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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태국-라오스

[51] 캄보디아 역사

백수.白水 2015. 4. 3. 07:00

 

 

앙코르 왕조 약사(略史)

 

푸난(扶南)왕국(Funan 86-550) 시대

 

1세기경 지금의 캄보디아 땅에 최초의 국가인 푸난(Funan)이 세워진다. 캄보디아는 푸난의 영역을 대부분 계승한 국가였지만 푸난과의 민족적 연계성은 없다푸난의 민족기원은 크메르인들의 나라라기보다는 남쪽의 말레이계 해상민족이었던 인도네시아 계통의 사람들이 세웠다고 생각된다.

 

푸난은 중국의 사서와 동남아시아의 비문에 역사적 실체가 함께 나타나고 다량의 유물도 출토되고 있다. 국가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기원후 1~2세기경에 눈에 띄게 발전하기 시작한 것 같다. 푸난의 중심부가 있었던 곳은 인도차이나 반도 남쪽 메콩 연안으로서 현 프놈펜보다 조금 아래쪽이었다.

푸난의 중심지가 되는 비아댜푸라(Vyadhapura: 지금의 바프놈 부근)는 해안에서 강을 타고 들어가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위치했다고 보아야 한다. , 푸난의 주요 항구였던 옥 에오(Oc Eo)*는 남중국해와 시암만에 가까웠다. 푸난은 해상 교역을 통제하고 중간 교역에 종사하면서 강력해진 국가였다.

*오크에오 [Oc-eo]: 베트남 남부, 메콩 강 델타 서부에 있는 유적. 1944년의 발굴에 의하여 캄보디아 왕국의 전신인 부남국시대(2~6/7세기경)의 해안도시 유적임이 판명되었다. 부남의 외항으로서 번영하였음이 추측된다.

 

그에 반해 크메르인들은 언어 분류상 몬 - 크메르어로 분류되는 민족이다. 이들은 티베트 쪽에서 내려와 한 집단은 현 태국의 짜오프라야 강변 및 버마의 남부인 이라와디강 하류까지 가서 정착했고, 다른 부류는 메콩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정치 권력을 만들어 점차 통합되어 갔다. 크메르인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민족이며, 내륙에서의 동서 교역을 통해서도 부를 축적했다. 특히 메콩과 연결되는 톤레삽호수 주변의 풍부한 농업 생산력과 톤레삽 호수의 수산 자원은 인구의 안정된 부양 및 지속적인 증가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해상 교역에 기반한 푸난에게 도전할 수 있는 역량을 축적할 수 있었다.

 

 

 

'푸난'은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의 '프놈(Phnom)'과 같은 뿌리를 가진 단어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이고, 산은 신성한 정령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으며, 그 정령은 해당 지역의 지배자를 보호하는 수호신으로서 이해되었다. 산이 정령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동남아시아 사회만의 특징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만 해도 산 및 산의 정령이 갖는 보호자로서의 의미를 크게 부여한다. 중국도 각지에 영산을 정해 놓고 천자가 직접 제사 지내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절대자는 하느님이지 산의 정령들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고대 동남아시아에서 해당 권력을 보호해 주는 산은 세계의 중심이며 그 산은 권력자와 일체화된다.

 

 

자연 재해가 비교적 적은 동남아시아에서 경외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과 바람과 기후를 주관한다고 여겨지던 다소 추상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사 및 인생과 관련된 구체적인 신들이었다. 산꼭대기에 시바신상 등을 모시고 링가를 세우는 의식도 산을 중시하는 데서 나오는 관념이다. 힌두 신앙에서 우주의 중심 역시 산(메루산)이며, 신은 그곳에 있었다.

 

뱀의 딸 소마가 다스리고 있던 이 땅에 카운딘야(Kaundinya)라고 하는 한 브라만이 서쪽(인도 또는 말레이 반도)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전설은 동남아시아의 토착 세력과 인도로부터 온 세력의 결합을 상징하며,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 사회에 미친 인도의 영향력을 알려 준다. 전설에 나오는 소재들을 살펴보면 명확해지는데, 첫째는 카운딘야라고 하는 브라만, 둘째는 신궁, 셋째는 그들이 타고 간 배, 넷째는 옷이다. , 힌두교라고 하는 고급 신앙과 신궁, 선박, 옷으로 상징되는 고급 물질 문화의 전래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방적인 점령 및 인도화가 아니라 토착 지배 계급과의 결합이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토착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이 융합해 독특한 형태의 문화를 창출하니, 이것이 푸난 문화의 특징이며 나아가 동남아시아의 보편적 경향성이기도 했다. 힌두 문명이나 그 뒤를 이은 불교의 전래, 그리고 이슬람교의 전파에 이르기까지 외래의 사조는 늘 토착적인 것과 융합하며 발전했다.

 

푸난은 기원후 3세기 초쯤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비약적으로 팽창해서 그 지배 영역은 동쪽으로 현 베트남 남부의 거의 모든 지역, 서쪽으로 현재의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 반도, 버마에까지 이르렀다. 말하자면 대륙부 동남아시아 대부분을 그 지배 영역하에 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푸난이 로마나 아니면 진대(秦代) 이래 중국처럼 영토의 대제국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지배의 영역은 푸난 왕에게 복종하는 종속국들로 연결되는 범위였을 뿐이지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는 것도 아니었다. 토착 지도자들의 지배권은 그대로 인정되는 형태였다.

 

푸난 상류 사회에서는 인도적 요소가 지배적이었다. 조정에서는 산스크리트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시바와 비슈누는 중요한 경배 대상이었다. 힌두교 문화가 전래된 이래 자연스러운 인적, 물적 교류에 따라 이곳에 불교 역시 뒤따라 전해진 것은 당연했다. 이미 3세기에 푸난을 통해서 대승 불교가 북베트남 지역을 거쳐 남중국으로 소개되기 시작하며, 동시대 판시만 왕은 불교의 후원자였다.

 

푸난은 인도차이나 남쪽바다를 지배하면서 해상교역을 바탕으로 번성했으나 중국인들이 해상무역에 손대기 시작하면서 대략 6세기 말경부터 쇠퇴하는데, 그것은 푸난보다 메콩 상류에 위치해 있던 첸라(Chenla)가 점차 성장하여 새로운 권력 중심부가 되면서 푸난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이 첸라가 바로 유명한 앙코르 시대를 만들어 낸 주인공이다. 푸난을 약화시켰던 또 하나의 세력은 푸난의 동북쪽, 현 베트남의 중부 지역에 위치했던 또 다른 왕국 참파다.

 

첸라(眞臘)왕국(Chenla 前 앙코르시대, 535-802)

 

비문과 중국의 자료를 종합해 보면, 바바바르만(Bhavavarman)이라고 하는 왕이 6세기 중반부터 등장하며 톤레삽 호수 부근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권력이 성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왕조에 의해 통일된 영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각지의 크메르 공국들이 경합하고 있던 형태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셔나프라에 도읍을 정한 첸라는 메콩강 일대를 장악하였으며,  푸난을 밀어내고 7세기경 캄보디아를 차지한다. 수도에는 2만호 이상이 거주하였고, 수나라에 사신을 보낼 만큼 국가적인 면모를 갖추어  크메르인 최초의 단일국가로 성장하나 자이야와르만 1세가 죽은 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8세기경부터 내륙지방의 륙진랍(陸眞臘)과 해안지방의 수진랍(水眞臘)으로 분열하게 되어 외세의 지배를 받는 등 혼란기를 맞았으나, 이후 8세기 말 자야바르만 2세가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역대군주 목록

1. 바바바르만 1[550~ 600]

2. 마헨드라바르만 [600~ 616]

3. 이사나바르만 1[616~ 635]

4. 바바바르만 2[639~ 657]

5. 자야바르만 1[657~ 681]

6. 자야베디 [681~ 713]

* 륙진랍과 수진랍의 분열 시기 : 706~ 802

* 자바인들의 통치기 : 774~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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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왕조 약사(略史)

 

그리하여 9세기부터 크메르제국을 개창했고, 13세기까지 400년간 크메르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크메르제국의 야소바르만 1세는 앙코르제국 최대의 수도인 야쇼다라프라를 건설했고, 수르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와트를 축조하였으며, 자야바르만 7세는 인도차이나반도 전지역을 정복하는 등 최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 이후 크메르제국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타이의 침공을 받아 수도를 내어준 것을 시작으로 타이, 라오스, 베트남의 압박에 의해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앙코르 시대(ANGKOR(또는 KAMBUJA) 802~1431년)
   1. 초대 왕, 자이야와르만 2세 (JAYAVARMAN Ⅱ , 802-834)
   2. 제 3대 왕, 인드라바르만 1세 (INDRAVARMAN Ⅰ , 877-889)
   3. 제 4대 왕, 야소바르만 1세 (YASOVARMAN Ⅰ, 889-912)
   4. 제 7대 왕, 자이야와르만 4세 (JAYANARMAN Ⅳ, 928-942)
   5. 제 9대 왕, 라젠드라바르만 2세 (RAJANDRAVARMAN Ⅱ, 944-968)
   6. 제 10대 왕, 자이야와르만 5세 (JAYAVARMAN Ⅴ, 968~1001)
   7. 제 13대 왕, 수리야와르만 1세 (SURYAVARMAN Ⅰ, 1002~1050)
   8. 제 18대 왕, 수리야와르만 2세 (SURYAVARRMAN Ⅱ,1113~1150)
앙코르 왕국 최고 전성기를 맞이한 크메르 왕국은 이때 앙코르 유적 중 가장 유명한 앙코르왓을 축조함으로서 불가사의적인 건축물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는 열렬한 힌두교 신자로서 앙코르왓을 세웠고 자신을 힌두교의보호, 유지의 신인 위슈누(VISHNU)와 동일시했다. 사원들은 우주의 중심으로 힌두교의 신들이 거주하는 메루(MERU)산을 지상에 재현하며, 사원의 주변은 저수지나 해자로 둘러쌓다. 이는 우주를 감싸는 성스러운 대양을 의미하며 실용적으로는 외적방어와 관개수로로 사용되었다. 앙코르의 전성기로 인구 100만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였다.

   9. 제 22대 왕, 자이야와르만 7세 (JAYAVERMAN Ⅶ, 1181~1219)
수리야와르만 2세의 죽음 후 후계자 다툼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시암족과 참파국이 침입하고 참족의 지배를
잠시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이들을 물리치고 격퇴한 크메르 제국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자이야와르만
7세다. 그는 톤체샵 해전에서 참족을 모두 격퇴하고 대승을 거두는데 이 장면이 바이욘 사원의 벽면에 생생하
게 부조로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자이야와르만 7세는 캄보디아 역사에서 영웅이며 부처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바이욘
사원이 있는 거대한 앙코르 톰의 건설과 주위에 '타 프롬', '프레아 칸' 등 불교사원을 건립하고 대승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사회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수많은 병원을 전국에 건립하였다. 재임기간 동안
베트남의 해안에서부터 말레이시아 반도와 멀리 미얀마까지 최대의 영토를 구축하여 앙코르 왕조 최후의 번성
기를 누렸다. 그러나 자이야와르만 7세 이후 크메르 왕국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14세기 이후 크메르
왕조의 힘은 점점 쇠약해지며 1431년 마침내 서쪽 태국의 아유타야 족에 의해 앙코르는 점령되고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지게 된다.

 

앙코르 시대(802-1,431) 개관

기원전 1세기경, 캄보디아의 남부 연안지대에서 인도 상인들과 교역하면서 인도적인 문화와 종교를 토속의 여러 신앙에 융합시켜 받아들인 부남이라는 나라가 일어나 메콩강 델타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남의 속국이었던 메콩캉 중류지역의 크메르 진랍이 5세기경부터 세력이 강성해져, 7세기초 남하(南下)하여 부남을 멸망시키고 국내를 통일했다. 진랍은 자이야와르만 1세(Jayavarman1, 재위 675~681)가 죽은 후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혼란에 빠져 내륙 쪽의 육진랍과 연안 쪽의 수진랍으로 분열되었으며, 수진랍은 8세기경부터 군웅이 할거하여 혼란해진 틈을 그 일부가 인도네시아 자바세력에게 점령당했다.

 

자바에 포로로 잡혔다가 8세기 후반 귀국한 수진랍의 자이야와르만 2세(재위 802- 835)는 메콩강 델타지역의 지배자가 되어 781년경부터 메콩강 중류지역을 정복하고, 톤레삽 호 동안으로 북상하여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게 되자, 802년 앙코르 북동쪽에 있는 프놈 쿨렌(Phnom Kulen) 산에서 자신을 전륜성왕이라 선포하고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자바에의 복속을 거부하고, 왕은 힌두교의 신 시바와 합체된 존재라는 왕즉신의 ‘신왕신앙’에 따라 ‘데와 라자’라는 제의를 집행했는데, 이러한 강력한 종교적 배경이 앙코르 왕권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앙코르톰에서 남동쪽으로 14km 떨어진 곳에 하리하랄라야라는 도성을 조영하고, 크메르 제국 앙코르 왕조의 위대한 시조가 되었다.

 

그 후 야소와르만 1세(Yasovarman 1, 재위 889~910경)가 900년경 수도를 앙코르로 정하고, 제1차 앙코르 도성을 건설하여 자신의 이름을 따라 ‘야소다라푸라(Yasodarapura)라 했다. 이 도성은 프놈 바켕(Phnom Bakheng)을 중심산으로 하여 그 위에 신전을 건축하고, 앙코르톰의 서남쪽에 토성을 쌓아 완성시켰다.

 

그 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자이야와르만 4세가 921녀부터 944년까지 코 케르(Koh Ker)로 천도함으로써 이 도성은 잠시 버려졌다가, 라젠드라와르만 2세(Rajendravarman 2, 재위 944~968)가 다시 앙코르로 돌아와 피메아나카스(Phimeanakas)를 중심사원으로 하여 제2차 앙코르 도성을 건설했다.

 

자이야와르만 5세((재위 968~1001)의 치세는 태평성세여서 문물이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그 후 세 사람이 왕위계승자가 다투어 9년 간의 내전을 치른 끝에,

혈통이 다른 수리야와르만 1세(Suryavarman 1, 재위 1001~1050)가 즉위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그의 아들 우다야디티와르만 2세(Udayadityvarman 2, 재위 1050~1066)는 바푸온(Baphon)을 중심 산으로 하여 제 3차 앙코르 도성을 조영했다.

 

그러나 새 도성의 무리한 건설이 화근이 되어 반란이 일어나고, 타이의 북동쪽 코라트 고원에서온 유력자가 왕위를 찬탈하여 왕실의 혈통이 바뀐 다음,

 

수리야와르만 2세(재위 1113~1150년경)가 왕국을 재통일하여 실력으로 앙코르 왕조의 최전성기를 구축했다. 그는 크메르 문명의 상징인 앙코르왓을 건조하고, 적극적으로 외국 정벌에 나서 국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과 대사원의 무리한 건립으로 국력이 피폐해져, 1177년 도리어 앙코르 도성은 참파(Champa, 지금의 메콩강 삼각주의 남베트남) 군의 침공을 받아 왕궁과 사원둘이 철저하게 약탈당하였다.

 

자이야와르만 7세(재위 1181~1219)는 참파를 토벌하여 크메르에 병합하고, 대승불교를 국교를 삼아 바욘(Bayon) 사원을 건립했으며, 앙코르톰을 조영하여 제 4차 앙코르도성을 건설했다. 그는 원기왕성하게 외국을 정벌하여 동쪽으로는 중부 베트남 해안에서 서쪽으로는 미얀마와 타이 사이의 메콩강 상류지역까지, 북쪽은 랑도스의 비엔티안(Vientiane)까지, 남쪽으로는 말레이반도 북부에 이르기까지, 인도차이나반도를 석권하는 캄보디아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대 제국을 구축했다. 이때 크메르제국의 영광은 최고조에 달했고, 그 수도 앙코르 도성은 넓이 약 1백 평방킬로미터, 인구 1백만명을 넘어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앙코르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원인은 세력이 강성해진 시암(Siam, 지금의 태국)의 아유티아(Ayuttaya)조로부터 1353년과 1364년 연거푸 공격을 받은 데 있었다. 그후에도 양국은 격전을 거듭하다 드디어 1432년 아유타야의 침공을 방어할 힘이 없어 유서깊은 앙코르 도성을 버리고, 남동쪽 240km 지점에 있는 프놈펜으로 천도했다.

찬란했던 앙코르 문명의 가장 큰 붕괴원인은, 반복되는 시암과의 소모전이지만, 거듭되는 전쟁으로 인한 주민생활의 피폐, 과두정치, 왕실의 내분으로 인해 외세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 고대 힌두사상과 체제(카스트제도)의 정체, 지방세력의 할거와 그에 따른 왕권의 약화, 새로운 상죄부 불교의 침투(평등사상)등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시 황폐화의 길을 걷게 된 고도 앙코르는 그 존재조차 망각되다시피 했다.

 

앙코르왓 문명 요약

앙코르왓은 캄보디아 서북부에 있는 '앙코르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현재 캄보디아 시엠립 북쪽 6km 지점에 있다. 이곳은 9~15세기에 크메르 제국의 수도였다.
가장 눈에 띄는 기념물은 수리야와르만 2세(1113-50경 재위)가 12세기에 지은 앙코르왓과 자이야와르만 7세가 1200년경에 지은 앙코르톰이다.

앙코르 시는 왕가의 중심지로서, 크메르 왕조는 이곳에서 동남아시아 역사상 가장 크고 번성하고 발달한 왕국을 다스렸다. 890년경 야소와르만 1세가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때부터 13세기초까지 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잠시 동안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위기시를 제외하고 앙코르의 왕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부분에서 북쪽으로 윈난(雲南)까지, 또 베트남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통치기간에 지배자들은 자신들과 수도를 찬양하기 위한 일련의 거대한 건축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과 국력을 쏟아부었다.
자이야와르만 7세(1181~1215경 재위) 이후 왕국의 권력과 활력은 점차 쇠퇴하여 1431년 타이 군대에게 앙코르를 점령당하여 약탈당한 다음 마침내 버려졌다. 앙코르에서 위대한 건설과 축조는 300년이 넘게 계속
되었는데 이 동안 건축과 예술양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종교의식은 시바 신과 위슈누 신을 섬기는 힌두교에서 점차 관세음보살신앙이 퍼져나갔다.

앙코르도 통치의 중심지이자 신격화한 왕을 숭배하던 곳으로서, 인도에서 들여와 지역적 전통에 맞게 고쳐진 종교적·정치적 개념에 의거해 계획·건설되었으며 여러 번 재건되었다. 이 도시에 '야소다라푸라'라는 원래의 이름을 붙인 야소와르만 1세 때부터 앙코르는 인도의 전통적 우주론이 제시한 모델에 따라 세워진 하나의 상징적 우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 도시는 중심부 산, 즉 피라미드형 사원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는데, 이것은 인도의 우주론에 등장하는 메루 산과 동일시되었으며 동시에 왕국의 번영이 달려 있는 토양의 힘을 집중시킨다고 믿었다. 야소다라푸라로 명명되었을 당시의 중심부 산의 사원은 그 지역에 있는 자연 언덕인 프놈 바켕을 적절히 변형시켜 만든 건축물이었으나 후대에 와서 전적으로 인공적인 건축물, 즉 피라미드 사원이 되었다.

이런 후대의 사원으로는 자이야와르만 5세(968~1001 재위)의 피메아나카스 사원, 우다야디티아와르만 2세(1050~66 재위)의 바푸온 사원 및 불교사원인 바욘 등이 있다. 특히 바욘은 자이야와르만 7세 때의 중심사원이었다. 자이야와르만 7세는 이 도시를 지금과 같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건립했는데 이 무렵에 도시는 앙코르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이때에는 앙코르의 주요특징인 방대한 저수지·운하·해자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것들은 수량조절과 관개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우주론에서 우주 중심부의 산을 둘러싸고 있는 대양의 상징이기도 했다.

13세기말 이 곳을 찾은 중국의 무역사절 주달관(周達觀)의 생생한 기록에 따르면 앙코르는 그때까지도 번영을 누리던 거대한 도시였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장엄한 수도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 무렵에는 자이야와르만 7세의 재위기간 동안 극에 달했던 거대한 규모의 건축열이 확실히 끝나고, 상좌부로 대표되는 새롭고 보다 절제된 종교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국 서부에 세워진 타이 왕국의 군대도 이미 크메르의 심장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16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도시의 폐기라는 형태로 절정에 이르렀고, 밀림으로 뒤덮인 고대 사원의 유해와 한때는 장대했던 저수지와 수로망의 폐허만 남게 되었을 뿐이다.

고대도시가 멸망한 15세기초부터 19세기말까지 400년이 넘는 동안 앙코르에 대한 관심은 대부분 앙코르왓에 모아졌는데, 앙코르왓은 상좌부 승려들에 의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됨으로써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순례지의 하나가 되었다.

 

캄보디아의 암흑기 (1,431-1,863)

 

1431년 샴의 침략 후, 샴과 베트남의 지배를 번갈아 받으며 왕국의 명맥만 유지하다가 19세기 중반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15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계속적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영토가 축소되는 캄보디아의 암흑기라 할 수 있다.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잦은 침략과 정복을 당하며,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잦은 외세로부터의 침략을 당한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가지게 된다.

 

프랑스 식민 지배기 (1,863-1,953)

 

1863년 노르돔 왕이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다는 조약에 서명하고 단계적으로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1941년 프랑스 식민정부에 의해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가 왕으로 즉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