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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항(鰲川港)키조개와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

백수.白水 2017. 3. 30. 20:16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종전에 오천성(鰲川城)으로 불리다가 이름이 바뀌었으며, 충청수영(忠淸水營)은 충청수군절도사영(忠淸水軍節度使營)의 약칭이다.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서해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위해 돌로 높이 쌓아올린 석성(石城)이다. 조선 중종 4(1509) 수군절도사이장생(李長生)이 축성, 충청수영의 외곽을 두른 1,650m의 장대한 성으로 자라()모형의 지형을 이용 높은 곳에 치성(稚城) 또는 곡성을 두어 바다와 섬의 동정을 살폈고 해안방어의 요충지였다.

 

사방4대 성문과 소서문(少西門)을 두었고, 동헌을 비롯한 관아건물 영보정(永保亭), 관덕정(觀德亭), 대섭루(待燮樓), 능허각(凌虛閣), 고소대(姑蘇臺) 등이 있었으나 허물어졌고, 서문 망화문(望華門)과 건물로는 진휼청(賑恤廳), 장교청(將校廳), 공해관(控海館)이 보존되고 있다.

 

망화문은 화강석을 다듬어 아치(Arch)형으로 건립하여 발전된 석조예술을 볼 수 있으며, 오천항은 백제때부터 중국과 교역하던 항구로서 회이포(回伊浦)라 불리었고, 고려시대에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하여 많은 군선을 두었으며, 세조 12(1466)수영을 설치, 충청수군의 최고사령부로 서해안을 방어하였다.

 

충청수영성은 고종 33(1896) 폐영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 142척에 수군 수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1597) 7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의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출처: 보령시청 문화관광홈페이지, 문화재청>

 

 

 

화강암을 다듬어 아치(Arch)형으로 올린 망화문(望華門, 西門) 노거수와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답다.

 

 

 

성 돌의 고색(古色)에서 500년이 넘는 긴 세월의 역사가 느껴진다.

 

 

 

성안에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이곳과 객사와 삼문(三門)만이 남아있다.

 

 

 

진휼청(賑恤廳. 진휼청은 중종 때 두었으며, 인조 때인1648常平廳으로 개명함)은 흉년에 충청수영관내의 빈민구제를 담당하던 곳이다.

정면5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온돌방·툇마루·부엌 등이 있다.


 

 

성벽을 따라서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영보정으로 구부러져 오르는 길이 운치를 더한다.


 

 

오천항이 내려다보이고 내포(內浦)가 길게 들어와 있다. 서쪽으로 쭉 내려가면 천수만을 만나고 바다로 들어간다.

 

 

 

충청수영성 내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영보정으로 1504년 수사 이량에 의해 창건되어 고종15(1878)에 소실된 후 137년만인 2015년 복원되었다.

 

 

 

 

 

서쪽으로 내려가면 천수만.. 동쪽으로 오르면 보령댐이다.


 

 

오천교회 쪽으로 충청수영내삼문과 충청수영장교청(객사)가 어렴풋이 보인다.

 

 

 

엄청난 양의 키조개를 도로에 부어놓고 할머니들이 내용물을 발라내고 있다.


 

 

내용물이 어른 주먹만 하다.


 

 

내용물을 분리하여 보통은 근육질인 패주(조개관자)를 먹고 나머지 내장은 매운탕용으로 따로 나간다.

판매업체에 들어가면 도소매판매를 하는데 이렇게 작업을 해서 패주1kg25,000원에 판매한다.

 

 

 

충남 보령시 오천항은 천수만을 앞에 두고 있는 어항이다. 좁은 바다가 내륙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다. 그 좁은 바다의 내륙 쪽 끝은 광천이다. 새우젓으로 유명한 곳이다. 오천항은 바다에서 내륙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어 예부터 상업적, 군사적으로 주요한 항구였다. 조선시대에는 충청수영이 있어 한반도 중부 해안 지역의 군사 요충지로 쓰였다. 지금은 그다지 큰 항구는 아니다. 항구를 낀 마을도 크지 않다. 이 조그만 어항에서 한반도 키조개 생산량의 60% 정도를 감당한다. 천수만에서 나오는 키조개가 여기로 모이는 것이다.

 

특이하게 큰 패주

 

키조개는 곡식을 까부를 때 쓰는 키를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전라도에서는 게지 또는 게이지, 경상도에서는 채이조개 또는 챙이조개라고 부른다. 충청도에서는 치조개라고도 한다. 내륙과 가까운 앞바다의 진흙에 박혀 산다. 조개껍데기의 뾰족한 부분이 진흙에 박히고 그 반대편의 둥그런 부분이 진흙 밖으로 나와 있다. 부화한 알이 1520일간 떠돌다가 바닥에 붙은 후 진흙에 몸을 넣으면 그 자리에서 3~4년을 살고 죽는다. 껍데기의 빛깔은 마른 상태에서는 회갈색이며 물에 닿으면 오색이 영롱하게 반짝이며 짙게 변한다. 껍데기의 안쪽은 흑진주 광택이 나므로 진주 양식용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키조개는 여느 조개와 달리 큼직한 패주(貝柱)를 가지고 있다. 패주는 조개관자라고도 부른다. 패주는 조개가 자신의 껍데기를 열고 닫기 위해 만들어놓은 근육이다. 생물학적 용어로는 폐각근(閉殼筋)이다. 보통의 조개 패주는 작고 질기다. 보통의 조개는 이라 부르는 근육을 껍데기 바깥으로 내밀어 이동을 하므로 패주와 같은 기타의 근육도 발달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키조개는 붙박이 생활을 하니 강한 근육이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키조개에는 이 안 보이며 패주는 작고 질긴 근육보다는 큼직하고 부드러운 근육으로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 패주를 흔히 가이바시라고 부르는데 일본어 かいばしら(가이바시라)에서 가 떨어져나간 것이다.

 

잠수를 하여 잡는다

 

바다에 잠수를 하여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잠수기어업이라 한다. 그에 동원되는 배는 잠수기선이다. 잠수부에게 동력으로 산소를 공급해주는 장치가 있는 배라고 보면 된다. 이 잠수기어업은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우리 바다에 들고 들어왔다. 그 이전 조선의 어민들은 맨몸으로 잠수하여 해산물을 잡았다. 이를 나잠어업이라 한다. 제주 해녀들이 하는 일이 나잠어업이다. 키조개는 잠수기선으로 바다에 나가 잠수부가 해저에서 잡는다.

 

키조개는 수심 5~50미터의 진흙 속에 박혀 있으므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나잠어업으로는 키조개 잡는 것이 어렵다. 그러니 일제시대 잠수기어업이 들어오면서 키조개 잡이가 본격화되었다. 초기 키조개 잡이는 남해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대부분은 일본으로 수출이 되었다. 서해에도 키조개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이다. 서해에서 키조개가 많이 나와도 한국인들은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가 일본에 수출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시장에도 나오고 식당에서도 팔리었다.

 

 

바다에 보관한다

 

오천항에는 잠수기선이 20척 가까이 있다. 이들 배가 나가서 키조개를 잡아오는 기간은 한 달에 보름 정도이다. 물살이 약한 조금 기간에 잡는다. 잡아온 키조개는 그물망에 넣어 바다 한복판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 꺼내어 가공을 하거나 판매를 한다. 바닷물 속에 담아놓으면 길게는 2개월 동안 산다. 7~8월 산란기에는 키조개를 잡지 못한다.

 

오천항에는 키조개 판매 업체와 키조개 식당들이 즐비하다. 항구에는 키조개 실은 배가 연신 들어오고 골목 곳곳에서는 키조개 다듬는 광경을 흔히 볼 수가 있다. 봄에는 키조개 축제를 열기도 한다. 오천항의 어민들은 봄 키조개 맛이 가을 키조개 맛보다 낫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봄에 많이 나올 뿐이며 사철 맛있다는 것이다. 극히 일부의 어민들만 봄 키조개가 찰기가 있고 단맛이 더 난다고 하였다. 봄 키조개와 가을 키조개를 한 자리에 놓고 비교시식을 할 수 없는 일이니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으나 조금의 차이가 있기는 있는 듯하였다.

 

<글 / 황교익 / 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