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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와 사직 (宗廟社稷)

백수.白水 2019. 10. 1. 08:11

2019.9.29(일)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마따나 그 오랜 세월동안 관심 없이 지나쳤던 조선시대의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처음으로 찾았다. 사극을 보면서 종묘사직이 위태롭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는데 이는 곧 나라가 위태롭다는 말인즉 종묘사직이란 왕실과 나라를 아울러 이르는 말인 것이다.

 

 -.宗(마루 종) 마루(머리: 곧 으뜸 근원 근본), 조상, 제사, 사당

 -.廟(사당 묘) 사당, 위패, 정전(正殿:나라의 정사를 집행하는 곳)

 -.社(모일 사) 모이다, 제사를 지내다, 토지신(土地神)

 -.稷(피 직) (볏과식물), 곡신(穀神), 농관(農官)

 

위 한자의 새김()으로 알 수 있듯 종묘(宗廟)는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며, 사직은 토지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나라(王朝)를 세우고 도성(都城)을 만들 때 종묘와 사직을 먼저 짓고, 다음에 궁궐, 그리고 마지막에 성벽을 쌓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조선시대의 궁궐건축


한양도성은 유교의 치국이념과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하여 건설되었다. 도성 주위로는 좌 청룡(낙산), 우 백호(인왕산), 전 주작(남산), 후 현무(백악)가 둘러싸고 있고, 도성 안에는 궁궐, 종묘, 사직단 등이 자리 잡았다.


1392년 조선왕조를 일으킨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는 즉위하자마자 신하를 한양에 파견하여 고려시대 남경 이궁을 고치게 한 후, 1394(태조 3) 8월 한양으로 도읍하기로 결정하고, 같은 해 1025일 천도를 단행한다. 도성은 종묘와 사직을 먼저 짓고, 다음에 궁궐을,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성벽을 쌓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종묘는 왕실의 조종(祖宗)이 되는 신위를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곳이고, 사직은 민생의 근본인 토지와 곡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백성들에게 보이고 정교(政敎)를 펴는 곳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는 곳으로, 이 모두는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하여 가장 먼저 지어야 할 건축물과 시설물들이다.

처음으로 지은 궁궐은 경복궁(景福宮)이었다. 경복궁 이외에 한양도성에 세워진 궁궐로는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인경궁(仁慶宮, 후에 철폐), 경덕궁(慶德宮, 후에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이 바뀜), 경운궁(慶運宮, 현재의 덕수궁德壽宮) 등이 있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으로 사용되다가 1592(선조 25)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후 270여 년 동안 중건되지 못하였다. 그 후 1865(고종 2)에야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기 시작하여 1868년 준공되면서 다시 조선 왕조의 정궁 역할을 회복하였다. 경복궁은 도성의 북쪽에 위치하였다고 해서 북궐이라고도 불렸다.

 

창덕궁은 1405(태종 5) 경복궁동쪽 향교동에 지은 이궁으로,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복궁을 대신하여 오랫동안 정궁 역할을 하였다.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고도 불렸다. 창경궁은 1483(성종 14)에 대왕대비 등 홀로 된 왕비들을 모시기 위해 세운 별궁이었다.

이상 언급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임진왜란 이전에 창건된 궁궐들이고 인경궁, 경덕궁, 경운궁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된 궁궐들이다.

 

<출처: 조선시대의 궁궐건축 (한국 미의 재발견 궁궐·유교건축)>



종묘(宗廟)


종묘의 기원은 중국의 상고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천자는 7묘제(七廟制, 7대조까지 묘에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 지내는 것), 제후는 5묘제를 채택하였다.

 

우리나라 종묘도 그 기원은 매우 오랜 것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미 신라에서 남해차차웅 3(6)에 시조묘(始祖廟)를 세웠고, 고구려에서는 대무신왕 3(20)에 시조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으며, 백제도 온조왕 원년(기원전 18)의 동명왕묘, 동왕 17년의 국모묘(國母廟)를 세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는 5묘제, 고려왕조는 7묘제를 채택하였고, 조선왕조에 와서는 7묘제가 시행되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이 조성될 때 고대 중국의 좌묘우사(左廟右社), 면조후시(面朝後市)의 제도를 따라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에 왕의 조상을 제사지내는 태묘(太廟)를 두고 오른쪽에는 토신과 곡신을 제사지내는 사직단(社稷壇)을 두었던 것이다.


종묘(면적194,331㎡. 58,785)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후 및 추존된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서 태묘(太廟)라고도 하는데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태조 3(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1395) 9월에 완공 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별묘인 영년전은 세종3년(1421)에 창건되었다.

 

현재 전에는 19 49, 영녕전에는 1634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정전에 계신 왕들의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1외대문(정문)  2망묘루  3공민왕 신당  4향대청  5재궁  6공신당  7칠사당  8정전 9정전수복방  10전사청  11제정  12영녕  13정전악공청  14영녕전악공청



종묘공원에 있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선생 동상








종묘 정문. 외대문(外大門) 또는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다.



종묘의 정문 앞에서 남쪽의 주작(朱雀)에 해당하는 남산(목멱산)이 아주 가깝게 보인다.



1.외대문 2.정전 남신문 3.정전 4.영년정 5.향대청  6.재궁 7.전사청 8.정전 악공청 9.영년전 악공청







신로(神路)종묘제례 등 의식을 위해 만든 길이다. 가운데가 약간 높고 양옆이 약간 낮은 세 길중, 가운데 길은 신주와 향·축이 들어가는 신로(神路), 동측의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 서측의 길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이다.



신로는 외대문 안에서 정전과 영년전의 남신문 밖까지는 거칠고 널찍한 박석으로, 남신문 안에서 상월대 아래까지는 전석으로 설치되었다. 어로와 세자로는 재궁으로 이어진 다음 정전과 영년전 동문 안 상월대 아래까지 설치되었다.



향대청 일원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지당(池塘)이 있고, 그 동쪽으로 망묘루, 공민왕 신당, 향대청 일곽이 있다.



망묘루는 향대청 남쪽에 위치하며 제향(祭享)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망묘루는 건물 중 한 칸이 누마루로 되어 있다.



공민왕 신당은 망묘루 동쪽에 있는 별당으로 고려 31대왕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신당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影幀)과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신당의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향대청앞 중연지(中蓮池)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香祝幣)등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재궁(齋宮) 일원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국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어목욕청(왕이 목욕하는 건물)이 있다.













사진에서 신로(神路) 왼쪽이 정전(正殿)이고 오른쪽이 재궁(齋宮)이다.



전사청·정정수복·제정 일원


정전(正殿)의 동문(東門)밖에 2019년 묘현례(廟見禮)재현행사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출연진들이 정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부 출연자들이 정전 동문으로 입장하고 있다.



   

 막후 즉 출연진의 대기 장소에서 왕비마마를 만났다. 하여튼 고상한 품격이 돋보이고 우아하다. 사전 공개모집을 통해 선정된 시민모델이다. 지나고 보니 그곳은 원래 관람객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구역인 듯, 하여튼 한 장 찍었다.



전사청 일원

정전(正殿)의 동문(東門)밖에서 북쪽으로 정정수복방·전사청·제정(祭井) 등이 자리하고 있다.


정전수복방(正殿守僕房)


정전 동문 북쪽에 위치한 수복방은 두벌 장대 기단위에 정면 4, 측면 단칸의 맞배집으로 수복들이 머무는 곳이다. 수복(守僕)은 조선 때, ((((서원(書院) 따위의 청소하는 일을 맡아보던 구실아치를 말한다.

    


전사청(典祀廳)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으로,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주실은 정면 7, 측면 2칸이고 옆에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으로 꾸몄다.


 

제정(祭井)

향제(享祭)에 사용되는 우물을 말하는데 정전 전사청(典祀廳)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찬게 특이하다고 한다. 네면을 담장으로 둘렀고, 남쪽에 우진각지붕의 일각문(一脚門)이 있다.


    

정전(正殿) 일원




종묘정전(宗廟正殿)

조선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왕실의 사당이다.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 신실 양 옆으로 각각 두 칸의 협실,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태조(시조), 태종(3), 세종(4), 세조(7), 성종(9), 중종(11), 선조(14), 인조(16), 효종(17), 현종(18), 숙종(19), 영조(21), 정조(22), 순조(23), 문조(추존), 헌종(24), 철종(25), 고종(26), 순종(27)과 각왕의 비()를 합쳐 모두 19감실에 49신위가 모셔져 있다.


남문인 신문에서 보면 동서 109m, 남북 69m나 되는 묘정 월대가 넓게 펼쳐있고,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으며, 그 북쪽 끝에 상월대와 기단이 설치되어있다. 종묘 건축이 다른 건물과 다른 점은 건물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건물을 옆으로 증축하여 길게 늘린 점에 있다.



공신당(功臣堂)

조선왕조 역대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정전 울타리 안 월대 남쪽의 동쪽에 있으며 창건 때는 5칸에 불과하였으나 나중에 9칸으로 늘렸다가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로 되었다.

칠사당과 같은 구조 형식으로 매우 간소하게 되어 있는데 왕의 신실과 한 울타리 안에 있어서 일부러 그 형식을 낮추었다고 생각되며 16칸이라는 보기 드문 건축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정전에 와서도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쉬운 건물이다


칠사당(七祀堂)

종묘 창건 때부터 정전 울타리 안 월대 남쪽의 서쪽에 있던 것으로, 봄에 모시는 사명과 사호, 여름의 사조, 가을의 국문과 공려, 겨울의 국행과 그밖에 중류의 7사에 제사 지내는 곳이다.

정면 3, 측면 1칸의 맞배 지붕 건물로 정면에는 판문과 격자창을 두고 나머지 3면은 전돌로 벽을 쌓았다.



담장 밖에서 본 종묘정전



정전의 정문인 남신문(南神門)



조선의 세자빈 혼례를 고하다. “2019 묘현례(廟見禮)”가 재현되고 있다.

   


묘현례는 왕비나 세자빈이 왕실혼례를 마친 후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진 종묘를 알현(謁見)하는 의례로서 조선시대 종묘에서 행해지는 국가의례 중 왕실여성이 참여하는 유일한 행사이다.

    


금년은 9.20()22()9.27()29()13시와 15시에 행사를 한다. 나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방문했는데 금년도 마지막의 묘현례를 보게 된 것이다.



묘현례의 절차는

1.국왕과 왕세자, 문무백관이 국궁(鞠躬)4배로 선대왕께 인사를 올리는 국왕,왕세자 봉심준비

2.국왕과 왕세자가 선대왕들의 신주가 모셔진 신실을 살피는 국왕,왕세자 신실봉심

3.문무백관 퇴장 후 국왕과 왕세자가 소차(小次, 임금이 거둥 때 잠깐 쉬기 위해 막을 쳐 놓던 곳)로 돌아가는 국왕,왕세자 소차이동

4.왕비와 세자빈이 선대왕들께 공식적으로 인사를 올리는 왕비, 세자빈 알묘

5.인사를 마친 왕비와 세자빈이 동문 밖으로 퇴장하는 왕비, 세자빈 퇴장순서로 진행된다.




영녕전(永寧殿) 일원




바깥에서 본 영녕전(永寧殿)





종묘 영녕전은 종묘 정전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신 종묘의 별묘(別廟).

 

태조의 4대조인 목조(4대조, 고조부), 익조(3대조, 증조부), 도조(2대조, 祖父), 환조() 순으로 하여 정종(2), 문종(5), 단종(6), 덕종(추존), 예종(8), 인종(12), 명종(13), 원종(추존), 경종(20), 진종(추존), 장조(추존), 영왕(英王)과 각 왕의 비를 합쳐 모두 16감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에는 한때 폐위되었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의 신위는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 반면, 폐위된 연산군(10)과 광해군(15)의 신위는 정전과 영녕전 모두에서 제외되었다.

 

모셔져 있는 왕이나 왕비의 위상을 보면 정전에는 모두 왕과 왕비 49명의 신위를, 영녕전에는 태조의 추존 4대조, 단명(短命)하고 , 추존되고 , 나중에 복권된 그리고 대가 끊어진 등의 이유로 정전에 모시지 못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