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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

공주 공산성(公山城)

백수.白水 2019. 7. 9. 05:52

2019.07.08(월)


세월은 강물처럼.. 파란하늘 흰 구름처럼 흘러가지만, 역사는 떠밀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위로 켜켜이 쌓이는 시루떡처럼 그리고 퇴적지층처럼 쌓여가는 것이다.

 

선사(先史)이래 고래(古來)로 사람들은 살만한 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왔다.

어느 유적지를 발굴해보니 맨 아래층에서 석기유물이 출토되고, 그 위 토층에서 삼국시대의 각종생활유물이, 그리고 상위지층에서 조선시대의 집 자리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면, 그 자리는 지나온 시대 그 시대마다 사람이 살기에 가장 적합했던 환경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공산성(公山城)은 백제동성왕 때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 성책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성책을 삼국초기에 설치했는지 아니면 그 이전의 삼한시대 마한의 어느 소국에서 설치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여튼 공산성이 웅진백제시대 이전부터 전략적인 요충지였음은 분명하다.

임류각(臨流閣)만해도 백제 때 세운 건물이지만 파괴된 뒤에 그 터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공산성에는 백제 때의 토성을 비롯해서 고려와 조선시대를 이어가며 세워진 각종 누각과 유물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유물은 반드시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가 가장 소중한 최고(最高)일수는 없다.

고대·중세·현대의 것들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역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하는 것이고, 또 만들어가는 것 이기도하다.

공산성 한 바퀴 돌아보는데 1시간 반 정도,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까지 봐도 2시간 남짓이면 족하다.

시간이 나면 한번 백제의 숨결을 느껴보시라.





웅진(熊津)백제시대(475~ 538)

 

왕성인 웅진성(지금의 공산성)은 금강이 수운교통과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하였으며, 공산성은 산성으로서 견고하였다.

 

475년부터 부여로 천도하는 538년까지 5명의 왕이 약 63년간 재위하는 동안 세 명의 왕이 귀족세력에 피살되는 등 정치적인 혼란을 겪었으나, 무령왕(25, 재위 501~523)이 즉위하면서 국력을 점차 회복하여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유역의 일부를 회복하게 되었다.

 

26대 성왕(재위 523~554)은 중앙의 행정조직을 22부로 재정비하고, 지방의 행정 및 군사조직을 방군성(方郡城) 체제로 전환하는 등 대대적으로 조직을 정비하였으며, 특히 538년에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김으로서 새로운 도약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웅진백제는 64년의 짧은 기간 동안 백제의 도읍이었지만 공산성·송산리고분군을 중심으로 백제의 우수한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있으며, 특히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백제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낯선 곳을 가면 먼저 동서남북 방위를 익히는데 애를 많이 쓰게 되는데생각해보니 방향을 제대로 알아야 길을 잃지 않는다는 생존본능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머릿속이 뒤죽박죽 헝클어지며 무엇을 봐도 본 것 같지 않고 혼란스럽다.

따라서 지도도 북쪽이 위로 가도록 해놔야 안정감을 느끼게 되고 이해가 빠르다. 지도를 좌측으로 90도 회전시키니 방위가 딱 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종전보다 많이 편하다.

위쪽이 금강이고, 공산성이나 송산리고분군은 금강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곰나루와 公州(공주), 熊津山城(웅진산성)公山城(공산성)

 

이라는 의미를 지닌 옛말 은 백제어에서 , 고마로 바뀌었으며, 이는 ·· 등으로도 쓰일 수 있다. 또한 왕의 옛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본의 가미()고마도 여기서 파생된 음이다.

 

공주의 옛 이름은 곰나루라고 하였는데, 지명기록으로는 용비어천가의 고마나루, 일본서기의 구마나리久麻那利 구마노리久麻怒利, 주서·북사·양서고마성固麻城 등으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한자로는 熊津(웅진熊川(웅천)으로 쓰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발췌요약>

      

후대의 지명인 錦江이나 公州에서의 ·의 또 다른 표기일 것이다.

산성의 이름은 초기의 지명인 고마나루·곰나루·熊津(웅진)이 사용되던 시절에는 熊津山城(웅진산성)으로 불리다가, 후대에 공주(公州)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公山城(공산성)으로 바뀌는데, 공산성이 公州山城(공주산성)의 약칭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지도 역시 180도를 회전시키니 방향감각을 찾기가 훨씬 수월하다.



공주공산성(公州公山城)

 

충남 공주시 금강변 야산의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백제시대의 포곡식(包谷式)산성이다.

포곡식은 말 그대로 골짜기를 포용하여 산과 언덕을 따라서 성곽을 쌓으므로 성 내부의 수원이 풍부하고 활동 공간이 넓다. 계곡물은 평지에 가까운 수구(水口)를 통하여 외부로 유출되는데 성문은 대개 수구부근에 설치되어 있다.


공산성은 원래 흙으로 쌓은 것을 임진왜란 직후에 돌로 다시 고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진남루(鎭南樓공북루(拱北樓) 등의 남·북문은 남아 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았다.

암문, 치성, 고대(高臺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도 남아 있다.

 

백제 당시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고 불렀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산성이라고 불렸으며,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문주왕 이후 성왕 이전까지 수도 웅진(熊津)을 수비하기 위하여 여러 성을 쌓았던 동성왕 때로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웅진 천도 이전에 이미 성책(城柵) 시설이 있었다는 견해도 제기되어 있다.

 

성 규모(면적) 66천여 평에 성벽의 둘레는 2.2정도인데, 돌로 쌓은 부분이 약 1.81이고, 흙으로 쌓은 성벽은 약 390m이다.

성벽은 2중으로 축조되었지만, 만하루(挽河樓)터 주변에는 동성왕이 쌓았다고 전하는 무너진 성벽이 있어서 모두 3중으로 축조된 셈이다. 이것은 규모를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성 북쪽의 영은사(靈隱寺) 밖에도 높이 7.4m, 길이 43m의 성벽이 2중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돌 홈통인 석루조(石漏槽) 2개가 있고, 그 위에는 너비 2m의 수구문과 문의 주춧돌 2개가 남아 있다.

 

흙으로 쌓은 성벽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후대에 고쳐 쌓았을 가능성도 있다. 높이와 너비는 일정하지 않은데, 대체로 높이는 1m이고, 너비는 아랫부분이 8.5m, 윗부분이 3m이다. 성 안에는 깊이 약 2m의 호()가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돌로 쌓은 성벽은 가운데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을 돌로 쌓는 협축(夾築) 방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다만 일부는 속을 다지고 겉을 쌓은 내탁외축(內托外築)을 한 구간도 있다.

협축으로 쌓은 성벽의 윗부분 너비는 약 0.7m 정도이며, 안쪽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백회를 발랐다.

진남루 주변에 사용된 돌은주로 긴 네모꼴이나 네면이 같은 네모꼴인데 반해, 영은사 밖에 사용된 돌은 비교적 큰 편이다. 나머지 구간은 대체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산성의 주문(主門)은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이다. 진남루는 정면 3, 측면 2칸의 초익공(初翼工) 팔작지붕 누각이며, 공북루는 1603(선조 36)에 옛 망북루(望北樓)터에 세운 것으로 고주(高柱)를 사용한 정면 5, 측면 3칸의 2층 다락집이다.

서문은 1975년에 보수공사하였을 때 높이 4.4m, 너비 5,6m, 길이 17m의 크기를 확인하였지만 받침 부분만 복원되었고, 동문도 발굴 결과 길이 6.45m, 너비 2.46m였음이 확인되었다.

1859(철종 10)에 편찬된공산지(公山誌)에 의하면, 동문은 서문·남문·북문처럼 2층이었으며, 동쪽 외곽의 토성에도 약 4m 크기의 문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80년에 발굴조사한 결과, 만하루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건물이며, 임류각(臨流閣)은 백제 때 세운 건물이지만 파괴된 뒤 그 터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장대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2칸인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적심석만 남은 상태로,주변에서 백제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

 

그 뒤 1983년에도 조사되었는데, 길이 10.23m, 높이 1.67m, 너비 130.8m의 암문이 발견되었다.

현재 성 안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를 비롯하여 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쌍수산정주필사적비(雙樹山亭駐蹕事蹟碑주춧돌·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곧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는 의자왕이 잠시 거처하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뒤 822(헌덕왕 14)에 김헌창(金憲昌)이 일으켰던 반란은 이곳에서 진압되었고, 1623년에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잠시 피난하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공산성 금서루(錦西樓, 서문지西門址)

 

 

서문은 본래 유지(遺址)만 남아 있었으나, 최근 문루와 함께 새로운 형태로 문루의 복원이 이루어져 있다. 복원된 문루는 공산성 서쪽 성곽선에 연결되게 성선을 연결하면서 성의 입구를 개구식으로 내면서 그 위에 문루를 올린 상태이다. 더불어 본래의 문지는 성내의 출입시설로 사용되고 있으며 복원된 문루는 외형만 겸비하고 출입시설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문의 형태에 대하여 <여지도지>에서는 동, 서문은 각각 3칸이란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서문지의 복원은 1990년에 이르러 본래의 문지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3칸 규모의 고주 형태의 문루가 축조되었다. 비록 최근에 새로이 조성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 양식을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금서루 입구 비석군

 

공주와 관련된 인물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들이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있던 것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 등 총 47기가 있다. 대다수는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새긴 송덕비인데 여기에는 영세불망비, 청간선정비, 거사비, 만세불망비, 유애불망비, 청덕선정비등의 글이 새겨져있다. 우의정, 도순찰사, 관찰사, 암행어사, 목사, 판관, 군수, 우영장 중군 등 주로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아에 배치되었던 관리들의 송덕비가 많다.



성문 앞에서 볼 때, 오른쪽 성벽 길로 오르면 남문(南門)이 나오고 왼쪽 길로 오르면 북문(北門)이 나온다.



금서루(錦西樓)


본래의 문지(門址, 사진아래 출입구)는 현재 성내의 출입시설로 사용되고 있으며 복원된 문루(門樓, 사진위쪽 문)는 외형만 겸비하고 출입시설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본래의 문지(門址, 사진아래 출입구)인 이곳으로 사람들이 출입한다.



현재 출입시설로 사용하지 않고 있는 복원된 문루(門樓, 사진위쪽 문)의 출입문



천정의 벽화



복원된 문루(門樓) 금서루의 누각(樓閣)



금서루에서 북쪽을 향해 성벽위로 난 길을 오른다.





금서루에서 내려다본 공산성의 서쪽 시가지. 파리의 개선문처럼 보이는 저곳을 지나서 쭉 나가면 산 너머에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이 있다.



공산성의 서쪽인 송산(松山)쪽에서 보는 동쪽의 금강, 다리, 공산성, 시가지의 모습이다.



송산리고분군이 있는 송산(松山)정상에서 내려다본 공산성의 크로즈업사진. 금서루, 비석군, 황색깃발, 성벽 등이 가까이 보인다.



성의 정북(正北)쪽 모서리 전망대 가까이에 서있는 정자 유선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여러 곳에서 잘 보이니 이정표로 삼아도 되겠다.



유선대쪽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금강. 왼쪽(강 하류)백제큰다리(백제대교)’이고, 오른쪽(강 상류) 철교가금강교이다.



강 건너에 공주버스종합터미널·공주대학교신관캠퍼스·덕성아파트가 보이고, 그 뒤쪽으로 쭉 더 나가면 의당면의 골드리버골프장이 나온다.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니 내가 올라온 성벽길과 휘날리는 깃발, 서문인 금서루, 그리고 남문으로 올라가는 성벽길이 또렷이 보인다.



가까이서 본 유선대의 모습




금강철교에 얽힌 배다리이야기.<아래>



배다리는 한자로 주교(舟橋)라고 한다.





북문인 공북루로 내려가는 길이 제법 가파르고 강쪽은 절벽이다.



왼쪽마을은 공산성의 서북쪽인 웅진동이고 정자산터널입구가 보인다.



공산성 왕궁관련 유적지









공북루(拱北樓)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종 4(1663)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기록은 송시열이 하였다. 월파당은 효종 5(1654)에 붕괴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앞면 5·옆면 2칸으로 규모가 큰 누각 건축이어서, 위층에는 누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은 통행로로 쓰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공북루(拱北樓)’라고 쓴 현판은 성의 안쪽에 해당하는 추녀 밑에 걸려있다. 공북루는 송시열이 쓴 기록을 비롯해 여러 글이 걸려 있어 멋스러운 경치를 더해 주는 건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이다.



북문인 공북루(拱北樓)에서 서문인 금서루쪽으로 펼쳐지는 왕궁관련 유적지구 모습.

 


9천여 평의 넓은 평탄지를 이루며 7개구역으로 나뉘는데 이곳은 그중의 한곳인 왕궁건물 중심지이다.





이 유적지는 북문인 공북루에서 서문인 금서루로 훤히 연결되는 통로이기도하다.



금서루에서 북문인 공북루를 내려다본 모습




27년이나 지난 지금도 MBC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거부실록>‘공주갑부 김갑순’이 비교적 또렷하게 생각난다82322일 시작해서 친일논란으로 후손들의 명예훼손 시비를 낳는 등 사회적으로 큰 화제 속에 61522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 드라마 말이다.

그시절 주인공 김갑순(배역 박규채)이 툭하면 뱉어내던민나 도로보데스(‘모두 도둑놈이다라는 일본말)”라는 말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김갑순은 누구인가? 1872년 고종 9년 김현종의 차남으로 출생, 그런데 아버지와 형이 요절하며 13살에 가난한 소년가장이 되었다. 먹고 살아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보부상을 따라다녔다. 여기서 이용익을 보게 된다. 축지법을 쓴다 할 만큼 발이 빠른 이용익을 김갑순은 쫓았다. 이용익에게서 보부상의 이재를 터득하고 돈을 모았다. 1900년 김갑순은 첫 번 째 매관매직을 감행한다. 관학분(주사급)에 오르고 관에서 도는 정보에 귀 기울인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도모하고 그 발판으로 철도건설 계획을 세운다는 사실이 퍼지고, 노선이 알려지자 공주의 유생들이 철도건설을 반대하고 나선다. 경부선의 노선이 변경될 처지에 놓인다. 김갑순은 식산은행으로부터 저금리의 융자를 받아 대전과 유성 쪽의 황무지 땅을 사들인다. 무려 20만평. 1905년 서울과 초량 간 445경부선이 대전을 경유하면서 김갑순은 갑부 대열에 오른다. 그의 매관매직은 계속된다. 1906년 공주군수, 1910년 아산 군수, 김갑순의 황무지 개발 또한 계속된다. 1930년엔 천만 평을 사들여 온양온천을 개발하고 극장을 여러 군데 지어서 문화사업에도 눈독을 들인다. 그는 또 대전의 땅을 사들인다. 곧이어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는데, 대전의 부지 57만평 가운데 22만평이 김갑순의 땅이다. 배꽃문양 기둥을 한 대전시 청사가 들어선 건 1932, 김갑순은 재벌의 반열에 등극한다. 어여쁜 첩도 둘씩 집에 들인다. 김갑순의 집에서 경옥고 끓이는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을 했다 한다. 경옥고를 끓이던 하인이 가마솥 뚜껑을 열고 조금이나마 간을 보는 재미에 밤새는 줄 모르고 불을 지폈다고 한다.

공주갑부 김갑순의 인기 비결은 민나 도로보데스유행어와 더불어 김갑순의 인간적인 면모와 주인공 박규채 특유의 해학적 연기 덕분이었다.....<중략>...

박규채, 그 내공은 그대로 <거부실록>에서 발현된다. 그의 말들은 금방 유행어가 되어 떠돌아다녔다. “민나 도로보데스”....<중략>....공주갑부 김갑순은 매관매직으로 따낸 군수이지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본인이 돈이 많으니 가난한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 일도 없고, 주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도 명쾌하게 해결해주어 훗날 솔로몬 판정을 능가했다는 평판도 자자했다. 우리 모두에게 잠재적 대리만족도 작용했으리라....<중략>....

 

공주갑부 김갑순은 해방과 함께 급격한 몰락을 맞게 된다. 토지개혁과 화폐개혁으로 재산은 거의 환수되고, 1949년 반민특위 때 불려갔다 보석으로 풀려나는 고초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김갑순은 역전을 노리며, 잘 생긴 첩의 아들 둘을 ‘5·10총선에 내세우지만 참패하고 만다. 이 선거로 모든 재산을 깡그리 다 날렸다. 김갑순은 89살까지 살다가, 어느 날 찹쌀떡 하나 먹다가 목에 걸려 죽었다. 한 재벌의 허망한 죽음까지도 화제가 되었다 한다.

<출처: 2018.5.5일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고석만 첨병민나 도로보데스발췌>



공북루에서 영은사로 가기위해 작은 고개를 넘는다.



한 나무에서 줄기가 둘로 갈라진 것인지...아니면 두 나무가 하나로 연리지(連理枝)혹은 연리목(連理木)이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홀랑 드러난 나무뿌리


영은사(靈隱寺)


작은 고개를 넘으니 소박하고 고즈넉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사찰전각3채가 내려다보인다.



관일루




규모는 작지만 이 전각이 영은사의 대웅전인 원통전(圓通殿)이다.






공산성 만하루(公山城 挽河樓)와 연지(蓮池)


절 앞으로 금강을 면한 낮은 곳에 공산성 만하루(公山城 挽河樓)가 자리하고 있다.



만하루(挽河樓)


조선 영조(1724∼1776)대에 건립된 누각으로 연못과 금강 사이에 자리잡은 누각은 공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평소 경치를 관람하는 역활을 하였다.

홍수로 붕괴되어 땅속에 묻혔다가 1982년 발굴조사로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1984년에 발굴조사결과를 바탕으로 건물을 복원하였다. 8각으로 다듬어진 기둥 받침돌과 기단석 디딤돌 등을 원형 그대로 이용하였다.

만하루라는 명칭은 중국 시인 두보(杜甫)의 시 세병마(洗兵馬)’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암문처럼 만들어진 통로가 있다.








공주공산성연지 (公州公山城蓮池)

 

공산성 안에 있는 연못 중 하나로 전체적인 모습은 석축을 단이 지게 정연하게 쌓아 동서로 최대 길이 21m, 너비 12m 정도로 위를 넓게 하고, 아래는 최대 길이 9m, 너비 4m로 좁혀 쌓아 석탑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서남 방향에는 잘 다듬은 돌 2매씩을 길게 쌓아 10여 개의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였다.

바닥에는 판판한 돌을 깔았고, ·서벽 쪽에는 너비 40의 배수로를 설치하여 물의 흐름을 쉽게 하였다.

 

이 연못은 백제 때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연못에 이를 수 있는 암문(성벽에서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을 택하여 몰래 출입하도록 만든 작은 문)이 발굴되어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영은사에서 왼편에 금강을 두고 임류각을 향해 올라가는 성벽 길.



백제대교. 금강철교. 그 다음 금강 상류 쪽으로 공주대교. 신공주대교. 등이 연이어 보인다.





강과 하늘과 시가지가 어우러진 풍경이 조용하고 청량하기 그지없다.










임류각(臨流閣)


백제시대인 동성왕22(500) 봄에 왕경인 웅진의 궁성 동쪽에 세웠다. 높이는 5()이었으며, 연못을 파고 기이한 금수를 길렀다. 이에 간신이 반대의 상소를 올렸으나 동성왕은 듣지 아니하고, 또 간하는 자가 있을까 하여 궁문을 닫아버렸다.

 

임류각의 위치에 대하여서는 한때는 공산성과 그 동쪽에 솟아 있는 여왕봉과의 경계선상으로 추정하기도 하였으나 최근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공산성의 동쪽 최고지대인 광복루 서쪽구릉 아래에 있는 광장북쪽의 약간 두드러진 곳에서 주춧돌과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임류각지로 추정되었다.

 

공산성 정상부에 위치하며 주변은 편평한 대지로 다듬어져 있다. 누각의 높이는 15m, 2층 구조로 이루어진 대형의 건축물이며 백제시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누각의 용도는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었던 장소로 추정된다. 1980년 공산성을 발굴하면서 임류각 터를 알게 되었고 1993년 복원하였다.




공산성 광복루 (公山城光復樓)

 

조선시대의 누각이다. 공산성은 동서로 마주하고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를 에워싼 형태로 축조되어 있다.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는 해발 110m, 서쪽에 있는 산봉우리는 해발 85m인데, 광복루는 동쪽에 있는 해발 110m의 산봉우리 정상부에 있다.

 

원래 조선시대 중군영(中軍營)의 정문 문루였고, 명칭도 폐문루(閉門樓)였다. 원래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명칭을 웅심각(雄心閣)으로 바꾸었다.

그 후 건물이 낡아 보기 흉해짐에 따라 1945년에 공주읍민들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복루라는 명칭은 19464월에 이곳을 방문한 김구, 이시영이 광복을 기념해서 붙여준 이름이다.





백제시대 쌓았던 토성구간으로 동문이 내려다보인다.









위에서 내려다본 영동루의 모습




공산성 영동루(迎東樓)


공산성의 4개 성문가운데 동쪽에 설치된 문이다.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 조사하여 건물의 하부구조를 확인하였다. 성문의 너비는 2.5m였고, 문 옆 양쪽에서 문을 지탱하고 있던 문지석을 원래 모습대로 찾아내었다.

발굴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에 2층 문루로 복원하였다. 잊혀진 문루의 이름은 2009년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영동루로 지었다.



동문인 영동루에서 조금 더내려오면 남문인 진남루가 내려다보인다.




공산성 진남루(鎭南樓)


공산성의 남문으로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 초기에 석성으로 고쳐쌓으면서 세운 문루이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고쳐지었는데, 1971년에 전부해체하여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높은 축대위에 앞면3, 옆면2칸 규모의 건물을 세워 2층 누각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공산성 쌍수정(雙樹亭)

 

조선 후기의 누정(樓亭)으로 1624(인조 2)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난을 피하여 이곳에 머무르다가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 있던 두 그루의 나무에 대부작(大夫爵)을 명하고 성을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고 하였다.

 

1709(숙종 35)이선부(李善溥)가 관찰사로 부임하여 공주 쌍수산성기적비를 건립하고 비각을 건축하였으며, 1735(영조 11) 이수항(李壽沆)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삼가정(三架亭)을 창건한 것이 곧 쌍수정이다.

 

그 뒤 1788(정조 12) 관찰사 홍억(洪檍)이 대지를 평탄하게 한 뒤 중건하였으며, 1903년 관찰사 홍승헌(洪承憲)이 수축한 것이 현재의 쌍수정이고 그 뒤에도 몇 차례 보수를 한 바 있다. 지금도 정자 앞에 느티나무와 말채나무가 한 그루씩 있다.




쌍수정아래(남쪽) 너른 평탄지에 추정왕궁지가 있다.






한창 발굴조사 작업 중이다.



추정왕궁지에서 서문인 금서루로 내려가는 성곽 길







처음 출발했던 금서루로 돌아왔다.



오른쪽으로 북문인 공북루와 금강이 내려다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