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전원거(歸田園居) .... 시골에 돌아와 살며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전체는 되는대로

역사.유적.유물.지리.지질

조선의 5대궁과 종묘사직

백수.白水 2019. 8. 9. 08:01

 

 

살아오면서 어린 시절의 수학여행을 포함해 한두 번쯤은 둘러본 곳이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은 기억이 흐릿하다. 서울에 볼일이 있을 때마다 짬을 내어 돌아보고 있다.

 

 

 

 

 

1. 경복궁(景福宮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태조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을 세우고 한양을 수도로 정한 뒤 1395년에 완성하였다.

그 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867(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다시 지어 면모를 되찾았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경복궁건물 대부분을 훼손하여 근정전 등 극히 일부건물만 보존되었고, 조선총독부를 경복궁 안에 지어 궁궐을 가려버렸다.

경복궁은 1,990년 조선총독부건물을 철거하면서 복원사업을 시작했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2010년에 제자리를 찾았다.

      

 

2. 창덕궁(昌德宮

 

창덕궁은 1405년 조선의 3대왕 태종이 경복궁의 동쪽에 이궁(離宮, 別宮)으로 지은 궁궐이다.

이궁이란 전쟁이나 큰 재난이 일어나 공식 궁궐을 사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지은 궁궐을 말한다.

조선의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해,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왕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일제강점기에 많이 훼손되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건축물이 자연과 잘 어우러져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특히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후원은 조선 시대 궁궐 후원 가운데 가장 넓고 경치가 아름답다.

    

 

3. 창경궁(昌慶宮

 

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 때 지어진 궁궐로 경복궁 동쪽에 지어져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다.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대비들이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가까이에 지은 궁궐이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짓기도 했다.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에 창경궁에는 왕실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풍부하게 전해지고 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 왕후를 독살하려다 사약을 받은 곳이 취선당이고,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였던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불행한 죽음을 맞았던 곳은 선인문 안뜰이었다.

1909년 일제는 전각들을 헐어 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며 창경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었다.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원지로 이용되다가 복원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창경궁이라는 이름도 되찾았다.

 

 

4. 경희궁(慶熙宮

 

1623(광해군 15)에 완성된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궐로도 불렸다.

효종부터 철종에 이르는 10여 명의 임금이 살았던 경희궁에는 숭정전을 비롯하여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가 그 자리에 일본인을 위해 경성 중학교를 세우면서 중요 전각이 모두 헐렸다.

이후 면적도 절반 정도로축소되어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1987년부터 복원 사업이 시작돼 왕이 조회를 하던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해 자정전과 태령전을 다시 세우고,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5. 덕수궁(德壽宮

 

본래 이름이 경운궁(慶運宮)인 덕수궁은 궁궐 안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 정관헌과 근대식 석조건물 석조전이 들어서 있어 고유한 궁궐의 양식과는 다른 것이 특징이다.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 돌아온 선조가 궁궐이 모두 불에 타 머물 곳이 없자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907년 순종 즉위 후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덕수궁은 구한말 어지러웠던 시기에 조선의 멸망을 지켜본 궁궐이다.

고종은 명성 왕후가 시해된 뒤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이 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인 을사조약이 덕수궁의 중명전(重明殿)에서 체결되었다.

 

종묘사직(宗廟社稷)

 

宗廟(종묘)는 역대 왕들의 位牌(위패)를 모신 사당이며, 사직(社稷)土神(토지 신)(穀神(곡식 신)을 나타낸다. 따라서 종묘사직은 왕실과 나라를 아울러 이르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