을 관통하는 하천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읍치의 명당수로 서금천(錦川)이라고 불려왔는데, 『여지도서』(금산)에 "금천은 성 남문 밖에 있다."고 하여 관련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동일 문헌의 지도에는 금천과 후곤천(厚昆川, 고천 古川)이 만나는 수구처에 동림(東林)이라는 커다란 비보숲이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금산교·금천교 등에서 관련 지명이 엿보인다.
금산천변에 있는 금산산업고와 그 뒤쪽으로 금산동중학교, 금산여중, 금산여고가 접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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