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금강산'으로 불리는 용봉산(381m)은 사람으로 치면 작은 거인이다.
낮고 작지만 웅장하고 기백이 넘치는... 웅혼(雄渾)한 산이다.
옹골진 화강암이 기암괴석으로 솟구쳤고 수백 길이나 되는 직벽은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냈다.
충청도를 가르는 차령산맥의 지맥으로 가야산의 한 줄기인 용봉산(龍鳳山·381m)은 산세가 용의 모습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고려시대에는 차령 너머 충청도 서북쪽 최대 도시인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의 북쪽 진산이어서 '북산(北山)'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8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팔봉산'이라고도 했다. 또 일제 강점기에는 산의 정상이 홍성군 홍북면에 속할 뿐 아니라 용봉사(龍鳳寺)가 있어 홍성군 지역을 용봉산, 예산군 덕산면 쪽에 수암사(秀岩寺)라는 절이 있다고 예산군 지역의 산을 수암산(260m)이라고 각각 부르기도 했다. 사람들은 기암괴석으로 뒤덮인 용봉산을 금강산과 비슷하다고 해서 오래 전부터 '소금강산'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용봉산 남쪽 기슭에 통일신라 39대 소성왕 원년(799)에 지은 사찰 용봉사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오래 전부터 용봉산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 홍주일보 (hjn24.com)>
*빨강선: 1차산행로 ☞ http://blog.daum.net/ybm0913/4548
(용봉산 주봉과 노적봉-악귀 –최영장군 활터-미륵불, 2016.10.23일)
*파랑선: 이번 2차산행로
사람이나 사물의 본모습을 보려면 이모저모 요리조리 뜯어봐야지 어느 한쪽에서만 보게 되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20여일 만에 다시 오르는 용봉산, 첫 산행 때는 용봉초등학교에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을 따라 최고봉 – 노적봉 – 악귀봉을 왕복했으나, 오늘은 지난번과 달리 반대방향으로 자연휴양림매표소에서 악귀봉 – 노적봉 – 최영장군활터로 좀 더 넓은 범위를 잡아 내려왔다.
같은 길을 걷더라도 갈 때 풍경이 다르고, 되돌아올 때의 감흥이 다르지 않던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려면 어쩔 수없이 단선(單線)산행을 해야 하지만,
시간이 허락된다면 복선(複線)을 그리는 원점 회귀산행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
욕심을 부리자면 선(線)보다는 면(面)을 그리는 것이 더 좋겠고...
습관처럼 주능선만을 치고나갔다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비경을 보았다.
용봉사(龍鳳寺)
돌 축대 위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지금 절은 실은 원래 자리가 아니다. 현재 자리 서쪽으로 좀 높은 곳에 절이 있었는데 그 터가 명당이라 하여 풍양 조씨 일가가 묘를 쓰겠다고 절을 폐해버려 밀려 내려온 것이다. 지금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채뿐으로 190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옛터에 거대한 마애불이 있고 석조와 절구, 맷돌이 남아 있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용봉사의 창건이나 중수에 관해서는 전하는 이야기가 없다. 다만 옛터에서 가끔 나오는 백제 때의 기와조각이 이 절이 백제 시대에 이미 지어졌음을 말해 준다. 또 절 입구에는 통일신라 때의 마애불입상이 있고 산 정상 부근에 앞에 말한 고려 때의 마애불이 있어 이 절의 오랜 내력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홍성 읍내에도 절터에서 가져갔다는 유물들이 있는데, 건양각(乾陽閣)에 고려 시대의 좌불이, 홍성여고 안에 옥개석이 깨진 삼층석탑이 있다. <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 충남>
다산 정약용은 1795년(조선 정조19년) 1월 정3품인 동부승지로 제수되었다가 그해7월에 청나라신부 ‘주문모 잡입사건’으로 종6품인 금정도찰방(역참에 속하는 역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지금의 역장과 비슷)으로 좌천되어 홍주 보령 등을 유람할 제 홍주의 용봉산에 들려 기암괴석의 아름다움에 반해 감탄하며 시를 지었다.
過龍鳳寺(과용봉사) 용봉사에 들러
홍주(洪州)에서 북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다
西海寡名山 (서해과명산) 서해의 지역이라 명산은 적고
墳衍厚肌肉 (분연후기육) 기름진 넓은 들만 깔리었는데
不圖蛻化骨 (불도태화골) 뜻밖에도 본질을 탈바꿈하여
梳洗出平陸 (소세출평육) 머리 빗고 몸 씻어 평지에 나와
群巒起岧嶢 (군만기초요) 뭇 봉우리 드높이 솟아오르니
刻削散大朴 (각삭산대박) 가팔라 투박한 살 털어버렸네
廉纖欲銷滅 (렴섬욕소멸) 가녀린 꼴 금세 곧 소멸할 것만 같고
巀嵲復森束 (찰얼복삼속) 험난하여 또 다시 삼엄한 느낌
驚鴻矯自擧 (경홍교자거) 놀란 기러기 고개를 높이 쳐들고
奇鬼伺還伏 (기귀사환복) 별난 귀신 엿보다 도로 엎드려
佞臣獻側媚 (녕신헌측미) 아첨하는 간신은 참소 올리고
儇女含慍毒 (현녀함온독) 경망한 아녀자가 독기 품은 듯
制造信崎崛 (제조신기굴) 생김새 그야말로 특이하구나.
百態紛駭矚 (백태분해촉) 온갖 형태 보는 눈 휘둥그레져
...............................
僕夫向余言 僕夫向余言 따르는 종 나에게 말해주기를
蘭若在中谷 蘭若在中谷 절간 하나 골짝에 들어있다나
下馬理輕策 下馬理輕策 말을 내려 지팡이 들고나서니
豈復念緋玉 豈復念緋玉 관원 신분 생각을 할 게 뭐 있나
脩陰下曾阜 脩陰下曾阜 긴 그늘 높은 언덕 내리덮이고
錦石委澗曲 錦石委澗曲 비단 돌 시내 굽이 깔리었는데
巖峭經微霜 巖峭經微霜 서릿발 살짝 덮은 드높은 바위
紅薜間翠竹 紅薜間翠竹 푸른 대에 끼어든 붉은 담쟁이
禪樓出樹杪 禪樓出樹杪 절간이 나뭇가지 위에 나오니
滄涼便悅目 滄涼便悅目 싸늘한 정경에도 반갑고말고
老僧辭荒廢 老僧辭荒廢 노승이 하는 말이 절이 황폐해
未足待信宿 未足待信宿 이틀 유숙 접대는 할 수 없다나
破筧餘點滴 破筧餘點滴 깨진 대홈통 물줄기 아직 남았고
古殿暗丹綠 古殿暗丹綠 낡은 절간 단청빛 흐려 어둡네
旣不愛禪逃 旣不愛禪逃 절간살이 내 이미 달갑잖은데
詎必隨僧粥 詎必隨僧粥 어찌 굳이 중 따라 죽을 마시랴
却憶南皐子 却憶南皐子 생각난다 지난날 우리 남고자
與觀華山瀑 與觀華山瀑 어울려 화산 폭포 구경할 적에
放浪白雲巓 放浪白雲巓 흰 구름 산마루에 방랑을 하며
吟嘯震林木 吟嘯震林木 숲나무 진동하게 노래불렀지
盛事足歎詑 盛事足歎詑 그때 그 성대한 일 감탄겹거니
俯念傷局促 俯念傷局促 오늘날 매인 신세 가슴 아프네
棲棲作客旅 棲棲作客旅 나그네 몸이 되어 떠돌다보니
無人問幽獨 無人問幽獨 고독한 사람 찾을 틈이 없구나
所以靈悟人 所以靈悟人 이 때문에 또 깨친 사람이라야
纔能齊寵辱 纔能齊寵辱 비로소 영예 치욕 같아지는 법
*. 남고자 : 윤지범(尹持範)을 가리킴.
<출처: 茶山詩文集 시29 제2권>
햇빛과 단풍그림자 때문에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아 자료사진을 아래에 옮긴다.
용봉사 정원명 마애불
용봉사로 오르는 길 왼쪽 바위에 숨은 듯이 있다. 바위 면을 감실을 파듯이 파 들어가 불상을 조각했는데 머리 쪽은 좀 깊게 파고 아래로 올수록 파 내려간 깊이가 얕아진다. 오른쪽 어깨 옆 바위 면에 3행 31자로 불상조성기가 새겨져 있어 대강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글자가 더러 마모되어 전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으나 조성기는 대략 이렇게 읽힌다.
貞元十五年己卯四月日仁符
○佛願大伯士元烏法師
○香徒官人長珍大舍
이에 따라 이 불상이 통일신라 소성왕 1년(799) 4월에 장진대사가 발원하여 원오법사가 새겼음을 알 수 있다. 마애불의 경우 조성년대가 분명한 것이 많지 않으니 이처럼 조성년대가 확실한 것은 다른 불상의 연대를 짐작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에 사료가치가 높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얼굴이 긴 편이며 가는 눈이 살짝 웃는 표정을 보이고 입 좌우가 옴폭 들어가 수줍게 웃는 듯한 모습이다. 얼굴 표정에 비해 신체는 밋밋하게 조각된 셈이다. 물결치는 옷주름이 아래로 처져 있으며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가슴께로 들어올렸다. 광배 표현도 감실을 파면서 선으로 희미하게 표현해 놓아 뚜렷하지 않다. 이런 표현들이 통일신라 하대에 지방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어 조성년대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하반신 표현이 거의 없는데다가 아래쪽에 시멘트로 단을 만들어 놓아 전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현재 키는 2.1m이다.
<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 충남>
절의 서쪽 약간 높은 곳 원래 용봉사가 있었던 자리다.
조선 후기 까지는 용봉사가 수덕사에 버금가는 큰 절이었으나, 1906년 풍양 조씨 가문에서 절을 부수고 공조참판을 지낸 조희순의 묘를 썼다.
묘비명에는 朝鮮嘉善大夫工曹參判平壤趙公羲純墓<조선가선대부공조참판평양조공희순묘> 조선국 가선대부 공조참판 평양조씨 희순의 묘>라고 쓰여 있다.
가야사를 불태우고 그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쓴 대원군의 사례를 본뜬 것일까.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절에서 200m쯤 올라가면 용봉산 거의 정상께에 넓은 터를 앞에 두고 우뚝 솟은 바위 면에 거대한 마애불입상이 있다. 이 부근이 용봉사 옛 절터이다. 옛 행정명칭대로 흔히 신경리 마애불로 부르나 현재 소재지 명칭은 홍북면 노은리이다.
앞으로 조금 숙은 바위 면을 역시 감실을 파내듯이 파내어 그 안에 숨은 부처를 드러낸 듯이 새겼다. 불상 앞쪽에 넓은 공터가 있고 한 단 축대 위에 모셔져 있어 더 우러러보게 된다. 전체 높이가 4m에 이르는 만큼 멀리서 보면 자못 엄숙하고 권위 있게 보인다. 한편 가까이 가 보면 인자한 맛도 없지 않다.
용봉사 입구의 마애불입상처럼 머리 부분은 깊게 새겨 얼굴은 매우 풍만한 편이나 아래쪽으로 갈수록 신체 표현이나 옷주름은 얕은 돋을새김으로 되어 있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몸에 거의 붙이고 왼손은 가슴께에 올려 편 모습이다. 바위 면에 감실을 파낸 안쪽으로 얕은 선으로 두광과 신광의 표현을 하였다. 머리 위쪽으로 바위 위에 보개처럼 돌 하나를 얹었다. 전체적으로 우람한 편이나 괴체화되지는 않은 고려 때 불상으로 여겨지며 보물 제355호이다. <출처: 답사여행의 길잡이, 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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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사 오른쪽 봉우리인 용바위
용바위 너머 내포신도시
악귀봉이다.
삽살개바위
물개바위
옆집 펜션의 부녀
악귀봉에서 보는 노적봉(앞)과 맨 뒤 오른쪽 봉우리가 최고봉.
악귀봉 전망대로 가는 길
왼쪽 수덕산과 용봉저수지
맨 왼쪽 끝이 두꺼비바위
노적봉
행운바위
옆으로 크는 소나무(수령100년)
사진으로 여성봉을 흉내 냈는데...어림 턱도 없다.
최영장군 활터에 있는 정자가 보인다.
최영장군 활터에서 하산하는 길, 왼쪽 능선과 계곡의 풍경이 그야말로 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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