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이 포천시 적성면 장좌리를 휘감아 돌아가면서 대안(對岸)인 임진강 북쪽에 ∩자모양의
길고 가파른 수직석벽을 만들었으니 이곳이 바로 송도8경의 하나인 고랑포의 장단석벽(長湍石壁)이다.
이 석벽은 그 길이가 얼마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수지석벽이 워낙 높아서 강바닥으로 내려 갈 수가 없다. 띄엄띄엄 몇 군데
계곡에서 내려온 물이 석벽을 침식시켜서 강 쪽으로 도랑을 만들어 놓았지만...
고랑포석벽은 경고문에서 보듯 전 구간이 민간인 통제구역이라서
출입이 불가능하여 강바닥에 내려가서 석벽을 자세히 살필 수가 없다.
고랑포나루 선착장
옛날 조선시대나 한국전쟁발발이전까지는 황포돛배가 소금,새우젓,생선,쌀,인삼,콩을 싣고 고랑포를 지나 파주와 마포나루 까지 한양을 오갔다고 한다.
강 남쪽이 파주시 적성면이고 북쪽은 연천군 장남면. 두지나루에서 장남교를 건너면 바로 이정표가 서있다. 원당2리:1km. 원당면사무소:1.5km. 원당1리:2.5km. 원당3리:2.5km. 호로고루성:3km. 자작리:3.5km 1.21무장공비침투로:8.2km다.
내가 사는 동네가 원당2리, 면사무소가 있고 북쪽으로 도로를 따라 쭉 올라가면 자작리에서 동서로 연결되는 372번 지방도를 만나는데 더 이상 북으로 오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임진강에서 대략4km 이북은 민통선(민간인통제선)이며 막혀있는 산을 넘으면 남방한계선(철책선)이 남북을 가른다.
군사분계선 남북으로 각각2km에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을 표시하는 철책선이 있고 철책안쪽 공간이 비무장지대(DMZ)다. 민통선 안에는 허가받은 사람들만 출입영농을 하는데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민가도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현재 파주시의 민통선 안에 있는 4개면(군내면, 장단면, 진동면, 진서면)에 소위 민통선마을로 불리는 통일촌, 해마루촌, 대성동마을 등이 있는데 이렇게 특별한 곳에만 거주가 허용되고 있다.
자작리에서 372번 도로를 만나고 좌회전해서 조금 더 달리면 고랑포가 나온다. 그곳 도로변에 공원이 조성되어있고 안내판이 서있다. 북쪽 산길로 오르면 신라경순왕릉, 도로를 계속 따라가면 군 초소가 나오는데 사전에 면사무소의 허가를 받은 사람들만 들어가서 1.21무장공비침투로를 볼 수 있다. 무장공비들이 남방한계선 철책을 뚫은 곳이다. 침투로는 고랑포공원에서3 km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고, 호로고루성은 상류 쪽 그리 멀지 않은 강변에 있다.
자작리에서 고랑포구로 가는 길 오른 편에 고읍동(古邑洞)이라고 조그만 팻말이 꽂혀있는데 이는 이곳에 고려시대와 조선 초에 장단현의 관아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단의 옛 지리지를 참고하면, 광해군 때 이곳에 있던 장단현의 관아 건물이 현재의 파주시(옛 장단군) 군내면 읍내리로 옮겨지면서 이곳 지명이 ‘고장단(古長湍)' 또는 ‘고읍(古邑)'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현재 관아가 있던 곳은 모두 농지로 변해 버렸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와편들이 널려 있고 많은 생활유물들이 수습되기도 한다.
지금 고랑포리에서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고랑포리는 본래 장단도호부 장서면(長西面)의 관송리(貫松里) 지역이며, 임진강에 ‘고랑개’ 또는 ‘고랭이’ 라는 포구가 있어 고랑포라 불리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관송리를 고랑포리로 개칭하여 장남면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 후에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민간인 통제구역에 속해 있다가, 1963년 1월 1일 「수복지구와 동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하여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4월 1일 다시 장남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전 지역이 휴전선과 인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일부 지역에만 출입 영농이 가능한 하나의 법정리이다.
가운데고랑포[中高浪浦] : 아랫고랑포 위에 있던 큰 마을. 고랑포 3개 마을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한국전쟁 전까지 2·7일 장이 섰던 상권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마을 동쪽의 임진강 장단석벽 위에는 한국전쟁 전까지 장남면사무소를 비롯한 여러 기관의 건물이 있었으며 고랑포나루에는 항시 많은 상선들이 정박하며 성황을 이루었던 명소이다. 아랫고랑포[下高浪浦] : 서원말 동쪽, 고랑포의 3개 마을 중 가장 아래에 있던 마을
윗고랑포[上高浪浦]:고랑포나루 북쪽에 있던 마을. 한국전쟁 전까지 고랑포국민학교가 있던 곳이다.
자지포(紫芝浦) : 윗 고랑포 동쪽에 있던 마을.
전쟁이후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고랑포리의 1930년대 가장 번성했던 마을 모습. 화신백화점 분점이 보인다.
고랑포 나루터는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다. 가운데 고랑포와 윗고랑포 사이에 있었으며 파주시 적성면 장좌리와 연결되었던 곳으로 옛 문헌에는 ‘고랑도’라고 기록되어있다. 한국전쟁 전까지 임진강에서 가장 번성했던 포구였으며, 서해안으로부터 조기, 새우젓, 소금 등과 콩, 땔감, 곡물 등을 교역하였고 교통이 편리한 조건으로 인하여 경기북부 지역의 농, 특산물 집하장 역할을 하여 상권형성의 중심지였다.
새우젓이나 소금을 싣고 서해로부터 올라온 큰 배가 다다를 수 있는 임진강의 마지막 포구인 고랑포는 일제 강점기만 하더라도 큰 배는 물론 개성과 한양으로 오가는 ‘도라꾸(트럭)’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인근을 통틀어 고랑포 시장만한 큰 장이 없어 개성의 산물들이 집결했기 때문이다. 시장 상인들이 돈을 갹출해 일 년에 한 차례씩 치렀다는 고랑포의 고창굿은 며칠을 두고 이어졌는데 어린 무동 일곱 명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무동들은 고랑포나 인근 지역주민들의 아이들이 아니라 개성권번에서 곱상하게 생긴 어린 아이들을 데려와 무동으로 삼았다. 이처럼 경기 파주 일대에서는 개성과 왕래한 이야기들이 임진강 하류의 푸진 강물만큼이나 흔하다.
국토의 분단으로 인해서 지금은 나루의 흔적을 거의 찾기 어렵고 군부대 앞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은 편이다. 현재 2명의 어업종사자가 허가를 얻어서 어업활동을 하고 있다.
한반도 중부 지역의 주요 교통로였던 임진강의 하운의 중심지가 문산포와 함께 고랑포였다. 임진강의 하운은 하구에서 상류로 문산포와 고랑포를 지나 약 90km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고랑포를 지나 상류로 올라갈 때는 여울이 많아 통행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임진강을 지나 지류인 한탄강으로 올라가서 전곡까지 배가 다녔다고 한다. 현재는 소공원이 조성되고 나루터는 철문으로 닫혀있다.
고랑포에는 대규모의 시장과 마을이 6.25 전까지 번창했다. 서해의 조기, 새우젓, 소금(주로 가까운 강화 소금) 등이 서해가 만조가 되었을 때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고랑포에까지 왔다. 그리고 이 지역의 명산물인 장단콩, 땔감, 곡물 등과 교역하였다. 육지와 하운 교통의 요지로서 주변 지역인 파주, 연천, 장단 등의 곡물들의 집산지였다. 특히 장단콩의 집산지로 전문 객주가 7-8명이 있었다고 한다. 장단콩 출하는 음력 9-10월에 시작하여 강이 결빙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현재 장단콩이 다시 살아나서 파주와 문산 여러 곳에 장단콩 두부집들이 성업 중이다. 오두산 통일전망대 부근에 장단콩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동해의 물산이 추가령 고개를 넘어서 고랑포까지 와서 배에 실려 서해로 나가기도 했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 때의 고랑포 마을의 전경을 보면 약방, 시계방, 면사무소가 있었다. 현재의 주소는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205, 206번지이다. 고랑포 뒤편 산록에 경순왕릉이 있다. 38선에 인접하여 6.25때는 격전지였다. 경순왕릉에도 총탄의 흔적들이 많이 발견된다. 고랑포는 문산포와 함께 뱃길의 안전과 포구의 번성을 비는 도당굿에 유명하였다. 특히 고랑포는 윗고랑포와 아래고랑포가 3년을 주기로 7일씩 경쟁하면서 총 보름동안 치루었다고 한다. 이 도당굿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는데, 음력 2월에 열렸으며 정월 10일부터 진행되었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만큼 고랑포의 위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의 모습은 2006년 6.25 격전지였던 만큼 연천군에서 군부대의 협조로 지뢰를 제거하고 공원(고랑포 소공원)을 조성하였다. 고랑포에 인접하여 경순왕릉과 호로고루성이 자리잡고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임진강의 규모 있는 포구들로 고미포, 도감포, 토막포, 자지포 등이 있었다. 화석정 아래에 있던 나루터는 임진나루(臨津渡)였다. 나루터는 한자로 도(渡), 진(津)이고 규모가 크지면 포(浦), 항(港)이 된다. 진(鎭) 명칭은 군사기지이다.
이 곳 임진강변의 석벽은 장단석벽이라 하여 송도팔경(松都八景)의 하나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망라해서 각 제왕들과 선현들이 자주 찾아와 절경을 감상하고 시문을 남긴 곳으로도 유명하다. 고랑포 일대는 이 석벽 외에도 고호팔경(皐湖八景)이라 하여 지금까지도 그 절경들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와 같이 경순왕릉이 자리하고 있는 아름다운 땅, 고랑포는 현재 폐허가 된 채 한국전쟁의 상흔과 분단의 안타까운 역사의 현실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송도팔경은
1)북산의 안개비(北山煙雨)· 2)서강의 눈보라(西江風雪)· 3)백악의 비 갠 구름(白岳晴雲)· 4)황교의 저녁놀(黃橋晩照)· 5)장단의 석벽(長湍石壁)· 6)박연폭포(朴淵瀑布)에 7)전팔경의 자동심승(紫洞尋僧)과 8)청교송객(靑郊送客)을 더한 것이다.
“개성 꼬마기생도 왔지” 남도 북도 없던 굿판의 추억
시장 흥성했던 임진강 환승포구 고랑포
온마을 한달 준비해 사흘밤 신명 굿판 개성·철원서도 구경꾼 몰려들어
1998년 원당리에 살던 권태응 옹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이는 분단 이전, 고랑포 일대에서 벌어지던 고창굿에 대한 증언을 해 주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그이를 처음 만난 것은 1994년이었다.
한참 휴전선 일대의 촬영을 다닐 무렵이었고 그이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高浪浦)에 살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고랑포 지역은 민간인출입통제선 이북이어서 검문소를 통과 할 때 마다 신분증을 내고 사진촬영도 제한적인 시절이었다. 취재를 하려면 국방부에 취재협조 공문을 보내고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 현장에서는 안내장교가 따라다니며 성가시게 간섭을 하고 심지어 사진을 몇 장이나 찍었는지조차도 체크를 하곤 했었다.
고랑포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이 있는가 하면 분단 이전에는 서해바다나 한강으로부터 임진강으로 이어지는 내륙 수운의 마지막 종점이기도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환승포구였던 셈이다. 서해바다 물이 넘나드는 고랑포까지는 큰 배가 들어 올 수 있었지만 그곳부터는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탄 후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던 것이다. 400석이나 되는 곡물을 실은 배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하니 당연히 사람들이 들끓었고 시장이 섰다. 고랑포의 시장은 임진강 유역에서는 경기도 파주시의 문산포와 함께 가장 번성했던 것으로 손꼽혔으며 강 건너 개성으로 이어지는 내륙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더구나 임진강변을 따라 펼쳐지는 석벽의 아름다움은 빼어나 뭇 시인 묵객들의 발길을 붙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고려의 문신인 익재(益齋) 이제현(1287~1367)은 <익재난고>에 ‘송도팔경’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그 중 장단석벽을 두고 “물에는 석벽 솟구치고 / 공중에 검은 절벽 펼쳐져 있다 / 물고기와 용들이 모퉁이에서 돌아들고 / 초록이 백리토록 덮여 있다 / 달이 잠기니 파리옥의 빛이고 / 꽃이 떨어지니 수놓은 비단 무더기라 / 그림배 술을 싣고 관현 가락 재촉하여 / 하루에 천 바퀴나 돌아다닌다.” 라고 노래했으며 고려와 조선의 왕들까지도 석벽 아래에서 뱃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내가 권태응 옹을 만나러 너덧 차례나 부득부득 찾아 갔던 것은 이렇듯 자료를 뒤적이면 나오는 이야기들을 또다시 듣고자 함이 아니었다. 고랑포 근처 원당리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살아 온 그이를 통해 이젠 사라져 버린 마을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던 것이다. 그이는 11대째 같은 곳에 터를 잡고 살아 왔으니 토박이나 진배없으며 한국전쟁 이전의 마을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 이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분단 유목민이 되었던가. 본디부터 유목민이었더라면 나름대로 문화의 틀을 갖췄겠지만 고향을 상실한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지녔던 문화가 해체되어가는 아픔을 겪으며 또 다시 정착한 곳의 문화를 이식해야하는 이중의 고통을 받기 마련이다. 그나마 몸은 한 곳에 정착했을지라도 마음만은 그렇지 못해 습관적인 유목의 방랑을 멈추지 못하지 않겠는가.
11대째 살아온 마을 사라져 문화란 끊임없는 고리로 연결되며 이어져야 하는 것인데 전쟁으로 인해 마을이 사라지고 주민들이 떠나면서 흔적조차도 찾을 길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전쟁의 포화를 피한 유형의 것들은 그나마 남아 있지만 그 마저도 드물기는 매 한가지이다. 더구나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무형의 것들은 깡그리 사라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근 10여 년 간 민북지역 혹은 접적지역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지역을 쏘다니면서 전통문화와 같은 것을 조사했지만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마을은 있지만 그 마을들이 자연부락의 형태가 아니라 한번 해체되었던 것을 인위적으로 다시 조성한 이주 지역이었기 때문 일 것이다.
그이가 살던 원당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웃한 고랑포리에는 아예 사람이 살지 못하고 원당리와 자작리 일대에만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러니 면면히 이어져 오던 마을 문화의 유기적인 관계성은 끊어져 버린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 내가 권태응 옹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엄연한 사실이었고 개연성이 충분한 것이었다. 왜 이렇게 말을 하느냐하면 그가 말하는 것들을 상상해 낼만한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랑포는 1934년까지는 관송리로 불렸으며 웃고랑포인 자지포, 가운데 고레이라 불리던 중고랑포, 아랫 고랑포와 세곡동, 육동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해마다 큰 굿판이 벌어졌는데 고창굿이라고 했다.
고창굿은 대단한 굿이었어요. 인근 지역에서 굿하는 날이 되면 며칠씩 고랑포에 와서 구경을 하고 가고 그랬어요. 보통 정월 10일께 부터 굿을 준비해서 2월 10일께 좋은 날을 잡아 굿을 했어요. 나야 별 관심이 없어 직접 일을 하거나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워낙 큰 행사였고 내가 또 면에 있어서 이것저것 많이 도와주기도 하고 그랬어요. 고창 굿은 항례제라는 것과 수신제라는 것으로 행사를 했는데 그걸 준비하는데 만도 한달 동안 준비를 했어요. 무동(舞童)이나 취군이라는게 있었고 50명 정도 되는 장정들이 그 무동들을 어깨에 올리고 취군들 풍물에 맞춰 춤을 추는 걸 연습하고 그랬어요.
하루 종일 하는 건 아니고 틈 날 때마다, 겨울이니까 농한기라 바쁜 일들이 없으니까 모여서 하곤 그랬어요. 무동은 남자들만 하는 게 아니라 여자들도 했는데 너무 어려도 안 되고 너무 커도 안 되고 해서 다섯을 전후한 아이들 중에서 댕기 머리를 길게 딴 아이들을 골랐어요. 무동은 전부 13명 정도였는데 여덟은 여자아이로 팔선녀라고 했는데 이들은 개성의 권번에서 데려왔어요.
그리고 다섯은 오동자라고 해서 마을의 사내아이들한테 색동옷을 입히고 그랬어요. 무당들이 말을 타고 아래고레이로 가면 그 뒤로 농악대하고 무동들이 뒤를 따르며 춤을 추었어요. 무동들이 장정들 어깨 위에서 이리저리 춤을 추는데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난리였어요. 그 뒤로는 깃발들이 따랐는데 오색기가 끝도 없이 펄럭였어요. 고랑포 장에 있는 상가에서 서로 돈을 내서 깃발을 만들었는데 색색으로 만들었어요. 길이가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올려다봐야 했으니까 삼사 미터는 됐던 것 같아요. 그런 깃대들이 사오십 개가 색색으로 있었으니 장관이었지요. 그 행렬이 앞장서면 뒤로는 장남 사람들만이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뒤를 따르고 그 주변으로는 행상들이 말도 못하게 몰려들어 장사를 하곤 했었어요.
그 와중에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많아 미아보호소도 만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렇게 아래 고레이에 있는 남신에게로 가서 다시 한바탕 놀고 남신을 모시고는 웃고랑포로 돌아 왔지요. 무당들이 아래 고레이 부군당에서 남신을 모시는 동안 취군들 하고 놀이패들은 고랑포 공굴 다리 옆에서 신나게 노니 사람들 흥이 절로 났던 것 같에요. 말로야 이렇게 밖에 못하지만 그때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마을이 들끓었던 같애요. 개성이나 고양, 철원에서도 사람들이 구경 오고 사람들이 그래 모이니 장사꾼들이 오죽 했겠어요. 동네가 굿이 벌어지기 하루나 이틀 전부터 북적거리기 시작해 굿이 끝나도 그 여파가 하루나 이틀 정도 갔으니까, 굿은 이틀 낮 사흘 밤을 했지만 실제로는 일주일 정도가 흥청거렸어요.
아래 고레이에서 무녀들이 남신을 모시고 다시 웃 고랑포로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제 웃 고랑포 부군당에 다시 도착하면 서너 평 정도 되는 부군당에 신들을 모셔 놓고 본격적인 굿판이 벌어지는데 열두거리 굿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 이틀밤 사흘 낮을 했었어요. 사흘째 되는 날은 강가로 내려가 수신제(水神祭)를 지냈는데 이게 또 재미있었어요. 사람들은 석벽 위에 서서 구경을 하는데 고랑포 나루터에서 무당들이 배를 타고 강 한가운데로 나가요. 그리고는 큰무당이 허리에다 무명 천으로 줄을 묶고 한쪽 끝은 배에다 묶어요. 그리고는 강으로 수차례 뛰어 들었다가 나오곤 했는데 그건 강을 끼고 살고 특히 고랑포는 강이 마을 생업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으니 수신을 달래는 행동이었다고 그래요.”
고랑포는 앞서 말한 대로 임진강 하류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써 수운과 육운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그래서인지 농업보다는 상업과 운수업이 크게 번성했던 곳이다. 그러니 자연히 물을 관장하는 신에게도 제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흥하던 굿판이 벌어지지 않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말 부터였다고 권태응 옹은 기억한다. 해방 후에 한차례 더 고창 굿이 있고 난 뒤에는 삼팔선으로 장남면이 둘로 갈라지고 또 다시 한국전쟁으로 휴전선으로 마을이 갈라진 것이 고착되면서 더 이상 고창 굿은 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권태응 옹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서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여태껏 우리들은 분단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엄숙하며 사상사적인 이야기들만 해 오지 않았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비무장지대가 생태계의 보고 이전에 우리 민족문화에 있어 남북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의 하나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나무와 풀 그리고 짐승들이 자라기 이전에 사람이 살았던 그곳에 대한 천연자원의 조사뿐 아니라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향유했던 문화적 행위들에 대한 조사도 빠뜨리면 안 된다. 분단 1세대들이 하나 둘씩 유명을 달리하는 이즈음까지 그것 하나 제대로 해 놓지 못한 우리들은 깊이 반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무장지대, 그곳은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땅이니까 말이다. [이지누/글 쓰는 사진가의 인물로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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