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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길을

4. 유클리드

백수.白水 2012. 4. 20. 09:21

“기하학 어디에 쓰나” 제자 푸념에 “본전 찾으려 학문하나” 질타


 

 2000년 이상 세계 수학계를 주름잡았던 ‘기하학 원론’을 쓴 유클리드. 사진 출처 보우터히쉔묄러

 

 

‘지금도 전 세계 초중고교 수학에서 그대로 배우는 영원한 기하학의 성전(聖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기원전 330?∼기원전 275?)의 저서 ‘기하학 원론’에는 이런 찬사가 붙는다. 그가 사망한 후 19세기까지 2000년이 넘도록 전 세계 기하학은 모두 ‘유클리드 기하학’을 의미했다. 하지만 불후의 학문적 업적에 비해 개인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생몰(生沒)연도도 불확실하다. 더욱이 그의 학문적 고향 알렉산드리아에서 그의 존재감이 없어 대학자로서의 명성이 무상함을 느낀다.


지중해 연안 알렉산드리아.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후 그의 장수가 자신의 이름을 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연 곳이다. 로마와 비잔틴 제국을 거쳐 641년 이슬람이 들어와 나일 강 상류이자 남쪽 카이로로 천도하기까지 970년간 지중해 문명의 중심이었고 지금은 이집트 제2의 도시다.

 

 

하지만 이만근 교수(동양대)와 함께 최근 찾아본 이곳에선 과거의 영광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정치적 혼란과 경제난 속에서도 값싼 기름값 덕분에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 어설픈 교통체계, 실종된 양보의식, 경찰력 부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내 도로는 마비상태였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본산이지만 유클리드의 동상이나 조각, 그의 이름을 딴 거리나 대학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사마 무함마드 알렉산드리아대 부대학원장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도 유클리드가 이곳 출신임을 모르고 있을 정도”라고 개탄했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도 꼽혔던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에는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리가 적용됐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체취가 남아 있던 유일한 구조물이던 파로스 등대마저 1349년 대지진으로 무너져 사라졌다. 지금은 아랍의 술탄 퀘이베이가 세운 ‘퀘이베이 요새’로 변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유클리드의 진지한 학문 태도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전해온다. 어려운 기하학 문제로 골치 아파하던 한 제자가 “도대체 배워서 어디에 씁니까?”라고 묻자, “동전이나 몇 푼 던져줘라. 꼭 본전 찾으려고 배우는 놈인 모양이다”라고 꾸짖었다. 이집트에 새로운 왕조를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도 기하학을 가르쳤는데 왕이 기하학이 어렵다며 “좀 더 쉽게 배우는 길이 없냐”고 묻자, 유클리드는 “기하학 공부에 왕도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다.

그의 업적은 그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평가되고 있을 뿐이었다.
무함마드 엘 알렘 알렉산드리아대 수학과 과장(55)은 “유클리드를 떠올리는 조형물은 없지만 그의 정신으로 연결되어 있다”며 “대학이나 도서관, 그리고 시내 거리에서 ‘유클리드도 이곳을 걸으며 기하 문제를 생각했겠지’라고 회상한다”고 말했다. 이 대학 수학과 4학년 무함마드 카미스 씨(24)도 “유클리드는 아이작 뉴턴처럼 인류 역사를 바꾼 위인이라고 생각한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마무드 거브르 전 알렉산드리아대 자연과학대학장은 “이집트는 2300년간 이민족이 지배했고, 독립한 지 5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독립 후에도 군부 독재 시절이 이어졌다”며 “이런 상황에서 위대한 고대 수학자에게 눈을 돌릴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유클리드의 흔적을 찾기 위해 2002년 10월 세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찾았다. 이 도서관은 유클리드가 과거에 활동했던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다. 지중해변 샤트비가에 위치한 도서관은 국제 공모를 통해 채택한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떠오르는 태양을 형상화한 웅장한 유리궁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는 이집트 정부와 유네스코가 국제적인 후원금 등 약 2억2000만 달러(약 2500억 원)를 들여 건설한 국제사회의 재산이기도 하다.

지하 5개 층을 포함해 총 11개 층으로 된 도서관에는 맹인용 점자책 등 150만 권가량의 도서가 소장돼 있다. 하지만 유클리드는 이런 초대형 도서관에서조차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원론’에 대한 영어와 아랍어 해설서 등 책 10여 권이 꽂혀 있는 별도의 서가가 유클리드와 관련된 전부라고 사서인 가다 사미 씨(25·여)가 말했다.

도서관 외벽에는 세계 각국 언어의 글자판이 마련돼 있다. 과거 세계를 주름잡던 알렉산더 대왕의 위업을 되살리려는 듯했다. 어떤 이유로 선택됐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지만 글자판 가운데 한글 ‘름’ 자도 눈에 띄었다.

유클리드가 활동했던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세계 최초의 도서관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왕궁에 세운 종합학술 연구기관 ‘무세이온’ 산하 기관이었던 당시 도서관은 파피루스 두루마리 장서가 70만 권에 이르러 당대 최고 규모를 자랑했다. 유클리드는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기하학 원론’을 썼다. 원작이나 필사본은 이집트가 2000년 이상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원론’의 내용은 다른 많은 저작에 인용돼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 ‘기하학 원론’에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자세히 소개돼 있다. 이처럼 원론의 내용 상당수는 유클리드가 직접 발견하거나 증명한 것만을 모은 것은 아니다. 유클리드는 당대의 그리스 기하학을 집대성하고 공준(公準) 공리(公理)로부터 체계적으로 명제들을 증명해 가는 방법론을 총정리했다. 이는 후대 각 분야의 학문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을 남긴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이라는 저서에서 ‘유클리드식 수학적 방법론’을 동원해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수학은 물론이고 신학을 포함한 서구 지성계 대부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클리드 ‘가장 편안한 황금비율은 1:1.618’도 증명

 

 유클리드 기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찾은 시민들이 넓고 웅장한 내부 열람실에서 자료를 보고 있다.

이 도서관은 유클리드가 활동했던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계승한다고 하지만 그와 관련된

서적 몇 권 외에는 유클리드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알렉산드리아=구자룡 기자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 ‘평행하는 두 직선은 만나지 않는다.’

유클리드가 기원전 3세기경에 집필한 ‘기하학 원론’에 있는 명제들 중 일부다. 초중학교 시절 누구나 배우는 기하학의 기초적인 내용들이다. 하지만 당시엔 이런 명제는 기초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유클리드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 수학자 탈레스가 수학의 한 분야로 기하학을 시작한 이후 피타고라스, 플라톤, 에우독소스 등이 증명한 내용들을 집대성했다.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보다 크거나 작다는 등 면(面)을 추상화해 다양성을 추구한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은 19세기에나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13권으로 된 ‘원론’은 증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자명한 5개의 공준(公準)과 5개의 공리(公理)를 토대로 한 명제 465개를 증명했다. ‘두 점을 잇는 직선은 하나’ ‘평행하는 두 직선은 만나지 않는다’ 등이 공준에 포함된다.

‘원론’ 1권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기하학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등 1∼6권은 평면 기하학을 다룬다. 7∼9권은 자연수 체계 등 수(數) 이론, 10권은 무리수, 11∼13권은 입체 기하학을 소개했다,

요즘에는 간단하게 수식(대수학 공식)을 이용해 풀 수 있는 것들도 도형을 이용해 설명한 것도 원론의 주요한 특징이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에는 인간의 눈을 가장 편안하게 하는 두 길이 간의 비율(1 대 1.618)이 소개되어 있다. 후대에 ‘황금비율’이라고 이름이 붙은 이 비율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 바로 배꼽을 기준으로 상반신 대 하반신 비율이 1 대 1.618인 밀로의 비너스 조각상이다.

특히 6권에서는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가 ‘신이 만든 자연의 예술품’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황금비율도 나온다. 황금비율은 인간의 눈을 가장 편안하게 하는 두 길이 간의 비율로 1 대 1.618이다. 황금비율이라는 용어 자체는 14세기 르네상스시대에 등장하지만 유클리드는 피라미드 등에 이 같은 비율이 적용됐다며 기하학적 계산을 통해 이 비율을 소개했다. 밀로의 비너스 조각상도 배꼽을 기준으로 상반신 대 하반신 길이가 1 대 1.618로 만들어진 황금비율의 전형이다. 직사각형에선 가로 대 세로의 비율로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전면에 적용됐다.

황금비율의 현대적 정의는 ‘긴 부분과 짧은 부분의 길이의 비가 전체와 긴 부분의 길이의 비와 같다’는 것이다. 이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1.618 대 1=2.618 대 1.618’에 해당한다. 최신 전자제품인 와이드 TV에는 16 대 9, 15 대 9, 16 대 10 등의 비율이 사용되는데 이는 황금비율의 근삿값에 해당한다.

<이만근 교수/알렉산드리아=구자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