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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길을 /도덕경

<도덕경> 주석(注釋)

백수.白水 2012. 4. 9. 08:12

도덕경

중국의 도가서<道家書>, 춘추 시대 末期, 노자가 윤희의 물음에, - 도덕 오천언[五千言]을 적어 준 冊'이라 하나, 실제로는 전국 시대에 있어서의 도가 사상가의 언설을 한나라 초기에 집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는, 노자(老子)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노자(老子)》로도 불린다. 노자는 이 저서에서 전체적으로 자연에 순응하는 무위(無爲)의 삶을 살아갈 것을 역설하였다.

 

 

주석 <注釋>

도가<道家>, 즉 노장사상<老莊思想>은 중국사상(中國思想)의 여명기인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or 선진 시대(先秦時代) : BC 770~221> 以來 유가(儒家)와 함께 중국 철학의 두 주류를 이루었던 학파이다. 도가는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 : 춘추전국시대 여러 사상가들과 그 학파들>의 하나로, 대표적인 사상가는 노자 · 장자이며, 전국시대 중기에 유가<춘추시대 말기(770~403)'에 공자(孔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儒學)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르는 말>와 함께 유력하였다.

 

 

도가는 참된 길, 즉ㅡ 도(道)는 인위(人爲)를 초월한 곳에 있으며 그것은 직관에 의해 체득되는 것으로 사람은 그 참된 길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쳤다. 또 인위(人爲)를 배제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될 것을 권했는데, 배제해야 할 인위(人爲) 中'에서 主'된 것은 유가의 도(道)인, 인(仁)이나 예(禮)라고 말했다. 중국사상의 양대흐름인 유가와 도가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현실적이며 긍정적인 유가가 군주의 통치권을 합리화하여 역대 왕조의 통치이념으로써 사회의 기본사상으로 자리잡은 것에 비해, 도가사상은 현실부정적이고, 도피적인 성향이 강해 하층민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려 後에 도교로 발전하였고, 主'로 민간신앙과 철학적 사고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유가가 지배자의 사상을 대변한다면 도가는 지배층에 대항하는 피지배자의 사상으로 대변되었다. 도가는 한나라(漢) 以後 구체적인 모습을 가진 철학 학파로서의 독립성은 잃어버렸지만, 그 사상은 後世 중국 불교에 수용되었고, 도교(道敎)의 교리의 형성을 도왔으며, 문예(文藝)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1.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도덕경을 규정한 것은 삼국시대 말기에 왕필'이 정리한 것이며 이를 왕필본 혹은 통용본이라고 부른다. 1973년 중국 장시성의 마왕퇴(BC 168년 추정)에서 발굴된 백서본은 왕필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 텍스트가 담겨있었다. 즉 왕필본의 원본이 바로 백서본인 것이며 왕필이 정리하기 이전에 중국의 여러 사서에 인용된 것도 이 백서본이다. 백서본은 두 종류로 백서본 갑본은 전국시대 말기(BC 247年 以前)로, 을본은 한나라 초기(BC 195年 以前)로 추정된다.

 

 

2. 1993년 중국 화북성의 곽점촌에서 발견된 곽점본(혹은 죽간본, BC 300'년 추정)은 백서본의 중요한 내용이 많이 빠져있는 미완결된 형태이나 백서본에 없는 내용 일부가 있어 새로운 텍스트에 의한 연구성과가 나오고 있다. 곽점본과 백서본의 주요 차이는 아래와 같다. 곽점본은 대나무에 쓰였고, 백서본은 비단에 쓰였다. 곽점본의 상당수 내용이 백서본에는 없으며, 백서본에 없는 내용 일부가 곽점본에 있다. 곽점본은 2,000'여자로 백서본의 40% 정도의 분량이다.

 

3. 곽점본에 비해 백서본의 내용에는 조금씩 추가된 것들이 있으며 문장 형태가 말끔해지는 경향이 있다.

4. 백서본에는 전사과정의 기본적인 오류와 원래는 주석이었으나 옮기는 과정에서 본문으로 들어간 오류 등이 보인다.

5. 곽점본에 비해 백서본이 더욱 반 유가적인 경향을 띤다.

 6.백서본이 더욱 정치술수적인 내용을 많이 가지고 있어, 백서본 성립 시기에 유행한 황로학의 영향을 받아 통치술에 가까운 내용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7. 백서본은 음양사상을 받아들여 기화론적 우주생성론의 내용을 담고있다.

 

도덕경을 상하로 나눈 것은 전한 말기의 유향이었다. 현존하는 완결된 도덕경 주석서로서 가장 오랜 것으로 '하상공'(혹은 '하상장인')이 지은 하상공장구가 있다. 후한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하상공장구는 당나라 시기까지 가장 유행한 판본으로 양생론적 성향이 강해 초기에는 도교도들에 의해 많이 읽혔으나 以後 당나라 시대까지 가장 많이 읽히는 판본이 되었다.

 

왕필은 18세이던 243年'에 노자도덕경주'를 완성하고, 이것이 以後 위나라의 재상 하안'에 의해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당나라때까지만 해도 하상공장구에 비해 덜 읽혔으나 송나라때 이후 유학자들에 의해 주요한 판본으로 자리잡았으며 이 지위는 명청대에 더욱 확고해져서 백서본 출토 以前'까지 무려 천년 以上 동서양 도덕경 이해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도덕경을 유가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많아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백서본과 왕필본의 차이는 아래와 같다.

백서본은 장절구분이 거의 없이 이어 적혀있었으나 왕필본에서는 장절구분이 잘 되어있다. 백서본은 덕경이 도경보다 앞에 있으나 왕필본은 도경이 덕경보다 앞에 있다. 왕필본 장절구분을 기준으로 하면 백서본은 24-22-23'장과 41-40-42'장, 66-80-81'장의 순서로 되어있다. 백서본은 왕필본에 비해 시대 특성상 가차자가 많이 쓰였고 따라서 그 글자들의 해석이 복잡하다. 백서본은 왕필본에 비해 허사가 많이 남아있어 왕필본의 끊어읽기 문제를 다소 해결해준다. 곽점본, 백서본, 왕필본의 차이만 보아도,전설처럼 노자가 함곡관을 넘으면서 도덕경 5,000'여자를 남겼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도덕경은 일거에 성립된 것이 아니고, 고대부터 전국시대 말기까지의 노자 사상이 응축되어 성립된 책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복잡한 성립과정은 도덕경 안에 여러 모순된 사상이 뒤섞여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하상공장구가 양생술로, 왕필주가 신비주의로 해석하였으며 ,그 外'에도 무위자연주의, 반유가주의, 반법가주의, 음양가 사상, 무정부주의, 병가 사상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가 있다. http://blog.daum.net/allpeninsula/7512435