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8(일)
부여의 능산리고분군을 찾게 되면 백제왕릉원·백제금동향로가 발견된 능산리사지· 부여나성까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유적을 한꺼번에 모두 볼 수 있다. 먼저 나성부터 살펴보자.
❶능산리고분군 ❷능산리고분군 전시관 ❸능산리사지 ❹나성
부여나성(扶餘羅城)
위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부소산성이 왕궁의 방위를 위한 것이라면 부여나성은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수도인 사비의 외곽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다.
나성은 곧 사비도성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 안에는 왕궁과 관아, 민가, 사찰 등이 있었을 것이다.삼국 시대의 도성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흙을 다져 쌓은 나지막한 토성이다.
나성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곳이 그리 많지 않으나, 그나마 쉬이 알아볼 수 있는 곳은 능산리고분군 앞쪽 길 양 옆과 신동엽 시비가 있는 금강변에 강둑처럼 남아 있는 곳이 있다.세월에 많이 깎여서 나지막한 둔덕으로나 보이는데, 염창리의 동북문지부근의 나성단면은 밑변이 13m, 윗변은 4m, 높이는 5.2m쯤 된다. 문 자리에는 주초석과 문초석 들이 남아 있다.
□ 안팎 2중으로 구성된 성곽에서 흔히 왕궁을 둘러싼 성벽을 왕성(王城)·내성(內城)이라 부르고, 그 바깥의 민가·도시·농토까지 둘러싼 또 하나의 성벽을 나성(羅城)·외곽(外郭)으로 불렀다.삼국시대 초기에는 평지의 왕성과 그 배후에 있는 산성이 조(組)를 이루고 있는 도성이 일반적이었고, 6세기경에 이르러서야 대략 나성을 갖춘 도성제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부여청산성(靑山城): 부소산성에서 동쪽으로 약50m쯤 떨어진 해발고도48m의 구릉지에 축조된 둘레550m의 테뫼형 삼중(三重)산성으로, 북쪽성벽이 나성과 연결되어있어서 독립된 산성이라기보다는 나성과 동일시기에 축조된 부소산성의 동부보루격인 산성으로 짐작된다.
□부여청마산성(靑馬山城): 능산리 월명산의 능선과 계곡을 아우른 포곡식(包谷式)산성이며, 성벽둘레가 6.5㎞로 백제산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수도인 사비를 보호하는 외곽방어시설로 알려져 있다.
성왕대(523~553)에 쌓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완성된 시기는 7세기 초인 무왕대로 추정한다.
전체 길이 84㎞에 면적은 632,846㎡(약191,000평)에 이르는데, 크게 東쪽나성·西쪽나성·南쪽나성으로 갈라 볼 수 있다.
▶東쪽나성: 부소산성동문부근 영일루 앞 - 동쪽으로 약500m쯤에 있는 청산성 - 남쪽으로 석목리필서봉 – 염창리 뒷산봉우리 – 금강변까지.
▶西쪽나성: 부소산성 서문바깥 – 유스호스텔자리 – 관북리 – 구교리 – 동남리 – 군수리.
▶南쪽나성: 동리 – 중리 - 당리의 뒷산을 연결.
나성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구축한 외곽성으로서 현재의 부여읍을 감싸며 원상을 잘 간직하고 있다. 나성은 방어의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부여의 서편과 남편은 금강이 자연적인 방어시설로 기능하였고 자연제방이 성벽의 역할을 대신하였지만 동쪽의 경우 산지 사이로 평지가 분포하므로 인공적인 시설물이 필요하였다.
나성은 고고학적 조사 결과 총 6.3㎞의 구간이 확인되었다.
부여 지역은 북·서·남의 3면이 금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자연 조건 때문에 부여나성의 정문은 동쪽에 만들었다. 정문에 해당하는 제1동문지는 능산리 왕릉 옆의 평지에서 발견되었다.
성문의 너비는 9.5m이며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정연하게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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