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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積城)의 유래와 역사

백수.白水 2014. 1. 10. 07:08

 

적성(積城)의 유래와 역사

 

1. 지명의 변천

 

  ○ 삼국시대: 칠중현(七重縣) 난은별(難隱別) 또는 낭비성(??? 娘臂城)

  ○ 통일신라: 중성현(重城縣)

  ○ 고려시대: 적성현(積城縣)

  ○ 조선시대(1895): 積城郡으로 개칭

  ○ 일제강점기(1914): 積城面으로 개칭

 

2. 연혁

 

  1) 원래 백제 땅 이었다 (백제 온조왕 18<BC 1> 이전)

  2) 광개토왕 ∼ 장수왕 때에 고구려 땅이 되므로 칠중현(七重縣)이 되었다.(AD 391- AD 396)

      

*광개토대왕은 386(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91년 고국양왕 사후에 즉위하였다. 즉위 초부터 대방(帶方)을 탈환하고자 백제의 북쪽을 공격하여 석현(石峴) 10성을 함락하였고, 396(광개토왕 6)에는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3) 진평왕 51(629) 신라의 정벌(김서현외 2)로 신라로 편입되고,

          선덕여왕 때 이곳에 칠중성을 축조하였고, 삼국통일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다.

  4) 통일신라시대인 757(경덕왕 16)에 중성현(重城縣)으로 개칭하다.

  5) 고려시대에 지금의 이름인 적성(積城)으로 고쳐 1018(현종 9)에 장단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후에 내소군(來蘇郡)(지금의 양주시내)의 영현으로 삼았다.

  6) 1106(예종 원년)에는 감무가 중앙정부에서 파견되었다.

  7)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13(1413)에는 현감을 두었다.

  8) 189523부제의 실시와 더불어 현()이 폐지됨에 따라 한성부 관할 적성군이 되었다가

         13도제 실시로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9) 1895년 북면(지금의 연천군 백학면)이 마전군에 편입되다.

  10)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으로 연천군에 속하면서 적성군의 중심지역이 적성면이 되었다.

  11) 1945년에 38선이 그어지면서 연천군 대부분이 38선 이북에 속하게 되자,

       38선 이남의 적성면 등이 파주군으로 편입되었다.

  12) 1946년 남면(지금의 양주시 남면)이 양주군에 편입되다.

  13) 1996년에 파주군이 시로 승격되어 지금의 파주시 적성면이 되었다.

 

3. 지명 유래

 

  삼국시대에는 칠중현(七重縣)이라고 불렸다. 고구려어로 난은별(難隱別), 또는 낭비성(娘臂城)이라고도 했는데, 난은(難隱)이 일본어의 나나츠()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현대 한국어로는 "일곱겹"으로 읽을 수 있는데 일설에는 근방을 흐르는 임진강의 흐름이 그만큼 굴곡이 심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도 하며 그래서 고대에는임진강을 "칠중하(七重河)라고 불렀다. 실제로 지도를 보면 적성면 주변으로 임진강의 굴곡이 일곱 개 안팎임을 볼 수 있는데 여담으로 나당 연합군에 소속된 당나라 군인들이 칠중하의 굴곡진 흐름을 보고 마치 표주박이 굴러다니는 것 같다며 '호로하(瓠蘆河)' '표하(瓢河)'라고 불렀다고 한다.

 

  낭비성(娘臂城)629년 신라 진평왕 51, 고구려 영류왕 12년 가을 8월에 신라 대장군 김용춘(金龍春)과 김서현(金舒玄), 부장군 김유신(金庾信)이 점령한 고구려의 성이다. 낭비성의 위치는 7세기 전반의 고구려와 신라의 영역과 경계를 반영하는 점에서 주목을 받아왔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해 일반적으로 지금의 청주시인 낭자곡성으로 비정되었지만

 

문제는 그 당시에 그 이북인 한강 유역이 신라의 영역이어서 청주가 고구려 땅이었다면 본국과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문제이다. 629년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정에서 이미 150년이 경과한 시점이고 그 이후로 100년 넘게 고구려군이 본국과 고립된 상태로 버티었다거나 신라나 백제가 그 기간동안 청주를 그냥 두었다는 게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다. 그런 이유로 낭비성은 청주에서보다 훨씬 북쪽으로 비정되는 견해가 있다. 가령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낭비성을 칠중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실제로 낭비(娘臂)라는 이름은 낭자곡(娘子谷)보다 칠중의 고구려어 이름인 난은별(難隱別)에 더 가깝다 <위키백과>

 

4. 관할영역

 

  ○ 조선 고종32(1895) 23부제의 실시로 전국의 현()이 폐지됨에 따라 한성부 관할의 적성군이 된다. 이때 편제를 하게 되는바 동, , , 북의 方位面으로 縣內와 동면, 서면, 남면, 북면으로 나누며 면별 管轄里는 다음과 같다.

 

<적성군 시절, 都合 5面 坊里39>

 

⊙ 縣內 8 館洞 北2葛兀 北3檢詳洞 西4鼎後 西5樹谷 西6六溪 西7

                   漢夜 西10雪馬洞 南10

東面 9 客峴 東4白雲 東8場坪 東9栗浦 東9魚餘地 東20松峴 東10

                   山德 東12赤巖 東20訥木 東25

南面 8 神巖 南25神山 南25沙村 南27閑山 南27笠巖 南28北谷 南30

                  湘水 南30隍防 南30

西面 6 馬智 西5食峴 西10武建 西20群芳 南20畓谷 西20紫芝浦 西23

北面 6 鶴谷 北10蘆谷 北13龜尾淵 北15通口 北20箭洞 北20獐谷 北20 

                  ⑦孟洞 北20高村 北20里                      

 

※[현내] 검상(금성골로 추정) [북면] 통구리(통구+맹동) 두일리(장곡+고촌) [동면] 객현리(객현+백운) 장현리(장평+송현+산덕) [서면] 도장(현재 파평면 덕천리) 현석(자하리-검은돌) 장파리(현재는 파평면)

 

  ○ 적성은 고대에 칠중성이 있는 중성산 중심으로 구읍리가 들어서고 점차 산 아래 둘레에 동서남북으로 관골, 금성골, 가월리, 주월리, 설마리 까지 취락이 생기며 칠중현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생각 된다. 그 후 칠중현은 동서남북으로 영역이 점차 확대되면서 큰 고을()을 이루니 그 경계는

 

    -.북은 장남면을 경계를 이루며, 지금의 연천군 백학면(위의 북면지역)까지.

   -.동은 간파천 서쪽에 위치한 늘목리까지.

   -.남은 양주군 남면을 포함하고, 지금의 법원읍 경계까지

   -. 서는 현재의 파평면 경계까지에 이른다.

 

5. 관할구역의 변천

 

   ○ 본래 적성현 지역으로 적성읍내였으므로 현내면이라 하여 읍내·관동·가월·검상·주월·설마 등 6개리를 관할하였는데

 

   ○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동면의 객현·백운·장평·송현·산덕·율포·어유지·적암·늘목의 9개리와 서면의 두지·마지·식현·도장·무건·답곡·자장·현석·장파의 9개리, 마전군 군내면의 삼화리, 장단군 고남면의 장좌리, 양주군 영근면의 하원리 일부, 파주군 파평면의 천천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적성면이라 하여 연천군에 설치하였다.

 

   ○ 191441일 적성군(積城郡)을 연천군에 편입하였다. 적성군 동면(東面) 서면(西面)을 적성면으로 합면하였다. <19/ 구읍리, 가월리, 주월리, 설마리, 객현리, 율포리, 늘목리, 장현리, 어유지리, 적암리, 두지리, 마지리, 무건리, 식현리, 장파리, 답곡리, 자장리, 삼화리, 장좌리>

 

   ○ 1945815일 연천군 대부분은 소군정의 관할에 두었다. 단 백학면 일부, 전곡면 일부, 적성면, 남면은 미군정의 관할에 두었다.

 

   ○ 1945114일 미군정 관할의 연천군을 파주군에 편입하였고, 백학면 일부, 전곡면 일부를 적성면에 편입하였다.

 

   ○ 19541117일 연천군 전역을 수복하여 구 백학면, 구 전곡면을 연천군 각 면에 환원하고, 삼화리를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하였다(18법정리)

 

   ○ 196311일 늘목리를 연천군 전곡면에 편입하였다. (17법정리)

 

   ○ 197371일 장파리를 파평면에 편입하였다(16법정리)

 

   ○ 법정리/ 어유지리, 장좌리, 장현리, 구읍리, 객현리, 가월리, 무건리, 율포리, 답곡리, 식현리, 주월리, 설마리, 적암리, 두지리, 마지리, 자장리

 

6. 적성면 마을의 지명유래

 

현재의 한자지명에 견강부회한 설명이 많이 있으므로 확인되는 대로 나의 의견을 추기하도록 하겠다.

 

馬智里/ 지형이 마디처럼 생겼으므로 마디라 하였는데 발음이 변하여 마지로 되어T. 당의 장수 설인귀가 주월리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용마와 갑옷,투구,칼을 얻은 뒤 적성일대에서 훈련하였다고 한다. 그의 말발굽이 이곳 마지리를 제일 많이 지나갔다고 하여 馬帝里라 하였다가 발음이 변하여 마지리가 되었다고한다. 마디, 마제, 마지라고도 한다.

 

食峴里/ 밥재고개 밑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식현리 또는 食峴洞이라고 한다.

 

武建里/ 옛날 설인귀가 이곳 살골짜기에서 무술을 연마한 곳 이라한다. 무건이 무건동이라고 한다.

 

雪馬里/ 당나라 장수 인귀가 칠중성에서 태어나 이 곳에서 말을 달려 훈련했으므로 薛馬馬也 또는 설인귀가 추운 겨울에 눈에 쌓인 상봉을 거쳐 감악산 봉으로 말을 달려 무예를 쌓았다하여 설마리라고도 한다. 설마동 설마치라고도 한다.

 

적암리/ 마을 뒷산에 붉은바위(赤岩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고려때 적암향이 있었기에 적암향이라고도 한다.붉바위 적암향이라고도 한다

 

魚遊池里/ 임진강가 용못에 살았던 이무기를 고기에 비유하여 어유지리라하였다. 옛기록에는 魚餘地라 표기되어있다

 

墻峴里/ 1914년 행정구역폐합때 墻坪松峴里 산덕리를 통합하여 두 마을의 앞자를 따서 장현리라 함

 

율포리/ 밤나무가 많은 포구이므로 밤개라하고 한자말로 栗浦라 하였다. 밤개, 율포동 ,율포

 

客峴里/ ()고개 밑이되므로 손고개 선고개 객현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자연마을인 객현리와 백운리를 합쳐서 객현리라 하였다. 옛 객현리는 지금의 객현2리로, 그 보다 규모가 큰 백운리는 객현1리로 칭한다.

 

객현(2)리에서 골짜기를 따라서 감악산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적성소재지로 가는 고개가 있는데, 그 고개이름이 선고개, 신선고개, 손고개 등으로 불렸다하는데 손()고개를 한자로 客峴리라 한것이다.

 

백운리는 현재 객현1리의 우리말 지명이 배우니인바, 배우니는 백운가 백운이 - 배운이 - 배우니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백운와 배우니 중 어느 지명이 선행인지 상고 할 수없으나, 옛날에는 이 마을 앞 까지 배가 드나들었다는 말이 있다. 지금도 윗배우니 아랫배우니라 부르는데, 생각컨대 배가 들어오는 곳의 위에 동네가 있으니 배 위에 마을이란 의미로 배윗마을 - 배윗리 - 배웃리 - 배운리 - 배운이 - 배우니로 변음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우리 말 지명인 배우니를 선행지명으로 보고 白雲里는 후대에 한자화한 이름으로 본다.

 

舊邑里/ 옛 적성현 읍내가 되므로 붙은 이름이다 읍내라고도 한다.

 

佳月里/ 감악산자락 북쪽자락이 임진강가 칠중성에 이르러 반달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곳에 있는 돈대에서 옛 군대들이 파수를 볼 때 강물에 비친 달이 너무 아름답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가룰 가루리 갈을 갈월 가월동이라고도 한다

 

舟月里/ 원래 한야리라고 하였는데 고려때 우왕과 공민왕이 궁여들을 거느리고 뱃놀이 하였다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한배미 한야미 한야리라고도 한다

 

斗只理/ 지형이 두지(뒤주의 사투리)처럼 생겨 붙은 이름이다. 두지리는 원래 斗只가 아니고 頭耆라고 한다

 

紫長里/ 국사봉 밑이 되므로 자핫골이라 불렀다 입진강변에 붉은 찰흙이 분포되어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자핫골 자자기 자장이 재재이 자장리라고 한다

 

沓谷里/ 논이 많은 골짜기라서 붙은 이름이다 논골이라고도 한다.

 

長佐/ 장자못이 있어 붙은 이름이며 장자울 장좌울 장좌동이라고 한다. 1973년 장파리가 파평면으러 편입. 긴등마루에 마을이 있어 붙은이름이다 이 긴능선은 금파리에서 고랑포쪽으로 약 2kmjd도를 말한다 긴등마루 장마루 장파라고도 한다.

 

늘목리/ 본래 적성군 동면 지역으로, 고려 말에 눌처사가 살았다 하여 늘목, 늘무기, 늘메기, 눌목동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늘목리'라 하여 연천군 적성면에 편입되었다. 194513일 파주군 적성면으로 편입되었다가, 1963년 월 일 수복지구와 동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하여 전곡읍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2개의 행정리, 4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7. 史記의 기록

 

三國史記 권 제37(잡지 제6 지리 )에 고구려의 郡縣名 일람

  -. 漢山州 / 買省郡(양주군 주내면)領縣으로 七重縣(파주군 적성면) [難隱別이라고도 함] 波害平史縣(파주군 파평면) 泉井口縣(파주군 교하면) 述尒忽縣(파주군 주내면) 達乙省縣(후에 高烽이라 함)이 나온다.

 

  -. 한산주/ 牛岑群(황해도 金川郡) 영현으로 獐項縣(장단군 북쪽) 長田淺縣(장단군 군내면) 麻田淺縣(연천군 미산면) 부소압(개성시) 若只頭恥縣(장단군 북쪽) 屈於押(금천군 서북면) 冬比忽(개풍군 서면 개성리 일대) 德勿縣(개풍군 봉동면 흥왕리 일대) 津臨城縣(연천군 임진면) <현재 지명은 이병도의 譯註에 따랐다.>

 

三國史記 권 제37(잡지 제4 지리2)에 고구려의 郡縣名

  -. 漢州 / 來蘇郡(양주군 주내면) / 重城縣(파주군 적성면) 波平縣(파주군 파평면)

  -. 漢州 / 交河郡(파주군 교하면)/ 봉성현(파주군 주내면) 高烽縣(고양군 벽제면)

  -. 漢州 / 牛峯郡(황해도 금천군)/臨江縣(장단군 북쪽). 長湍縣(장단군 군내면). 臨端縣(연천군 미산면)

  -. 漢州 / 開城郡(개풍군 서면 개성리 일대)/ 臨津縣(연천군 임진면)

 

 고려사 지리지

 

§ 적성현(積城縣)

  본래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중성(重城)으로 고쳐 내소군(來蘇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다. 현종(顯宗) 9년에 장단현(長湍縣)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문종(文宗) 16년에 내속(來屬)하여 예종(睿宗) 원년(元年)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기 / 양주 도호부 / 적성현

 

적성현(積城縣)

 

본래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인데, 신라가 중성(重城)으로 고쳐서 내소군(來蘇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어, 현종(顯宗) 무오에 장단현(長湍縣) 임내(任內)에 붙여서 상서도성(尙書都省)의 관장을 삼았다가, 문종(文宗) 17년 임인에 개성부(開城府)에 직속시켰으며, 예종(睿宗) 원년 병술에곧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5.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계사에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을 삼았다.

 

명산(名山)은 감악(紺嶽)이다.현 동쪽에 있으니, 신라 때부터 소사(小祀)를 삼았다. 산 위에 사당이 있으니, ·가을에 나라에서향축(香祝)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현종(顯宗) 5년 갑인에 글안(契丹) 군사가 장단(長湍)에 이르니, 감악 신사(紺岳神祠)에서 정기(旌旗)와 군사와 말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서, 글안 군사가 두려워 감히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였으므로, 나라에서명하여 사당을수리하고 제사를 지내어 보답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사람이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제사지내어 산신(山神)을 삼았다.”고 한다.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마전(麻田)에 이르기 15, 서쪽으로 원평(原平)에 이르기 5, 남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기 8, 북쪽으로 장단(長湍)에 이르기 12리이다.

 

호수(戶數)212, 인구가 380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21, 선군(船軍)14명이다.

 

토성(土姓)3이니, (((), 망성(亡姓)3이니, ((()이며, 속성(續姓)3이니, ((()이다. 땅은 메마르고, 기후가 일찍 추우며, 간전(墾田)2663()이다.논이 5분의 1이 된다.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메밀··뽕나무·[]이요, 토공(土貢)은 느타리[眞茸지초(芝草)이며, 약재(藥材)는 검산풀뿌리[續斷]이요, 토산(土産)은 주토(朱土)이다.현 남쪽의 제당산(祭堂山) 아래에서 나는데, 중품(中品)이다.도기소(陶器所)현 동쪽 백운리(白雲里)에 있으니, 중품(中品)이다.

 

()2이니, 상수(橡樹)세속에서 상수(相水)라고 잘못 칭한다.단조(丹棗)이다.세속에서 단조(丹召), 또는 단금(丹金)이라 잘못 칭한다.이포진(梨浦津)현 북쪽에 있다.·두지진(豆只津)현 서쪽에 있는데, 모두 나룻배가 있으며, 서쪽으로 흘러 장단진(長湍津)이 된다.·용두산(龍頭山)두지진(豆只津) 서쪽에 있다. 사면(四面)에 돌이 서 있는데, 그 둘레가 1리요, 그 높이가 50()이며, 위에 40여 사람이 앉을 만하고, 가물 때 비를 빌면 효험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

 

경기(京畿) / 적성현(積城縣)

  동쪽으로 마전군(麻田郡) 경계까지 17리이고, 남쪽으로 양주 경계까지 31리이며, 서쪽으로 장단부 경계까지 8리이고, 파주 경계까지는 8리이다. 북쪽으로는 장단부 경계까지 20리인데, 서울과는 18리의 거리이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 칠중현(七重縣)이다. 신라 경덕왕이 중성(重城)이라 고쳐서 내소군(來蘇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 9년에 장단현에 예속시켰다. 문종 17년에는 개성부(開城府)에 예속시켰고, 예종(睿宗)이 비로소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현감훈도 각 1.

 

군명칠중성중성내별.

 

성씨본현 유()()()()(). 모두 속성(續姓)이다.

 

형승동쪽으로 감악산을 기댔고, 서쪽으로 장단을 눌렀다 김반(金泮)이 지은 혜민당기(惠民堂記), “서울에서 동북쪽으로 설마현(雪馬峴)을 넘어 수십 리 지점에 적성현이 있는데, 동쪽으로 감악 높은 산을 기댔고, 서쪽으로 장단부 큰 강을 눌렀다. 지역이 가장 궁벽하고 좁아서 백성의 삶이 가난하였다.” 하였다.

 

산천감악산(紺岳山)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고려 임춘(林椿)의 시에, “조물은 어린아이라, 참으로 희롱하기를 좋아하네. 모래를 모아 많은 봉우리를 만들었구나. 이 산이 머리에서 끝까지 여러 고을을 걸터앉아, 하늘 밖에 날 듯한 것이 춤추는 봉새 같구나. 내 일찍이 산하와 연분 없음의 한탄이여, 지팡이를 버티고 유람하는 것 오래 못하였다. 그윽함을 찾고 기이함을 골라냄은 지금부터 하리라. 한가한 사람과 함께 빠른 말 달리어 딸깍딸깍 길을 걸으며, 원숭이와 앞 다투고 당기고 붙들매, 비로소 옷 무거운 줄 알겠다. 옥실(玉室)과 금당(金堂)은 한사(漢士) 같구나. 가만히 오악(五岳)과 통해서 그윽한 골이 있네. 도인(道人)의 안력(眼力)이 하늘 교묘함을 엿보고, 바위에 걸쳐 집 지어서 다락이 솟아난 듯. 내가 와서 나이를 물으니, 웃으며 대답 않고, 여상(藜床)에 오뚝 앉아 맞이하거나 전송하지 않는다. 집 밑에 흐르는 샘물 맑아서 마실 만한데, 처음 맛보니 차가 와서 이가 어는 듯하다. 영지(靈芝)는 흰 구름 피는 둔덕에 나고, 늙은 잣나무는 돌 틈에 자란다. 새벽 바람이 눈을 몰아 나무 가지에 지네. 아찔한 두 눈동자는 구르는 수은 같다. 헌함에 임해서 한 번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바라보니, 가슴 속에 운몽택(雲夢澤)이 아홉이로구나. 이 사이에 내 시()가 없어서야 될쏜가. 하물며 연하풍경(煙霞風景)이 나의 읊조림을 돕는 데에랴. 인생 만사는 머리 한 번 돌리는 동안에 바뀌는 것, 숨을 터 잡아 고고하게 삶 누가 함께하리. 집이 없어도 처노(妻孥) 나무람 겁날 것은 없지만, 즐거움을 행하는 데에 어찌 반드시 기생 따르랴. 만약 돌아와서 한구렁을 오로지 하겠다면, 다른 해 이 지역에 뗏집을 지으리라.” 하였다.

 

용두산(龍頭山) 현 서쪽 8리 지점에 있다. 4면으로 돌이 깎아 지른 듯하고, 둘레는 1리이다. 높이는 50()이며, 위에 40여 인이 앉을만하다. 날씨가 가물어서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설마령(雪馬嶺)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소마동(所磨洞) 현 남쪽 5리쯤에 있다. 청학동(靑鶴洞) 설마령 밑에 있다. 두지진(頭只津) 현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이포진(梨浦津) 현 동쪽 8리 지점에 있다. 장단부 임진도(長湍府臨津渡)에 자세하다.

 

구연강(仇淵江) 현 동쪽 9리 지점에 있다. 신증권우(權遇)의 시에, “몇 번이나 서로 생각했던가, 지금에야 돌아옴 기꺼워라. 맑은 강 한 굽이 둘러 있고, 여러 멧부리 사방으로 에워쌌다. 언덕을 격해 배불러 건너고, 마을 찾아 길 물으니 희미하구나. 아이들 나오는 줄 알고 서로 끌며 사립문에 나서더라.” 옛날에 한 차례 놀던 이 지역, 산은 깊고 초목은 무성하구나. 깨끗한 시냇물 가면서 찾고,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서 쉰다. 멀리 봐도 인적은 보이지 않더니, 곁을 보니 모두가 사슴들 놀이터이네. 지금 와서 치우치게 기뻐하는 건, () 안에서 농사하기에 족하구나.” 서늘한 강가에 초정(草亭)이 하나, 눈앞 경치는 형용하기 어렵다. 바람이 살짝 부니 물결이 일고, 안개가 날아가니 비가 오려나. 푸른 산은 겹겹으로 돌벽을 임했고, 백조(白鳥)는 쌍으로 모래에 내린다. 아버지께서 만년에 와서 봉양을 편히 하매, 내 지금 문안함을 다행히 여기시네.” 앞에는 맑은 강 뒤에는 산, 한 구역 형승(形勝)을 하늘이 숨겨뒀던 곳, 꼬불꼬불 작은 길 밭고랑 복판, 보일락말락 빈다락 수목 사이네. 동산에 가득한 토란밤 맛이 멋지고, 곳마다 풍경은 볼만도 하다. 진세(塵世)에 끌렸던 일 한스러워라. 어찌하면 이 지역에서 한가히 놀까.” 하였다. 용지(龍池) 감악산 서쪽 꼭대기에 있는데, 가물어도 장마가 져도 물이 불거나 줄지 않고, 비를 빌면 감응이 있다. 휴근도(朽斤渡) 현 동쪽 17리 지점에 있다. 신증차력산(硨礫山)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토산오지그릇[陶器]적토(赤土)벌꿀누치[訥魚]쏘가리[錦鱗魚]산무애뱀[白花蛇].

 

궁실객관 서거정의 기(), “적성도 작은 고을이니, 예전 명칭은 내소(來蘇)이고, 고려 적에 여러 번이나 개성양주 양부의 속읍으로 되었다가 뒤에 다시 현으로 되었는데, 관아는 본래 산성 남쪽에 있었다. 토지가 편벽되고 민물(民物)이 잔약하여 요역(徭役)을 능히 바치지 못하니, 수령된 자가 죄다 걱정하였다. 고려 말에 죄신(罪臣) 임치(林緻)의 집을 몰수하여, 고을로 만들어 옮겼다. 태수(太守) 한옹(韓雍)이 관청 집을 짓기 시작하였고, 사군(使君) 이명성(李明誠)박흥군(朴興君)박하신(朴河信)이 잇달아 지어서 완성하였다. 그러나 규모가 비좁았고 세월이 오래 됨으로 말미암아 거의 무너졌다. 뒤에 원으로 오는 자가 그대로 했을 뿐이고 수리하지 않았다. 정통(正統) 기원 10년 을축년에 견성(甄城) 이후(李侯)가 이 고을에 와서 정사에 임하면서, 1년이 채 못 되어 정사가 정리되고 폐단이 없어졌다. 이에 민중을 모아서 의논하기를, ‘대저 관사라는 것은 빈객을 받들고 관부(官府)의 위의를 엄하게 하는 곳이거늘, 이제 황폐하여도 수리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다. 내가 수령이 되어서 그 직책에 마땅하지 못할까 크게 두려워 엎어지고 넘어진 것을 그냥 보기만 하고, 걱정을 뒤에 오는 원에게 남기는 것은 차마 못하겠다. 철거하여 일신하게 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니, 뭇사람이, ‘모두 명에 따르겠다.’ 하였다. 후가 이에 감사에게 보고하여 나라에 알려서 윤허를 얻었다. 후가 녹봉을 내어서 쓰임새에 밑천으로 하고 또 백성으로서 품 팔려는 자를 허락하였다. 드디어 공인(工人)과 재목을 모아서 옛터에다가 제도를 보태기도 줄이기도 하였다. 남북으로 대청 세 칸을 각각 세웠는데, 크고 넓으며 모두 앞뒤로 달아내어서 동쪽 곁에는 온돌방이 있고, 또 넓혀서 마루를 만들었다. 남쪽으로 긴 골마루를 만들었고, 복판은 마루이다. 창고와 행랑이 총 약간 칸이라, 모두 단청을 칠했는데, 옛날에 빠졌던 것이 지금은 완전하다. 썩은 것을 갈아서 견고하게 하고, 기울어진 것을 바꿔서 바로 세우며,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낮은 것을 높게 하였다. 보는 자가 장하게 여기고, 사신과 빈객으로서 이 고을을 지나는 자도 또한 후의 훌륭한 치적을 알았다. 금년 가을에 임기가 차서 임금이 불러 가려 하니, 그 고을 부로(父老)가 만류하고자 하여도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때문에 글을 지어서 그 사람이 간 뒤에 사모하는 듯을 표시하기를 원하고, 드디어 나에게 기문하기를 청하였다. 거정은 후의 친속이다. 평소부터 후의 백성을 다스리는 재주에 탄복하였거니와, 지금 또 고을 사람에게 물었다. 후가 적성에 정사한 지가 6년이 되었으나, 백성의 애모하는 마음이 하루 같고 또 수십 년이나 황폐했던 관사를 수리하였으니, 백성에게 폐단이 미쳤을까 의심되나, 일 전이라도 백성들에게 징수한 것이 없었고, 노역이 농군(農軍)에게 미치지 않았다 하니, 또한 어렵지 않은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도로써 백성을 시키면 백성이 비록 수고하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 하였다. 하물며, 수고시키지도 않은 것이랴. 후의 다스리는 재주 있음을 내가 더욱 알게 되었다. , 짓는 어려움보다 중수하는 것이 더 어렵다. 지금 후의 이번 거조는 또한 그 어려운 것을 겸했다 할 수 있다. 대저 앞사람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것은 뒷사람의 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후를 이어 오는 자도 능히 후의 애쓴 것을 저버리지 않으면, 적성의 관사는 전일과 같이 염려하지 않을 것이며, 적성 백성도 또한 그 덕을 입을 것이다. 후의 이름은 숙희(俶喜)인데, 세족(世族)의 주손(冑孫)이다.” 하였다.

 

신증안침(安琛)의 시에, “그림같은 산 끝이 없고, 물빛은 똑같이 푸르기도 하다. 천석(泉石)을 좋아하는 병 고칠 수 없어, 오가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하였다. 마음은 화악(華岳) 밖에 머물렀고, 집은 죽계(竹溪) 가에 있노라. 시름하느라 살쩍이 희어졌는데, 전원에 가고파도 벌서 틀렸다.” 하였다. 혜민당(惠民黨) 현 서헌(西軒)이다.

 

학교향교 현 서쪽에 있다.

 

역원상수역(湘水驛) 현 남쪽 27리 지점에 있다. 김수온의 시에, “싫증나는 벼슬살이 남북(南北) 길 멀다. 옛 역에 사람 없고 국화만 폈다. 헌함에 기대 누우니 가을 저문데, 회암산(檜巖山) 빛이 울창도 하다.” 하였다. 단조역(丹棗驛) 현 서쪽 4리 지점에 있다.

 

불우감악사(紺岳寺) 감악산에 있다. 고려 황빈연(黃彬然)이 과거하기 전에 여기에서 글을 읽었다. 동각(東閣) 김신윤(金莘尹)이 술에 취해서 미친 말을 하다가, 권신에게 미움을 받고 도보로 감악에 들어와서 스스로 늙은 병졸이라 하며 기숙하기를 청하였다. 빈연이 그가 늙었고 또 곤궁함을 민망하게 여겨서 허락하였다. 종일토록 형상 아래에 있으면서 말 한 마디 없다가, 우연히 부젓가락을 잡고 재를 모아서 글자 모양을 만들었다. 좌중(座中)에서 모두, “저 늙은이가 문자를 제법 안다.”고 지목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신윤의 아들 온기(蘊琦)가 이미 과거에 올라 아비를 찾아와서 뜰 아래에서 절하니, 빈연이 땅에 엎드려서 사과하였다. 신윤은 웃으면서, “범수(苑雎)가 이미 진() 나라 정승이 된 줄을 궁한 늙은이가 어찌 알리요.” 하고, 서로 더불어 북쪽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밑 돌에 앉아서 함께 술 마시며 한껏 즐거워하였다. 송풍(松風)을 제목으로 하여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빈연은, “원숭이 휘파람 소리 끊어졌다 다시 들리고, 학의 충천하는 기운 우뚝하게 날개치는구나. 깜장 원숭이 휘파람 불어 보내고, 흰 학 충천하는 기운 드날린다.” 하였고, 동각은, “날 추우니 학이 잠들기 어렵고, 중이 선정(禪定)에 드니, 귀머거리 같다.” 하였다. 빈연이 머리를 조아리며 수업(授業)하기를 원하였다. 두어달 머물러서 전한서(前漢書)를 다 읽고 돌아왔다. 운계사(雲溪寺)신암사(神巖寺) 둘 다 감악산에 있다.

 

사묘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감악사(紺岳祠) 항간에 전해 오기는, “신라에서 당 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산신(山神)으로 삼았다.” 한다. 본조에서도 명산으로 중사(中祀)에 기재하고, 봄 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서 제사한다. 고려 현종 5년에 거란 군사가 장단(長湍)에 이르니, 감악사에서 정기(旌旗)와 군사가 없는 듯하므로, 거란 군사가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앞으로 가지 못하였다 한다. 또 충렬왕이 장차 원 나라에 가서 황제를 도와 내안(乃顔)을 토벌할 참인데, ()을 제2로 봉해서 도만호(都萬戶)로 삼았으니, 대개 신이 가만히 돕는 공을 바란 것이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총묘이견기 묘(李堅基墓) 현 남쪽 27리 지점에 있다. 권홍 묘(權弘墓)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고적토탄 고성(吐呑古城) 일명 성산(城山)이다.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1937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아미성(阿未城) 현 동쪽 18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고, 둘레는 1937 척이다. 수철성(水鐵城)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적암향(赤巖鄕)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명환신라 필부(匹夫) 무열왕 때 현령이었는데, 고구려 군사가 와서 포위하였으나 필부는 20여 일을 버티면서 싸웠다. 마침내 고구려 군사가 물러가려 하였는데, 대나마(大奈麻) 북삽(北歃)이란 자가 가만히 사람을 보내서 성안에는 식량이 떨어지고 전력이 궁하다는 것을 알렸다. 그리하여 고구려 군사가 다시 공격하였는데, 필부는 북삽의 머리를 베어서 성밖에 던졌다.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번 호통하니 앓던 자도 모두 일어났다. 본숙(本宿)모지(謨支)미제(美濟) 등과 함께 적을 막아 싸웠다. 화살이 필부에게 집중하여서 피가 발뒤꿈치까지 흘러서 죽었다. 왕이 통곡하고 급창(級滄) 벼슬을 추증하였다.

 

신증본조 김세우(金世愚) 아전과 백성이 두려워하고 사랑하였다.

 

효자고려 정빈(鄭贇) 효행이 있어 정려하였다.

 

제영야단수성미(野斷水成湄) 권제의 시에, “산이 높으니 구름이 멧부리에서 나오고 들이 끝난 곳이 물가로 되었다.” 하였다. 감악부천반(紺岳浮天半) 함부림의 시에, “감악이 반공에 떴고, 암성(巖城)은 물가에 임했다.” 하였다. 중산환소읍(衆山環小邑) 권람(權擥)의 시에, “여러 산은 작은 읍을 둘렀고, 구부러진 길은 강가를 굽었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고종 32년 마전(麻田)에 속했다가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토산지치[紫草][蜂蜜]이 생산된다.

 

방면현내면 끝이 5리이다. 동면(東面) 처음이 5, 끝이 20리이다. 서면 서남쪽으로 처음이 5, 끝이 20리이다. 남면 동남쪽으로 처음이 20, 끝이 40리이다. 북면 처음이 5, 끝이 20리이다. 적암향(赤巖鄕)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1872지방도 적성지도(積城地圖) 적성은 파주시 적성면과 양주군 남면, 연천군 백학면의 남쪽에 해당하는 작은 고을이었다. 지도는 수묵화를 활용해서 미적으로 꾸미면서 장터, 역터, 嶺路, 마을, 비석, 폭포 등 상세하게 정보를 담고 있다. 다만 읍치가 북향인 영향으로 남북이 정반대가 되어 있다. 적성 읍치는 지금의 적성면내가 아니라 고개(지도상의 望峴을 넘은 자리(舊邑里 읍내마을)에 있었다. 지금 읍치의 흔적은 거의 없고 향교마저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적성 영역이 지금의 양주군 남면과 연천군 전곡읍과 백학면의 일부까지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읍내에서 十二灘(紺嶽山계곡)을 지나 雪馬嶺(설머치)를 넘어 光水院, 湘水驛(상쉬마을)에 이르는 지역인데, 이 지도에서도 지형상 양주의 세력권임을 알 수 있다. 읍내에서 임진강 건너편 일대도 적성의 영역이었는데, 강가는 赤壁이라 불린 벼랑에 막혀, 神智江(신시개)라는 포구에서 건널 수 있게 되어 있다. 紺嶽山은 적성의 주산이며, 예로부터 京畿五嶽의 하나로 불리어 왔다. 정상의 비석에는 薛仁貴碑沒字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이 비에는 아무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은데,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이 고장 출신이라 설인귀비가 아닌가 전해지고 있다. 북한산처럼 예로부터 영산으로 알려져, 무속신앙을 위한 祭堂이 정상에 보인다. 지도에 보이는 鳳菴寺法輪寺 등 이름난 절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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