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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알려진 창옥병의 위치

백수.白水 2014. 1. 7. 21:22

 

잘못 알려진 창옥병의 위치

 

 

 

영평팔경의 한 곳인 창옥병(蒼玉屛)에 대한 포천시 문화관광 홈페이지의 유적설명이 잘못되어 있다.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영평천변에 있는 벼랑이다. 영평8경 중 3경이다. 창옥병이란 이름이 말하듯이 기암괴석으로 된 병풍이다. 해동지도"창옥병(蒼玉屛)은 영평천(永平川)가의 벼랑으로 푸른 바위가 옥병풍처럼 벌여 있어 생긴 이름이며 영평팔경의 하나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창옥병은 영평현 서쪽 1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창옥병의 폭이 수마정이요 높이가 40~50자에서 백수십자로 깎은 듯한 절벽으로 절벽에는 굴곡이 있고 고저가 있고 암혈이 있는가 하면 갖가지 형태의 동물 모양이 되어 돌출한 바위도 있다.

1931년에 이 암벽을 깎아서 터널을 뚫어 도로를 만들어 통행하였으나 최근에 우회도로가 생겨 현재는 일부 차량만 통행하고 있다. 맞은 편에

옥병서원(창수면 주원리)이 있었는데 1658(효종 9)에 창건하였다. 여지도에는 "창옥병에 박사암서원(朴思菴書院)이 있다."고 표기되어 있다. 팔도군현지도에는 옥병(玉屛)으로 표시되어 있다. [참고자료]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일러두기 및 '우리나라의 지명' 총론 목차  ---------------------------------------------------------------------------------------------------- 포천시의 유적설명은 국토교통부산하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명유래집 중부편 p431에 실린 '창옥병(蒼玉屛)'에 관한 내용을 100%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

그런데 위의 유적설명에서 청색글씨로 된 부문은 맞고,

내가

붉은 글씨로 구별해놓은 부분은 틀린 내용이다(이하 같음).

 

유적설명에 인용된 사서나 고지도에는 옥병서원 앞의 석벽을 창옥병이라고 하였지만, 누군가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엉뚱한 주해(註解)를 해 놓았고, 잘못된 내용이 진실인양 지금껏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토지리정보원의 같은 책 p424의 보장산(寶藏山)

지명유래에도 완전히 잘못된 내용이 올라 있다.

...옛 영평군 당시 읍 뒤 주산 불곡산(현 불무산을 말하는 듯)의 내맥으로 많은 전설과 영평팔경의 하나인 기승 창옥병을 지니고 있는 명산이다. 백운산으로부터 서류하는 영평천이 보장산 남쪽 기슭을 흐르고 있으며 그 언덕에 창옥병이 자리 잡고 있어 산자수명한 승경 찾아 옛 문인과 묵객들의 내왕이 잦았다는 흔적 또한 남아있다. 이 산이 위치한 지역을 오가리(伍佳里)라 하는데 다섯가지 가경이 있다하여 이름 지었다 할 만큼 아름다운 산이다.

창수면 오가리의 큰 절벽이 창옥병(蒼玉屛)이라고 잘못 단정지은 것이다. 

 

유적의 핵심은 역사성이다. 국토지리정보원과 포천시에 민원형태로 바로 잡아 줄것을 요청했는데, 고치려면 지방지명위원회와 전국지명위원회를 여는 등의 절차가 필요하므로  오랜 시일이 걸릴것 같다는 답변이 왔다.

 

이양정기(二養亭記)

 

창옥병(蒼玉屛)이라는 地名은 사암(思菴) 박순(朴淳,1523~1589) 선생이 1586년 가을에 永平으로 내려와 영평천 언덕위에 배견와(拜鵑窩)이양정(二養亭) 짓고 은거하면서 집 앞 강가의 벼랑과 그 아래 물가에 드러난 아름다운 바위와 못을 찬탄하면서 淸泠潭(청령담) 白鶴臺(백학대) 靑鶴臺(청학대) 散襟臺(산금대) 水鏡臺(수경대) 吐雲床(토운상) 窪尊(와준) 鳴玉淵(명옥연) 등 의 이름을 지어 이를 바위에 새기고, 이곳을 창옥병(蒼玉屛)이라 이름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1588)에 쓰신 이양정기(二養亭記)

라는 글에 자세하게 나온다.

 

[思菴先生文集卷之四] <二養亭記  余於丙戌仲秋承恩浴椒井于永平地覽其溪山而心悅之遂稅駕而居焉吾東山水此縣最名由縣而言淸泠潭其尤也卽白雲溪之所瀦而源發白雲山也鍾賢東支至潭作崖故水底皆布全石高者露出詭怪錯陳有若龜龍曝日島嶼浮溟崖之嵁巖俯潭爲臺者四曰白鶴曰靑鶴白者或乘靑者一隻時往來洲渚皆記實也餘曰散襟曰水鏡中介石床曰吐雲巖足陂陀於水心有窪容斗曰窪尊潭瀉長灘西折而淵曰鳴玉大壁倚天根浸灘淵極造化之剞劂曰蒼玉屛葺茅潭西曰拜鵑窩每於玉屛春夏望帝來呌山空響徹聽者自感也又就潭崿最峻處規爲草亭曰二養取伊川養德養體之義也觀其左當大壁右聯四臺皆負崇山面勢澄泓攢巒叢峭拱揖內嚮石骨瓊田倒燭縈廻呑吐乎煙嵐晻靄乎林坰舒慘異侯萬變迭形鬪奇矜秀各不相讓咸與收精會神俎豆於枕席之間爲吾所蓄而日與之娛棲遲嘯詠境淨意適不知山之阻身之遠鳥獸之可猜其孰使然非玆潭之有遭歟略敍其槪難窮厥狀名而志之者二養主人筆其大字與小字者韓主簿濩鏤諸十有一石者 辛秀才夷 是歲萬曆十六年也

 

나는 병술년 8(1586) 성은을 입어 영평땅 초정에 목욕하러 왔다가 그 산과 물을 보고 마음으로 기뻐하여 마침내 벼슬에서 물러나 살게 되었다. 우리 동방의 산수 중에 이 영평현이 가장 이름이 높고, 영평현에서는 청령담(淸泠潭)이 가장 뛰어난데, 白雲溪의 물이 고인 곳으로 백운산에서 발원한다. 종현산(鍾賢山) 동쪽지맥이 청령담에 이르러 벼랑이 된다. 물 밑에 큰 바위하나가 펼쳐져 있어, 높은 것은 물위에 드러났다. 괴이하게 섞여 늘어서 있는데 거북이나 용이 햇볕을 쬐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섬이 바다에 떠있는 것 같기도 하다. 벼랑의 험준한 바위 넷이 청령담을 내려다보는데 그중 백학대와 청학대가 있다. 흰 학 네 마리, 푸른 학 한 마리가 와서 때때로 물가에 왕래하니, 모두 사실을 적은 것이라 하겠다. 나머지 둘은 산금대와 수경대다. 그 가운데 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토운상이라 한다. 바위 아래가 물 가운데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고 우묵한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한말의 술을 담을만해서 와준이라 한다. 청령담에서 장탄으로 물을 토하여 서쪽으로 꺽인 못이 명옥연이다. 큰벼랑이 하늘에 기대있고 그 뿌리가 장탄과 청영담으로 파고들어 조물주가 깎고 다듬은 솜씨가 지극한 것이 창옥병이다. 청령담 서쪽에 지은 초가가 배견와다. 매번 창옥병에 봄여름 두견와가 와서 울면 산이 텅 비어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듣는 사람들이 감개하게 된다. 또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초가정자를 짓고 이양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과 몸 두 가지를 기른다는 이천(伊川)선생의 뜻을 취한 것이다. 그 왼쪽을 보면 큰 벽이 서있고 오른쪽에는 네 개의 둔대가 이어져있는데 모두 높은 산을 등지고 맑은 물을 바라보고 있다. 깎아지른 멧부리와 무더기로 된 뾰족한 바위들이 읍을 하며 안으로 향해 있는데 석골(石骨)의 산과 옥같은 들판이 마치 넘어진 촛불이 얽혀있는 듯하다. 안개가 이내를 토하고 숲을 어둡게 가리니 어두워졌다 밝아지며 신이한 기후가 천변만화하며 모습을 바꾼다. 기이함과 빼어남을 다투고 뻐기어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 정령과 신령을 거두고 모아서 이부자리 아래 모두 진설해 놓았으니, 나를 위해 간직해둔 것이라 매일 즐기고 노닐며 시를 읊조린다.경치가 맑고 뜻이 맞아 산으로 막혀 있다는 것도, 이 몸이 멀리 와있다는 것도, 또 날짐승 길짐승이 나를 시기한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무엇이 이렇게 만든 것인가? 이 청령담이 나를 만나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대략 그 경관을 적기만 하고 그 모습을 극진하게 그려내지는 못한다. 이름을 지어 붙인 사람은 이양정의 주인이요, 큰 글자와 작은 글자를 글로 쓴 이는 주부 한호이며, 십여 곳 바위에다 새긴 사람은 秀才 辛夷. 때는 萬曆16(1588)이다.

 

위치비정에 대한 시시비비(分別)

 

※ 창옥병의 위치에 대하여

이양정기큰벼랑이 하늘에 기대있고 그 뿌리가 장탄과 청영담으로 파고들어 조물주가 깎고 다듬은 솜씨가 지극한 것이 창옥병이다.’라고 명확히 하였다. 지금은 배견와 옛터에 옥병서원이 들어서 있다. 옥병서원에서 앞(동쪽)으로 나가면 영평천인데 직각에 가까운 긴 바위 절벽이 있다. 사암선생이 명명한 , 등이 모두 그 절벽과 그 앞의 물가에 있으니, 서원 앞의 강벽(江壁)이 창옥병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양정기에 종현산(鍾賢山) 동쪽지맥이 청령담에 이르러 벼랑이 된다.’고 하였다. 사암 선생은 종현산 지맥이 영평천을 만나 멈춰서며 벼랑이 된 곳, 그 벼랑 앞이 청령담이고, 그 벼랑에 암각문을 새겼는데, 암각문을 새긴 그 벼랑이 창옥병이라 하였다. 오가리절벽은 '보장산 남쪽지맥이 강에 이르러 벼랑이 된 곳이지, 종현산(鍾賢山) 동쪽지맥이 강에 이른 곳이 아니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이 쓴 白雲溪記(백운계기)를 보자.  백로주를 보고 저녁에 백운계에 이르렀다....못가에 옛날 金氏(김확복, ?)가 지은 金水亭이 있다. 아래로 몇 리를 내려가면 창옥병(蒼玉屛)이 있는데, 계곡을 따라 이어진 산면(山面)이 모두 바위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박승상(朴丞相, 朴淳)의 별업(別業)이 있으며 시냇가에 승상의 사당이 있다.고 하였다. 별업(別業) 곧 별장인 배견와(拜鵑窩)가 있었고, 옥병서원(玉屛書院) 있는 곳은 '오가리절벽'이 아니라 창옥병이다.

 

해동지도 [海東地圖]

채색필사본으로1750년대 초반에 제작된 관찬(官撰) 지도집.

 

<지도: 奎章閣>

 

 

[규장각 注記’의 창옥병 관련내용] 읍치의 서쪽에는 金水亭(창수면 오가리)이 표시되어 있다. 金水亭永平八景의 하나이다. 蒼玉屛(창수면 오가리)永平川가의 벼랑으로 푸른 바위가 옥병풍처럼 벌여있어 생긴 이름이며 永平八景의 하나이다. 맞은편에 玉屛書院(창수면 주원리)이 있었는데 1658(효종 9)에 창건하였다. 朴思庵思庵 朴淳을 지칭하는 것이다.(이현군)

 

[검토] 지도에서 창옥병과 박사암 서원이 종현산의 동쪽지맥이 영평천을 만나 멈춰선 벼랑위에 정확히 그려져 있다. 그리고 오가리절벽은 종현산의 동쪽지맥이 아니라 보장산의 남쪽지맥임이 뚜렷하다.  그런데 규장각은 주기에서 엉뚱한 주해를 달고 말았다.

 

여지도 [輿地圖

]

 채색 필사본으로 1789년에서 179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지도: 奎章閣>

 

[규장각 注記’의 창옥병 관련내용] 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고 있는 광여도의 영평현 지도와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이기봉)

 

[검토]  지도에서도 창옥병과 박사암 서원이 종현산의 동쪽지맥이 영평천을 만나 멈춰선 벼랑위에 정확히 그려져 있다.

 

광여도 [廣輿圖]

전국 군현 지도집으로 해동 지도와 구성이 유사하며 1 ,800년대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됨.

<지도: 奎章閣>

 

[규장각 注記’의 창옥병 관련내용]읍치 아래쪽에 있는 金水亭楊士彦(1517-1584)이 이름을 지어 현판을 달고, 李德馨(1561-1613)이 시를 지어 찬양한 곳이다. 그 아래쪽의 蒼玉屛은 푸른 바위가 옥병풍처럼 벌여 있는 곳이다. 두 곳 모두 당시에 아주 유명했던 영평 8경으로서 지금은 창수면 오가리에 있다. 창옥병 옆에 있는 서원은 玉屛書院으로서 政爭을 피해 이 고을 백운산에 숨어살았던 朴淳(1523-1589) 등을 배향하여 1713(숙종 39)賜額받았다. (이기봉)

 

[검토] 이 지도에서도 위치가 제대로 그려져 있고, 금수정도 영평천의 북쪽에 위치하지만,  규장각은 엉뚱한 주해를 하고 말았다.

 

 

1,872년 지방지도[1,872年 地方地圖

]

개항기에 제작된 필사본 회화식 지도책으로 국가의 주도로 제작된 전국 단위의 군현 지도다.

<지도: 奎章閣>

 

[규장각 注記’의 창옥병 관련내용] 永平郡地圖,영평은 포천군 영중면 영북면, 이동면, 일동면 창수면에 해당한다. 본디 永興縣이라 하였으나 1394(태조3) 영평군으로 개칭되었다

 

[검토] 이 지도에서 창옥병을 영평천의 북쪽에 그려넣은 것은 잘못이다.

 

 금수정 정자아래에는 맑은 牛頭川이 흐르고, 정자를 심을 때 심었다는 수령 400년의 소나무가 있어 늠름한 자태를 과시하였다. 100년전 까지만 해도 은행나무로 새로 2평 남짓한 규모의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주춧돌 여덟 개만 남았다. 다행히 콘크리트 건물을 세우지 않아 상상으로나마 옛 모습을 만나게 한다. 그 건너편에 창옥병이 있다. 이름이 말해주듯 푸른빛의 구슬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다. 암반이 강 가운데까지 뻗어 있으며 암벽 도처에 시인의 제영이 새겨져 있어, 바위 자체가 하나의 필첩(筆帖)이라 할만하다. <이종묵,2006년, 조선의 문화공간 2. p109 - 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