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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한성백제의 왕성(王城) 풍납토성을 걷다.

백수.白水 2019. 6. 23. 18:36




황성옛터(荒城)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 가엾은 이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나는 가리오다 끝이 없이 이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나라는 망하고 무심한 세월은 수백 수천 년이 흘러 왕성(王城)은 흔적을 찾기 어려울정도로 철저하게 폐허가 되어버렸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혼백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황성의 자취를 둘러보는 나그네의 심사를 이처럼 잘 표현한 노래가 있을까?

 

왕건이 세운 고려(9181,392)1,392년 조선이 세워지면서 475년의 역사를 기록한 채 망하게 된다.

이 노래는 1928년 나온 노래로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가 처음 불렀다.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滿月臺)를 찾아 역사의 무상함과 쓸쓸한 감회를 그린 노래로 지금도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나는 옛 성터를 둘러볼 때마다 이 노래를 곧잘 흥얼거린다.

한성백제(BC18~ 475)가 무너진 것은 고려의 멸망보다도 819년 전의 까마득한 일로, 그동안 왕궁의 자취를 찾지 못하다가 풍납토성이 궁성으로 밝혀진 것은 기껏해야 20여 년 전쯤의 일이다.

 

2019.6.22.() 집에서 새벽 첫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가서 풍납토성을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관련 자료를 검색정리하여 올린다. 순전히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백제(百濟)



시대구분

존속시기와 기간

재위 왕

왕성(현재 이름)

한성시대

BC18 ~ 475 (493)

시조 온조 21대 개로왕 (21)

위례성(풍납토성)

웅진시대

475 ~ 538 (63)

22대 문주왕 26대 성왕(5)

웅진성(공산성)

사비시대

538 ~ 660 (122)

26대 성왕 31대 의자왕(5)

사비성(부소산성)


BC18 ~ 660 (678)

31왕




1. 한성(漢城)백제시대(BC 18 ~ 475)

 

백제의 첫도읍지는 위례성(慰禮城)으로 풍납토성·몽촌토성·아차산성·석촌동고분군·방이동백제고분군·가락동고분군 등의 유적이 있으며, 특히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중심지였던 하남위례성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큰 유적지로 보고 있다.

 

4759월 도읍지인 한성(漢城, 위례성)이 고구려 장수왕의 고구려군에 함락되고 개로왕(21, 재위455-475)이 살해되니, 문주왕(22, 재위 475-477)은 다음 달인 10월에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한다.

 

 

2. 웅진(熊津)백제시대(475~ 538)


왕성인 웅진성(지금의 공산성)은 금강이 수운교통과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하였으며, 공산성은 산성으로서 견고하였다.

475년부터 부여로 천도하는 538년까지 5명의 왕이 약 63년간 재위하는 동안 세 명의 왕이 귀족세력에 피살되는 등 정치적인 혼란을 겪었으나, 무령왕(25, 재위 501~523)이 즉위하면서 국력을 점차 회복하여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유역의 일부를 회복하게 되었다.

 

 

26대 성왕(재위 523~554)은 중앙의 행정조직을 22부로 재정비하고, 지방의 행정 및 군사조직을 방군성(方郡城) 체제로 전환하는 등 대대적으로 조직을 정비하였으며, 특히 538년에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김으로서 새로운 도약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웅진백제는 64년의 짧은 기간 동안 백제의 도읍이었지만 공산성·송산리고분군을 중심으로 백제의 우수한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있으며, 특히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백제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3. 사비(泗沘)백제시대(AD 538~ AD 660)


성왕(26, 재위 523~554)538년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였으나 공식적으로는 백제라는 국호가 그대로 사용되었다.

부여지역은 금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적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넓은 평야가 있어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금강을 통하여 남부지역 및 가야지역으로의 진출과 서해를 통한 중국 및 일본과의 교류가 한층 용이하였다.

 

왕성은 부소산성을 배후산성으로 하고, 부여를 둘러싸는 나성을 축조하여 이중적인 방어체계를 갖추었으며, 22부사의 중앙 관부와 5방의 지방 통치조직을 완비하였다.

대내외 정책을 통해 국력을 강화시킨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고구려가 점유한 한강유역에 대한 회복에 나서기도 했으나 554년 신라와의 전쟁 중에 적에게 붙잡혀 사망하였다.

 

무왕(30, 600~641)은 왕권을 회복하고 대외적으로 신라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여 재위기간 중 신라와 10여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렀으며, 왕도를 사비에서 익산으로 옮기려고 익산에 왕궁성을 조성하고, 대규모 사찰인 미륵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31대 의자왕(31, 641~660)은 즉위 이듬 해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시키는 대성과를 거두었으며,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켰고 이후에도 신라의 서부지역에 대한 공략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서기660712일 나당연합군의 총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되자 항복하고 의자왕과 태자, 여러 왕자들, 다수의 고위직 관료, 그리고 백성 12,807명은 당의 수도로 보내졌고, 백제지역에는 당에서 5개의 통치조직을 두게 됨으로서 고대왕국은 678년 만에 종말을 고하게 된다.



 한성백제500

 







지하철8호선하차 5번 출구 토성동벽(영파여중근처)출발 남벽 서벽 북벽 동벽방향으로 한 바퀴 돌았다.

 

중간에 풍납백제문화공원을 둘러보고, 올림픽대로지하통로(풍납토성나들목)를 통해 한강공원으로 나가 한강과 강 건너 아차산을 조망했다.






관련 사이트링크


한성백제박물관: http://baekjemuseum.seoul.go.kr/contents.jsp?mpid=SBM0001000000

발표자료집_한성백제의 왕궁은 어디에 있었나(2013년 하반기 쟁점백제사 집중토론 학술회의).pdf

서울 백제왕궁의 발견 http://blog.daum.net/ybm0913/5232

위례성과 풍납토성: http://blog.daum.net/ybm0913/5224




현재 상태가 양호하게 남아 있는 동벽에 올라 성 안쪽을 오른편으로 두고 남쪽으로 돌았다.




남쪽에 롯데월드타워가 랜드마크역할을 한다.


오른쪽 현대리버빌아파트


동벽에서 북쪽으로 건너다보이는 강동교회와 아래↓


대아아파트



토성로가 동벽을 끊고 지나간다.


요렇게



남벽



남벽안쪽으로 한강극동아파트









남벽에 접해 강동대로가 지난다.



아주 조금 남아있는 서벽 안쪽으로 한강극동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서벽에서 아차산이 보인다.









서벽은 유실되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공장이전 문제로 당국과의 갈등이 여전히 진행 중인 삼표 풍납공장, 레미콘차량이 연신 드나들고 담장 이곳저곳에 현수막이 걸려있다.






풍납백제공원






























풍납백제공원에서 길을 건너면 한강변으로 나가는 올림픽대로지하통로(풍납토성나들목)가 있다.







한강공원









올림픽대교



그랜드워커힐호텔과 아차산(295.7m)이 보인다.














북벽을 만난다. 북벽은 들어가고 올라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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