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전원거(歸田園居) .... 시골에 돌아와 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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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後苑)을 걷다.

백수.白水 2019. 8. 11. 08:12

2019.08.07(수)


지금 생각해보니 서울에 살면서 적어도 5대궁궐(경복궁· 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과 종묘·사직,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4(백악산·낙산·인왕산·남산)정도는 둘러봤어야 되는데 건성건성 허투루 보낸 그 오랜 세월이 후회스럽다.


나이 들어 귀거래(歸去來)한 후 이제야 비로소 아쉬움을 달래며 기회를 맞춰 돌아보고 있는 중이다.

폭염 중 태풍영향으로 비바람이 칠거라던 지난주8.7, 다행히 서울지방에는 큰 영향이 없어 보슬비를 맞으며 조선의 정원 중 으뜸으로 꼽는 후원(後苑)구경에 나섰다.


비원(祕苑)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었듯 후원은 언제라도 찾아가면 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시간별로 관람인원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사전예약을 해야 낭패를 보지 않게 되고, 개인 자유 관람이 아니라 해설사의 인솔을 따라서 정해진 시간에 입장하고 또 같이 나와야한다.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산자락에 만들어진 연못과 다소곳한 정자들이 억지를 부리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아늑한 풍경 속에서 도원경(桃源境)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비단 나만의 허풍이 아닐 것이다.

 

삼국사기(김부식)에 초기백제왕궁을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로 표현하였는데, 이곳 후원도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모습이다.

 

후원 중 최고의 절경으로 옥류천(玉流川)일원을 꼽는데, 동절기와 하절기에는 이 코스를 관람할 수 없어 아쉬웠다. 앞으로 사시사철 어느 때라도 기회 되는대로 간간히 찾아볼 것이다.





부용지



후원(後苑)

창덕궁은 궁궐로서보다는 비원(秘苑)으로 익숙한 곳이다. 비원이란 창덕궁과 창경궁에 딸린 북쪽의 정원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용어는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주로 후원(後苑)이라 불렀고, 때로는 내원(內苑), 상림원(上林苑), 금원(禁苑)으로 불렀다.


창덕궁 후원은 북한산과 응봉에서 뻗어내려 수림이 울창한 자연스런 구릉지대에 점점이 시설물을 설치하여 만든 정원으로 넓이는 약9만여 평에 이른다. 원래는 창경궁의 후원과 서로 연결되어 구분이 없었으나 일제가 조선 말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조하면서 두 궁궐의 후원에 담장을 쌓아 지금처럼 분리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 가운데 가장 넓고 경치가 아름다워 일찍부터 왕실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 때문에 여러 왕에 의해 많은 누정이 지어져서 한때 100여 개 이상의 누각과 정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누각 18채와 정자 22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자연의 구릉과 계곡, 폭포와 숲에 최소한의 인공을 가해 가다듬고 여기에 어울리게 연못, 화계, 취병(翠屛, 꽃나무의 가지를 틀어서 문이나 병풍처럼 만든 것)을 가꾸어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창덕궁 후원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우리 전통 정원을 대표하는 명소이다.

 

후원은 왕과 왕실 사람들의 휴식처였을 뿐 아니라 국왕과 왕자들이 글을 읽고 학문을 연마하거나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던 곳이다. 또 임금이 논밭을 갈고 왕비가 누에를 치는 일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궁궐지에는 역대 임금이 여기에 있는 누각과 정자 그리고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시와 글, 상량문과 기문들이 수도 없이 나오니, 이곳은 궁중문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곳은 정조의 꿈이 서린 곳이었다. 그는 후원에 규장각을 세우고 여러 서고(書庫)를 지어 왕실도서관을 마련하고 규장각 각신들을 길러내어 새로운 정치와 문화를 펼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조경 원리를 흔히 차경(借景)이란 말로 설명하곤 한다. 자연을 빌어쓴다는 뜻을 함축한 이 말의 적절한 예로 창덕궁 후원을 꼽는다. 과연 그러해서 창덕궁 후원은 자연을 넌지시 빌어다 쓸 뿐 어디를 보아도 억지스럽고 지나치게 인공적이며 과도한 기교를 부린 구석이 없다.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소박한 삶을 영위하고자 했던 우리네 조상들의 심성과 자연관이 녹아 있는 창덕궁 후원은 우리 정원문화의 자존심이다. <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발췌>



●답사여행의 길잡이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2840&docId=2057112&categoryId=42848

조선의 왕들, 후원에 취하다(동영상)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2927&docId=1623720&categoryId=42927

왕이 사랑한 정원, 창덕궁 후원(동영상)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2927&docId=1623720&categoryId=42927




[후원배치도]

                

후원입구  부용지 불로문·애련지 관람지(존덕정·폄우사) 옥류천 연경당

 



[❶후원입구]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창덕궁 성정각일원의 담장을 따라서 올라가면 후원의 초입부인 부용지에 이른다. 오른쪽 문은 창경궁으로 출입할 수 있는 함양문이다.



왼쪽은 창덕궁담장이고 오른쪽은 창경궁담장이다.



[❷부용지 일원]

 


이곳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300(1000)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로 쓰였고,

영화당(暎花堂)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부용정은 연못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의 형상으로 2012년 보물 제 1763호로 지정되었다. 행사가 치러지던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도 각각 특색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이다.

현재는 어수문을 중심으로 생울타리인 취병을 재현하여 지역을 구분하고 있다.



주합루 - 어수문(중앙) - 영화당(우측)



부용정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사정기비각, 어수문과 주합루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연못 서편의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은 숙종이 지은 사정기를 새긴 비석의 보호각이다.

그 기문에 의하면 세조가 영순군(永順君)과 오산군(烏山君)을 시켜 찾아낸 네 개의 샘에 각각 마니(摩尼), 파려(玻瓈), 유리(琉璃), 옥정(玉井)이라 이름붙이고 우물을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여러 차례 병화를 겪는 동안 두 개는 사라지고 두 개만 남아 이를 애석히 여긴 숙종이 1690년에 석공을 시켜 남은 두 우물을 보수하도록 하고 이를 기념하여 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 뒤 1707(숙종 33) 그 자리에 연못을 파고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다. 그러다가 정조 초년 연못을 고쳐 쌓으니 그것이 지금의 부용지이고, 택수재 또한 고쳐 짓고 이름을 바꾸니 그것이 오늘날의 부용정이다.




영화루



주합루1층이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이고, 2층은 열람실인 주합루이다. 옛날에는 2층루각의 1층은 ’2층은 를 붙였다고 한다.




취병(翠屛)은  꽃나무의 가지를 틀어서 푸른 병풍처럼 만든 울타리이다. 내부가 보이는 것을 막아주는 가림막 역할과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을 하면서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 생기가 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주합루로 올라가는 길에 어수문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수없다'는 말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긴 문으로, 임금은 어수문으로 그리고 신하들은 양쪽의 작은 문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❸불로문·애련지 일대]



<애련지·연경당 일원 배치도>


1692(숙종 18)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애련지 서쪽 연경당 사이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 어수당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1827(순조 27)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의두합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현재기오헌(奇傲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8칸 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매우 소박한 건물이다. 바로 옆의 운경거(韻磬居)로 추정되는 건물은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다.




불로문과 애련지 일원




금마문(金馬門)은 일각대문(一角大門)으로 문 안쪽에 기오헌(寄傲軒)과 운경거(韻磬居)가 들어서 있다.



왼쪽부터 금마문, 기오헌운경거()



기오헌(좌측)은 18효명세자가 1827년에 지은 건물로 당시에는 의두합(倚斗閤)이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집이 북향인 점을 고려해서북두성[]에 의지해서[] 경화(京華)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寄傲軒(기오헌)’이란 편액을 달고 있는데,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남쪽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앉으니 무릎 하나 간신히 들여놓을 작은 집이지만 참으로 편안하구나.”(倚南牕以寄傲 審容膝之易安)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운경거(韻磬居, 우측)는 그 이름이 시와 음악이 있는 집임을 암시하고 있다.



불로문은 애련지와 연경당으로 통하는 문인데, 화강암 통돌을 아무 장식 없이 자 모양으로 다듬어 세우고 전서체로 不老門이라 음각하였다. 애초에는 문짝을 달았던 듯 돌쩌귀를 박은 흔적이 남아 있다.



애련지()와 애련정()

 


이름에 연꽃을 사랑한다는 뜻이 담겼다.



[❹관람지(존덕정·폄우사)]




이 일대는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모습은 네모나거나 둥근 3개의 작은 연못들이 있었는데, 1900년대 이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관람지라고 부른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纜亭),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砭愚榭),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勝在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폄우사는 원래 부속채가 딸린자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부속채가 없어져 단출한 모습이고, 숲 속에 자리 잡은 승재정은 사모지붕의 날렵한 모습이다.

1644(인조 22)에 세워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관람지(觀纜池)

 


곡면이 일정하지 않아 표주박 혹은 한반도를 연상하게 하는 연못이 반도지(半島池)이다. 반도지 주변은 잘 자란 나무와 물과 갖은 형태의 정자가 어우러져 옥류천 부근과 더불어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잘 정돈되고 그윽한 운치를 선사하는 곳으로, 왕실 정원의 품격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관람정(觀纜亭)은 부채꼴 모양의 평면에 앞면에 넷, 뒷면에 둘, 모두 여섯 개의 가늘고 긴 두리기둥을 부채꼴로 펼쳐 세워 입면을 구성했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공예적인 정자로 고종 대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승재정(勝在亭)이다.




다른 쪽에서 내려다본 관람정



폄우사 쪽에서 본 승재정




폄우사(砭愚榭)는 낮은 기단 위에 세운 후원의 정자 건물로 조촐한 집이다. 폄우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침을 놓는다는 뜻이다.



존덕정(尊德亭)은 선조의 어필 현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선조대에는 있었던 듯 하나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 같다. 이를 다시 세운 것은 인조 22(1644)이었다.

평면이 육각형이기 때문인데, 여섯 개 가운데 두 개가 수면 위로 솟은 두리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다음 바닥에는 마루를 깔아 본채를 마련하였으며, 그 주위로 처마에 잇대어 지붕을 따로 씌운 퇴칸을 한 겹 돌려서 마치 지붕이 이중으로 겹쳐 있는 것 같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 퇴칸의 모서리마다 가는 기둥 세 개씩을 세운 점도 다른 데서는 좀체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존덕정 앞의 연못에서 물이 넘쳐 반도지로 흘러드는데, 물길 위에 화강암을 다듬어 홍예(虹蜺, 무지개모양)를 튼 예쁜 다리 하나가 놓였다.



천정 한가운데 육각 평면에 마치 용상 위 보개처럼 왕을 상징하는 청룡, 황룡을 화려하게 그려넣어 격이 높은 건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6.연경당과 선향재]

 

 

연경당(演慶堂)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순조 28)경에 창건했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는 연결되어있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민가가 99칸으로 규모가 제한된 데 비해, 연경당은 120여 칸이어서 차이가 난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후원 높은 곳에 있는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안채 뒤편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반빗간이 있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선향재(善香齋)는 서재 겸 응접실로 쓰이던 건물로 차양이 길게 덧대어져 있고 측면이 벽돌로 쌓아올려져 있어 중국 건물처럼 보인다.



연경당(演慶堂)은 본래 바깥행랑(외행각), 안행랑(내행각 혹은 남행각), 서행랑(서행각)과 여기에서 이어진 담장 안에 들어선 사랑채, 안채, 선향재, 농수정, 그리고 반빗간 따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연경당은 이 건물군의 사랑채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건물 전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집으로, 전문가들도 우리 건축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서 짜임새 있게 지어진 집으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연경당은 한국 주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거기에 투영된 미감도 우리의 미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연경당의 안채는 안방과 마루, 건넌방과 누마루와 부속채까지 모두 갖추고 있으나 살림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행랑채



가마를 보관하고, 말말을 매어놓는 마구간, 변소 등을 갖췄다.



옥류천(이번에 관람하지 못한 지역)

 

옥류천은 후원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1636(인조 14)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籠山亭), 취한정(翠寒亭), 청의정(淸漪亭)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는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淸漪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이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청의정만 궁궐 안의 유일한 초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