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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유적(王宮里 遺蹟)

백수.白水 2020. 6. 15. 07:44

 

왕궁리는 예로부터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으로 불려, 고대 백제의 왕궁이 이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지역의 유적은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왕궁 유적과 사찰 유적이 함께 남아 있다. 발굴 ·조사 결과 백제 무왕(600~641)때 왕궁으로 조성된 이후 백제 말에서 신라초기에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을 쌓고 나서 내부 경사면을 따라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고 건물을 지었는데, 왕궁 내에서 물과 조경석을 이용한 조경 시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유적지 내에는 왕궁 건물터와 금당(金堂)등의 사찰 건물터가 여럿 남아 있다.

사찰 유적 중 국보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王宮里五層石塔)은 조형미가 뛰어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❶정전건물지   ❷5층석탑      ❸금당지       ❹강당지      ❺와적기단건물지   ❻정원

[7]동서석축1    ❽동서석축2   ❾동서석축3   ❿동서석축4  ⓫화장실유적        ⓬공방

 

왕궁리유적

왕궁리성지라 불리는 왕궁리유적 1998년 9월 17일 사적 제408호로 지정된 유적으로 면적은 21만 6,862㎡에 이른다. ‘왕궁리성지’라고도 부르며 마한·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석탑 동쪽으로 30m 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가마 2기를 발견했다.

 

[백제 왕궁터 왕궁리유적]  사적 제408호 왕궁리유적은 1989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의 왕궁 외곽담장과 건물지, 석축, 정원유적, 공방지 등의 내부시설이 확인되어 왕궁으로 일정기간 사용되다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 내고 그 자리에 탑, 금당, 강당 등 사찰이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왕궁은 폭 3m, 동서 245m, 남북 490m의 장방형 담장으로 둘러쌓고 내부에는 왕이 정사나 의례를 행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정전 건물지 등 14개의 백제시대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아울러 백제 최고의 정원유적과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지, 백제 최고의 화장실유적이 확인되었다.

백제 무왕대 말기나 의자왕대에는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탑, 금당, 강당 등 사찰건물이 들어서게 되는데, 백제 후기에서부터 통일신라기에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되는 계기는 백제왕궁의 서측에 조성됨에 따라 의자왕이 부왕의 명복을 빌기위한 원찰로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정문에서 바라다 보이는 왕궁리유적전시관, 유적지는 광장의 왼편에 위치한다.

 

유적전시관의 자료(일부)

 

 

 

 

 

 

 

 

 

 

 

 

 

 

 

남측궁월문지

 

 

동쪽 궁궐담장

 

 

동문터

 

 

 

 

 

 

후원을 지나 멀리 북문지가 보인다.

 

후원과 곡수로

 

 

서쪽 담장쪽

 

 

 

 

서쪽 담장쪽이다.

 

 

금당터는 5층석탑의 바로 뒤(북쪽)에 있다.

왕궁리의 사찰은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초기에 궁궐터에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터의 동쪽으로 약간 기운 남북 축에 오층석탑, 금당터, 강당터가 있어 '11금당'이라는 사찰 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를 모시는 금당은 사찰의 중심 건물로, 정면 5(19.1m), 측면 4(14.5m)으로 된 통간 구조이다. 그 밖의 사찰 유적으로는 오층석탑 동편의 기와 가마터와 강당터 서편의 건물터 두 자리가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王宮里五層石塔)국보 제 289호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높이가 9m인 이 석탑은 단층 기단, 얇고 넓은 옥개석, 3단 옥개 받침 등이 특징적이다.

1965~1966년에 해체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다.

제1층 옥개석 중앙과 기단에서는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같은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가, 석탑 밑에서는 가로 16.8m, 세로 12.7m인 건물 기초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 기초를 보면 이 석탑은 본디 목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주변에서는 ‘왕궁사(王宮寺)’, ‘관궁사(官宮寺)’, ‘대관관사(大官官寺)’, ‘대관궁사(大官宮寺)’ 라는 글자가 적힌 통일 신라 시대 명문 기와가 여럿 출토되었다.

지금도 이 탑의 축조 시기를 놓고, ‘백제, 통일 신라, 고려 초’라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남측 궁궐 담장

 

 

 

백제역사유적지구

http://www.baekje-heritage.or.kr/html/kr/bjheritage/bjheritage_010101.html

 

백제의 건국과 성장 > 백제의 역사 > 백제역사유적지구 > 백제세계유산센터

백제 시조 온조는 졸본지역에서 한강유역의 위례지역으로 이동해 와서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다. 백제는 한국의 고대국가 가운데 한 국가였다. 기원 전 18년에 건국되어 660년 멸망할 때까지 약 70

www.baekje-heritage.or.kr

백제의 역사(백제의 건국과 성장, 중흥과 발전, 백제연표, 백제의 왕력표) 시대별유적

 

 

왕궁리유적

http://www.iksan.go.kr/wg/index.iksan?menuCd=DOM_000005404002000000

 

왕궁리유적전시관 왕궁리유적

홈 세계유산 왕궁리유적 왕궁리유적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일반현황 유적명 : 익산 왕궁리유적(사적 제 408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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