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작년도 12월부터 금년 1월까지 2개월에 걸쳐 역사에 관한 글을 써서 네이버 블로그에 올려놓았다. 옛 지명의 유래 고찰이다. 내 고향인 1)금산군의 옛 지명과 그 속현이었던 2)부리현과 3)진산군, 무주군의 4)주계현과 5)무풍현, 진안의 6)용담현의 지명연원에 관한 글이다. 그리고 충북 7)단양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적성현의 8)칠중산성과 9)육계토성의 지명유래도 썼다.
다른 학자들이 밝히지 않았거나 아니면 밝히지 못한 사실을 나만의 설, 나만의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권위 있는 학술지에 발표한 것도, 그럴 생각도 없었으니
여태 제대로 된 질정(叱正)을 받은 바 없으나 아직까지도 내 주장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다.
의미의 전달과 글 쓰는 속도의 편의를 위해 한자를 혼용해서 읽기에 불편하므로
내가 태어난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삼태리 이야기만 옮긴다.
고향마을 서드실 이야기 인데 내 고향 소개인 셈이다.
제목은 서드실 이야기라고 붙였지만 이야기는 아니고 나는 그저 땅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만 적는다.
덧붙혀 우리 마을뿐만 아니고 이웃마을과 내가 어릴적 왜 그런 이름으로 불렸는지 궁금해 했던 우리동네로 이사온 여인네들의 친정마을 이름도 몇개 그 유래를 살피기로 한다.
곽영을의 홈피에서 끌어온 삼태리 전경 사진
우리 조상들은 '새김'과 '소리'를 빌려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적었다.
쉽게 말하면 신라시대의 이두식 표기법인 셈이다. 한자지명보다는 우리 지명이 훨씬 일찍 발생하였고 마을 이름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바뀌기도 하고 행정개편을 통해 인위적으로 바뀌기도 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面里制가 본격화 되는데 아마 그때 자연부락의 우리말이름이 한자지명으로 한꺼번에 많이 바꾼 것으로 보인다.
서드실을 三台里, 비모골은 虎尾里, 무내미는 馬壯里, 동수는 下桐里, 새미실은 士美里로 바뀐다.
이두식 표기시 뜻을 담는 경우, 소리를 담는 경우, 소리와 섞어서 담는 경우, 전혀 새로운 말로 바뀌는 경우 등을 생각할 수 있다. 땅이름의 뒤에 붙는 실, 골(홀, 고을), 말(마을), 들(달,대)과 같은 말 들은 옛날에는 지금의 里나 洞(洞內 ⇒동네)의 개념으로 쓰던 보통명사라고 보면 된다. 이러한 전제를 염두에 두고 몇 군데만 짚어 보자.
삼태리는 본래 서드실이라 불렀다.
먼저 한자 台의 訓은 별이름(태), 지명(태), 마을(대)인데 "태"로 읽고 "대"로도 읽는다.
지명을 한자로 바꿀 때 이두식표기법의 용례는 "틀무실(틀물실)"을 機勿里라 표기하는 식이다.
機는 틀기자로 뜻을 取하고 勿은 소리 물을 취했다.
그러므로 우리 글의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울 때 한자 표기를 분석해 보면 그 어원을 찾기에 유용하고 편리 할 때가 많다. 틀어져 돌아가는 물(강이나 내)이니 다시 말해 물이 마을(앞)을 돌아서 흐르니 틀무실이 되는거다 .
지명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음이나 모음의 일부가 탈락되고 혹은 보내지면서 발음이 변화하기도 한다.
틀물실 ⇒ 틀무실 ⇒ 틀므실 ⇒ 틀미실의 변화에서 "ㄹ"의 탈락과 물이 무, 므, 미로 변해 가는걸 알 수있다.
버드실은 柳村 즉 버드나무가 있는 마을인데 원래 버들실에서 "ㄹ"이 탈락하여 버드실이 되는거다
서드실과 삼태리
1. 먼저 어원과 지세로 살펴보는 나의 견해다.
서드실의 "서" 부터 보면 서드실과 三台里의 대응관계로 보아 서가 셋(三)임을 알 수있는데 셋은 자음 "ㅅ"이 탈락해 "세"가 되고 다시 모음"ㅣ"가 탈락해서 "서"로도 쓰인다. 셋살이 세살이되고. 쌀 셋말은 쌀 세말로 다시 쌀 서말로 변화를 일으킨다.
버들에서 "ㄹ" 이 탈락해 버드나무가 되듯 서드실에서도 "서들"의 "ㄹ"이 탈락해서 서드가 됨을 알 수 있고 들이 대,태(太)와 대응되는데 대는 들, 달, 벌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거기에 마을(촌락)을 뜻하는 말인 "실"이 붙으니 서드는 곧 세들이요 서드실은 세들마을인 셈이다.
옛날 우리 논 중에 세들논이 있었는데 세들의 지역범위는 삼태미티에서 마두산까지의 논과 벌판을 지칭했다.
삼태미티는 '삼태의 끝에 있는 땅' 이라는 얘기다. 한자로 쓰면 三台尾峙가 되는데 위성사진의 3번 아래 지금은 공장이 들어선 산끝을 삼태미티라 했다. 삼태미티는 다음에 마장리의 말미티를 설명을 보면 이해하기가 쉬울것이다. 마을 지형상으로 보면 큰 골짜기를 기준으로 3개 골(들)로 구분 할 수 있는데 첫째가 위성사진의 1번 흔터골을 포함한 뒷골이고 두번째가 2번 윗말, 골말, 중말을 포함하는 들이요. 그 다음이 3번 연못 일대로 크게 세개의 골이나 들로 구분 할 수있다.
2. 처음에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세가 삼태기를 닮아 삼태리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봤는데 삼태기의 원말은 봉태기로 서드실과 전혀 연관이 않 된다.
3. 금산의 지명유래를 쓰는 과정에서 삼태리의 지역이 지금보다 훨씬 넓었던 것을 알았다. 기록으로 보면 1914년 행정개편시에 삼태리의 일부 지역이 금산읍으로 또 일부는 황풍리로 편입이 됐다. 현재 금산군지도를 보면
남일면 윗쪽의 긴 꼬리가 신대리 앞을 지나서 금산읍 앞 까지 뻗어 있는데 종전의 확실한 경계를 자세히 알 수 없어 금산군청에 확인 요청을 해 놨는데 결과가 나오면 다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래도 별다른 자료나 근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1번의 견해를 취하고자 한다.
4. 三台里라는 지명을 쓰는 곳이 전국에 5군데 있는데 셋(三)과 관련하여 우리 마을과의 유사점을 찾아보자.
慶尙南道 密陽市 武安面 三台里 / 마을 한가운데 큰 바위(지석묘)가 세 개가있어 삼태리 라하고 그 바위를 삼태바위로 부른다.
1] 당두는 삼태리의 중앙마을로 옛 지명은 당북리였다.
2] 태봉은 당두 마을 서편에 있는 마을로 조야산리였다.
3] 오숲골은 당두 마을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유사점] 윗말, 골말, 중말 등 3개의 골짜기 마을이 있는 점. 三台峰이란 말을 들어 본것 같기도
한데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어느 봉우리를 지칭해서 말했는지 자세한 기억이 없다.
全羅南道 谷城郡 竹谷面 三台里/ 평야지역으로 고장골, 화장산, 석장골의 삼장이 마을 뒤에 있고 좌우에 삼봉이 있어 마을명을 삼태라 하였다.[유사점] 3개마을이 있다는 점이 같다.
全羅南道 長城郡 南面 三台里/ 자연마을로는 동태, 서태, 잿말, 중태 등이 있다.
1] 동태는 동쪽에 있는 마을. 2] 서태는 서쪽에 위치. 3] 중태는 중앙에 위치 0] 잿말은 동남쪽 언덕에 위치
[유사점] 3태가 우리마을의 3말과 같고. 1말인 잿말이 1골인 흔터골과 비견된다.
忠淸南道 天安市 東南區 豊歲面 三台里 /고려시대 全成安, 李崇仁, 全允藏 三 재상이 태어났다 하여 삼태리라고 한다.
[유사점] 이곳은 삼재상이 이미 나왔고 우리동네는 앞으로 삼재상이 나올만한 자리라는 점이 유사하다.
충남 금산군 남일면 삼태리
후대에 바뀐 三台里라는 지명은 풍수지리상 지세가 三台六卿(즉 三公六卿 = 3정승 6판서)이 나올 만한 자리라 하여 삼태리라 하였다고 한다. 남일면 홈피에 三台六鄕이라 함은 잘못된 표기로 정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지세가 삼태기 모양으로 북쪽은 뒤에서 높은 산이 삥둘러 감싸 앉았고 좌청룡 우백호가 뚜렸하며 앞에 내가 흐르고 안산으로 진악산이 있으니 背山臨水의 명당임에는 틀림이 없다.
윗말. 골말. 중말. 흔터골
윗말: 맨 동쪽에 위치해 지세가 제일 높으니 윗 마을 ⇒ 윗말
골말: 제일 깊은 골짜기에 자리했으니 골짜기마을 ⇒ 골말
중말: 제일 가운데 있으니 가운데 마을 ⇒ 중말
흔터골: 현재 집이 제일 적은 골(골짜기)인데 남일면홈페이지에는 허물어 버린 집터가 많은 마을이라 흔터골 이라 부른다고 쓰여있다. 그럼 헌터가 본말인데 흔터골로 변했다는 건가. 도시계획으로 이주한 것도 아니고 홍수로 휩슬려갈 자리도 아닌데 왜 흔터가 되었나
그러나 옛 어른들이 흔터골을 토골이라고 불렀고 土洞 <派譜>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 흙티골 ⇒ 흙터골 ⇒ 흑터골 ⇒ 흔터골로 변했는지도 모른다. 티는 지금의 터와 같은 말(원말)이다. 소금을 다루던 터(자리) 즉 소금터가 염티(鹽峙)가 되고, 증은 ①도자기를 구울 때 도자기 굽 밑에 붙은 모래알이나 진흙이고 ②징의 옛말이라는 두가지 뜻이 있으니 그릇을 만들던 터도 증티요 징 만들던 터도 증티가 된다. 지금도 아산군 염티면은 한글로는 염티요, 티라는 한자가 없으니 한자로는 언덕峙자를 차용해서 쓴다. 峙를 한자자전에서 찾으면 "치"로만 사용하지 "티"로 발음되는 일은 전혀 없다. 혹시 對峙(대치)하다를 "대티"하다로 읽으면 않된다는 말이다. 결론은 흔터골은 흙을 파 많이 이용했던 곳, 흙티골 인지도 모른다.
군북면에 헌터골이 있는데 옛날 헌감이 살던 곳이라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 한다. 삼태리의 옛날 경계가 확인되면 실마리를 찾을수 있을지 모르겠다.
[2014.3.15일 다음과 같이 내용을 수정한다.]
‘흔터골’이라는 이름에서 옛날에 집터가 있었던 곳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흔터골’을 한자로 ‘흙터⇒土, 골⇒洞’을 차용하여 土洞(토동)이라고 적었다. 그렇다고 흙이 많은 동네라는 말이 아니고, 터(垈)는 토(土)와 서로 넘나듦을 알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옛 어른들은 이곳을 ‘흔터골’ 또는 ‘토골’ 로 불렀다. ‘토골’은 ‘ㅣ모음동화’로 ‘퇴골’이 되고, 다시 ‘사이시옷현상’을 일으켜 ‘툇골’로 되는 것이다.
질마재. 내나골. 더덕골
한자로는 鞍峴 즉 나내골로 넘어가는 고개의 형상이 질마(길마가 구개음화.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하여 소나 말 따위의 등에 얹는 안장)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실제 가보면 지형이 소가 앉아 있는 모습을 닮았고 먹을 물이 있어야 한다고 조상들이 구수(바른말 구유) 역할을 하는 못을 파 놓았다
내나골은 지도에 나내골로 기록되어 있으나 우리동네서는 발음을 편하게 내나골로 부른다. 한자로 羅川이라 쓰는데 羅는 音借표기요 川은 뜻을 취하니 '나내'가 되는데 어원에서 두 말의 선후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나, 내 모두 시내 또는 개천을 뜻하니 이리 부르나 저리 부르나 상관없다. 역전 앞 처럼 중복표기다.
더덕골은 더덕이 많이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릴 때는 더덕굴이라 해서 도둑이 숨어있는 굴이있는 줄 알았다
독다래끼. 팽낭거리
한발에 건너뛸 수있는 개울에 넓적하고 큰 돌을 걸쳐 다리를 놓았는데 아버지는 돌다리 있는 곳의 근처를 독다래끼라 하셨다.☞ 돌다리있는곳쯤 ⇒ 돌다리께 ⇒ 돌다리께 ⇒ 독다리께 ⇒ 독다래끼로 변한 것이다.한자지명으로 바꾸면 石橋洞이 되는 것이니 지명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바뀌어 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다.
팽낭거리는 팽나무 즉 측백나무가 서있는 곳이다. 거리는 소전거리처럼 소전(牛市場)이 있는 곳 근처 또는 거리를 말하는데 어디쯤. 어디께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말죽거리도 같은 말이다.
☞ 팽나무거리 ⇒ 팽낭거리로 줄여서 붙인 말이다.
고래실. 물탕골. 회총골
고래실은 바닥이 깊고 물길이 좋아 기름진 논으로 비슷한 말은 고논 ㆍ고답ㆍ고래실논ㆍ구레논ㆍ수답(水畓)이있다. 구레는 지대가 낮아서 물이 늘 괴어 있는 땅으로 웅덩이의 북한말이라고 한다. 구레 자체가 기름지고 물이 많아 수렁처럼 푹푹 빠지는 땅인데 장소를 의미하는 실을 붙여 고래실이라고 하며 동네에서 공동으로 쓰던 우물가 앞쪽의 수렁논을 고래실논이라 했다.
물탕골은 마을 앞 높은산 꼭대기에 폭포가 있고 여름이면 폭포 웅덩이에서 목욕도 하니 그산 계곡을 물탕골이라 했다. 뜨거운 물이 나오면 온천탕이다.
회총골은 어릴 적 삼태리 연못 바로 옆 산기슭에 홍수로 속살을 다 들어내고 묘실의 입구가 훤히 열린 무덤이 있었다. 묘실 안은 꽤 넓어 어린 우리들은 고려장 자리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석실은 시멘트가 아닌데도 돌처럼 단단해 옛날식 석회와 흙을 섞어 쌓았다는 것은 하얀색깔이 확연한 것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었다. 석회로 만든 무덤이 회총(灰塚)이다. 회총이 윗말 맨 꼭대기에 또 있었나 보다. 그 곳을 회총골이라 했다.
노간젱이. 老柯亭
노간주나무가 바른 말인데 노가자.노가주.노가주나무로도 불린다. 측백나뭇과의 상록 침엽 교목. 높이는 8~10미터이며, 잎은 세 개씩 돌려나고 실 모양이다. 봄에 녹색을 띤 갈색 꽃이 피고 열매는 구과(毬果)로 다음 해 10월에 검은 자주색으로 익는다. 나무는건축 재료나 기구를 만드는데 쓴다. 한국, 몽골,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비슷한 나무로 편백나무가 있는데 편백나무 숲은 환자들의 치료에 좋다하여 산림욕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 마을에 지금은 없지만 옛날에는 측백나무 울타리가 많았는데 노간주나무를 노간젱이라 불렀다. <派譜>에 老柯亭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혹시 정자가 있었고 그 곳에 노간주나무를 많이 심었는지 모른다. 보통 "정"자 뒤에 "ㅣ"를 첨가해서 발음하기 쉽도록 젱이라고 부르는 습속이 있는데 皇風亭을 황풍젱이로 부르고 배정을 배젱이라 부르던 梨亭도 마찬가지다.
무내미와 馬壯里
옛 이름은 무내미다. 물넘이→ 무너미→무내미로 변음이 되는데 장마가 지면 앞의 강물이 넘쳐 농경지를 휩쓸고 하던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서울 수유리도 옛 이름이 무내미인데 한자로 물 수자에 넘을 유자를 써서 한자이름이 된 것이다. 남일면 홈페이지에 馬壯里가 조선시대에 말을 먹이던 곳이라 마장이라 했다고 되어 있는데 말을 기르던 다른 지역의 지명은 모두 場자를 써서 馬場인데 여기는 壯또는 莊자를 사용한다. 말을 길렀다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고 옛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마장리 마을을 뒤에서 감싸고 있는 산(삼태리와 경계를 이룸)의 지세가 말을 닮았다고 했다. 머리부분이 국도를 따라서 관천리 쪽으로 가다가 오른 쪽에 있는 馬頭山(우리는 흔히 馬頭를 마디라 부름) 이고 꼬리 부분이 연수원이 자리한 말미티(馬尾)가 되는거다. 금남초등학교 교가에 "....금강의 푸른 물 말미티 흘러..."가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티는 터와 같은 말로서 염티 증티와 같이 자리, 장소, 땅,지역 등을 지칭한다. 馬壯은 마을의 지세가 "씩씩한 말의 형상"이므로 마장이라 이름했고 홈피의 내용 중 연수원도 말머리터가 아니고 말미티에 세워졌다고 고쳐야 맞다. 연수원은 유리공업이나 야금제로 쓰이는 형석(螢石)제련소 즉 형석공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섰고 선광장은 즉 螢石選鑛場이란 말이다..
비모골. 호미골.虎尾洞
雨谷(빗골)의 북한어로 비물골이 있는데 표준말은 빗물골이며 비슷한 말로 빗골짜기란 말이 있다.즉 빗골(雨谷)은 빗물에 패어 생긴 골짜기 또는 보통 때에는 물이 말라 있고, 비가 올 때에만 물이 흐르는 곳을 말하는데 비모골의 지형이 딱 빗물골이다. 마장리 3개 자연부락 중 제일 높은 산중의 협소한 골짜기에 위치하여 물이 풍족하지 않고 마을 앞에 조그마한 못(저수지)이 있어 빗물을 가두는 역할을 한다. ☞ 빗골짜기 ⇒ 빗물골 ⇒ 비물골 ⇒ 비무골 ⇒ 비모골로 된것이다. 후에 풍수지리설에 따라 雙虎揮尾의 형국이므로 호미동 이라고 이름 하였다.
桐藪(동수)
옛날에 오동나무숲이 있었다 해서 동수라 부르고 자개농을 만들며 살던 마을이었다 한다.
한자 지명 桐(오동나무동) 藪(큰 늪수)을 쓴것으로 보아 동네 이름은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다리골.
동수의 윗 동네를 윗동수라 하고 윗동수에서 봉황천을 건너 산골 궁벽진 마을을 다리골이라고 한다. 남일면의 지명유래에서 옛날에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다리골이라고 한다고 적었으나 내가 진산군의 지명유래에서 밝힌대로 돌이나 바위가 많은 산골이니 山의 원형인 ㄷ.ㄹ이 달. 다리로 변하며 다리(山.石.岩)골이 된 것이다. 원래는 산골, 돌골, 바위골을 뜻하는 말로 달골, 다리골이라 부르던 것을 후대에 잘못 알고 다리(橋)로 본 것이다.
황풍리(皇風里). 황풍젱이
고려시대 중국에서 크게 벼슬을 했던 김신 (금산김씨의 시조)이 살았으며 그를 위해 세운 萬里皇風이라고 새긴 비가 있어 황풍동 이라 부른다고 한다. 비와 함께 황풍사라는 사당도 있어 황풍정이 된것은 맞는데 김신은 옛날 부리현 관할인 안성현(지금의 무주군 안성면) 공도 출신이다. 벼슬 은퇴후 황풍리에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새미실과 사미리
士美里는 옛 이름이 새미실이다. 마을에 큰 샘이 있었던 까닭에 새미실이라 부른 것이다. ☞ 샘+실(마을을 뜻함,샘실) ⇒ 샘이실 ⇒ 새미실 ⇒ 새미실 ⇒ 사미리로 변했다는 얘기다. 새미실을 한자로 옮길 때 옛 이름의 뜻과 의미는 담아내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士美里라 했는데 선비 운운은 후세에 한자의 뜻에 부회한 美化다.
기타 지명들
-.물페기. 물패기 / 교장할머니가 물페기댁이다. 물페기 마을은 충청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물페기농요로 유명한데 금강 상류에 자리잡은 농촌으로 600~800 마지기의 논이 있고 제방을 막아 마련한 논이 200여 마지기나 된다.
비가 조금만 오면 심하게 물이 잠겨 ‘물페기’라고도 하고, 금강으로 들어가는 냇가가 겹쳐진다고 해서 물이 포개졌다는 ‘물폭’이라 했다고도 하며, 이 마을 앞쪽에 금강이 휘어져 한쪽이 패였다고 해서 ‘물패기’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물페기나 물패기란 지명은 전국에서 유일하고 페기나 패기란 순수 우리말도 사전에서 찾을 수 없으니 어원을 찾기가 어렵다
-.첼리 / 우리 당숙모가 첼리댁인데 초현리를 줄여서 발음하기 쉬운 첼리라 불렀다.
-. 더그내.德川 / 본래 큰내다. 한자로 큰德자를 써서 德川이라 개명했는데 덕내가 되고 발음이 편한 더그내로 불렀다. 산과 냇물이 조화를 이루어 덕망있는 사람이 많이 배출된다 해서 덕천리고 하는 것은 德자에 부회한 美化다.
-. 불리 /어릴 때는 불(火)과 관련있는 동네인줄 알았다. 조선시대에 고려 3은중의 하나인 야은 길재의 不事二君의 업적을 높이 사서 그가 자랐던 이 지역이 불이동(不二洞)으로 지명이 바뀌었다고 한다. 불이가 발음이 변해 불리라 부른 것이다. 富利縣이라는 지명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 시드물 / 우리 할머니 친정이 시드물이다. 마을앞에 시원한 우물이 있으므로 처음에는 시린물이라고 불러 오다가 변하여 시드물 이라고 부른다고 하나 "시드"를 "시린"으로 추정하는 것은 논거가 약하다. 서드실과 대응시켜 보면 서드실은 ⇒ 서들실 ⇒ 세들실 ⇒ 세들마을이 되니 세들(달,땅)이 합해져 마을이 되었고 시드물은 ⇒ 시들물 ⇒ 새들물 ⇒ 새들마을이 되니 새로 땅을 개척해 들어선 마을이 다. 신라의 옛 지명인 서라벌은 시라, 새라등 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면 여기서 "시, 새, 신" 은 모두 새(로운)와 같은 말이고 "드" 는 "들" 에서 "ㄹ"이 탈락했으며 마을이라는 "실"을 붙여 시드물이 되는 것이다. 가마실은 안가마실과 바깥가마실 둘로 나뉘니 한곳은 구마을이고 한곳은 새마을 즉 시드물 인 것이다.
-. 잔실 / 우리 선조들의 산소가 많은 곳이 금성면 잔실이다. 못안 동남쪽에 비암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로 차분하게 산과 들을 끼고 있다 해서 잔실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원래 잣실 즉 잣마을 다시 말하면 측백나무가 많은 마을이다.
派譜에 栢洞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잣나무가 혹은 측백나무가 많은 마을 임을 알수있다. 栢은 ㉠측백, 측백나무 ㉡측백나무의 잎 ㉢잣, 잣나무 ㉣가까워지다, 다가오다 ㉤크다 로 나온다. 잣실이 발음하기 쉬운 잔실로 된 것이다.
-. 짐성굴 / 교장아주머니가 짐성굴댁인데 어릴 때 그 동네에 짐승이 많이 사는 굴이 있다고 생각했다. 본래 김해김씨가 오래전 부터 자리잡고 살아왔기에 금성리가 되었다고 한다. 금은 김으로도 읽으니 김성이요 다시 구개음화가 되니짐성이며 한자지명으로 바꿔도 里보다는 골이나 실을 붙이는 것을 즐겨해서 짐성골로 부른 것이다.
-. 갓바래. 冠川里 / 정용이 어머니가 갓바래댁이고 우리집안 선산도 그 곳에 있다. 뒷산에 갓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며 마을 중앙으로 작은 냇물이 흐르므로 갓끈의 역활을 하므로 두 말이 결합해서 갓바위내 ⇒ 갓바내 ⇒ 갓바래로 된다.
-.가매실. 가마골 / 우리 고모는 가매실로 이모는 가마골로 시집을 갔다. 가마실은 지형이 가마의 형국이라 가매실이란다. 전국에 가마라는 지명이 많은데 가마(釜)의 뜻으로 옛날에 가마솥에 펄펄 끓는 물처럼 온천이 나오는 곳이 많다.釜山과 釜谷도 가마釜자를 쓰는데 가마라는 지명이 있는 곳을 파면 온천물이 펑펑 솟아 오르는 곳이 있을 수 있다.
-. 고로티, 고리티/ 옛날엔 산이 헐벗어 마을 가까운 곳엔 땔나무가 없었다. 아침 일찍 동네사람들이 도시락을 지게에 도시락을 매달고 큰산으로 행렬을 이루어 떠났다. 몇십리 떨어진 곳이라 저녁 해질무렵에나 돌아 오는데 큰산이 바로 평댕이요 고리티다. 고로티는 높이 469 m. 조금치(造金峙) ·율현(栗峴) 등과 함께 소백산맥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호남지방과 영남지방 간의 지형적 장벽을 이루는 교통의 불편을 완화시키는 주요 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최근에는 진안~무주 간 국도가 통하고 있다. 여기서 티는 터보다는 고개를 나타낸다.
-. 평댕이/평당리를 발음하기 편하게 평댕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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