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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내항과 안흥외항(신진도)

백수.白水 2017. 1. 7. 13:55

2017. 01.06(금)

안흥항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진 가의도에 들어가려고 안흥내항에 들렸으나, 여객선은 안흥외항(신진도)에서 출발한다고 하여 양쪽을 모두 들르게 되었다. 결국은 배시간이 맞지 않아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왔다.

 

 

 

 

안흥내항

 

 

 

 

 

 

 

 

 

 

 

유람선은 외항과 내항 어느 곳에서나 탈 수 있다.

 

 

 

 

 

 

 

 

안흥외항(신진도)

 

 

 

 

 

 

 

 

 

 

 

 

 

 

다리로 인해 관광명소로 변하고 있는 섬

신진도(新津島)

 

 

 

신진도 개요

 

섬의 전체 면적은 1.43km2이며, 해안선길이 7km, 최고 높이 132m, 경사는 비교적 완만하다. '신진도(新津島)'라는 이름의 유래는 '새나루'에서 시작된다. 오래전 육지사람과 섬사람이 오가면서 나루를 하나 만들었는데 '새나루'라 불렀다. 신진(新津)은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신진도는 면적은 넓지 않지만 경관이 빼어나고 먹거리가 풍부하다. 태안반도 중심부에서 넓은 바다로 뻗어나가는 모양새가 일품이다. 정죽반도 끝에 위치한 신진도는 태안군으로부터 40km, 근흥면으로부터 1km 거리에 있다. 원래는 섬이었으나 지금은 신진대교라는 다리로 인해 섬의 지위에서 벗어났다. 안흥~신진도를 연결하는 신진대교는 지난 1995년에 개통되었다.

 

다리는 섬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덕분에 번화가가 되었다. 태안반도 최대 항구가 된 것이다. 그래서 신진도는 먹을거리와 볼거리를 볼 수 있는 태안군의 명소가 되었다. 매주 금요일이면 낚시장비를 실은 서울 등 외지인들의 차량이 장사진을 이룰 정도다.

 

태안반도를 국립공원이라 칭하고 있지만, 안흥항은 이른 봄 자락에 왠지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천혜의 항구라는 안흥 외항, 거기다 수년 전부터 유명해지면서 항구 인근 지역에 들어선 숙박 시설과 식당은 궁색하다 못해 무질서의 어줍잖은 상차림 같다.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바로 앞의 신진항 때문이다.

 

안흥과 신진도

 

신진도 가는 길목에 안흥항이 있다. 예전 서해의 큰 항구였던 안흥진(安興鎭)은 서해로 내달리던 금북정맥이 내포지방을 지나 바다로 빠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빚어놓은 나루다. 지금은 서해에 접한 작은 어촌이지만, 백제 시대에는 당나라와의 교역으로 크게 번창했던 항구였다.

 

안흥항 앞바다는 물길이 험하기로 유명한 해역이었다. 그래서 이곳은 지나기 어렵다 하여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렀는데, 나라의 세곡을 실은 배들이 자꾸 조난을 당하자 조정에선 평안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안흥량(安興梁)이라 바꾸었고, 이곳 지명도 자연스레 안흥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안흥항은 구항과 신항으로 나뉘어 나란히 태안을 대표하며 예전에는 사시사철 싱싱한 해산물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신진도가 개발되기 이전에 안흥항은 태안군 일대에서 가장 큰 항구였다. 안흥항은 고려와 조선 왕조 시절에 번성한 항구로 특히 중국의 산동 반도와 가까워 무역이 활발했던 곳이다. 안흥항 바로 앞 신진도에 지금도 중국 성인 퉁씨가 많이 가주하는 것을 보아도 중국 사람들의 많이 드나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이 안흥 항구를 이용하는 명나라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얻기 위해 성을 쌓고, 성 안에는 호화스러운 집들을 지었다고 한다. 명나라 사신들이 배를 타고 와 이곳에 내려 안흥 항구를 보고 '이성계가 나라를 다스리더니 조선이란 나라가 참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높이가 4-3-4m나 되고, 둘레도 1km가 넘는 성을 쌓는데에 자그마치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오랫동안 이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 부역으로 인해 고초가 심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동서남북으로 돌문이 하나씩 달리고 그 안쪽에 삼백 채 정도 되는 호화로운 주택이 지어졌다. 안흥성은 태조의 뜻대로 명나라에 많이 알려져서 "조선에 가거든 안흥성을 보고 오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과시와 홍보용으로 세워진 안흥성은 조선 오백년 동안에 일시적인 영화를 누렸으나 갑오년의 동학혁명 때에 대부분 망가져 버렸고 네 개의 문도 다 무너졌으며 집들 또한 대부분 헐어졌다. 이제 안흥항은 옛 영화를 뒤로하고 약 40가구가 사는 초라한 어촌으로 변했다. 북쪽에 있는 성은 잡초만 무성하고 그 자취만 남아 있다. 이제는 신진도에 모든 상권을 고스란히 넘겨주고 말았다.

 

고려 성종 시절에는 해안을 수비하기 위한 관청인 '만호청'을 설치하면서부터 신진도에 주민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했다. 신진도는 안흥팔경의 멋을 독차지하고 있는 능허추월, 곡암낙조, 태국종성, 장사백구, 삼도신루, 관정귀범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그 경치가 아름답고 주변의 경관이 좋아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특히 신진도의 후망봉은 주변 바다의 크고 작은 섬들과 어선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명소로 유명하다. 고려 때 송나라로 떠나는 사신이 조선을 떠나갈 때 무사 안녕을 위하여 이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날씨가 청명하기를 기다렸다는 구전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신진도에서는 지금도 매월 정월 열사흘 날이면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위하여 당제가 치러진다. 푸른 송림과 기암괴석으로 천혜의 관광자원을 소유한 신진도는 최근에 다리 개통으로 서해안의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신진도를 처음 개발한 것은 지난 1978년 안흥항이 1종항으로 되면서부터이다. 1979년부터 92년까지 총 222억원을 투입해서 서해안의 어업전진기지로 만들면서 함께 관광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제 신진도는 안면도 국제 관광단지, 만리포 해수욕장 등과 함께 서해안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었다.

 

전통 사회의 국가 조운선의 역할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는데 비슷한 사건 사고들이 반복되는 경우가 참 많다. 2014년 봄 세월호 사고로 온 국민들이 트라우마에 빠져 있는데 과거에는 이러한 해난 사고가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대부분 풍선이었고, 해도나 GPS나 레이더 등 바다를 항해하는 데 필요한 장비가 없었다. 특히 세곡선의 길목인 서해안에서 사고가 잦은 것은 지리적인 여건 때문이다.

 

서해는 고려와 조선의 세곡선 루트였다. 조운(漕運)이란 현물로 거두어들인 각 지방의 조세 즉 쌀을 선박으로 왕도(王都)까지 운반하던 제도였다. 우리나라의 곡창지대는 전라·경상·충청 등 삼남 지방이다. 충남과 경상도까지 곡식을 세금으로 거두어 운반하는 세곡선 루트가 서해상이었다. 고려의 개경과 조선시대 한양이 수도였으니까 세곡과 소금 기타 일반 물품이 서해를 따라 올라가다가 조류와 바람에 밀려 암초에 부딪쳐서 사고가 많이 났었다.

 

필자도 탐사선 등대호를 타고서 정확히 여수에서 세 번을 오간 적이 있다. 인천까지, 한번은 태안의 신진도까지 왔다가 간 적이 있다. 한번은 200412월 가로림만의 고파도를 답사한 후에 서해안을 따라서 야간 항해를 통해 태안의 신진도까지 2시간 정도 걸려서 온 적이 있다.

 

지금은 야간에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게끔 인프라가 잘 되어 있다. 유인등대와 무인등대, 부표의 신호등을 보면서 내려오면 야간에도 안전하게 항해를 할 수 있다. 불과 60-70년 전에는 이런 항해 인프라들이 거의 없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해난사고가 일어난 곳은 태안의 안흥량과 경기도의 강화수로(江華水路)의 손돌항(孫乭項) 일대이다. 그래서 이 두 곳에 운하를 만들어 위험지역을 회피하려 했으나 굴포 운하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 대신 안면도 운하가 건설되었으며 강화 운하는 시도하지 않았다.

 

서해안의 태안반도 근해에는 세곡선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보물선들이 태안의 마도 근처에서 고려청자를 가득 싣고 개경으로 가다가 침몰해서 지금도 수많은 청자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배의 침몰사고가 해방 전 동력선으로 바꾸어지기 전까지는 많이 있었다.

 

사고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 때에 조운선 사고가 났는데 1395년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침몰 당하였고, 태종 때도 경상도 조운선 54척이 난파당한 사고가 있었다. 특히 역사에 남은 초대형 사고는 1414년에 조운선이 태안반도 안행량을 통과하던 중에 침몰 당한 것이다. 그때 가라앉은 조운선이 모두 66척이며 2백여 명의 사망자와 물속에 들어간 곡식이 무려 58백석에 달했다고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서해의 특성상 계절풍이 불면 파도가 높은 지역이다. 아마도 간만의 차이가 심한 시기에 돌풍을 만난 결과로 보인다. 그 당시 해도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 암초가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또 안개 때문에 사고가 나고, 무리하게 야간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암초에 좌초하는 사고도 일어났을 것이다.

 

또 그 당시에 지루한 항해 때문에 현장 책임자가 관기들을 데리고 타면서 감독을 게을리한 탓도 있을 것이다. 특히 7월부터 태풍이 오는데 일기예보를 몰라서 날씨가 좋다고 여긴 후 출발했다가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 당시 배가 좌초되면 구조신호를 보내도 작은 배로 세곡선에 구조를 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처럼 구조선이나 구조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고가 나면 엄벌에 처하고 책임을 물었는데 이런 사고는 자연 앞에서 어쩔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였다. 국가의 조운선은 국가의 운명선이기 때문에 최우선적으로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과제였다.

 

그래서 시도한 것이 태안반도의 굴포 운하와 안면도 운하를 만든 것이다. 국가적인 숙원 사업이었기에 11차례나 굴포 운하 파는 것을 시도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조선 후기에는 지방관리와 사공들의 결탁으로 인해서 조세 횡령, 잦은 해난사고, 세곡 도착의 지연 등 수많은 문제가 있었다. 개항 이후에 서양 문물의 도입으로 도로가 사방에 개설되고 조운선이 기선으로 대체 운영됨으로 이런 병폐가 어느 정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 뒤에 조세의 현금화가 일반화되고 도로를 통해 운송되어 조운제도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도 태안의 인평리에 가면 당시 운하를 판 흔적이 남아 있고 이 공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신진도 둘러보기

 

필자와 신진도는 인연이 매우 깊다. 93년 가을에 배를 타고 인천으로 올라가면서 이곳에서 연료를 공급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200511월 저녁에 인천 울도를 향해 가다가 엔진 고장으로 해양경찰서 경비정에 의해 신진항으로 예인되어 수리한 곳이다. 어업전진기지가 있기 때문에 이곳에 배를 안전하게 대놓은 채 연료를 공급받고, 배를 고치고, 숙식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곳이다.

 

안흥항 앞바다에 떠 있는 신진도는 연륙교가 놓이면서 자동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안흥항이 역사는 깊지만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큰 배의 드나들기가 여의치 않은 까닭에, 말굽처럼 생긴 신진항이 항구의 역할을 대신해 가고 있다. 태안의 고깃배들이 점차 신진항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농산물로는 약간의 밭농사가 있을 뿐 대부분의 주민이 어업과 숙박업에 종사한다. 마을은 북서쪽 신진마을과 동쪽 아랫목 마을에 밀집해 있으며, 섬의 서쪽 연안에 신진항(안흥 외항)이 자리잡고 있다.

 

신진항에는 꽃게, 갈치, 오징어 등 다양한 수산물을 실은 어선들이 매일 수십 척씩 드나든다. 마도가 보이는 해안길을 따라 약 20분 정도 걷다보면 수협공판장이 나온다. 신진항 수협공판장에서는 어민들이 직접 잡아온 활어를 시간대별·어종별로 경매를 한다. 이곳 위판장에는 갓 잡아온 수산물을 파는 어물전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처럼 신진도가 활기를 띠게 된 것은 서해안 어업전진기지로 만들기 위해서 3만 평의 공유수면을 매립하고 배후지를 주택과 상가 등 어업과 관광을 연계시키자는 차원에서 개발하면서부터다.

 

수협공판장에서 만난 어부는 "60-70년대에는 신진도 근해에 풍어를 이루어 돈이 널려 있는 곳이었지요. 1990년대에 어족자원이 고갈되면서 위기를 맞이하였지만 지금은 양은 적지만 고기가 비싸게 팔립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늘면서 직거래를 통해 예전의 경기가 돼 살아나고 있는 느낌입니다"라고 말했다.

 

신진도는 사계절 내내 바다낚시꾼들이 몰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전국에서 모여든 강태공들이 갯바위나 방파제 배낚시 등을 한다. 신진도 주변은 넙치와 우럭, 광어 등이 많이 잡히고 갯바위 낚시를 통해서는 놀래미, 고등어 등을 낚을 수 있다. 근해에서 조금 더 나가면 넙치와 우럭이 많이 잡힌다.

 

갯바위에서는 감성돔(숭어(여름우럭·백조기(가을) 등이 많이 낚인다. 수도권이 가까워서 금요일이 되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과 낚시객들이 많다. 승용차에 낚시장비를 싣고 와 신진도와 마도 해안선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신진도와 바로 앞 섬인 마도는 다리가 아닌 시멘트 포장길로 연결되어 있다. 물의 흐름을 차단한, 말 그대로 도로로 바다를 양쪽으로 분리시킨 것이다. 이 도로를 건너면 바로 조그마한 포구다. 이곳에는 고만고만한 배들이 정박해 있다.

 

마도는 지금 한창 개발 중이다. 신진도에서 마도에 막 들어서면 언덕을 깎아내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미 주위에는 각종 모텔 등의 유락시설이 들어서고 있고, 현재도 새로운 시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마도 앞 옛 방파제에 바닷물이 흐르는 50m 길이의 아치형 다리도 설치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바다길이 열려 바닷물 숨통이 트일 것이다. 신진도 앞 바다의 풍경은 유람선을 타고서 감상하면 볼 만하다. 이 섬들을 구경하려면 신진도에서 유람선을 타면 된다. 신진항에서 매일 2대의 유람선이 다닌다.

 

한편 이곳은 최근 몇 년 사이 골프장이 들어서고, 해저 유물이 지속적으로 발굴되면서 외지 관광객과 학계의 관심이 동시에 부쩍 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지난 20075월 최초 발견 이후 시작된 고려청자 발굴은 근흥면 대섬 인근 해역에서 총 23천여 점을 건져 올린 데 이어 7월에는 마도 근해에서 연판문대접 등 고려청자 515점을 발굴했고, 지난해 4월말에는 마도 북동쪽 해상에서 고려청자의 매장을 확인하는 등 보물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어업전지기지를 개발하면서 지난 877월 신진도와 마도를 잇는 방파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출토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곳에서 둥근 화강암 한가운데를 파서 적은 양의 식물을 넣고 찧도록 만든 홈돌과, 조개더미에서 나온 동물화석 토기 등이 다량으로 발견됐다.

 

<출처: 한국의 섬(저자,이재언, 섬 탐험 전문가- 충청남도, 2016. 7. 25. 지리와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