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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태국-라오스

[36] 라오스의 역사. 탁발(托鉢) / 루앙푸라방

백수.白水 2015. 3. 23. 21:05

2015.02.10(화)

라오스의 역사.

 

중국남서부 운남(雲南)지역에 거주하던 타이족은 BC 2C경부터 중국계인 남소국(南昭国: 당나라때)의 지배와 영향을 받으며 수 세기에 걸쳐 남쪽으로 이동하였다특히 13세기에 남소국이 몽골에 의해 멸망하면서 대거 이동해왔는데 이들은 현재의 태국북부, 라오스북부, 미얀마북동부에 걸쳐 소국가 형성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남하해 차오프라야 강 유역에 정착하여 오늘날의 태국을 형성하였고, 따이족의 일파인 라오족이 현재의 영토로 이주하면서 라오스 국가의 틀을 갖추게 되는데, 14세기 초까지 통일된 왕조를 이루지 못하고 비엔티안, 루앙파방, 짬빠삭 등을 중심으로 각지에 무앙(Meuang)이라 불리는 소국을 이루어 발전하였다.

 

루앙푸라방에 위치했던 한 무앙의 왕자가 변란을 피해 크메르로 들어가 왕실에서 성장하여 앙코르 공주와 결혼을 하는데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파 응움Fa Ngum(재위: 1,353년- 1,373년)이다.  그는 캄보디아 왕실에서 뛰어난 전사로 성장하였고, 왕의 지시로 북부의 각 무앙에 대한 원정을 지휘하여 루앙프라방까지 점령하고,  마침내 1,353년 소국을 통일하여 라오스 최초의 왕국인 란쌍 왕국Lan Xang(Lane Xang)을 세우고  캄보디아로부터 독립했다.  란쌍은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으로 강력한 국력을 표출하는 이름이다. 란 쌍의 건국은 이 지역에 소승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데, 특히 파 응움의 크메르인 왕비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라오스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섬으로써 14세기는 '따이의 시대'로 불러도 좋을 만큼 대륙부 동남아시아에서 따이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서쪽 버마에는 따이계의 샨족이 아바(Ava) 왕조를 세웠고, 태국에는 수코타이에 이어 아유타야가 성립했으며, 치앙마이의 란나 왕국도 번성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란쌍 왕국이 성립한 것이니 동쪽에 치우친 캄보디아와 베트남, 참파를 제외하고 대륙부 동남아시아 대부분은 따이인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파응움 왕은 1,356년 비엔티안 점령을 시작으로 영토를 확장해 오늘날의 라오스 크기의 통일국가를 이룬다. 그는 크메르공주와 결혼했으며, 남방불교를 받아들이고 신성한 황금불상인 파방 Pha Bang(프라방 Prabang)을 란쌍 왕국으로 가져온다. 파방이 전래되면서 수도이름도 씨앙통 Xieng Thong(황금의 도시라는 뜻)에서 루앙프라방으로 바뀐다.

 

파 응움의 시대는 1,374년까지 계속되었고 란쌍의 영역은 줄곧 확대되었다. 특히 북동부 지역 그러니까 과거 운남 지역으로부터 따이족들이 이주해 내려오던 방향으로의 진출이 두드러졌다. 코랏(Korat) 평원 지대(*)를 정복해 라오인들을 이주시키기도 했다. * 이 지역은 역사 속에서 라오스와 태국 사이에 경합이 벌어진 곳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와 샴 사이의 절충으로 태국의 지배가 인정되었다. 현재 태국에 의해서 '이산(Isan)'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태국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하는 이곳에는 라오족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민감한 사안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후 버마의 급성장으로 주변정세가 요동친다. 란나 왕국은 1,556년 버마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란쌍 왕국의 셋타티랏 왕(재위: 1548- 1,571)은 버마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1,563년 수도를 비엔티안으로 옮긴다. 그러나 1,574년에 버마의 침략으로 속국으로 전락하고 두차례에 걸쳐 버마의 통치를 받는다.

후에 안정을 되찾고 란쌍 왕조의 마지막왕인 쑤리야웡싸 왕(재위: 1,637- 1,694)의 재위시에 황금기를 누렸으나 왕의 사후에 왕위계승 문제로 발생한 내분과 미얀마, 베트남, 타이 등으로부터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3개 왕국으로 분열된다. 1,707년 루앙파방(북부)과 비엔티안(중부)이 분리되었으며, 1,717년 짬빠삭(남부)왕국이 건설되었다

 

다시 강성해진 버마는 1,765년 비엔티안 왕국을 지배하고, 1,767년 타이의 아유타야 왕국을 함락시킨다. 아유타이 왕국의 후손들은 1,768년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 톤부리 왕조를 건설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1,782년에는 짜끄리 왕조로 바뀐다.

톤부리왕조는 1,779년 비엔티안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신성한 불상인 프라깨우와 파방을 방콕으로 가져갔다. 비엔티안은 씨암과의 전쟁에 패해 1,828년 멸망하여 씨암의 영토로 편입되고, 루앙프라방 왕국과 짬빠삭 왕국은 씨암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1,940년대까지 근근이 명맥은 유지했다.

 

1,862년 베트남과의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면서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는데, 프랑스는 1,893년 태국과의 전쟁에 승리하여 라오스를 거느리게 되며, 오늘날의 라오스 국경도 이때 정해졌다. 프랑스는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라오스를 병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루앙프라방의 왕을 라오스의 국왕으로 승격시키고, 참빠싹과 씨엥쾅(Xieng Quang)의 왕을 주지사급으로 강등시켰다. 라오스가 내륙국이며 인구가 희박하여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고, 애초 프랑스가 의도한 중국 진출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자 식민정부는 라오스 개발을 등한시 했다.

 

인도차이나 전쟁 (1946~1954) 에서 프랑스가 베트남에게 패하고, 1953년 라오스는 입헌군주제의 왕립 라오정부를 탄생시키며 완전한 주권국가의 지위를 확보하였고, 1986년 자본주의를 도입하였다.

 

루앙프라방

지도 크게보기 https://maps.google.co.kr/maps?ie=UTF-8&t=m&iwloc=A&q=17.976754,102.63651200000004&ll=17.980764548426204,102.6393336838837&z=14&output=classic&dg=brw

 

 

루앙프라방은 라오스 북서부 메콩강 유역에 있는 도시로 동남아시아 전통 건축과 19 ~ 20세기 프랑스 식민지시대 건축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곳으로, 1995년 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라오스 메콩 강가에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들어선 루앙프라방은 근대화의 폭풍이 휩쓸고 간 아시아에서 과거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도시로 꼽힌다. 14세기 란상 왕국(Lan Xang)의 수도가 된 이래 라오스에 들어선 여러 왕국의 수도이자 종교 및 상업 중심지로 번성했으며, 1975년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라오스 왕이 머물렀던 유서 깊은 도시다.

 

루앙프라방은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많은 전통 건축물과 유적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19-20세기에 프랑스 식민 지배를 받았던 흔적도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데, 라오스의 전통 건축물과 식민지시대 건축물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흥미롭다.

 

루앙 프라방의 문화유적들 중에 가장 화려하고 매력적인 것은 구시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불교사찰들이다. 왓 아함, 왓 마이 수반나푸마캄(Wat Mai Suwannaphumaham), 왓 마노롬, 왓 루앙, 비수나랏, 왓 시엥 무안, 왓 시엥 통(Wat Xieng Thong) 등 수십 개에 달한다. (Wat)은 라오스어로 사원이라는 의미이다.

 

가장 유명한 사원은 메콩강과 칸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왓 시엥 통으로 전통적인 라오스 건축기법의 걸작으로 꼽힌다. 1560년에 건립되었으며 색유리와 금으로 장식되어 화려하고 아름답다. 1821년에 건립된 와트 마이는 과거 라오스의 큰스님 프라 쌍카라즈(Phra Sangkharaj)가 머물던 곳으로 유명하다. 루앙프라방 중앙에 위치한 푸시(Phusi)산 정상에는 1804년에 건립된 타트 촘 푸시(That Chom Phusi)라는 사원이 있는데,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금으로 장식된 첨탑이 인상적이다.

 

푸시 산 끝자락, 메콩 강가에 위치한 왕궁 박물관은 과거 왕궁이었다가 현재는 국립박물관으로 쓰이는 곳이다. 1975년 왕정이 폐지되기 전까지 라오스 국왕이 이곳에 머물렀다. 1909년에 완공되었으며, 화려한 왕관을 비롯한 란 상 왕조의 유물과 종교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루앙 프라방의 명물인 황금 불상이 소장된 곳으로 유명하다. 이 불상은 처음 스리랑카에서 만들어져 11세기에 라오스로 들어와 보물로 숭배되었으며 루앙 프라방이라는 도시 이름 자체가 이 불상에서 연유했다루앙 프라방은 (Luang. Louang)  황금 불상(Prabang. Phang))’이라는 의미다.

 

 

 

식료품 시장이다. ‘왓 마이사원 옆 골목과 뒷골목에 아침 일찍 좌판을 펴고 각종 식료품과 채소를 판매한다. 상추와 오이 배추 등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채소도 나온다. 찹쌀주먹밥에 곁들일 반찬을 마련하려고 이른 아침에 장을 봤다.

몽족들이 사거리코너에 과일좌판을 펼쳤고, 그 뒤쪽 길거리에선 천막을 치고 수공예품을 팔고 있다. 대낮이라서 파리를 날리고 있지만 밤이 되면 길거리에 노점이 들어차 조명을 밝히고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북적인다.

 

 

 

그러나 태국에서 열리는 야시장보다 규모가 작고, 모이는 사람도 적다. 

 

 

 

 

 

 

 

 

 

 

제일 마음에 드는 곳, 1만 킵 뷔페다. 준비된 큰 접시에 마음대로 골라서, 요령껏, 한 번에, 많이 담아다 먹으면 된다. 라오스음식이 우리와 잘 맞는다. 메뉴가 다양하고 저렴해서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지금은 올라서 15,000, 그래도 우리 돈으로 치면 2,000원 남짓밖에 안 된다. 라오스맥주 비어라오! 우리 것보다 독하고 맛있어 한 캔을 먹으니 반주로 딱 좋다.

 

 

 

 

======================================================================탁발===========================================================================

 

 

 

 

 

탁발(托鉢)

 

탁발(托鉢)은 산스크릿트어 piapata의 번역어(음역).

  -. (): [부탁할 탁] 의탁하다. 받치다. 의지하다.

  -. (): [바리때=승려의 밥그릇 발]. 사발(沙鉢).

 

'바리때를 받쳐 들다.‘ 또는 바리때에 의탁하다.’는 뜻으로,

승려들이 공양과 보시로 즉 걸식(乞食)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가리킨다.

 

 

탁발은 단순한 구걸이 아니라, 무욕과 무소유를 실천하는 수행방식이며, 보시하는 쪽으로 보면 선업을 쌓는 공덕이 된다. 걸식으로 얻은 것은 모든 중생에게 베풀고, 부처와 성현에게 공양한 다음에 먹어야 남의 보시를 헛되이 하지 않는다.

 

 

탁발은 매일 행해지는 의식으로 날이 채 밝기전인 6시쯤에 시작된다.

구역이 어떻게 정해졌는지 알 수는 없으나 노스님이 앞장을 서고 젊고 어린스님들이 뒤를 따른다.

긴 행렬은 아마도 큰 사원의 스님들일 것이고짧은 행렬은 작은 사원의 스님들이 분명한데

탁발행렬이 서로 겹치거나 마주치지 않는다.

맨발스님들의 발걸음이 워낙 바빠서 나같이 둔한 사람은 순간포착이 어렵다.

 

스님들의 걸식이 끝나면 이번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어린이들의 그릇에 스님의 보시가 시작된다.

헐벗고 굶주린 자들이 빌어먹는 게 아니라, 부끄럼 없이 보시를 받는 세상!

가난하지만 부처님의 자비와 사랑이 충만한 나라!.

비엔티안에서 세 명인가 보긴 했지만... 라오스에는 거지가 거의 없다.

 

루앙프라방 중심지에 있지만 아주 조용한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