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설을 코앞에 둔 섣달그믐날!
점심식사 후 서해바다 천수만쪽으로 나간다.
오천항(보령충청수영성)과 대천해수욕장을 둘러
보령터널을 통과 - 안면도 경유하여 돌아 올 참이다.
나에게 바다와 섬은 늘 그리움이다.
그리움이 가슴깊이 저려올 때면 불현듯 포구(浦口)로 달려가고 싶다.
「 그래 말하지 말라.
저마다의 포구 하나씩 품고 왔던 길 되짚어 돌아가 살면서 오래 질끈 눈 감고 말 없도록...
“....떠난다고 내 안의 그리움이 떠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그리움이 내안을 꽉 채울 뿐이다.
그렇다고 떠나지 않을 수도 없다. 떠나지 않고 온전할 어떤 것도 없다.
뻘밭은 여전히 깊다. 누구도 깊이 빠져있지 못하면서 빠져 있다. 세상은 깊은 뻘밭과 같다.
아무리 용맹한 사유로 무장한 전사라 하더라도 함부로 저 깊은 뻘밭에서 헤어나기라는 것은 요원하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뻘밭에 발목 묻지 않았다고 빠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매한 자의 소관이다.
누가 홀로 저 깊은 곳을 빠지려 할 것인가? 그러나 빠져있는 것이다.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석여공스님의 글 <그리움의 서쪽 황청포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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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보령 충청수영성 保寧忠淸水營城 - 한국역사문화신문 (ns-times.com)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년(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현지 안내문>
보령 충청수영성 (保寧忠淸水營城)은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수영(水營)의 성으로 1510년(중종 5)에 축조하였는데, 구릉의 정상을 중심으로 주변에 성을 쌓아 성 안에서 성 밖을 관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영보정 앞에서
성 안에는 영보정(永保亭) · 관덕정(觀德亭) · 대변루(待變樓) · 능허각(凌虛閣) · 고소대(姑蘇臺)와 옹성(甕城:) 5개, 문 4개, 연못 1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진남문(鎭南門)·만경문(萬頃門)·망화문(望華門)·한사문(漢舍門) 등 4문은 모두 없어지고, 망화문터의 아치형 석문(石門)만이 남아 있다.
이 성은 해변의 구릉을 정점으로 쌓은 성이어서 바다를 관측하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성벽위에 서다.
성벽 위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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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유시화첩에 나와있는 보령 충청수영성의 영보정과 거북선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
상류 쪽으로 보령방조제와 수문이 보인다.
올해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입학하는 손자 둘과 함께하는 여행이라서 더욱 뜻깊다.
멀리 동쪽 정중앙으로 하얗게 보이는 산이 억새로 유명한 오서산(?) 인듯....
해발 790m로 금북정맥의 최고봉이며, 충남에서 3번째로 높은 산이자, 충남 서해안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억새산행지의 명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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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산(烏棲山) 억새산행과 탁월한 조망. (tistory.com)
오천항 (鰲川港) 은 바다 양면에 있는 산이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아무리 심한 폭풍우에도 피해가 없고, 또 수심이 깊어 간만의 차로 인해 선박의 통행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서해안의 천혜의 항구이다.
오천항은 이미 백제 때부터 회이포라는 항구로 이용되었으며, 통일 신라 당시에는 당나라와의 교역항구로서 이름이 높았고, 고려로 접어들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오천항 일대를 지키는 군선이 머물렀던 곳이다.
오천에 수영(水營)이 설치된 것은 조선조 때이다. 조선조 당시 우리나라에는 바다를 지키는 3개의 수영이 있었다. 충무의 경상 수영, 여수의 전라 수영, 오천의 충성 수영이다. 각 수영에는 수군절도사를 상주시켰으며, 바다를 지키는 군영이 함께 있었다.
이곳은 1210년(중종5년) 수군절도사 이장생이 본격적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고 서울로 항해하는 조운선을 보호하기 위해 오천성(사적 501호)을 구축했다.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며 서해 바다를 지키는 요새가 된 것이다.
광어 1kg에 35,000원, 2kg을 사와 온가족 6명이 싫껏 먹었다.
대천하수욕장에서 ▼
보령해저터널을 통과하여 원산도 안면도를 지나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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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 원산도 - 보령해저터널 - 대천항 종주(縱走)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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