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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송산리고분군(宋山里古墳群)

백수.白水 2019. 7. 9. 06:04

솔뫼, 솔산, 송산(松山)!

방방곡곡 소나무 많은 나라답게 곳곳에 송산(松山)이라는 이름이 많다.

소나무위에 앉은 학, 송학(松鶴)이라는 말도 낯설지 않고...

 

학들이 날아와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군무를 추는 풍경을 심심찮게 보며 자랐다.

젖가슴처럼 봉곳하게 자리한 분묘들을 멀리서 보니

학이 솔밭둥지에 알을 낳아놓은 듯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분묘는 왕성밖에다 썼다는 공통점이 있다.

송산리고분군은 왕성인 공산성의 서쪽 1km쯤 떨어진 곳에 조성되었다.


고요하고 아늑한 송산리고분군의외로 청춘남녀의 발길이 잦다.



웅진백제역사관 고분군모형관 백제연못 송산리6호분 송산리5호분  무령왕릉

송산리14호분 송산리방단계단형 적석유구 왕릉공원  10.공예품전시판매관



그동안 한성(漢城)백제시대(BC18~475, 493)의 유적 중 왕성이었던 풍납토성, 이웃한 몽촌토성, 백제초기의 왕릉을 품은 것으로 여겨지는 석촌동고분군, 한산(漢山)에 있는 남한산성을 둘러보았고

 

이번에 웅진백제시대(475~538, 63)의 왕성인 공산성, 왕과 왕족들의 무덤인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을 답사했다.


작년에는 사비백제시대의 왕궁이었던 관북리유적, 비상시 방어성인 부소산성, 정림사지, 왕성 밖으로 도시를 둘러싸는 나성, 왕과 왕족들의 무덤인 능산리고분 등을 돌았으며,


오래전인 2012년에 사비백제의 수도 기능을 보완하기 위한 복도(複都)의 왕궁인 왕궁리유적, 미륵사지를 둘러본바있다. 

 

백제역사의 얼개를 살피보기 위해서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일견(一見)했을 뿐이고언제가 될지 모르겠으나 심화과정은 다음을 기약한다.



동영상백제 역사를 새로 쓴, 무령왕릉 / YTN 사이언스



공주 송산리고분군(宋山里古墳群)

 

공주읍 송산리(옛 지명) 宋山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웅진시대(475~538)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원래 17기의 무덤이 있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1~6호분까지 7기만 복원되어 있다.

 

이들 무덤은 만들어진 형태에 따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과 벽돌무덤(塼築墳)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 1~5호분은 백제가 전통적으로 사용한 굴식돌방무덤으로, 돌로 널방을 만든 후 천장을 돔(Dome) 형태로 둥글게 처리하였으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도굴로 인하여 부장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웅진시대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활발했던 대외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다.

    


고분군모형관







고분군 보존상의 문제로 문화재청의 영구미공개결정에 따라 모든 무덤의 내부관람이 중지되었다.


송산리 제6호분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된 벽돌무덤으로 널방의 크기는 남북 길이 3.7m, 동서 너비 2.24m이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는 등감(燈龕)을 설치하였으며, 네 벽면에 회를 바르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四神図)를 그렸다.

목관을 올려 놓았던 관받침대가 하나인 것으로 보아 한 사람만 묻혔던 것으로 보인다.

벽돌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통해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❸ 송산리 제5호분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되어 조사된 굴식돌방무덤이다. 널방은 남북 길이 3.45m, 동서 너비 3.26m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바닥에서 1.3m 높이까지는 벽면을 수직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쪽부터는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은 후, 정상부에 판석 1매를 얹어 천장을 돔(Dome) 형태로 둥글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바닥에는 목관을 올려놓는 관받침대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도굴로 인하여 토기 1점과 약간의 장신구, 그리고 관못만이 남아 있었다.



령왕릉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501~523)과 왕비의 합장무덤이다.

19715호분과 6호분 배수로 작업을 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무덤은 중국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으로, 널방은 연꽃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으며 남북길이 4.2m, 동서너비 2.72m, 높이 2.93m이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놓았던 등감(燈龕)과 창문시설을 설치하였다.

특히 입구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은 무덤의 주인공과 무덤을 만든 연대를 말해주고 있다.

송산리분군에 있는 무덤 중에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것으로, 왕과 왕비의 금제 관장식을 비롯하여 총 1084,600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였다.


 

송산리 제1∼4호분

1927년에 조사된 4기의 백제 굴식돌방무덤으로 이미 도굴된 상태에서 공주지역의 백제유적 가운데 1927년에 처음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당시에는 5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현재 4기만이 복원되어 있다.

무덤에서는 금과 은, 금동으로 만든 껴묻거리가 일부 출토되어 웅진시대(475~538)백제문화 복원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송산리방단계단형 적석유구

송산 정상부 가까이에 있는 적석유구이다. 1단은 폭이 15m, 2단은 11.4m, 3단은 6.9m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들어 계단모양을 하고 있다.

목관을 놓은 흔적은 없으며, 대신 그 자리에 10cm 두께로 붉은 색의 점토를 깔았다.

내부에서는 삼족토기를 비롯한 백제토기와 옹관편이 수습되었다. 내부에서 목관과 같은 매장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성시대 마지막 왕인 개로왕의 가묘(假墓)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무덤이 아닌 제사시설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정자산유적으로 가는 길


공주 정지산(艇止山)유적은 공주시 금성동 정지산의 구릉지대에 있는 백제시대의 제사유적으로 송산리고분군에서 북동쪽 금강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유적이 조성된 시기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능선 전체에 수혈 주거지와 저장공이 입지하는 시기

둘째) 주거시설이 폐기되고 능선상에 국가시설물이 계획성 있게 배치되는 시기

셋째) 국가시설물이 폐기된 후 7세기대의 석실묘와 옹관이 만들어지는 시기로 나뉜다.

 

유적은 대부분 백제가 웅진에 도읍기의 집 자리와 국가제사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일부는 사비 도읍기의 무덤과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의 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출입구를 폐쇄한 송산리 제 6호분의 모습




출입구가 폐쇄된 무령왕릉










송산(松山)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고분군 ▼










송산(松山)에서 서쪽방향의 공산성 금서루를 클로즈업해서 찍었다.





공원의 금송(金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