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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독립운동가 조소앙.

백수.白水 2011. 5. 2. 17:13

 

인물사진

먼저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에서 조소앙(趙素昻)에 대한 인물정보를 올린다. 

1887년(고종 24)∼1958년. 독립운동가·정치사상가. 본관은 함안(咸安).

본명은 용은(鏞殷), 자는 경중(敬仲), 소앙(素昻)은 호이다. 경기도 파주 출신이다.

 

   1. 유년기의 활동

 

아버지는 정규(禎奎)이며, 어머니는 박필양(朴必陽)이다.
6세부터
통정대부인 할아버지 성룡(成龍)으로부터 한문을 수학, 1902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같은해 이하영(李夏榮) 등의 매국음모를 막기 위하여 신채호(申采浩) 등과 성토문을 만들어 항의하였다.
1904년
성균관을 수료하고,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동경부립제1중학에 들어갔다.

 

2. 일본에서의 활동

 

1906년 동경유학생 친목단체인 공수학회(共修學會)를 조직, 회보를 발간하면서 주필로 활동하였다.
같은해 메이지대학(明治大學)법학부에 입학하였으며, 1909년 동경에 있는 조선인의 각 단체를 통합한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창립하여 회지 《대한흥학회보》의 주필이 되었다.
경술국치 때는 ‘한일합방 성토문’을 작성하고 비상대회 소집을 꾀하려다 발각되어 고초를 겪었다.
1911년 조선유학생친목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경술국치 때는 ‘한일합방 성토문’을 작성하고 비상대회 소집을 꾀하려다 발각되어 고초를 겪었다.
1911년 조선유학생친목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3. 귀국 후의 활동
1912년 대학을 졸업, 귀국하여 경신학교·양정의숙·대동법률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년 중국에 망명하여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신채호·정인보(鄭寅普)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박달학원(博達學院)으로 개편한 뒤

중국혁명가 천궈푸(陳果夫)·황줴(黃覺)와 함께 항일단체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였다.
30세 전후에는 민족대동단결의 정신적·종교적 통일을 위하여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하고,

‘주권불멸론(主權不滅論)’·‘민권민유론(民權民有論)’의 취지를

1917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문제의 의제로 제출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4.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1918년 만주 길림(吉林)에서 무장항쟁노선이 집약된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독립운동 지도급인사 39인의 공동서명으로 발표하여 내외에 그 영향력을 크게 떨쳤다.
1919년 3·1민족항쟁에 즈음하여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 부주석으로 선출되고,

한성정부(漢城政府)교통부장에 추대되었다.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민주공화제헌법의 기초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국체와 정체의 이론정립 및 임시정부의 대외홍보 전반에 걸쳐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즉, 임시정부헌법·의정원법(議政院法)의 기초위원과 심사위원을 거쳐

초대국무원 비서장을 역임한 뒤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6월에는 파리에 도착하여
김규식(金奎植)과 외교면에서 괄목할 성과를 올렸다.

만국평화회의 대표단 지원을 비롯하여 만국사회당대회와 국제사회당집행위원회의 활동을 위하여

프랑스에서 스위스로, 또 네덜란드로 다니면서 한국의 자주독립과 그 당위성을 역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동당 지도층 인사들과의 폭넓은 교유로 영국 하원에도 한국문제를 정식 제기하도록 활약하였다.
또, 파리에서 철학자 베르그송(Bergson, H.)과 만나고, 런던에서 인도타고르(Tagore, R.)와도 만났다.

유럽 순방에 이어 1921년 국제사회당대표단으로 러시아 각지를 시찰한 뒤 모스크바를 경유,

5월 북경(北京)에 와서 공산주의 비판인 ‘만주리선언(滿洲里宣言)’을 발표하고 상해로 돌아와

이듬해 임시정부 외무총장·의정원의장이 되고, 세계한인동맹회장에 취임하는 한편,

김상옥(金相玉)을 국내에 밀파하여 의거하도록 하였다.

  5. 한국 독립당 창당
1929년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김구(金九)·안창호(安昌浩)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

독자적 이념체계인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입각한 정강·정책의 ‘태극기 민족혁명론’을 제창하였는데,

삼균주의는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다.

한국독립당의 대외선전 및 임시정부의 이론전개와 외교문제를 거의 전담하였다.
1934년 삼균주의를 국시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건국강령’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채택하게 하였다.
1937년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 1940년 한국독립당 부위원장으로서 창당선언에서 삼균주의를 다시 확립하고,

1942년 한중문화협회를 창설하여 중국 외교부장 쑨코(孫科)와 손잡고 김규식과 공동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43년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장, 1945년에는 충칭(重慶)임시정부 외무부장이 되었다.

  6. 해방 후의 활동과 저서

광복을 맞아 12월 1일 임시정부 요인 2진으로 환국, 1946년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여 그 의장이 되어

김구주석과 함께 임시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다.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고 한국민족대표자대회와 통합을 이룰 때 다시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또한 반탁투쟁위원회 부위원장과 삼균주의청년동맹위원장에도 추대되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왔고,

12월 방응모(方應謨)·백홍균(白泓均)·조시원(趙時元) 등과 사회당을 결성하고 당수가 되었다.
1950년 5·30총선에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3만4천여표로 전국최고득표자가 되어 제2대국회에 진출하였으나,

6·25동란으로 서울에서 강제 납북되었다.
1958년 9월 10일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한국문원 韓國文苑》(1932), 《소앙집 素昻集》·《유방집 遺芳集》(1983)이 있으며,

1970년 삼균학회에서 《소앙문집》 상·하권을 간행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趙素昻硏究(洪善熹, 太極文化社, 1975)
素昻先生文集(三均學會, 횃불사, 1979)
趙素昻(한길사, 1983)
三均主義硏究論集 Ⅰ∼Ⅵ(三均學會, 1983∼1985

 

삼균주의(三均主義)란?

상하이임시정부의 국무위원·외무부장 등을 역임했던 소앙 조용은(素昻 趙鏞殷;납북)이 일제하 민족운동과정에서

나타난 좌우의 대립을 해소하고 해방 후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기본정책으로 주장한 정책 내지 사상.

그 내용은 정치적 균권(均權;보통선거 실시), 경제적 균부(均富;국유제), 교육적 균지(均智;국비 의무제)가

실현됨으로써 개인과 개인 사이의 균등이 이뤄지며 이를 토대로

민족과 민족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의 균등이 이룩돼 궁극적으로 세계가 한 가족이 되는 이상사회가 실현된다는 것

 

경기도 파주 출생인 조소앙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신 독립운동가 이시다.

집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전곡 쪽으로 가다가 적암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동두천방향 368국도를 한참 달리다 보면

전곡읍과 양주군 남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가 나오고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도로에 안내 표지판이 나온다.

 

 

 본래 아랫쪽 길이 도로인데 왼쪽에 새로 길을 만들었다.

 

 

도로 옆에선  간판을 보고 작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일반 민가의 대문이 막아섰다.

 

마당에 풀어놓은 진돗개들이 요란스레 짖어대며 달라드니 주인 남자가 나왔다.  묘역을 보고 싶다고 하니 안내를 해 주었다.

그의 집 마당을 통과해야 갈 수 있는데, 그 집을 지나 옆으로 심하게 S자로 구부러진 길이 나 있었다.

 

조소앙 선생 묘소는 오른 쪽으로 보이는 묘역을 조금 더 지나야 나온다.

 

조금 멀리서 바라 본 조소앙선생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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