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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국내여행. 산행

비 내리는 수덕사 <풍경>

백수.白水 2022. 8. 15. 07:33

 

 

 

대웅전

 

 

 

 

 

 

삼성각

 

 

 

포대화상

 

포대화상: 포대 안에 담긴 꿈과 희망. 포대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소주의 광고모델로 출가사문이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나왔더라도, 이는 불교의 계율을 어기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다섯 가지 계율(五戒) 가운데 술 마시지 말라는 불음주계(不飮酒戒)가 있다. 융통성을 발휘하여 이 계율을 늘 깨어있으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해도 광고모델은 정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할 것이다. 그런데 한 소주의 로고에 포대화상(布袋和尙, 생년미상~917?)을 형상화한 모습이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복영감이다. 자비정신을 바탕으로 널리 인간을 복되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포대화상은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친근감을 더해준다는 내용까지 덧붙어있다. 화상의 모습이 성스러운 도량에서부터 세속적인 시장 거리에까지 널리 퍼져있는 것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의하면 포대화상은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출신으로 당나라 말기부터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름은 계차(契此)이며, 항상 커다란 포대자루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포대화상이라는 별명으로 많이 불렸다. 그는 모습만 봐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독특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다. 포대화상은 올챙이처럼 볼록 튀어나온 배불뚝이 모습을 하고서 늘 화통하게 웃고 있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보시 받은 물건을 포대 속에 넣고 다니면서 어려운 이웃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화상과 관련해서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는데, 눈 속에 누워 있어도 그의 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았으며 사람의 길흉을 족집게처럼 잘 알아맞혔다고 한다. <전등록>에는 포대화상이 지었다는 몇 편의 게송도 실려 있다. “발우 하나로 천집의 밥을 먹고 외로운 몸은 만 리에 노닌다(一鉢千家飯 孤身萬里遊)”는 시를 통해 구름처럼 살았던 그의 인생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포대화상에 대한 신앙이 적지 않게 퍼져있다. 화상의 배를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루어진다는 믿음 때문인지 배 둘레에 손때 자국이 선명한 곳이 많다. 그가 포대를 가지고 다니면서 많은 이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었다는 이미지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포대 속에 중생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믿음이 형성된 것이다. 당시 화상에게 음식을 얻은 사람들은 굶주리는 일이 없어졌고 물품을 받은 이들은 가난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재복이 따라왔으며, 아픈 환자는 병이 나았다고 전한다. 이런 기복적 이미지 때문인지 화상의 형상을 모신 도량도 꽤나 많은 편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포대화상은 미륵불의 화현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미륵불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567000만년 후 이 땅에 강림하여 모든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래불이다. 삶의 중심이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륵은 전쟁이나 재난과 같은 어려운 시절에 대중들이 의지하던 신앙이다.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미래에는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륵은 꿈과 희망의 아이콘인 셈이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로 통일되기 전까지 10여 개의 나라로 분열된 혼란기를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라 한다. 당시 전란으로 인해 중생들의 삶은 파괴되었고 거리에는 부모를 잃은 고아들과 굶주린 사람들로 넘쳐났다. 화상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탁발한 물건을 포대에 담아 배고픈 이들에게 나눠주고 꿈과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와 용기를 주었다. 그를 미륵불로 추앙하는 이유다.

 

 

이처럼 포대화상은 평생 나눔을 실천하는 삶으로 일관했던 인물이다. 포대는 곧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그 안에는 사랑 이외에도 꿈과 희망이라는 미륵의 마음도 함께 담겨있었다.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그는 계차(契此)라는 이름과 어울리게 이번() 생에서 맺은() 인연을 다하고 명주 악림사(岳林寺)에서 가부좌한 채로 열반에 들었다. 다음은 고요 속으로 떠나면서 남긴 그의 열반송이다.

 

 

미륵 참 미륵은 몸을 천백억으로 나누었네. 때때로 사람들에게 나타나도 스스로 알아보지 못하네(彌勒眞彌勒 分身千百億 時時示時人 時人自不識).”

 

내 앞에 있는 희망

 

철학자 스피노자는 희망을 불확실한 기쁨으로 표현했다. 희망이 이루어지면 기쁨이지만,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 않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꿈과 희망은 기쁨과 불확실성이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아니라 기쁨으로 무게의 추를 이동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그 힘을 포대화상의 미소에서 찾고 싶다. 당시 민초들은 전란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기를 희망했지만, 동시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힘들어했다. 포대화상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음식과 물건을 나눠주었다. 그 천진한 미소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강력하면서도 기분 좋은 에너지였다. 포대화상이 항상 웃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포대화상은 꿈과 희망의 아이콘인 미륵이 수많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있지만 중생들이 이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그렇다면 도대체 수많은 미륵불의 아바타는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그가 남긴 다음의 시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다만 마음, 마음 하는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시방세계에서 가장 신령한 물건일세. 종횡으로 묘한 작용을 일으켜 가히 중생들을 사랑하니, 일체 그 무엇도 진실한 마음만 같지 못하네(只箇心心心是佛 十方世界最靈物 縱橫妙用可憐生 一切不如心眞實).”

 

 

이 시에서는 선()의 향기가 진하게 풍긴다. 선불교의 생명과도 같은 견성(見性)마음이 곧 부처(心卽佛)’라는 실상을 깨치는 일이다. 견성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마음이 작동을 해서 뭇 생명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장 신령한 물건이며, 진실한 마음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진실한 마음을 불성(佛性)이나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하든, 아니면 미륵의 마음이라고 부르든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은 본래부터 이러한 바탕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중생이 곧 부처가 되고 진짜 미륵이 되는 셈이다. 참 미륵이 몸을 천백억으로 나누었다는 것은 바로 이를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가 미륵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왜 그럴까? 바로 삼독(三毒)의 술에 취해있기 때문이다. 탐내고 성내며 어리석은 독 기운에 취해 귀하디귀한 부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다. 전쟁은 인간의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의 결정판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부처들이 죽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대화상은 탐욕의 늪에 빠진 중생들을 향해 사자후를 외쳤다. 그들이 모두 미륵불이니, 죽음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는 자신 앞에 있는 부처들을 살리고자 포대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어느 물건이든 가리지 않고 포대에 담아 보시를 실천했는데, 그 안에는 비린내 나는 생선도 들어있었다.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륵정토는 먼 미래에 오는 세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라는 현실정토 사상을 읽을 수 있다. 현실정토 사상에는 고통으로 가득한 여기(Here)’에서 벗어나 행복이 넘치는 거기(There)’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가 거기라는 사유가 내재되어있다. 내가 서 있는 현실이 곧 정토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삶의 방식도 변하게 된다. 마냥 미륵정토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정토로 가꾸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포대화상은 그런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정토는 그러한 노력과 실천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포대화상을 통해 단순한 기복신앙이 아니라 마음이 부처라는 소식과 함께 상처 받은 중생들을 종횡무진 치유하고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절망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희망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희망과 치유의 연등을 밝힙니다라는 올해의 봉축표어와 무척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희망과 치유를 위해서는 삼독의 술에서 깨어나 내 주위에 있는 참 미륵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다. 어느 블로그에서 읽은 작자미상의 짧은 글이다.

 

눈이 녹으면 뭐가 되냐고 선생님이 물으셨다. 다들 물이 된다고 했다. 소년은 봄이 된다고 했다.”

 

추운 겨울 사람들은 봄이라는 희망을 꿈꾼다. 그런데 우리들 시선이 물에만 머문다면 봄이 와도 볼 수 없는 법이다. 집안에 가득한 봄 향기를 찾아 산으로 들로 헤매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앞에 있는 희망을 볼 수 있는 소년의 혜안이 필요하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