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26(일요일)
한강이남 남한산(南漢山. 522.1m)의 남한산성, 한강이북 북한산(北漢山, 백운대 835.5m)의 북한산성은 그 규모(길이)가 대략12km로 엇비슷하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세운 하남위례성(왕도)일 것이라는 주장과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주장성(晝長城,日長山城)이라는 두가지의견이 있었으나 그간의 발굴성과에 따라서 지금은 풍납토성(風納土城)이 백제최초의 수도인 위례성으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남한산성에서는 아직까지 왕성으로 볼만한 대대적인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음이다.
대신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고, 행궁터 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초대형건물지가 발견되므로서 ‘주장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청(후금)나라의 위협이 고조되던 인조 2년(1624)이다.
병자호란 때(인조14년,1636)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된 후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인데, 이 지역은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쟁탈전을 벌였던 곳으로 백제개로왕 5년(132)에 세워졌다.
고려 고종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13년(1387)에 다시 성을 고쳐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숙종 37년(1711)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쌓았다.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따라서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산성, 북한산성은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남한산성이 백제초기의 왕성이 아니었다손 치더라도, 남한산에서 북서쪽으로 9.5km쯤 뻗어 내린 자연구릉인 풍납토성·몽촌토성일대가 고대국가 백제의 초기왕도이자 전성기의 중심무대였으니
그 옛날 남한산은 수도의 진산(鎭山)으로서의 성스러움과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한성도읍기(서울) BC18∼AD475 (493년)
-.웅진도읍기(공주) 475∼538 (63년)
-.사비도읍기(부여) 538∼660 (122년)
백제의 기운과 숨결을 느끼러 남한산을 찾는다.
새벽5시에 일어나 덕산리솜스파캐슬에서 강남터미널로 가는 6:55분 고속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버스로 환승하고.. 10시께야 시작지점인 남한산성(종점)정류장에 도착했다.
산행은 남한산성행궁 – 북문 – 동장대지 – 장경사신지옹성 – 장경사 – 동문 – 제3남옹성 – 제2남옹성 – 제1남옹성을 돌아 남문에서 마쳤다. [청색선]
남문 – 수어장대 – 서문 – 연주봉(옹성) - 북장대터 – 북문코스 [적색선]와
남한산(벌봉,봉암)일대는 다음 기회로 미뤘다.
유적관련사이트.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https://www.gg.go.kr/namhansansung-2
☞ 문화콘켄츠닷컴(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42400490001&print=Y)
2019.5.26(일) 새벽5시 밝아오는 동녘에 양떼구름이 몰려온다.
산성로터리 부근
남한산성행궁(行宮)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행궁이라 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다.
실제로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여주,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남한산성 행궁은 1909년까지 잘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훼손되었다.
1999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2002년에 상궐에 해당하는 내행전을 준공하고 2004년 행궁 좌전을 준공하였다.
한남루
재덕당
이위정
후원
재덕당
북문에서 동장대터 까지
먼저 행궁을 둘러본 후 성벽안쪽 길을 걷기로 했다. 이곳이 북문이다.
본성에는 동문(좌익문,左翼門), 북문(전승문, 全勝門), 서문(우익문, 右翼門), 남문(지화문, 至和門) 동서남북 4곳의 성문이 있다.동문을 향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성벽의 바깥쪽은 급경사로 적의 접근이 어렵도록 되었지만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걸을 만하다.
할미밀망꽃. 사위질빵과 비슷하지만 사위질빵의 꽃잎이 4엽인 반면에 할미밀망의 꽃잎은 5엽이다.
북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이 하남시의 고골·춘궁동이며, 멀리 하남시의 중심부인 하남시청·미사리 일대의 시가지가 보인다.
지하철 산성역에서 서울 사는 고향친구와 만나 함께 산행을 했다.
동장대 암문 쪽으로 계속 오른다.
제4암문(북암문)이다. 암문(暗門)은 성벽에 누각이 없이 만든 문으로 성곽의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밀 출입구이다. 암문은 본성에 11곳, 봉암성 4곳, 한봉성 1곳 등 16곳이 설치되어 우리나라 산성 중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전시 상황이 되면 군수물자를 조달하거나 비밀리에 군사를 이동시키는 용도로 사용된다.
이 문으로 1km쯤 내려가면 하남시 상사상동에 이른다.
숲이 우거진 곳이나 성곽 깊숙한 곳에 만들어져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는 문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만들어진다. 성벽 밖에 나가서 찍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산세를 따라 구불구불 사행(蛇行)하며 내려가는 성벽의 모습이 산수병풍을 두른 듯 아름답다.
동장대터에 이를 때까지 이처럼 계속 가파른 오르막계단을 오른다.
동장대터 가까이서 보니 북쪽으로 하남시의 주시가지일원이 더 넓게 보인다.
원성의 동북쪽 꼭짓점인 동장대(東將臺)터에 이르렀다.
장대(將臺)란 한자풀이 그대로 장수의 지휘대라는 말이다. 지휘관측을 위한 누각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그렇다면 돈대(墩臺)는 무엇인가? 강화도에 가면 덕진돈대 갑곶돈대 등 돈대가 많은데, 높게 두드러진 평평한 땅, 조금 높직한 평지를 이른다.
동장대터에서 여장(女牆)을 볼 수 있다.
여장은 성벽 위에 설치하는 낮은 담장으로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여장(女墻)은 여담 또는 여첩(女堞), 타(垜), 성가퀴 등으로 다양하게 부른다.
여장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만 토성에도 여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석성에는 대부분 여장이 있다.
여장은 사이사이가 끊어져 있다. 그 끊어진 구멍을 타구(垜口)라고 하는데 열린 모양이 한국은 방형이 아니라 장구모양이어서 시야를 넓게 확보할 수 있는 과학적인 구조이다. 타구로 끊어진 여장의 한 구간을 첩(堞) 또는 타(垜)라고 하며 첩이나 타의 개수는 성벽의 길이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첩이나 타는 일정한 기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타에는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이를 총안(銃眼)이라고 한다. 총안은 수평으로 뚫려있는 것과 경사로 뚫려있는 것이 있는데 이를 각각 원총안(遠銃眼)과 근총안(近銃眼)이라고 부른다. 여장은 또 입면에서 보았을 때 장방형으로 만들어진 여장을 평여장(平女墻)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성곽 누문 주위로는 타구 없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평여장이라고 한다. .
남한산성은 본성에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을 함께 연결하여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남한산성 탐방안내도를 보면 알 수 있듯, 동장대터에서 보면 동북쪽 산봉우리(벌봉, 봉암蜂巖)으로 올라가는 성벽이 보인다. 저곳이 남한산성의 외성(外城)인 봉암성이다.
알고 보니 동장대터에서 암문을 통하여 봉암성으로 갈수 있는데...
남한산정상을 포함하여 봉암성을 한 바퀴 돌아보려고 했는데...
휴식을 취하고 있던 등산객이 잘못 알려주는 바람에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다음번에 혼자서 가 볼 생각이다.
동장대터에서 동문까지
북문에서 동장대터로 올라설 때 험했는데, 산이 높으면 골도 깊듯 동문으로 내려가는 길이 가파르다.
나와 반대방향에서 거꾸로 올라오는 산객들의 숨소리가 무척 가쁘다.
이곳이 본성의 동벽 길
장경사신지옹성
장경사주차장이 내려다보인다.
장경사
無量殿(무량전) 편액글씨가 멋있어서 한 컷.
장경사암문. 그 위로 여장(女墻)이 보인다.
암문 위로 여장(女墻)이 보인다.
굽이굽이 유려하게 휘도는 동쪽성벽의 곡선미
동문(東門)
동문에서 남문까지
동문 옆으로 난 큰 도로
동문에서 도로를 건너와 뒤돌아 본 동문과 동쪽성벽의 모습
동(東)암문(暗門)
동암문(東暗門)에서 부터 남문(지화문)으로 가는 성벽(남벽)이 시작된다.
각시붓꽃
옛 성터에 피어난 야생화 바람결에 흔들거린다.
너는 어디서 날아와 여기 자리 잡고 누굴 위해 어깨를 들썪이며 울음운다냐.
키 <유안진>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이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옛 성돌이 그대로 보존된 바깥성벽
남쪽의 옹성이다.
남장대터
제2남옹성
저산이 검단산(523.9m)인가?
남한산성에서 서쪽과 남쪽지역을 조망하다.
남한산성 남쪽으로 성남과 분당시가지와 고층아파트가 보인다.
강동 잠실지역의 고층빌딩도 나 내려다보인다.
4시간여 만에 다시 남한산성 남문으로 회귀하여 산행을 마무리했다.
남(南)성문안의 풍경들
남(南)성문 밖의 모습
야밤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길, 서해대교에서 내려다보이는 평택항.
홀로 걷는 여행길이 홀가분하긴 하지만, 주위가 적막에 들면서 순간순간 혼자임을 인식하게 될 때마다 가슴이 싸해질 때가 많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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