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8.(일)
▶부소산(낙화암·고란사·사자루... 등)
▶사비백제시대의 궁궐터로 추정하는 관북리유적지와 사비성의 內城으로 궁궐을 둘러싼 부소산성<세계유산>
▶外城으로 사비성을 지켰던 나성<세계유산>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있었던 정림사지<세계유산>와 5층 석탑(국보)
▶사비백제의 왕릉원인 능산리고분군<세계유산>
▶왕실의 원찰로 국보인 백제금동대향로<국보>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이 출토된 능산사지
이틀이라고는 하지만 짧은 시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주마간산(走馬看山)하였으니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확실한 말은 없다. 거꾸로 보는 만큼 알게 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좀 더 깊이 알고자 역사자료를 정리하며 공부를 했으니 다시 한 바퀴 돌게 될 때는 느낌도 다르고 좀 더 훤하고 멀리 보일 것이다.
부여 능산리고분군(陵山里古墳群)
능산리 부여나성 동편 밖에 인접하여 동서로 이어지는 능산(해발121m)의 남쪽사면 산록에 위치하며, 좌우로 야트막한 구릉들이 감싸고 있고, 고분군 앞으로는 왕포천이라는 개울이 흐르고 있다.
고분군에서 주작방향(남쪽)의 전경
풍수지리상으로 명당자리인 이곳은 능산을 주산(主山)으로 좌우에 청룡과 백호에 해당하는 능선이 감싸고 있다. 앞쪽은 능산천, 주작(朱雀) 방향에 안산(案山)이 있어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형국이다. 또한 그 너머로 백마강이 흘러 더할 나위 없는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6.東上총, 1.東下총 5.中上총, 2.中下총, 4.西上총, 3.西下총, 6.東上총, 1.東下총
능산리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5년에 고분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1916년~1917년에 걸쳐 이루어진 조사는 현재 능산리고분군으로 알려진 6기의 고분(1~6호분 또는 中上총, 中下총, 西上총, 西下총, 東上총, 東下총)에 해당된다. 7호분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이 되었다.
백제후기묘제를 알 수 있는 전형적인 석실분으로 중앙의 왕릉군 7기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이곳의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지만, 東下총은 벽화가 남아 있어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1호분(東下총)
능산리 동하총(1호분)은 벽화가 발견되어 유명한 고분으로, 밑변이 27m이며 널방(玄室)은 단면4각형의 모습으로 길이3.25m × 너비1.51 m× 높이1.94m의 규모이다. 벽화는 북벽 현무(玄武), 남벽 주작(朱雀), 동벽 청룡(靑龍), 서벽 백호(白虎)가 그려졌고, 천장에는 연화문과 유운문(流雲紋)이 그려졌다. 현재는 보존상태가 불량하여 현재 널방의 입구를 돌로 폐쇄하고 있다.
능산리 東下총(1호분) 모형
동하총벽화(자료사진)
천장의 연화문과 유운문(流雲紋); 국립부여박물관
능산리고분군은 시신을 묻기 위하여 널길을 통해 무덤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돌로 쌓아 만든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室墓)로 조성되어 있다. 천장을 어떤 형태로 마무리 했는지에 따라 볼트형과 평천장 구조로 나뉘고, 평천장 구조는 다시 단면의 형태에 따라 육각형과 사각형 구조로 나뉜다. 능산리고분군에는 이 세 가지 형식의 고분이 모두 존재하고 있다.
현재 능산리 고분군은 모두 3개의 군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1) 사적으로 정비되어 왕릉원으로 불리는 중앙지역의 능산리고분군에 7기.
2) 왕릉원 동쪽편에 있는 능산리동고분군에 5기.
3) 왕릉원 서쪽 의자왕가묘 뒤쪽으로 확인된 능산리 서고분군에 여러 기의 고분이 있다.
의자왕과 부여융 단비
의자왕의 생애(클릭하면 원본크기로 볼 수 있음)
부여융의 생애(클릭하면 원본크기로 볼 수 있음)
부여 능산리사지(扶餘 陵山里寺址)
나성과 능산리고분군 사이에 위치한 사비시대 백제의 왕실사찰 터로 능사(陵寺)로도 불린다.
백제국왕들의 명복을 빌었던 기원사찰로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다.
제3건물터 중앙방의 목곽수조 안에서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국보)가 발견되었고,
목탑지 중심부의 심초석(心礎石) 위에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국보)이 발견되었다.
그밖에 와전류, 토기류, 금속류, 목제류 등 다수의 유물과 특히 30여 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이들 목간은 현재까지 백제유적에서 가장 많은 수량이 확인되었다.
능산리사지는 잔존상태가 양호하고 출토유물에 대한 명확한 시대편년이 가능하여 삼국시대 건축은 물론 동북아시아 건축사연구에 획기적인 자료이다.
사찰 터 왼편(동쪽)으로 둔덕진 산줄기가 나성(羅城)이다.
탑과 금당을 에워싼 회랑(回廊)의 모습이 확연하다.
능사의 입구였던 중문(中門)이 있었던 자리.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 국보) 높이 61.8cm 최대지름 19.0cm
향로는 향을 피워 부정한 것을 깨끗이 하기 위한 도구이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는 한 마리 봉황이 향로 꼭대기에 앉아 있는 신령스러운 형상을 지니고 있다.
뚜껑은 부드러운 능선이 겹겹이 쌓인 산 모양이다. 신선들의 세계를 표현한 산 모양의 뚜껑에는 산악 사이사이로 구멍이 있어 향연(香煙)이 피어오르도록 하였다.
산 모양으로 향로를 형상화한 것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나라 때까지 중국에서 많이 만들어진 박산향로(博山香爐)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박산은 신선들의 이상세계인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박산향로에는 산수를 배경으로 불로장생의 신선과 다양한 동식물이 등장한다.
백제금동대향로에는 완함(阮咸), 종적(縱笛), 배소(排簫), 거문고(玄琴), 북(鼓)을 연주하는 다섯 악사를 비롯하여 신선, 새와 짐승들, 신기한 상상의 동식물들이 표현되어있다.
이들은 나무와 바위, 물 등 오묘한 산수 경치와 함께 나타나 향로의 세계를 더욱 신비하고 생동감 있는 변화무쌍한 공간으로 만든다. <국립부여박물관>
백제창왕명사리감(百濟昌王銘舍利龕: 국보) 높이74㎝×너비50㎝
능산리사지는 능산리고분군과 나성의 동쪽부분 사이에 자리한 절터이다. 능산리 절터에는 목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중문, 강당, 회랑, 공방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
백제창왕명사리감은 능산리절터의 목탑 심초석(心礎石) 위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리감의 좌우에 "백제창왕십삼계태세재(百濟昌王十三季太歲在)와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명문이 확인되었다.
곧 "공주가 창왕 13년(567)에 부왕(父王)인 성왕을 위하여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으로 이를 통해 위덕왕 13년(567)에 공주가 부왕인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절을 창건하였다는 사실과, 이후 백제 사비시대의 능사로서 이 절이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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