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먼저 자기가 서있는 곳을 중심으로 前後左右의 방향을 따지고, 원근과 거리를 인식하려는 습성이 있다.
어디로 갈까? 북으로 갈까 남으로 갈까?.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모든 행동의 시작은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은 지리적으로 내포지방(內浦地方)의 중심에 위치한다.
내해(內海)는 바다와 통해있지만 육지에 둘러싸여 그 입구 폭이 좁은 작은 바다를 말하는 것이고,
내포(內浦)는 바다나 호수가 육지 안으로 휘어 들어간 포구 곧 땅(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내포지방은 대략 충남 서북부 지역인 서산 예산 홍성 태안 당진 전 지역과 아산 보령의 일부 등의 지역을 아울러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내포지역은 산과 바다 어느 곳이나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이제 매일아침天氣를 살핀 후에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일이 거의 습관화 되어가고 있다.
오후 들어 부슬거리는 가을비가 조금 소강상태를 보이기에 그리 멀지않은 만해 한용운선생 생가(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19km)를 찾아 나섰다.
한용운 선생의 생가를 가려면 김좌진장군 생가(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12km)를 지나야 한다.
처음계획은 한용운선생 생가를 먼저보고 돌아오는 길에 김좌진장군 생가를 보려고 하였으나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한용운선생 생가만 보고 그냥 지나쳐돌아왔다.
지자체에서는 관광객유치를 위해서 최신버전의 8경을 개발 선정하여 지역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낯선 곳이라면 우선 이런 곳부터 찾아보는 것도 순서다.
또한 홍성은 고려의 명장과 충신인 최 영 장군(1316∼1388, 홍북면 출생)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 사람인 매죽헌 성삼문(1418∼1456, 홍북면 출생)
독립운동가인 백야 김좌진 장군(1,889∼1930, 갈산면 출생)
화가인 이응노 화백(1904∼1989, 홍북면 출생) 등
충신과 독립운동가 등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충절의 고장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안개가 감기듯 스멀스멀 내려앉는 단풍이 시골마을을 고운 가을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한적하고 평화롭다. 벼를 벤 곳보다 베지 않은 곳이 더 많고 콩잎이 누렇게 물들어가니 아직도 들판은 황금빛이다.
생가 앞에 있는 ㄱ자 집은 한용운 선생의 조카딸이 살던 집으로 관리사무소로 이용되던 집이다.
뒤쪽으로는 산줄기가 병풍처럼 생가를 둘러 바람을 막아주고, 마을을 향한 앞쪽은 조망이 툭 트여 아늑하다.
전체적으로 명당이라는 느낌이다.
만해의 친필 전대법륜(轉大法輪). 직역하면
‘법의 바퀴가 크게 굴러 간다'인데
'법(진리)의 수레바퀴를 크게 돌려라' '불법의 큰 가르침을 행하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만해사로 들어가는 문에는 禁門(금문)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사당 만해사(萬海祀)
公約三章(공약 삼 장)
ㅡ.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하나.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하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ㅡ.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 히 發表(발표)하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ㅡ.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 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나손(羅孫) 김동욱 문학비
스님과 시인으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민족의수난기에 치열한 삶을 산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卍海로 쓰기도 하는데 卍자는 원래 기호에서 생긴 글자로 사찰 불교 길상을 상징한다.
나는 그가 민족대표33인의 한 사람으로“...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썼다는 것,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썼으며,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고, 성북동의 심우장에서 지내다가 해방 일 년 전에 입적했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의 일대기를 옮긴다.
한용운
민족대표33인중 불교계를 대표하여 3.1독립선언을 이끌다.
님은 갔습니다. 님은 갔습니다./아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선생의 [님의 침묵]중에서(1926)
1905년 백담사에서 불교에 귀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 8. 29 ~ 1944. 6. 29)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더 이상 집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었다. 때문에 1896년 선생은 홀연히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선생은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조선불교유신론]을 간행하여 불교계의 혁신을 주장하다
1910년 선생은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고, 그것을 1913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아울러 1911년 친일승려 이회광 일파가 한국의 원종(圓宗)과 일본 조동종(曹洞宗)과의 합병을 발표하자, 선생은 이를 정치적 상황에 편승한 친일매불(親日賣佛) 행위로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이회광 일파를 종문난적으로 규정하는 한편,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등과 함께 송광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선생은 원종에 대응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하여 송광사에 종무원을 두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큰 호응을 받기도 하였다.
1914년 4월에는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1918년에는 본격적인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였다. 그럼으로써 선생이 추구하던 불교의 대중화뿐만 아니라 암울했던 식민지 무단통치 아래서 민족의 입과 귀의 역할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갔던 것이다.
1919년 선생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불교측 인사들과의 접촉을 위해 범어사까지 다녀오는 등 동분서주 하였고, 해인사 승려로서 서울에 올라와 있던 백용성 선사를 민족대표로 서명하게 하였다.
선생은 불교계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2월 28일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로부터 3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이를 불교학교인 중앙학림 학생인 정병헌, 오택언, 전규현, 신상환 등에게 건네주면서 3월 1일 오후 2시 이후에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이종일이 가져온 선언서를 돌려보는 것으로 낭독을 대신하고, 선생에게 간단한 식사(式辭)를 부탁하였다. 이에 선생은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선생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이후 피체될 경우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제시하였다. 첫째, 변호사를 대지 말 것. 둘째,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 것. 셋째,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민족대표들은 모두 일경에게 피체되었고, 선생은 옥중에서도 의인답게 태연한 모습을 보였으나 일부 민족대표들 가운데는 불안과 절망에 빠져 소란스러운 사람도 있었다. 선생은 그들에게 호통을 쳐서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경종을 울려 주었다. 나아가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선생의 수형기록표
민립대학건립운동 등 지속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다
1921년 12월 21일 석방된 뒤에도 선생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계속하여 갔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나아가 1924년에는 불교청년회 회장으로 취임한 뒤, 총독부에 대하여 당당히 정교(政敎)의 분립을 주장하면서 사찰령의 폐지를 요구하였다. 또한 중앙의 불교 행정기관을 각성시켜 불합리한 법규를 정정케 하고, 대중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는데 전력을 기울여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1927년 2월에는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의 창설이 추진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신간회가 창립된 뒤에는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5월에는 김법린, 최범술, 김상호 등 20여 명의 청년 불교도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운동단체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취임하였다. 만당은 경상남도 사천의 다솔사를 근거지로 하여 국내일원과 동경에까지 지부를 설치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민족의 자주독립이었으나, 1938년 말 일경에게 발각되어 서울, 사천, 진주, 해남, 양산 등지에서 6차례의 검거선풍으로 말미암아 와해되고 말았다. 이와 함께 불교의 대중화와 민중계몽을 위하여 일간신문의 발행을 구상, 당시 운영난에 빠진 <시대일보>를 인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속간하면서 불교 대중화와 민중계몽,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근대적이고 저항적인 민족시인으로 활동하다
한국문학사에서 선생은 근대적 시인이요, 3.1운동 세대가 낳은 최대의 저항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선생은 88편의 시를 모아 1926년 [님의 침묵]이라는 첫 시집을 발간하였고, 시조와 한시를 포함하여 모두 300여 편에 달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그밖에 소설로는 [죽음], [흑풍(黑風)], [후회], [철혈미인(鐵血美人)], [박명(薄命)] 등이 있다.
문학에서 시나 소설의 대상을 자의적으로 규정할 수 없지만, 선생의 시에 있어서 ‘님’은 연구자에 따라 조국, 민족, 불타, 중생 등 다양한 형태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선생의 문학은 삶과 행적을 살펴보건대 그것이 시든 소설이든 간에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과도 같은 당대의 한계로 인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자신의 심중을 은유적 수법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44년 꿈에 그리던 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
1933년 55세 되던 해 선생은 벽산(碧山) 스님이 기증한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택호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여기서 여생을 보냈다. 집을 지을 때 선생을 돕던 인사들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종용하였으나,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고 하여 끝내 동북방향으로 집을 틀어 버리고 말았다.
선생은 교우관계에 있어서도 좋고 싫음이 분명하여 뜻을 함께한 동지들에 대해서는 매우 깊은 의리를 보여 주었다.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김동삼이 1937년 3월 옥중 순국하였을 때에는 유해를 심우장으로 모시고 와 5일장을 치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변절한 친일인사에 대해서는 설령 친분이 깊거나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더라도 단호히 절교하고 일체 상대하지 않았다. 3.1운동 당시 동지였던 최린이 변절한 뒤 심우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으나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무안해진 최린이 선생의 딸에게 돈을 쥐어주고 돌아갔다. 이 사실을 안 선생은 부인과 딸에게 호통을 치고 그 길로 명륜동 최린의 집으로 달려가 그 돈을 집어 던지고 되돌아 왔다고 한다.
최후의 발악적인 일제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선생은 민족적 의기를 꺾지 않았다. 그리하여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승려이자 저항시인이요 독립투사인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하고 말았다. 장례는 전통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였으며, 유해는 망우리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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